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기억의 습작』

댓글: 11 / 조회: 1080 / 추천: 6


관련링크


본문 - 10-14, 2018 18:21에 작성됨.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 그래봐야 오늘도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겨우 집으로 돌아온 것이지만, 그래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일이 끝난 것이 어디인가. 아무렇게나 양복을 벗어 풀어헤쳐놓고 편의점에서 산 주전부리들을 탁자 위에 자랑스럽게 펼쳐놓고 텔레비전을 킨다. 별것 아닌 것이지만, 한 주의 마무리로는 아주 적당한 상차림. 포장지를 뜯은 쥐포를 굽고, 냉장고에 미리 넣어둔 맥주를 꺼내 한 모금 마신다. 목구멍을 훑는 기분 좋은 서늘함이 이내 짜릿함으로 바뀌고, 곧이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취기에 흐리멍텅해져서 상쾌해진다. 캬, 이 맛에 산다니까. 누가 듣는것도 아닌데 나의 입에서 감탄사가 쏟아져나온다. 어쩌면 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대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롭기에 그저 틀어놓고만 있는 텔레비전 속에서 웃고 떠들며 환하게 미소짓는 사람들.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새로운 맥주를 꺼내러 냉장고로 가려던 찰나, 틀어놨던 텔레비전에서 오늘의 마지막 편성일 새벽 뉴스가 짤막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아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을까. 나는 왠지 모를 기대감에 부풀어 맥주를 가지러 가려던 발걸음을 뒤로 하고 잠시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이름이 텔레비전에서 나올리 만무. 재미도 없는 시사 이야기와 경제 이야기, 그리고 약간의 흥미는 있을지도 모르는 스포츠 이야기를 간단히 읊어주던 앵커가 이내 뉴스를 마치며 고개를 숙인다. 뭐야, 재미 없는 내용이었잖아. 괜히 맥주를 마실 시간만 낭비한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일어나 냉장고로 간다. 맥주 한 캔을 꺼내고 다시 한 모금. 아까보다는 덜 청량한 목넘김이 내 식도를 타고 흐른다. 맥주를 가지고 다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채널을 돌린다. 몇 번이나 채널을 돌렸을까, 텔레비전에서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아이돌 하나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은퇴 선언을 하고 있었다. 아, 아는 이름이다. 오오하라 미치루. 나는 유명하지 않았던 그녀의 유명하지 않은 전 프로듀서였다.


같은 밀로 만들어져서였을까, 미치루는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마시고 싶어했다. 그때마다 나는 이건 아직 미치루에겐 이르다고, 이건 어른이 되어서 마셔야 한다고 몇 번이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미치루는 몇 번이고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내가 맥주를 마실 때면 쪼르르 다가와 무슨 맛이냐고 묻고, 또 마시게 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어차피 미치루와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지 않는 빵에 들어간 밀과 내가 마시는 맥주에 들어간 밀은 차이가 엄청나게 나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몇 번이고 거절했고, 몇 번이고 안 된다고 했고, 그러면서 나는 언제부턴가 밀 동맹이라는 이상한 동맹에 가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미치루는 동맹의 이름을 썩 마음에 들어했었다. 이름만 들어도 빵이 연상돼서일까? 아마 그래서였을거야.


「프로듀서 씨, 밀동맹의 두번째 동료가 되신걸 환영해요!」
「두번째라니, 첫번째는 누구인데?」
「그야 저 오오하라 미치루죠! 밀동맹의 첫번째 동료인 저!」
「그냥 구성원이 두 명 뿐인거고, 아이돌은 미치루밖에 없는거잖아.」
「아, 아우우...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뭐, 나쁘진 않네. 밀동맹이라니, 미치루의 관계가 한층 더 나아간 기분이야.」
「그렇죠?! 그러니까 이 빵을 한 번 드셔보세요! 맛있는 빵이라구요!」
「방금 점심 먹었어. 잠깐, 그 빵들은 언제 사온거야. 또 빵 먹는거냐, 미치루.」
「에헤헤-」


그녀다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딴지에도 그 미소를 잃지 않았던 미치루. 잘 대해준 기억은 없지만, 빵을 먹고 있을 때나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언제나 태양같이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던 아이. 언제나 배고픈 아이임에도 더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나누어주던 아이. 그런 아이가 지금 그 미소로 아이돌 은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5분짜리 기자회견. 그것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얻을 수 있었던 관심이겠지. 그녀에겐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나였다면 그녀에게 이 시간을 줄 수 없었겠지. 그래도 나보다는 좋은 프로듀서를 만난 모양이구나, 미치루. 다행이야.


맥주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맥주를 마시려는데, 캔은 자신이 비어있음을 알리려는 듯이 한 방울의 맥주도 내보내주지 않는다. 어느새 텅 비어버린 캔을 보며 허무한 눈으로 쳐다보던 나는, 이내 다시 냉장고로 돌아가 맥주를 한 캔 더 꺼내온다. 평소같았으면 두 캔 정도로 마무리했겠지만, 왠지 오늘은 그러기엔 아쉽다. 주말이 곧 다가오기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역시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오늘 취하면 내일 종일토록 차면 되니까. 내일로 안 된다면, 일요일까지 쭉 자면 될테니까. 그보다 지금은 텔레비전을 봐야할 때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저 오오하라 미치루는, 아이돌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날 거예요! 지금까지 응원해주셨던 팬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팬이다. 미치루가 팬이 많았다면 이렇게 짧게 작별인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아니, 애초에 지금 은퇴 선언을 할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다. 갑자기 죄악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 죄악감을 씻어내려는 듯이 맥주가 몇 번이고 나의 타는 듯한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내가 좋아했던 밀맥주의 풍부하고 깊은 맛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이상하다. 김이 다 빠져버려서인가. 아니, 그럴리가 없다. 캔을 잡은 손에서는 이렇게 차가움이 느껴지는데.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모든 분들,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랄게요!」


왠지 모르게 울음기 가득한 그 말을 끝으로 텔레비전의 화면이 암전한다. 더 이상 보낼 것도, 수신할 것도 없는 것이겠지. 아쉬움 가득한 5분을 보낸 내 손에는 아직도 차가운, 하지만 맥주는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없는 맥주캔이 들려있다. 화려하게 차려놓은 안주상을 보니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채다. 이렇게 놓아버리면 의미가 없는데. 괜히 속에서부터 화가 치밀어오른다. 이건 다 내 잘못이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제대로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좀처럼 식지 않는 내면의 분노를 조절해가며 어지럽혀놓은 상을 치우는 나. 냉장고에 들여놓은 맥주는 아직 남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마실 수가 없다. 어쩌면 나중을 위해서 남겨놓을 수도 있겠지. 밀동맹의 일원인 미치루를 위해, 어쩌면 기분이 동해 이 곳으로 올지도 모를 그녀를 위해 몇 캔 정도는 남겨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은 빵집으로 가서 빵 몇 개 사볼까. 상을 치우고 대충 침대에 누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 든다. 내일은 부디 조금 더 밝은 날이기를, 그렇게 부질없는 생각도 같이 하면서.

6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