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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5-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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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0, 2018 03:51에 작성됨.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4)】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후계자를 결정하던 그 날, 어째서 고작 운동선수에 불과한 남자를 후계자로 선택했냐는 질문에 할아버지. 아니, 가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레오나르도는 말했었지. 한 번이라도 하늘을 날아 보았다면 대지를 거니는 눈은 창공을 향할 것이라고, 그 곳을 겪어 보았으니 그 곳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할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한 번이라도 정점에 서 본 사람은 그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있단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그 곳까지 오르는 데 어떤 것이 필요한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그리고 그 곳을 겪어 보았으니, 다시 한 번 그 곳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법이란다.』

『그래서 나는 후계자로써 너희들이 그런 경험을 가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 단 한 사람도 그 간단하면서도 힘든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어. 지식Knowledge은 배우면 되고, 능력은 숙달하면 된다. 하지만 지혜Wisdom는 그렇지 않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평생 알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자, 이게 내가 그 아이를 선택한 이유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해 보거라.』


우리는,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5)】



달칵, 하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또 다른 와인 병 하나가 올라섰습니다. 사슴과 나무가 그려진 생소한 라벨이 붙어 있는 병의 목을 만지작거리며 레이첼 씨는 또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Stag's Leap Wine Cellars』 이 브랜드는 ‘파리의 심판’사태를 이끌어냈던 바로 그 브랜드랍니다. ‘파리의 심판’이 뭔지는 들어보셨나요?”

“……네, 뉴스에서 본 적 있어요. 프랑스의 와인 품평회……에서 있었던 일이죠?”

“Great! 역시 당신이네요. 맞아요.”


H호텔의 시크릿 라운지. 지금까지의 저는 상상조차 못 하고 있던 그 장소에는 명성에 걸맞게 온갖 종류의 술이 있었습니다. 레이첼 씨는 그 수많은 술 가운데에서 자신이 추천할만한 것들을 골라 저와 한 잔씩 잔을 나누며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SLV Cabernet Sauvignon은 그 시절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 와인이죠.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그리고 구세대에서 신세대로의 세대 전환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에요. 당도는 낮지만 타닌이 많아 부드럽고, 바디가 묵직한 것이 특징이죠.”


저는 그녀의 설명을 한쪽 귀로, 이제는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 와인은 목으로 넘기며 곁눈질로 홀의 입구 옆에 설치된 괘종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느덧 이 홀에 도착한지도 한 시간이 지났지만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러 왔다고 말했으면서도, 레이첼 씨는 좀처럼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말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대화의 흐름을 그쪽으로 돌리려 하면 어느 샌가 다음 술이 들어오고, 또 그 술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어버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제 머릿속에 반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아이돌로써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무렵 프로듀서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굉장히 피곤한 유형이 있습니다. 좀처럼 본론을 꺼내지 않고 시간을 끄는 타입이죠. 상대방 쪽에서는 좀처럼 이야기의 진도가 안 나가니 초조해지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전달하기가 더 수월해지는 법이거든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대하려면, 어렵더라도 억지로 대화의 흐름을 끊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비록 상대방이 말허리를 잘랐다며 불쾌해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할 말이 생기는 법이죠.』


저는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결정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를.


“흔히들 와인이라고 하면 프랑스, 이탈리아를 필두로 한 남부 유럽을 생각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그건 반만 아는 거랍니다. 최근에는 이렇게 미국에서도 훌륭한…….”

“저……레이첼 씨.”

“네?”


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고는 와인 잔에서 눈을 돌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아, 혹시 와인은 취향에 안 맞나요? 술은 종류를 안 가리고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일본주라도…….”

“좋아해요. 몹시 좋아한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다 보면,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를 마주칠 때마다 몸이 움츠러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그녀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듯 제 앞의 유리잔을 바라보았습니다. 유리잔에 비치는 저 자신의 모습이 다음 말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렴풋이, 그날 들었던 프로듀서 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 주세요. ‘저는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 곳에 온 게 아닙니다’라고요.』


‘이래서는 안 돼. 정면으로 마주보고 말해야 해.’


다시 한번 마른 침을 삼키고, 저는 유리잔에서 시선을 들어 눈 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저……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에요. 그리고 레이첼 씨도,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저를 부른 건 아닐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런 말을 꺼낼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첼 씨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도망치기만 하던 그녀의 눈을 다시 한번 마주보았습니다.


“……이제는 가르쳐주세요. 저를 왜 이런 곳으로 데려온 것인지, 그리고 단 둘이 하고 싶으신 이야기는 무엇인지.”


늘 즉답이 돌아오던 지금과는 달리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입구 근처의 괘종시계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시력이 조금 안 좋은 것일까요, 눈에 힘을 주며 시계를 바라보던 그녀는 작게 놀란 듯 다시 한번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어머, 미안해요. 제가 좀 말이 많았군요. 평소에는 누구 앞에서 이렇게 말 할 일이 없다 보니…….”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레이첼 씨의 모습은 짊어지고 있는 직책을 내려놓은, 그녀 나이대의 여자아이처럼 보였습니다.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저를 향해서 작게 허리를 숙였습니다.


