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퍼스널리티P 시리즈]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4)

댓글: 2 / 조회: 825 / 추천: 3


관련링크


본문 - 10-19, 2018 04:10에 작성됨.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3)】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주말 아침이지만 번화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시부야 거리 곳곳에는 많은 인파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시부야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한 H호텔 최상층의 발코니에서 한 여성이 거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 오른쪽 어깨로 늘어뜨리고, 그 아래에는 넥타이까지 제대로 갖춘 정장을 걸치고 있었다. 봄이라지만 해가 뜬 직후의 공기는 아직 서늘했기에, 빈틈없이 겨울용 정장을 갖춰 입었음에도 그녀의 손 끝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메리엇 가문의 일원이자 ‘메리엇 스튜어트’의 동아시아 지부 총괄이사인 레이첼은 마치 일개미처럼 꿈틀거리는 인파를 내려다보며 이 곳에 오기 전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 나라로 보내면서, 그녀의 할아버지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 주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자라 왔으며, 그 남자가 어째서 후계자의 자격이 있는지를.

그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야구선수’로서의 그밖에 알지 못했기에,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말해 준 것은 그녀로써는 무척 놀라운 이야기였다.

‘참 열심히도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앞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온 거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때, 발코니의 문이 열리면서 정장을 갖춰 입은 금발의 남성이 불쑥 나타났다.


“아가씨, 출발 준비 다 됐습니다. 사람들도 거의 다 모였다고 하는군요.”

“그래? 그럼 가자.”


그녀는 크게 기지개를 펴고는 남자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며 그녀에게 얇은 겉옷과 가방을 건네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주말인데 이렇게 막 불러모아도 됩니까? 저래뵈도 호텔의 중역들인데요.”

“내가 보겠다는데 뭐 어때서? 꼬우면 지가 오너하라고 하던지.”

“뭐, 그렇긴 하네요.”


그녀가 현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그녀보다 먼저 현관에 도착한 남자는 현관문을 열고, 그녀가 지나가기 편하도록 한쪽 옆으로 물러났다.


“오전에 빨리 끝내고, 오후에 그 사람 만나러 갈 거야. 스케줄이랑 집 주소는 알아놨지?”

“네. 오늘 오전에 촬영 잡혀있고, 늦어도 오후에는 대강 마무리 될 거라고 합니다.”

“그래. 잘했어.”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4)】




3월은 이미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건만, 도쿄의 날씨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더웠다가, 해가 지기만 하면 금세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등 따뜻함의 대명사인 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변덕이 심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레이첼과의 만남과 메리엇 스튜어트와의 파트너십 계약이라는 커다란 일이 있었던 그 주의 토요일.

프로듀서 P와 그의 담당 아이돌 중 하나인 타카가키 카에데는 이른 아침부터 CG프로덕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스튜디오에 있었다. 원래대로였다면 그 날은 별 다른 일이 없는 휴일이었어야 했지만, 며칠 전 M신사에서 촬영했던 화보의 추가 촬영분이 필요하다는 디렉터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다음 샘플로 바로 넘어가죠!”


해가 중천에 떠올라 후덥지근한 바깥과 달리 실내에는 적당히 서늘한 공기가 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정면으로 쳐다보기도 힘든 스튜디오의 밝은 조명 아래에 있으면 분명히 꽤 덥게 느껴질 것이다.

프로듀서는 한쪽 팔에는 카에데의 겉옷을 두르고, 다른 손에는 이온음료가 들어 있는 물병을 들고 스탭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플래시가 연신 터져나오는 스튜디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카메라 앞에서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는 카에데에게 향해 있었지만,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그의 초점은 약간 흐릿해 보였다.


“OK! 이 정도면 됐어! 여기까지만 하지!”

“수고하셨습니다!”


감독의 목소리가 촬영장 내부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생각하던 것을 머릿속의 한 구석으로 밀어넣고, 프로듀서는 스탭들에게 인사를 하며 스튜디오에서 내려오는 카에데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프로듀서를 발견하고는 빙긋 웃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마워요.”


프로듀서가 물병을 내밀자 카에데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었다. 아니나다를까, 가까이서 살펴본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꿀꺽, 꿀꺽, 작게 목을 울리며 물병의 내용물을 마신 그녀는 그제서야 살았다는 듯 휴우,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프로듀서에게 물병을 돌려 주었다.


“촬영 전에는 꽤 시원하다고 생각했는데……역시 조명 아래에 있으니 금방 열이 올라오네요. 거기다 이 옷, 봄 옷이라지만 겉옷이 있으니 꽤 포근하기도 하고요.”

“카에데 씨! 의상이랑 메이크 정리해드릴게요!”


그 때, 매니저 가운데 한 사람이 의상실 앞에서 카에데를 불렀다.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매니저를 발견한 그녀는 곧바로 프로듀서에게서 자신의 옷을 받았다.


“자, 그럼 이따가 봐요.”

“네.”


의상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한쪽 눈을 찡긋하는 그녀에게 프로듀서는 웃음을 되돌려 주었다.




******




“감독님, 저희는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아아, 주말인데도 나와서 하느라 수고했어. 다음에 보면 식사 한 번 하자고. 내가 좋은 데 알고 있으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주말 편히 쉬세요.”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 돌아갈 준비를 마친 카에데와 프로듀서는 디렉터의 인사를 받으며 마감 작업이 한창인 스튜디오를 뒤로 했다.

스튜디오를 빠져나오던 중, 프로듀서가 말을 꺼냈다.