“제 욕심이 조금 과했어요. 카에데 씨께서도 귀중한 시간을 내어 초대에 응해주셨는데, 부디 결례를 용서해주세요.”

“아, 아뇨, 결례라고 할 것 까지는……저기, 저야말로 죄송합니다……괜히 이야기를 끊어서요.”

“아뇨, 죄송하실 것 없어요. 이건 제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요.”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는 테이블에 설치된 벨을 눌렀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유니폼 위에 앞치마를 깔끔하게 갖춰 입은 직원이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찾으셨습니까?”

“자꾸 불러서 미안해요. 여기 테이블 위에 있는 것들 다 치우고 물 좀 가져다 줄래요? 가능하면 라임을 좀 넣어서, 숙취에 안 남도록.”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간 직원은 잠시 후, 자그마한 카트를 끌고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술병과 술이 남아 있는 술잔을 카트 아랫부분의 바구니에 담은 그는 카트의 위쪽에 있던 은색으로 반짝이는 금속 주전자와 크리스탈 컵 두 개를 테이블 위로 옮겼습니다.


“자, 일단 술 좀 깨고 이야기를 시작하죠.”

“네.”


직원이 카트를 가지고 사라지자 레이첼 씨는 제게 물이 담긴 잔을 내밀었습니다. 차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미지근하지도 않은 물은 은은하게 올라오는 라임 향과 더불어 적당한 청량감을 담고 있었습니다.

제가 빈 컵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 레이첼 씨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저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지금까지는 테이블에 두 팔을 올리고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두 손을 공손하게 아래로 내리고, 등을 곧게 편 채 저를 바라보는 그녀에게서는 조금 전까지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얼음처럼 차갑고, 주위의 모습을 반사시키는.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메리엇 가문의 레이첼 메리엇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저, 타, 타카가키……카에데입니다.”


그 때, 저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녀가 방금 전 자신을 소개했던 말. 그녀는 방금 자신을 ‘메리엇 스튜어트’가 아닌 ‘메리엇 가문’이라고 소개했던 것입니다. 분명 며칠 전에 만났을 때는 메리엇 스튜어트라고 소개했었을텐데요.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곧바로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오늘, 제가 당신을 이런 곳으로 모신 이유 중 하나는 CG프로덕션과 우리들간의 파트너십 계약에 대해 가르쳐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아, 혹시 P님께 들은 적이 있나요?”

“아뇨, 아직은……정식 계약서가 내려오면 말씀해 주신다고만 하셨어요.”

“그렇군요. 혹시나 먼저 이야기를 하신 건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 그분답네요.”


흠흠, 하고 작게 헛기침을 한 뒤,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파트너십 계약은 사실 몇 가지 커다란 세부항목을 포괄하고 있는 메인 타이틀 같은 겁니다. 실제로는 세부 항목이 더 중요하죠.”

“세부 사항이라면…….”

”뭐 이것저것 많습니다만, 짧게 요약하자면 ‘앞으로 이 일본에서, 우리 메리엇 스튜어트와 관련된 모든 마케팅에는 신데렐라 걸즈에게 우선순위가 돌아간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우선순위가 간다는 것이지 반드시 기회가 돌아간다는 것은 아니죠. 따라서 충분히 실력을 갈고 닦아야겠지만요.”


자신의 물잔을 잠깐 입으로 가져간 뒤, 레이첼 씨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당신께서도 모델 일을 해 보셨으니, 그리고 지금까지의 아이돌 활동을 통해서 알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기회’를 얻는 데 있어 경력이 얼마나 큰 영향을 차지하는지를. 우리는 그걸 제공해드리려고 하는 거에요.”


저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R호텔이나 H호텔 정도나 되는 브랜드의 경력이 찍힌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강점이 되겠죠.

경험이나 경력은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가장 얻기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프로듀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겠죠. 그 사람은 우리들 중 그 누구보다도 기회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라면 저보다는 프로듀서나 상무님을 찾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어째서 저에게…….”

“여기서 끝낼 거였다면 당신을 이 곳으로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에요. 아까 말씀드렸죠? 이 곳이 어떤 공간인지.”


저는 그녀의 말을 되새겼습니다. H호텔의 시크릿 라운지는 ‘대화를 위한 곳’.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계약 조건을 가르쳐 준 것도 ‘이유 중 하나’라고 했었고요.


“그래요. 본론은 이제부터랍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사실을 알고 있어도 되는 건 당신뿐이니.”

“네……?”


시선을 비스듬하게 낮추어 테이블을 보고 있던 저는 귓가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다시 바라본 제 앞에는 레이첼 씨. 아니, 메리엇 가문의 가면을 쓴 “레이첼 메리엇”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어째서 이런 파격적인 계약을, 특급 배우나 연예인이 아닌 당신들에게 들고 왔을까요? 궁금하지 않나요?”