“……주말인데도 죄송합니다. 갑작스레 추가분 촬영을 요구하실 거라곤…….”

“괜찮아요. 그다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 주말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녀의 대답에 프로듀서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장에서 그녀가 보여준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오늘의 일은 단순히 추가분 촬영이었기에 촬영 자체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만 않았을 뿐, 중요한 것은 귀중한 휴일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평소의 휴일이었다면 지금쯤 늘어져라 늦잠이라도 자고 있었을 터. 그마저도 최근에는 계속되는 일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소중한 휴식을 방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짜증을 내거나 불편한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주변 스탭들을 격려하면서 촬영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프로듀서는 그런 관록을 보여준 그녀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2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이제는 신데렐라 걸즈뿐만이 아닌 CG프로덕션을 대표하는 간판 스타로 떠오른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타카가키 씨.”

“네?”

“오늘은 정말, 잘 하셨습니다.”

“후훗, 고마워요.”


이 곳이 다른 사람의 눈길이 없는 곳이었다면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었을까. 평소와는 약간 다른 성질의 칭찬이라는 것을 눈치챈 듯, 그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두 뺨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주차장에 세워 둔 프로듀서의 차에 몸을 실었을 무렵에는 이미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오후 두 시였다. 아직 여름은 한참 남았을텐데도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햇빛에 프로듀서는 벌써부터 셔츠 아래, 암 슬리브를 차고 있는 두 팔이 촉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카에데가 안전벨트를 매는 사이, 프로듀서는 서류가방을 자신의 뒷좌석으로 옮기고 시동을 걸었다.


“배는 안 고프십니까? 간식으론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음……그러고보니 조금 출출하긴 하네요.”

“괜찮으시다면 간단하게 요기라도 하고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어머, 프로듀서가 쏘는 건가요?”

“물론이죠. 주말에도 이렇게 열심히 해 주셨으니, 제 나름대로의 포상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그렇다면 이런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는 없죠. 감사히 먹을게요.”

“특별히 먹고 싶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음……글쎄요……아, 맞아. 요전에 카나데에게 들은 곳이 있어요. 뉴욕식 핫도그를 파는 가게라고 들었는데…….”

“아, 거기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케부쿠로역 근처에 새로 생긴 곳 맞죠?”

“맞아요! 거기 한번 가 볼까요?”

“좋습니다. 그럼 그곳으로 안내하죠.”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았다.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스튜디오의 주차장을 막 벗어났을 무렵,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던 카에데가 말했다.


“저……프로듀서는 이 다음에 뭐 하실건가요?”

“음, 글쎄요…….”


골목길을 벗어나느라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프로듀서의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일단은 오늘 일을 마저 마무리 지어야겠지요. 보충 레슨 나오는 애들도 좀 봐주고요.”

“그럼 사무실로 가실 건가요?”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후훗,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골목을 빠져 나온 뒤, 교차로의 신호에 멈춰 있었기에 여유가 생긴 프로듀서는 조수석을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가벼운 웃음으로 넘기고는 있었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카에데의 모습은 어쩐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타카가키 씨,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오늘 하루 정도는 비워드릴 수 있습니다만…….”

“네? 아,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습니까?”

“정말이라니까요. 거기다 프로듀서, 오늘 제가 어울려달라고 하면 내일이라도 출근하실 거잖아요?”

“……아니라곤 말씀 못 드리겠군요.”

“그것 봐요.”


그의 대답에 그녀는 작게 웃으며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그의 이마를 콕 하고 찔렀다.


“제 휴일이기도 하지만, P씨의 휴일이기도 해요. 프로듀서에게도 아무것도 없이 비는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받아가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니, 다음 기회에 에스코트를 부탁드릴게요. 또 휴일이 겹친다면요.”

“알겠습니다. 그 때는 반드시.”


다시 신호가 바뀌었다. 프로듀서가 운전대로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본 카에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잠시간 곁눈질로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던 프로듀서는 앞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자, 다 왔습니다.”


프로듀서의 목소리와 함께 제가 살고 있는 원룸의 현관 앞에서 자동차가 멈춰 섰습니다.

자동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찰칵, 하며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안전벨트를 풀고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두고 간 것은 없는지 소지품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저는 조수석의 문을 열었습니다. 발이 차 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운전석에서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타카가키 씨,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네, 프로듀서도 수고 많았어요. 자아.”


차에서 내리기에 앞서, 저는 그를 향해 가볍게 말아 쥔 오른손을 들어올렸습니다. 잠시동안 제 손을 바라보던 그는 훗, 하고 작게 웃으며 왼손을 들어 톡, 하고 제 손에 갖다 대었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점심은 잘 먹었어요.”

“저야말로, 덕분에 좋은 가게를 알았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사무실에서 뵙죠.”


운전석의 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낸 뒤, 저는 조수석의 문을 닫고 현관과 연결된 계단을 올랐습니다.

하지만 계단을 올라 원룸의 현관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등 뒤에서 자동차가 움직이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약간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운전석의 창문 너머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이제 가도 돼요”라는 뜻을 담아서.

제 뜻이 전해진 것인지, 저를 바라보던 그는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천천히 멀어지는 자동차의 모습이 원룸의 담장 너머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저는 현관을 지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조금 전에 이웃이라도 들어 온 것인지 엘리베이터는 제가 살고 있는 층에 멈춰 있었습니다. 버튼을 누르고 텅 빈 우체통을 한번 살펴보는 사이 땡, 하는 짤막한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립니다. 문이 다시 닫히기 전에 저는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목적지의 버튼을 누르자 몸을 짓누르는 듯한 가벼운 가속도가 느껴졌습니다.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저는 꼭 쥐고 있던 자그마한 손가방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반쯤 열린 가방 틈새로 살짝 삐져나온 새하얀 봉투의 끝자락이 보였습니다. 그것을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하아……역시 같이 가자고 할 걸 그랬을까……?”