저는 고민했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그냥 프로듀서가 가르쳐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 속을 간파한 듯, 그녀가 덧붙였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 사실을 아는 건 오직 당신과 우리들 뿐입니다. 그 이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에요. 그 분조차도. 어떤가요, 구미가 당기지 않나요?”


그녀의 말은 마치 ‘고민하지 말고 궁금하다고 말해’라고 유혹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 있던 욕망, 그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하는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긴장했기 때문일까요.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몹시 크게 울렸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저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쿡, 하고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간단해요. 우리가 원하는 건 ‘그 분’이기 때문이에요.”

“그 분이라는 건…….”

“그래요. 여러분들의 프로듀서, P님이죠.”


그녀의 말을 듣던 저는 또 다른 의문점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호칭에 대한 것.

지금까지 만났던 수많은 관계자분들, 디렉터나 다른 회사의 중역 분들은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하대를 하거나 상호존대를 하는 것은 자주 보았지만, 이렇게 존칭에서부터 깍듯이 예를 표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어째서 이 사람은 한낱 프로듀서에 불과한 사람에게 극존칭을 쓰는 걸까요? 보통 사람도 아니고, ‘메리엇 스튜어트’라는 세계 굴지의 기업에 속한 간부이면서 말이에요.


“술기운이 올라오니 목이 마르네요.”


레이첼 씨는 자신의 텅 빈 잔에 재차 물을 채웠습니다. 저 역시 그녀에게서 물병을 받아 제 잔을 다시 채웠습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순순히 오실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신념으로 움직이는 사람만큼 강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런 사람을 막아서거나 회유하는 건 좀처럼 힘든 일이죠.”


무언가가 떠오른 것인지 레이첼 씨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후훗, 맞아요. 그 분은 선수 시절부터 참 지독한 사람이었지요. 돈, 명예,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야구를 제외한 다른 길로는 좀처럼 눈을 돌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그렇게 위대하게 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어딘가, 이야기의 흐름이 점차 제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그녀의 말이 잠깐 멈춘 틈을 타 말을 꺼냈습니다.


”그렇게 P씨에 대해서 잘 아시면서 어떻게 그 사람을 데려가시려는 거죠? 말씀하신 대로, 지금의 P씨는 야구 못지않게 프로듀서라는 일에도 열중하고 계신걸요.”

“맞아요. 당신의 말대로랍니다. 그 분은 신념으로 움직이는 사람. 그런 사람을 회유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죠. 그렇기에 저희는 당신들을 도우려 하는 거랍니다.”

“……네?”

“신념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회유하는 건 어려워요. 하지만, 그 사람의 신념을 꺾는 것은 그보다는 쉬운 일이죠.“


숨을 고르듯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저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습니다.


“그 분은 산불 같은 사람이에요. 불이 붙기도 쉽지만, 한번 불이 붙어버리면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때까지 맹렬하게 타오르죠. 그리고 재만 남고 나면, 그것은 바람을 타고 다른 곳으로, 또 다시 자신을 태울 것을 찾아 움직여요. 어떤가요? 당신께서 알고 계신 그 분과 무척 비슷하죠?”

“……그렇군요.”

”그 분께선 고난을,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에요. 그렇기에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의 앞에서 그들을 이끌어주는 것을 좋아하죠.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그 재미’를 없애면, 그 분께서도 더 이상 여러분께 흥미를 가지지 않게 될 거란 뜻이에요. 그러니……”

“……아니에요.”


저는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고,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프로듀서가 옆에 있었다면 제게 눈치를 주었겠죠.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저는 지금 제가 들었던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정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로듀서와 함께 갔던 그의 고향에서, 저는 그의 이야기를 본인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째서 프로듀서가 되기를 선택했는지, 왜 하필이면 프로듀서라는 직업이었는지를.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별이란 단순히 높은 곳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보고 따라오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고, 그들을 이끌어 줄 수 있어야 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는 이 직업을 택했다』라고요.

그래요. 그것은 적어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싸구려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있던 두 손을 꽉 움켜쥐었습니다.


그 사람은……프로듀서는 적어도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사소한 욕심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의지를 모욕하지 말아주세요.”

“그런가요? 뭐, 사람의 가치관은 다 다르니까 말이죠. 생각은 자유랍니다.”


저는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었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을텐데, 그녀는 저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더 이상 태울 게 없다면, 산불은 자연스레 꺼지게 되겠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산불이 더 이상 타지 않을 때까지 전소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고작 그런 걸로 그 사람의 신념이 꺾일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후훗, 천만에요.”


제 질문에 그녀는 마치 코웃음을 치듯 작게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톱의 자리까지 올라갈 때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에요. 그렇게 여러분들이 톱의 자리에 올라, 더 이상 그 분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되기를 기다릴 겁니다. 그 때가 되면 여러분들은 스스로 바람이 될 거에요. 재를 날려보내고, 산불을 다른 방향으로 보내는 바람이.”

“……뭐라고요?”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저는 불과 며칠 전에 들었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M신사의 신관님께, 프로듀서와 함께 말이에요.