봉투 안에 든 것은 지금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옛 동료에게서 받은 영화 티켓입니다. 최근에 개장한 새 영화관의 개점 이벤트로 받은 것으로, 자기는 몇 번이나 갔다 왔으니 쓸모가 없다며 제게 양보해 준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일이 잡힌 것만 아니었다면 같이 가자고 했을텐데……그냥 같이 가자고 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부탁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자신의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같이 가 주었겠죠.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저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아니야. 어차피 같이 가 봤자 머리에는 온통 일 생각뿐이겠지……마음도 딴 데 가 있을거고.”


저는 봉투를 향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것을 다시 가방 속으로 되돌렸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땡, 하는 짤막한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습니다.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있는 작은 홀을 지나 저희 집과 연결된 복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또각, 또각. 굽이 낮은 구두가 화강암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습니다.


“어……?”


홀과 복도를 연결하는 모퉁이를 꺾은 그 순간, 제 눈에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짧은 데님 팬츠 위에 흰 민소매 셔츠를 입고, 그 위에는 안쪽이 비치는 얇은 회색 가디건을 걸치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여성이었습니다. 등 뒤로 늘어뜨린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저는 두근, 하고 가슴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그녀가 어째서 이런 곳에 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제 이웃집에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저희 집의 문 앞이었으니까요.

제 발소리를 들은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기척을 느낀 것일까요. 붉은 머리카락의 주인이 천천히 몸을 돌려 제가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려 저를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이, 저에게는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잡아 늘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침내 저를 발견한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띄웠습니다.


“어머, 타카가키 양? 이제 오시는 길인가요?”


그리고는 마치 사자가 어슬렁거리는 듯, 가벼운 사복 차림으로도 숨길 수 없는 자신감과 기품이 넘치는 걸음걸이로, 그녀는 제게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Hello~? 어, 음……제가 누군지, 잊어버린 건 아니죠?”


찰나의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이 어째서 이곳에 와 있는 걸까, 프로듀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나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 걸까. 등등

하지만 혼란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행동해야 했으니까요. 저는 우선, 머릿속에 떠오른 그녀의 이름을 말하며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 그럴 리가요.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메리엇 대표님.”

“No, No. 사적인 자리에요. 대표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 대해주었으면 좋겠네요.”

“아……그게, 그러니까, 메리엇 씨……대표님……?”


좀처럼 호칭을 정리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자니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냥 ’레이첼’이라고 불러 줘요. 정 거북하시다면 미스 메리엇이라고 불러주셔도 되지만요.”

“네, 네……그럼, 레이첼 씨…….”

“Excellent. 훨씬 낫군요.”


메리엇 스튜어트의 대표님, 레이첼 씨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사람이 저희 집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메리엇 스튜어트의 대표씩이나 되시는 분이 무슨 이유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셨는지’가 조금 더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 제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레이첼 씨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께 급한 용건이 있었거든요.”

“그런 거라면 프로듀서를 통해서 연락을 주셨어도 될 텐데요…….”

“가급적이면 직접 얼굴을 보면서 하고 싶은 일이었거든요. 혹시 다른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도 어차피….”


이럴 줄 알았으면 프로듀서한테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라고 할 걸……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 가방 속의 영화 티켓이 떠올랐습니다. 머릿속에서 그것을 지워내듯 천천히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 저는 눈 앞의 붉은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한가했거든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레이첼 씨는 제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향수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에게서는 무척 부드러우면서도 고풍스러운 향기가 물씬 풍겨왔습니다.


“자, 그럼……어디로 가실래요? 저는 아무 곳이라도 상관 없어요. 괜찮다면 당신의 집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뇨, 다른 곳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사람을 집으로 들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저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첼 씨에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벽이 얇아요. 단 둘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라면, 이야기가 새어나갈지도 모르는걸요.”

“Um……그것도 그렇군요. 그러면, 내가 생각해 둔 곳으로 가도 될까요?”

“……네, 부디.”

“좋아요. 그럼 제가 안내하죠. 따라와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빙긋, 웃으며 제 옆을 지나쳐갔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조금 옅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약간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돌발상황이니 일단 연락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가방 속의 휴대전화에 손을 갖다 댄 순간.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엘리베이터 앞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습니다. 언제 꺼낸 것인지, 그녀가 쓰고 있는 색조가 옅은 선글라스 너머로 얼핏 보이는 눈빛은, 마치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고 경고하듯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황급히 가방에서 손을 치웠습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



들어간 지 10분도 되지 않아 원룸을 다시 나온 저는 레이첼 씨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원룸의 주차장 한 켠,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는 검은색 승용차가 서 있었습니다. 한 눈에 보더라도 보통 브랜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외형에서부터 무게감이 느껴지는 자동차의 운전석에서 내린 한 사람이 저희들을 맞이했습니다. 검은 중절모를 쓰고, 짙은 감색 정장을 갖춰 입은 금발의 남성이었습니다.