『떠나야 할 때를 본인만이 안다는 것은, 그 원인이 결과적으로는 주위 환경에 있다는 것이 되는 셈이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저희들이 원인이 된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그러고 보면, 그 사람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필요로 하는 한, 저는 어디에도 안 갈 테니까.』 라고.

그 때는 그저 흘려 들었지만, 그는 분명히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있기에 ‘자신이 이 곳에 있는’것이라고요.

그렇다면. 만의 하나.

아뇨, 그럴 리는 절대로 없을 테지만, 정말로 십만……아니, 백만 중의 하나라고 해도.

「우리들이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무언가가 내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우연의 일치일 뿐이야.

저는 머릿속에 떠오른 끔찍한 상상을 애써 부정하며 눈 앞의 여자를 바라보았습니다.


“……고작 그 정도로 그 사람이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물론이죠. 당신은 아실텐데요? 그 분의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늘 강해 보이는 그 분의 어디가 약한 부분인지…….”

“……!”


반박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저는 순간적으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벙긋거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프로듀서가 가장 깊숙한 곳에 품고 있는, 평생 아물지 않을 상처까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제 반응이 만족스러웠던 것일까요, 레이첼 씨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습니다.


”그래요. 그건 ‘고작’이 아니랍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다……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분께는 그것만한 치명타도 없을 테죠.”

“어, 어떻게 그런 짓을……그 사람이 괴로워할 걸 알고서도 그렇게 하시겠다는 건가요……?”

“뭐, 어쩌겠나요. 이렇게 배우고 이렇게 자란 걸. 목표를 얻는 데 있어 가장 효율적이면서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다. 그것이 ‘사업’의 기본이라고. 뭐, 그 분께서도 사정을 알면 이해해주실 거에요. 그 분도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니까요.”


정말로 별 수 없다는 듯, 너무도 태연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제는 섬뜩하게마저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아아, 그래서 그 사람은 그토록 이들을 경계했던 거였구나…….’


돌이켜보면 프로듀서는 ‘계약’에 대해 들은 이후로 계속해서 그들의 의도에 의구심을 가지면서 그들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이 계약에 본능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희들은 그런 그를 끌어내기 위해 선택된 미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것이 미끼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덥석 물었습니다. 그건 두말 할 것 없이 그들이 내건 조건이 너무나도 매력적이기 때문이겠죠. 그는 기회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니까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저를 다시 현실로 끌어낸 것은, 테이블 위에 레이첼 씨가 작은 기계를 올려놓는 소리였습니다. 손가락 세 마디 정도 크기의 작은 디지털 녹음기였습니다.


“이건……뭐죠?”

“며칠 전, 당신께서 P님과 함께 저를 만났던 날. 그 만남이 끝나고 나서, P님과 제가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나요?”

“……네.”

“이 녹음기에 든 것은, 그 날 P님과 나누었던 대화랍니다. ”


그녀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녹음기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뜬금없이 독대라니, 별 일도 다 있군요.』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계약에 대한 본사의 방침이 바뀌어서 전달을 해 드리려고요.』

『……어떤 내용입니까?』

『일방적인 퍼주기는 경영진들 역시 썩 마음이 들어 하지 않더군요. 당신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니까요.』

『……계속하시죠.』

『그러니 거래를 하죠. 쌍방이 납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말이에요.』

『거래라면, 구체적으로는?』

『윌리 존슨. 당신을 빌려 주세요.』

『네?』

『이번 시즌의 개막전, 메트로와 내셔널스의 경기가 도쿄 돔에서 열릴 거에요. 우선은 그 곳에서 당신께서 시구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잠깐만요. 그거랑 제 가치검증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글쎄요, 그건 가주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경영진들을 그 조건으로 설득하신 건 가주님이시니까요.』

『…….』


여기서 녹음기에서 나오던 소리가 잠시 멈추었습니다. 끝난 걸까? 싶어서 녹음기를 살펴보았지만, 재생 중이라는 녹색 불빛이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우선은, 이라는 것은, 두 번, 세 번도 있다는 뜻이겠군요.』

『상황에 따라서는 그렇게 되겠지요. 당신께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파트너십 계약은 별 탈 없이 진행될거에요.』

『거절한다면?』

『그 때는 서로가 “열심히 노력”해야겠지요?』


또다시 녹음기의 소리가 잠시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음성은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분명 그 사람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문득, 머릿속에 고민을 할 때면 으레 나오는 프로듀서의 버릇이 떠올랐습니다. 낮은 신음을 흘리며 손 끝으로 턱을 긁적이는 그의 모습이.


『……적어도 이전에 들었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보다는 조금 그럴싸해졌군요. 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반짝이던 녹색 불빛과 함께 뚝, 하고 녹음기에서 새어나오던 소리가 끊겼습니다. 저는 녹음기를 다시 품 속으로 집어 넣는 레이첼 씨를 바라보았습니다.


“들으신 대로, 우리는 그 분께서 원하시는 건 뭐든지 드릴 각오가 되어 있답니다. 자본이나 인력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말이에요. 이번 시구식 역시 그 일환이지요. 그 분께서 늘 돌아가고 싶어 하셨던 곳이니.”


저는 LA에서 프로듀서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그 사람은 제게 말했습니다. 그라운드로는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그 이상으로 그 곳을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뉴욕에서 보았던, 시티 필드에서 보았던 그 사람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만 같았으니까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다음에야 저는 레이첼 씨가 이 음성을 제게 들려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저 제게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프로듀서를, P씨를 위해 어디까지 해 줄 수 있는지를.

맹렬하게 타오르는 산불을 통제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산을 태울 수 있는지를.


“이런 이야기를……저 같은 사람한테 해 주시는 이유라도 있나요……?”

“그야,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면서 그녀는 테이블 위에 손바닥 크기만한 봉투를 올려놓았습니다. 또 녹음기 같은 게 든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저는 봉투를 집어 들고 그 안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안에 든 것은 봉투의 크기보다 조금 작은 네 장의 사진이었습니다.


“이, 이건…….”


봉투 속의 사진을 꺼내어 살펴보던 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사진 속에는 사복 차림을 하고 있는 프로듀서와 팔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 있는 제가 찍혀 있었던 것입니다.


‘앗…….’


그제서야 저는 레이첼 씨와 함께 탔던 자동차가 어쩐지 낯익게 느껴지는 이유를 떠올렸습니다. 그 자동차는, 다름아닌 프로듀서가 뉴욕에서 몰고 다니던 것과 같은 브랜드의 자동차였습니다.

‘그 때부터 프로듀서를 미행하고 있었구나…….’

고개를 들어 레이첼 씨를 바라보면,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프로듀서만큼 눈치가 빠르지는 않지만, 그런 저라고 해도 한 눈에 알 수 있는 정도로 그녀의 미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성질을 띠고 있었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죠? 이 사실은 당신 이외의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아니, 당신이기에 알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한번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합성이 된 건 아닐까.

하지만 제 눈에 보이는 이것들은 틀림없이 저와 프로듀서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프로듀서가 입고 있는 옷이나 쓰고 있는 야구모자 위에 걸쳐 놓은 선글라스 같은 것은 그 사람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저도 미국에서밖에 본 적이 없는 옷이었으니까요.


”타카가키 씨, 이 세상에서 그 분께 가장 가까이 다가간 건 당신뿐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거죠. 그렇기에 저희는 당신을 선택한 것이고요.”


술기운이 뒤늦게 올라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갑자기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요? 갑자기 머리가 빙빙 도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레이첼 씨의 휴대전화가 부우웅, 하고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잠시 실례.”


레이첼 씨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통화를 시작하자, 저를 짓누르던 공기가 한 순간이나마 가벼워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 나야. 밑에 있다고? 응, 금방 내려갈게.”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레이첼 씨는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야기는 이 정도만 해야겠네요. 이제 돌아가죠. 돌아갈 차가 기다리고 있답니다.”

“저, 저기, 레이첼 씨.”


아직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그녀를 다시 불러 세웠습니다.


“마지막, 마지막으로 하나만 가르쳐주세요.”

“말씀하세요.”

“어째서, 어째서 그토록 그 사람에게 집착하는거죠? 당신들에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상한 질문이군요.”


레이첼 씨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오랫동안 가족의 온기를 잊고 지내던 소중한 가족을 다시 가족의 품으로 데려오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나요?”

“……네?”


저도 모르게 되물었지만, 그녀는 ‘그 정도면 할 말은 다 했다’라고 말하듯 제 옆을 지나 방을 나갔습니다. 저는 황급히 짐을 챙겨 그녀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한편, 프로듀서와 시키, 두 사람을 태운 자동차는 카에데의 원룸에서 약간 떨어진 골목길에 있었다. 직접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기는 곤란하니 가능하다면 밖에서 만나서 자료를 넘겨 줄 생각이었다.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므로 음성 메시지로 전환됩니다. 삐 하는 소리가 들리면…….』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프로듀서는 휴대전화의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의 옆에서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시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아직도 안 받아?”

“안 받네. 어디 급한 일이라도 보고 계신가…….”


프로듀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휴대전화를 다시 주머니 속으로 되돌렸다.

벌써 다섯 번째.

그가 알고 있는 카에데는 일을 하는 도중이 아니고서는 휴대전화의 벨소리를 켜두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그녀가 다섯 번이나 전화를 놓칠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지 않고서야.


“음…….”


낮은 신음을 흘리며 카에데가 살고 있는 원룸의 건물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뒷좌석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직접 갔다 와야겠다.”

“오래 걸려?”

“아니, 오래는 안 걸릴 거야. 이따가 집에 가면 피자 사 줄 테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


‘피자’라는 말에 축 늘어져 있던 시키의 온 몸에 생기가 돌아왔다.


“진짜? 메뉴 내가 골라도 돼?!”

“그래.”

“옛써~! 쥐 죽은 듯이 코-자고 있을게요!”