“Wel……흠, 흠! 어, 어서 오십시오.”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가슴으로 가져가며, 외국인의 억양이 강하게 느껴지는 어눌한 일본어로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그는 차분하면서도 빠른 발걸음으로 자동차의 반대편으로 돌아와 뒷좌석의 문을 열었습니다. 레이첼 씨는 기다렸다는 듯 뒷좌석으로 몸을 실었지만, 저는 약간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서서 자동차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동글동글한 헤드라이트와 은색으로 반짝이는 격자무늬 라디에이터. 그리고 그 위에 각인되어 있는 마치 독수리처럼 꼬리깃과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알파벳 B가 그려진 엠블렘까지. 저는 분명 이것과 비슷한 자동차를 본 기억이 있었습니다.


“이게 부담스러우신가요? 그럼 택시를 부를까요?”


그게 언제였더라, 기억을 되새기고 있던 그 때, 또다시 귓가로 레이첼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면, 선글라스를 벗은 레이첼 씨가 차 안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후훗, 뭐, 놀랄 일은 아니죠. 이 차는 당신도 한 번은 타보셨을 테니까.”

“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자, 얼른 타세요.”

“아…….”


그제서야 저는 우리를 맞이했던 정장 차림의 남성이 문의 손잡이를 쥔 채, 가만히 서서 제가 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머, 죄, 죄송해요……!”


황급히 그에게 꾸벅, 목례를 하고는 차 안으로 뛰어 들어가듯 뒷좌석으로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뒷좌석의 문이 닫히고, 그가 운전석으로 향했습니다. 남자가 운전석에 앉자, 레이첼 씨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습니다.


“소개할게요. 제 비서이자 수행원인 제이크랍니다.”


과묵한 분인 걸까요, 아니면 일본어가 익숙하지 않은 걸까요. 레이첼 씨의 소개를 받은 제이크라는 이름의 남성은 룸 미러 너머로 빙그레 웃으며 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어 보였습니다. 저는 빙그레 웃으며 제이크 씨에게 인사를 되돌려 주었습니다.

제이크 씨가 안전벨트를 매는 등의 출발 준비를 하는 사이, 저는 자동차의 내부를 한번 돌아보았습니다. 자동차의 외형은 무척 낯이 익었지만, 넓은 실내는 영화에서나 본 적이 있는 고급 자동차 그 자체였습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호랑이 무늬가 그려진 가죽 시트라던지, 뒷좌석의 가운데 부분에 설치된 팔걸이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스위치가 잔뜩 붙어 있었고, 앞좌석의 등받이 부분에는 비행기에서나 보일 법한 액정 디스플레이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 때, 제이크 씨가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습니다. 부릉, 하는 낮은 엔진소리와 함께 차체가 가볍게 진동하기 시작하자 그는 룸 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정확히는 레이첼 씨를 슬쩍 바라보았습니다.


“Where should I take(어디로 모실까요)?”

“하아……제이크, 너도 참.”


대뜸 들려온 낯선 언어에 저는 깜짝 놀라 눈앞의 남성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작게 한숨을 내쉰 레이첼 씨가 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습니다. 얇은 겉옷 위로 그녀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손님께서 불안해하시잖니? 일본어로 하렴.”

“아차, 죄, 죄송합니다.”


레이첼 씨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낭패라는 표정으로 턱을 긁적이던 제이크 씨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으음……그러니까, 어, 어디로, 모실까요, 아가씨?”

“조용한 곳.”


레이첼 씨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래,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Ye…….”

“일본어로.”


자로 잰 듯한 레이첼 씨의 지적에 제이크 씨는 곧바로 어깨를 아래로 축 늘어뜨렸습니다.

이 두 사람, 굉장히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제이크 씨가 운전대에 손을 올렸습니다. 프로듀서의 자동차와는 정 반대로, 조용하지만 무거운 엔진소리를 울리며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차창 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집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요. 이 때까지만 해도,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알게 될 어떤 사실에 대해서도, 제가 처하게 될 상황도.









한펀, 그 시각.

CG프로덕션에 도착한 프로듀서는 본관의 정문으로 바로 들어가는 대신, 사무실이 위치한 제1별관의 외곽을 빙빙 돌고 있었다.


“……아무도 없지? 좋아.”


별관 주위를 맴돌며 본관의 경비실까지 별 다른 움직임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별관 1층의 기자재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방의 창문으로 다가갔다. 일반적인 성인 머리 높이의 창문에는 굵은 쇠창살이 걸려 있었지만, 양 모서리에 달린 걸쇠를 가볍게 조작하자 쇠창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힘없이 툭 떨어져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그는 창문을 열고 가볍게 도움닫기를 해 위쪽 창틀에 손을 걸었다.


“흡!”


마치 턱걸이를 하듯이 창틀을 타고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누가 볼세라 재빨리 미리 밀어 넣었던 창살을 다시 창 밖에 걸어놓고 창문을 닫았다. 그의 머리 위에는 회전식 CCTV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창가에서 출구까지 벽에 딱 붙어서 이동하는 이 루트는 CCTV에는 잘 보이지 않는 사각이었다.

살금살금, 혹여 순찰을 도는 경비에게 들릴까 발소리를 죽여가며 창고를 빠져 나온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편의 잠입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나 참, 내가 주말에 출근하려고 이런 짓까지 해야 되나…….”


프로듀서가 고작 출근을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사장이 그의 주말 출근을 격주에 한 번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작년 말에 진행되었던 행정감사에서, 비록 자의였다고는 하나 과도한 초과근무가 지적사항으로 나왔던 것이다.