“차 밖으로 나가지만 마라. 오늘은 일교차 있으니까 추우면 이거 덮고 있고.”

“네~!”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벌떡 일어난 시키에게 프로듀서는 입고 있던 정장의 재킷을 벗어 건네었다. 재킷의 칼라에 코를 파묻고 정신없이 냄새를 만끽하는 시키를 차에 남겨둔 채 운전석에서 내린 프로듀서는 카에데가 살고 있는 원룸으로 향했다.


“……어?”


원룸의 주차장으로 들어가던 그의 눈에 낯익은 자동차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주차장의 한쪽 구석, 비어있는 자리에 주차를 하고 있는 그 자동차는 프로듀서의 눈에 굉장히 낯익은 자동차였다.


“……뭐야, 저것들이 왜 여기에 있어?”


자동차를 향해 가까이 접근하며 그것의 번호판을 확인한 프로듀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자동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주차장의 빈 자리로 들어가던 자동차의 움직임이 멈추고, 붉은 색으로 빛나던 후미등이 꺼지면서 운전석에서 머리를 짧게 자른 금발의 남성이 나왔다. 프로듀서는 발소리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기지개를 펴는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봐!”

“히이익!?!!”


프로듀서가 남자의 어깨에 손을 대는 순간, 크게 놀란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프로듀서에게로 내던지듯 찔러 넣었다.


“당신들이 왜 여기……으으윽……!!”


딱! 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프로듀서는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온 몸의 근육을 비트는 것 같은 통증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

비록 은퇴한 몸이지만 한때는 프로 선수였던 몸.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동체 시력과 순발력은 보통 사람 이상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들어온 불의의 일격에 그는 비명다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그 자리에 쓰러졌다.










호텔을 나와 집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꽤나 시간이 지나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라 차를 세워 둘 수는 없었기에 자동차를 주차장 한 켠에 세워 두고, 함께 차에서 내린 레이첼 씨는 원룸의 현관까지 저를 배웅해 주었습니다.


“함께 해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도 이렇게 한번 만나서 술잔이라도 나누고 싶네요.”

“네……저도, 무척이나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해요.”


꾸벅, 머리 숙여 인사를 하는 그녀에게 질세라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정작 속마음은 밖으로 꺼낸 말과는 전혀 달랐지만요. 이런 최악의 술자리, 두 번 다시 갖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뇨, 제 욕심 때문에 괜한 시간을 잡아먹어서 죄송할 따름이죠. 다음부터는 주의할게요. 그럼 저는 이만…….”


그녀가 몸을 돌렸습니다. 이대로 계단을 내려가면, 그녀는 제이크 씨와 함께 이 곳을 떠나겠죠.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습니다. 아까는 사진 때문에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쳤지만, 지금 이 기회까지는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각오를 다질 겨를도 없이, 저는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녀를 다시 불러 세웠습니다.


“저, 저기, 레이첼 씨!”

“네?”


돌아서려던 그녀가 몸을 돌려 저를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보며, 저는 마음 속으로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녀를 불러 세운 것은 그녀에게 분명히 말해 두고 싶었던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해 주신 이야기……여러분들의 뜻대로는 안 될 거에요. 그렇게 끝나도록 놔두지는 않겠어요. 저는 제 나름대로, 최대한 저항할 거에요.”


제가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레이첼 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작은 눈웃음을 지었습니다.


“후훗, 그래요. 무운을 빌게요. 어차피 여러분이 그 분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네?”

“어머? 거기까진 아직 모르시나보네요?”

”그게 무슨 뜻이죠……?”

“글쎄요. 그 분께서도 함구하신 것을 제가 멋대로 가르쳐드릴 수는 없지요. 그러면,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이제는 정말 작별이라고 말하듯, 다시 한번 목례를 한 그녀는 제게서 완전히 몸을 돌렸습니다.

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당당한 걸음걸이로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카에데와의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온 레이첼을 기다리는 것은 자동차의 보닛 위에 엎어져 있는 거구의 남자와 마치 커다란 죄라도 지은 듯, 낯빛이 새파랗게 질린 채 잔뜩 움츠러들어 덜덜 떨고 있는 제이크의 모습이었다.

거구의 남자, 프로듀서는 자신을 바라보며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는 레이첼을 향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요즘 메리엇 가문의 하인들은……사람을 보면 냅다 테이저부터……갈기라고 배웁니까……?”

“테이저……요?”


그제서야 레이첼은 제이크의 발 앞에 떨어져 있는 검은 물체에 눈이 갔다. 검은 바디에 노란색 카트리지가 장착되어 있는 그것은 총기 소지가 불법인 국가에서 수행원들이 호신용으로 곧잘 가지고 다니는 테이저였다.


“제이크, 너…….”


레이첼의 시선을 받은 제이크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시는 바람에…….”

“너도 참……덩치 값 좀 하렴. 나중에 시말서 제출하고.”

“네, 죄송합니다…….”


들고 있던 가방으로 제이크의 등을 가볍게 때린 레이첼은 자동차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고 있는 프로듀서를 향해 다가갔다. 테이저의 효과 덕분에 팔다리를 덜덜 떨고만 있을 뿐, 그는 좀처럼 자세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눈짓으로 신호하자, 안절부절못하던 제이크가 재빨리 달려가 프로듀서를 부축했다.

반쯤 매달리다시피 하며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하던 그는 상태가 어느 정도 괜찮아 진 듯, 자신을 부축하던 제이크를 떨쳐냈다. 자동차에 기대어 서서 대퇴부를 주무르던 그를 향해 레이첼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하의 실수를 용서해주세요.”

“……괜찮습니다. 기척도 내지 않고 섣불리 접근한 내 잘못도 있으니.”

”그런데, 당신께선 무슨 일로 이 곳에 오셨나요?”

“전해 줄 자료가 있어서 잠시 들렀던 참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보이더군요. 제이크라고 하셨던가……? 이 사람, 본 기억이 있었으니.”

“주말인데도 일이라니, 힘들게 사시는군요.”


딱하다는 듯 말하는 레이첼의 말에 프로듀서는 작게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딱히 힘들다고는 안 느껴집니다. 그나저나, 당신들이야말로 이 곳까진 무슨 일입니까? 천하의 메리엇 가문이 이런 누추한 원룸에서 숙식을 해결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레이첼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야기? 타카가키 씨랑 당신이?”

“별 것 아니었어요. 그저 앞으로 그녀에게 맡길 일에 대한 이야기였을 뿐……뭐하면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셔도 된답니다?”

“…….”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다만 여전히 예리하게 번뜩이는 눈빛이 그가 아직 경계를 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은 그렇다고 알아 두죠. 다만, 한 가지만 말해두겠습니다.”

“말씀하세요.”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 까지는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업무에 관한 일일 경우에는 반드시 제게 먼저 말해주세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내가 그들의 프로듀서고, 내가 그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으니까.”


종종 그녀의 눈길을 피하던 카에데와는 정 반대로, 눈 앞의 남자는 정면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자신의 속내가 간파되는 것만 같았기에, 레이첼은 패배를 인정하듯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5분 정도 지나서 상태가 어느 정도 돌아온 프로듀서는 카에데의 원룸으로 향했다. 절뚝거리면서도 그녀의 집을 향해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이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제이크의 등을 두드렸다.


“그런 거 마음에 담아두는 분 아니니까 그만 정신 차려. 우리도 돌아가야지.”

“네, 네……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한편, 레이첼과 헤어진 뒤, 한참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온 카에데는 옷을 갈아입는 것 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채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산불은 맹렬하게 타오를 때는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지만, 꺼지고 나면 한줌의 재만 남기는 법. 이렇게 자신을 불태우며 뜨겁게 살아온 사람의 재만 남은 모습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좋아…….”


한숨을 내쉬며 카에데는 몸을 웅크려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 날 품었던 단순한 호기심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조차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그를 이끌어내기 위한 미끼가 되어 있었을 줄은. 그는 그것이 낚시바늘이 달린 미끼인 것을 알면서도 덥석 집어삼킨 것이다.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인생을 맡긴 사람들을 위해서.

그녀가 연이어 두 번째 한숨을 내쉬려 할 때, 별안간 딩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카에데는 화들짝 놀라며 현관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세요?”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들려온 것은, 딩동, 딩동, 하는 두 번의 초인종 소리였다.


“누, 누구세요……?”


침대에서 일어선 카에데는 조심스레 현관을 향해 다가가며 다시 한번 물었다. 혹시 만일의 상황에는 바로 연락을 할 수 있도록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쥔 채로.


『……접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현관문의 문틈 사이로 자그마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은 다름아닌 프로듀서의 목소리였다. 카에데는 황급히 현관문에 달린 렌즈로 밖을 확인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녀의 프로듀서가 확실했다.

그녀가 문을 열자, 바깥의 공기와 뒤섞인 후끈한 바람이 프로듀서의 냄새를 품은 채 그녀를 덮쳐왔다. 어디서 운동이라도 하다가 온 것일까,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고, 평소보다는 약간 숨을 거칠게 몰아 쉬는 그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그녀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타카가키 씨.”


두 사람이 완전히 현관 안으로 들어오자, 찰칵, 하는 소리를 내며 현관문의 문고리가 반쯤 닫혔다.
평소의 그라면 좀처럼 하지 않는 행동이었기에 크게 놀란 카에데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프, 프로듀서……여기엔 무슨 일로……?”

“……급히 드릴 자료가 있어서 왔습니다. 전화를 안 받으셔서요.”


그제서야 카에데는 그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가방에 꽂혀 있는 커다란 서류봉투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휴대전화의 화면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5건. 5분 간격으로 수신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레이첼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휴대전화를 무음 상태로 바꾼 것을 떠올렸다.


“죄, 죄송해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소리를 못 들었어요…….”

“그 중요한 약속이라는 게, 레이첼과 만난 겁니까? 메리엇 스튜어트……아니, 메리엇 가문 사람을요.”