물론 정문을 통해 정식으로 출근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을 통과시킨 보안팀의 입장이 난처해지게 된다. 창고를 나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서, 평소처럼 정문을 통과하려고 할 때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보안팀장의 얼굴을 떠올린 프로듀서는 훗,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열려 있구나.”


트레이닝 파트의 트레이너들이 출근을 하고 있었기에 사무실의 보안장치는 해제되어 있었다. 사실 트레이너들은 지하에 위치한 트레이닝 파트에 자신들의 사무실이 따로 있기 때문에 구태여 올라올 필요는 없지만, 오늘은 프로듀서 역시 출근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미리 부탁을 해서 잠금장치를 열어놓은 것이었다.

정작 그의 부탁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 마스터 트레이너는 ‘그 정도로 오지 말라는 데 굳이 와야 하는 이유가 있나?’라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땀에 절은 자켓을 옷걸이에 대충 걸어 두고는 바로 준비실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정리된 냉장고 안에는 밀폐용기에 들어있는 매실 담금주나 장아찌 따위의 간단한 찬거리와 스태미너, 에너지 드링크가 가득 들어 있었다. 프로듀서가 선택한 것은 빨간 바탕에 하얀 별 무늬가 그려진 에너지 드링크였다.

캔의 오프너를 당기자 푸식, 하고 탄산이 새는 소리와 함께 가뜩이나 시원했던 캔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땀을 꽤 흘린 탓인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드링크의 단맛이 꽤 반가웠다. 


“후우, 조금 살 것 같네.”


그는 에너지 드링크를 홀짝이며 준비실에서 나와서는 사무실 중앙의 원형 테이블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아 벽에 걸린 스케줄 보드를 바라보았다. 스케줄 보드 여기저기에는 트라이어드 프리무스나 후미카, 마유, 그리고 미즈키와 카에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제 막 데뷔무대를 가진 후배 아이들의 이름은 아직까지는 스케줄 보드 아래쪽의 ‘트레이닝 파트’항목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프로듀서는 아이들의 이름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며 한 모금, 드링크를 목으로 넘겼다.

아이들의 이후 플랜은 이미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데뷔는 한 번에 했지만, 이후의 활동 방향은 유닛, 혹은 개인별로 개별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다음부터는 실력과 더불어 운 역시 필요한 부분. 다행히도 몇몇 아이들은 마침 적재적소의 오디션을 구할 수 있었기에 금방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다만, 그러지 못한 아이들은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하리라.

아쉬운 듯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이때까지처럼 한두 명이었다면 최대한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 주었겠지만, 이렇게 사람이 늘어나버린 지금 예전처럼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힘들었다.

분신술이라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확실히 사람이 조금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또다시 한 모금, 시원하면서도 청량감이 도는 음료를 목으로 넘기며 프로듀서는 시선을 조금 더 낮추었다. 트레이닝 파트 항목의 아래쪽에는 ‘보충 트레이닝’이라고 적힌, 빨간색으로 강조된 항목이 있었다. 그 항목 안에는, 가장 최근에 합류한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보충 트레이닝 참가자; 이치노세 시키, 미후네 미유 – 총 2명


프로듀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이치노세 시키.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이치노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는 머릿속으로 그, 혹은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치노세. 당신들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거지?’


몸이 식을 때까지, 한 모금씩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며 스케줄 보드를 쏘아보던 그는 잠시 후 빨간 캔이 텅 비었을 무렵에야 테이블에서 일어나 창가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텅 빈 음료수 캔을 사무실 한 구석의 빈 병 회수용 상자에 던져 넣고 의자에 몸을 싣던 그는 며칠 전, 미즈키와 카에데를 데리고 레이첼을 만났던 그 날, 그녀와 단 둘이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일방적인 퍼주기는 경영진들 역시 썩 마음이 들어 하지 않더군요. 당신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니까요. 그러니 거래를 하죠. 쌍방이 납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말이에요.』

『그러니 P씨. 아니, 윌리 존슨, 당신을 빌려주세요.』








세 사람을 태운 자동차는 약 10분 정도를 이동한 다음에야 멈추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제이크는 다가오는 발렛파킹 요원에게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 뒤, 레이첼과 카에데가 앉아 있는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곧바로 차에서 내리려던 카에데의 눈 앞에 새하얀 면장갑을 낀 손이 불쑥 나타났다.


“레이디, 손을.”

“네? 아, 아아, 네…….”


새하얀 손을 바라보던 카에데는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장갑 위에 손을 얹고, 제이크의 유도에 따라 자동차의 밖으로 나왔다.

‘어쩐지 영화 같네……’라고 생각하며 차에서 내린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거대한 건물의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건물만큼이나 거대한 문의 위쪽에는 몇 번인가 TV 광고에서 본 적이 있는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시부야에 위치한, 도쿄의 호텔 가운데에서도 R호텔과 함께 호화롭기로는 수위를 다투는 H호텔이었다.


“먼저 들어가 계세요.”


뒤에서 들려온 레이첼의 목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따라 차에서 내린 레이첼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는 제이크에게 몇 가지 지시해둘 것이 있어서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랍니다.”

“아……네, 그렇게 할게요.”


카에데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다란 호텔의 회전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낮이었지만 주말이기 때문일까, H호텔의 로비는 사복 차림의 관광객들과, 단정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사업가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거대한 홀을 은은하게 채우는 교향곡 소리가 사람들의 말소리나 발소리 같은 소음에 묻혀 전혀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로비를 한번 쓱 돌아본 카에데는 고개를 돌려 유리창 너머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정말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인 제이크가 자동차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지자 레이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커다란 회전문을 지나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자, 그럼 갈까요?”