“저, 그, 그게…….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네. 만났어요…….”

말꼬리를 흐리던 카에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프로듀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연락이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아마도 휴대전화를 볼 틈도 없으셨을 거란 걸 압니다. 그 작자들이 하는 방식은 대개 그런 방식이니까요.”


프로듀서는 잠시 숨을 고르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저 역시 방금 밑에서 그 자들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말해 봐요. 그 작자들이 무슨 말을 했죠?”

“그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카에데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것을 레이첼에게 어떤 협박이라도 받은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프로듀서는 자세를 약간 낮추어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테이저를 맞은 영향으로 아직도 쥐가 덜 풀린 다리에서 격통을 동반한 경련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괜찮아요. 저 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저는 손 댈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다 말해 보세요.”

“그, 그게……그러니까…….”


그의 추궁에 어깨를 늘어뜨린 채, 카에데는 오늘 있었던 자초지종을 그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흥, 그딴 헛소리, 기억할 가치도 없습니다. 잊으세요.”


카에데의 이야기를 듣던 프로듀서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말을 일축했다. 덤덤하게 말하는 듯 싶었지만, 나름대로 그와 오랜 시간을 보낸 카에데는 그가 지금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저는 반드시 여러분들의 곁을 지킬 겁니다. 절대 떠나지 않을 거에요.”


‘아니에요. 그게 아니에요’

그의 말을 듣던 카에데는 마음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작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두려워 하는 것은, 그들에 의해 바뀌어버릴 자신들이었다.

‘만약 저희가 더 이상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당신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한 그녀는 그 대신,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타카가키 씨?”


자신의 예상 밖의 돌발행동에 그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긴장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피부로 전해지는 그의 몸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미안해요. 이렇게 있으면 마음이 정리될 것 같아서…….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있게 해 주세요…….”

“으음……오래는 안 됩니다.”


머리 위에서 무거운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주위에 보는 사람은 없는지 주변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터인데.

문득, 헤어지기 직전 레이첼이 남긴 말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랫동안 가족의 온기를 모르고 지내던 소중한 가족을 다시 가족의 품으로 데려오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죠?』


‘으응,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닐 거야.’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에게 타이르듯 가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카에데는 그를 끌어안은 두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두근, 두근. 그의 단단한 몸을 타고 귓가로 들려오는 그의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끝>







【Epilogue】


호텔로 돌아온 레이첼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는 듯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천장을 보고 있던 그녀는 품 속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냈다. 카에데에게 들려 주었던 녹취파일이 들어 있는 녹음기였다. 그녀는 손 끝으로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녹색 불빛이 깜박이며 안에 들어 있는 소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전에 들었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보다는 조금 그럴싸해졌군요. 하겠습니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녀가 카에데에게 들려주었던 부분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카에데는 알지 못하는, 그녀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혼자 담당해도 괜찮겠어요? 필요하다면 인적 자원도 얼마든지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아뇨,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확답을 듣고 싶군요. 당신들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기회'의 범위에 대해서. 그래야 구체적으로 이쪽도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깜박이던 녹색 불빛이 꺼졌다.


“……흥, 그래요. 그쪽도 이용해먹을 생각 만반이다 이거죠? 좋아요. 어디 한 번 해 보죠.”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레이첼이 녹음기를 품 속으로 되돌린 그 때,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제이크가 들어왔다.


“저 왔습니다.”

“그래, 이젠 좀 괜찮아?”

“네, 바람 좀 쐬니까 낫네요. 저녁식사는 어디서 하시겠습니까? 룸 서비스 부를까요?”

“아니, 나가서 먹을 거야. 라면 먹으러 가자.”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온 제이크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요, 아가씨. 그런 이야기를 저런 외부인한테 함부로 해줘도 됩니까?”

“뭐가? 우리 계획 말해준 거?”

“그럼 또 뭐가 있어요?”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제이크의 말에 레이첼은 피식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고작 한 사람이 그거 알고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리고 때로는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독이 되기도 하거든.”
“저는 잘 모르겠네요. 괜히 소문이라도 내면 어쩌시려고.”
“글쎄, 우리 스타일은 그 분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실테니까, 입단속은 알아서 시켜 주실거야.”


그 때, 무언가가 떠오른 듯 레이첼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맞아, 그러고보니 다음 달에 광고 하나 있었지? 캐서린이랑 로버트 나오는 거.”
“있는데요?”
“그거 연출한테 연락해 봐. 배우 하나 더 넣을수 있겠냐고. 아이돌이라곤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제이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을 나갔다.

다시 방 안에 혼자 남은 레이첼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창 밖으로 펼쳐지는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자, 타카가키 카에데. 우리의 계획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당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부디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쳐 주기 바라. 그래야 재미있을테니까.”


저물어가는 땅거미 아래 하나둘씩 불빛을 밝히는 불야성의 불빛 속에서, 마치 혈관이 맥동하듯 노랗고 빨간 불빛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끝>



내일 저녁 즈음해서 후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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