그녀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는 레이첼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로비의 프런트를 향해 다가가자, 자리에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보던 직원이 두 사람의 기척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들어 앞장선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H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시크릿 라운지를 쓰고 싶은데, 혹시 빈 방이 있나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직원에게 품 속에서 꺼낸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를 살펴보던 직원의 두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자세를 고쳐 꼿꼿하게 등을 폈다. 두어 걸음 정도 떨어진 카에데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상기된 그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무, 물론입니다! 어, 어서 오십시오!”

“그거 다행이군요. 그러면 저는 둘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담소를 나눌 방을 빌릴 수 있을까요?”


레이첼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카에데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이던 직원의 시선이 카에데에게 닿는 순간, 그의 눈이 다시 한번, 툭 하고 건드리면 톡 하고 빠져나올 듯이 휘둥그래졌다. 그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카에데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직원은 데스크에서 작은 무전기를 꺼내 목에 걸고 어딘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2분 정도가 지났을까, 무전기를 내려놓은 그가 다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방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안내까지는 필요 없어요. 열쇠만 빌려가죠. 그래도 되죠?”

“물론입니다.”


직원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데스크 뒤편의 열쇠함에서 열쇠와 카드키를 그녀에게 건네었다.


“여기 있습니다. 열쇠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리고 카드키는 방에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이마가 데스크에 닿을 정도로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직원을 뒤로 한 채 카에데를 향해 다가간 레이첼은 멍하니 있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 끌었다.


“자, 그럼 가죠.”

“아, 아아, 네…….”


반쯤 끌려가듯 레이첼의 뒤를 따라가며 카에데는 며칠 전, 프로듀서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곰곰히 떠올렸다.


『’메리엇 스튜어트’는 전 세계의 주(住)를 독점하고 있는 공룡입니다. R호텔뿐만이 아니에요. H호텔을 비롯한 수많은 호텔이 그들의 소유 아래에 있습니다. 그들의 자본력, 영향력은 자본주의가 기본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가히 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집단이죠.』


그렇게 말하며 프로듀서가 가르쳐 준 호텔의 이름 가운데에는 분명히 H호텔의 이름도 들어가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레이첼을 향한 직원의 과도한 반응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그래, 까마득히 높은 상관이 직접 나타났는데,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당장 모델 시절의 자신만 하더라도 디렉터 앞에서는 딱딱하게 굳어서 사진을 찍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레이첼의 뒤를 따라 일반 손님들이 엘리베이터를 탑승하는 곳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한 눈에 보더라도 ‘나는 좀 달라요’라고 과시하는 듯이 화려한 자수로 장식된 엘리베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이하게도 버튼이 있어야 할 곳에는 버튼 대신 열쇠를 꽂는 구멍이 나 있었다. 레이첼은 익숙한 동작으로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꽂아 반 바퀴를 돌렸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륵, 소리조차 내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그녀는 뒤에 서 있던 카에데를 향해 먼저 타라는 손짓을 했다. 카에데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 열쇠를 뽑은 그녀가 뒤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렸다는 듯 엘리베이터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문과 문이 부딪히는 자그마한 금속음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몹시 조용했다.

작은 샹들리에와 촛불처럼 디자인된 전등으로 장식된 엘리베이터의 내부에는 층 수를 선택하는 버튼 대신 열쇠구멍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구멍에 레이첼이 열쇠를 넣고 돌리자 가벼운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쇠에서 손을 뗀 레이첼은 고개를 돌려 카에데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꽤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모양인지, 층수가 표시되지 않는 엘리베이터는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불안하기라도 한 것일까, 카에데는 계속해서 엘리베이터의 구석구석이나 자신의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레이첼이 보다못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런 곳은 처음인가 보죠?”

“……네.”


카에데는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모습에 레이첼은 훗, 하고 작게 웃었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요. 해코지하려는 게 아니니까. 참, 예전에 한번 가 본적 있죠? R호텔의 라운지.”

“……네.”

“어떤 곳이었는지 기억나나요?”


카에데는 불과 몇 달 전에 있었던,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이 참가했던 애니버서리 파티를 떠올렸다.


“파티장……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요. 제대로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레이첼은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메리엇 스튜어트가 운영하는 각 호텔의 시크릿 라운지에는 저마다의 용도가 있답니다.”

“용도……요?”

“네. 예를 들자면, 아까 말씀하셨던 대로 R호텔의 라운지는 ‘파티장’이랍니다. 파티용 홀이 있고, 드레스 룸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가게 될 이곳 H호텔의 라운지는 무슨 용도일까요?”

“글쎄ㅇ…….”


카에데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 땡, 하는 가벼운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들의 앞에는 짧은 복도와 연결된 커다란 방음문이 있었다. 


“후훗, 정답은 이 문 너머에 있답니다. 갈까요?”

“네…….”


문으로 다가간 레이첼은 이번에는 카드키를 꺼내어 문 옆의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보안장치에 가져다 댔다. 삑, 하는 소리에 이어 철컥,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의 잠금장치가 열렸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바닥을 스치며 열리는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호텔 방 서너 개는 합친 듯한 커다란 홀이었다. 호텔의 상층에 위치한 듯, 한쪽 벽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채광창 너머로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여기는……바(Bar)……인가요?”

“네, 맞아요. 다만, 단순히 술을 마시는 자리는 아니죠.”


카에데는 레이첼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홀의 중앙에는 홀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거대한 기둥에는 기둥을 거의 둘러싸다시피 한 거대한 선반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일본주나 위스키를 포함한 수많은 나라의 언어가 적혀 있는 각양각색의 술병이 진열되어 있었다.

선반과 테이블 사이, 깔끔하게 유니폼을 갖춰 입은 바텐더 네 사람이 방으로 들어오는 레이첼과 카에데를 발견하고는 꾸벅, 목례를 했다.


“자, 따라오시죠.”


웨이터들이 있는 선반을 지나 홀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렬로 늘어서 있는 문 여섯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풍스러운 장식이 양각으로 새겨진 문의 손잡이 부분에는 하나같이 빨간 불빛이 반짝거리는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역시 가까운 곳이 좋겠지.”


문을 하나씩 살펴보던 레이첼은 홀과 가장 가까운 문 앞으로 다가가 들고 있던 카드키를 잠금장치에 집어 넣었다. 반짝이던 빨간 불빛이 녹색으로 바뀌고,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옆으로 스르륵 열렸다.


“자, 먼저 들어가세요. 열쇠를 입구에 꽂아놔야 하거든요.”

“아, 네…….”


레이첼보다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며, 카에데는 방 안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았다.

비즈니스 호텔의 1인실 정도의 크기로 보이는 방 안에는 네 사람이 둘러 앉을 수 있는 원목 재질의 원탁과 의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홀처럼 벽 전체를 뒤덮는 커다란 채광창은 없었지만, 출입문을 마주보는 벽에는 채광창 대신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림에는 문외한인 카에데의 눈에 보더라도 거장의 작품임을 알 수 있는 그림이었다.

액자가 걸려 있는 벽의 양 옆에는 수많은 와인과 와인 잔이 들어 있는 와인 셀러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류의 양주가 진열되어 있는 선반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곳 H호텔 라운지의 용도는 ‘대화’랍니다.”


방의 문을 닫고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레이첼이 말했다.


“대화……요?”

“그래요. 아무에게나 들려주기 힘든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아주 적격인 자리지요. 오늘 당신을 찾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요.”


‘비밀스런 이야기’라는 말에 카에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와 눈을 마주친 레이첼의 입가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같은 시각, 신데렐라 걸즈의 사무실.



-똑똑.


시계가 움직이는 재깍거리는 소리와 이따금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던 사무실에 별안간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니터를 노려보며 자판을 두드리던 프로듀서는 손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문을 향해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찰칵, 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며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저……실례합니다…….”

“나두~!”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은 오늘 보충 트레이닝이 잡혀 있던 미유와 시키였다. ‘맞아, 조금 전에 끝났다는 연락이 왔었지’ 뒤늦게 마스터 트레이너의 연락을 떠올린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트레이닝은 잘 받으셨나요?”

“네……어떻게든 따라갈 수 있었어요…….”

“좋은 현상입니다. 착실하게 발전하고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미유를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돌연 딱딱하게 굳었다. 미유의 옆에 있던 시키가,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틈을 타 프로듀서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킁킁, 킁킁!”


코를 벌름거리며 자신에게 달라붙는 시키를 마치 고양이를 떼어네듯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떼어낸 그는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시키를 노려보았다.


“이치노세, 너는?”

“냐하핫, 그런 건 껌이지~. 그보다 배고파! 뭐 먹을 거 없어?”

“곧 저녁밥 먹을 시간이다. 참아.”

“싫~어~! 과자! 까까! 배~고~파~!”

“……하아.”


어린아이처럼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시키의 모습에 프로듀서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를 사무실 한 켠의 소파에 내려놓았다.


“나 참. 별 수 없군. 얌전히 앉아 있어.”

“네~!”


준비실로 향하려던 프로듀서는 고개를 돌려 우두커니 서 있던 미유를 바라보았다.


“미후네 씨도 드실래요? 오늘은 꽤 강도가 높아서 열량도 제법 소모하셨을텐데요.”

“네? 아, 아뇨……저는 괜찮…….”


그 순간 어딘가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앗…….”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얼굴을 홍당무처럼 빨갛게 물들이며 황급히 자신의 배를 두 손으로 부여잡은 그녀는 ‘이래도 안 드실래요?’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프로듀서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그럼 조금만…….”


프로듀서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들어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아마 요전에 샀던 과자가 조금 남아 있을 겁니다.”

“……네…….”



*****



“자, 간식 나왔습니다.”


잠시 후, 준비실을 나온 프로듀서의 손에는 작은 쟁반이 들려 있었다. 쟁반 위에는 초콜릿이나 생크림이 들어간 웨이퍼나 전병, 그리고 몇몇 화과자가 담긴 양철 그릇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 세 개가 담겨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새끼손가락 정도 굵기에, 중심에는 하얀 생크림이 들어간 웨이퍼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며, 미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앉아 있는 1인용 소파의 옆에 놓인 3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으응~난 녹차보다 커피가 좋은데.”

“주는대로 먹어.”


소파의 절반 이상을 혼자 차지한 채 뒹굴거리며 과자를 먹는 시키와 그녀의 옆에 앉아서 이따금씩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에 박혀 들어간 부스러기들을 떼어내는 프로듀서의 모습은 얼핏 보기에는 사이 좋은 남매처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후네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미후네 씨?”

“……네, 넵?!”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미유는 대뜸 자신을 향해 날아온 프로듀서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괜찮으세요?”

“죄, 죄송해요. 잠깐 생각을 좀 하느라…….”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프로듀서의 모습에 미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마터면 들고 있던 과자를 떨어뜨릴 뻔할 정도였으니, 프로듀서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을 하시려던 건가요……?”

”아, 미후네 씨께서 집으로 돌아가실 거라면 댁까지 데려다 드릴 수 있습니다만.”

“아, 아뇨, 저는 괜찮아요……신경 써 주신 건 무척 감사 드리지만요……저……저녁에 따로 약속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어떤 약속인지 가르쳐주실 수 있습니까?”

“그게……치히로 씨랑 미즈키 씨에요. 같이 쇼핑을 하러 가자고 하셔서…….”


두 사람의 이름을 들은 프로듀서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두 분이라면 안심할 수 있겠네요.”

“죄송해요……저도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아뇨,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무례한 질문이었을 텐데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차가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네……”


그 때, 그의 옆에서 뒹굴거리던 시키가 그의 무릎 위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왔다.


“우우, 나는 왜 안 챙겨줘? 나도 챙겨줘!”

“넌 알아서 잘 주워 먹으니까.”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미유는 쿡쿡, 하고 소리 죽여 웃었다.



*****



”저……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약 20분 정도가 흐른 뒤, 시계를 바라보던 미유는 찻잔에 남은 차를 모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갈 채비를 마친 그녀가 사무실의 입구를 향해 다가가자,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주말인데도 나와서 고생하셨습니다. 월요일에 다시 뵙죠.”

“네……프로듀서 씨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꾸벅, 프로듀서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인 그녀가 사무실을 나갔다. 그녀를 배웅한 프로듀서가 다시 소파로 돌아오자, 그때까지 잠자코 과자를 먹고 있던 시키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맞아. 그러고보니 아까 소파 밑에서 이걸 주웠는데 말이야~?”

“뭔데? 한번 보자.”

“자, 여기~.”


시키가 불쑥 내민 것은 금속 집게로 철해진 두툼한 서류다발이었다.

서류를 건네 받은 그는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표지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표지 대신 내용물보다 약간 두꺼운 이면지가 끼워져 있는 그 서류는 어쩐지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뭐야, 이게 왜 여기에 있어?”


내용물을 살펴보던 그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이며 완만한 팔자(八字)를 그렸다. 서류의 내용물은 다음 주에 있을 오디션에 대한 자료였던 것이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키가 소파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그에게 물었다.


“뭐야? 중요한 거야?”

“……아니,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만……이 곳에 있어야 하는 물건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지금 그의 손에 들린 서류는 카에데에게 전달해달라면서 치히로에게 맡겼던 것.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카에데에게 있어야 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센카와 씨한테는 한번 주의를 줘야겠군.'


다만 순전히 그녀의 탓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아이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프로듀서 본인뿐만 아니라 치히로 역시 업무의 부담이 상당히 늘어났으니까. 그 점을 따진다면 외부 영업이 늘어났다고 해서 내부의 관리에 소홀했던 자신의 실수라고도 볼 수 있었다.


‘일단 챙겨뒀다가 월요일에 드릴까…….’


프로듀서는 고개를 돌려 일정표를 바라보았다. 카에데의 이름이 적힌 오디션은 다음 주 토요일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분량에 비해 그다지 복잡한 내용도 아니고, 한창 만개한 그녀의 능력을 감안하면 3일. 길어도 4일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발견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는 서류를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아니, 그렇게 하려 했다.


‘아니, 아니지.’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려던 그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추었다. 태엽이 멈춘 인형처럼 우뚝 서서, 가늘게 뜬 눈으로 손 안의 서류를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뭘 미루고 있어. 나답지 않게.”


자신에게 말하듯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여전히 뒹굴거리며 과자 삼매경에 빠져 있는 시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자, 그 정도만 먹고 일어나. 집에 가자.”

“에~~? 뭐야, 일 더 안 해?”

“그래, 오늘은 이정도만 할 거야. 가는 길에 시장도 봐 갈 거니까 먹고 싶은 거 생각해놓고.”

”네~! 밥이다 밥~피자~치즈~!”

“잠깐, 잠깐.”

“켁.”


소파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려던 시키의 뒷덜미를 번개같이 움직인 프로듀서의 손이 낚아챘다. 그 상태로 프로듀서가 자신을 끌어당기자, 시키는 마치 고양이처럼 몸을 움츠리며 얌전히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가까이서 살펴본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 여기저기에는 마치 비듬처럼 과자 부스러기가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과자 부스러기는 좀 떼고 가라. 응?”

“아하~! 내가 안 해도, 어차피 네가 해 줄 거잖아?”

“자꾸 이렇게 비협조적이시면 안 해주는 수가 있어.”


그녀의 머리카락 여기저기에 박힌 과자 부스러기를 떼어내던 그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문득, 그녀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 여기서 물어봐야 하나…….’


“왜 그래? 탈모 생겼어?”


자신의 머리를 만지던 손길이 멎은 것을 눈치챈 것인지 시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한번 쓱 쓰다듬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헤집느라 산발이 된 그녀의 머리카락이 약간 정리되자, 그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툭 밀며 말했다.


”자, 됐다. 출발!”

“야호~!”


통통 튀는 듯한 걸음걸이로 시키의 모습이 사무실의 문 너머로 사라졌다. 조용히 닫히는 사무실의 문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작게 기지개를 켜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좋아, 나도 준비할까.”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5)】에서 계속됩니다.




너무 길어서 두 편으로 나눠야 하다니......

글로 뵙는 건 오랜만이네요. 저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3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