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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에 꾸는 꿈 정도는 조금 더 달콤해도 괜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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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05, 2018 19:57에 작성됨.


*멜티판타지아 드라마 파트 이후를 망상해봤습니다. 미즈키가 꾸었던 최후의 꿈은,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자, 모두. 그럼 다과회를 시작해볼까."


식지 않은 차의 따스한 향, 그리고 딸기잼과 마멀레이드를 곁들인 포슬포슬한 스콘을 앞둔 채 치하야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멀리서 살짝 끼익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처럼의 다과회를 그저 방해하는 것만으로는 들리지 않는 그 소리에, 치하야는 살짝 들어올렸던 찻잔을 내려놓기도 전에 곧장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츠무기나 시호, 그리고 미즈키도 치하야의 뒤를 이어 그 쪽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한데 집중되는 그 순간.


조금 벌려진 문 틈새로 작은 소녀가 빼꼼, 하고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길다란 베이지색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모습이 무척 사랑스럽게 보이는 그 소녀는, 치하야도 츠무기도 시호도 미즈키도 전부 알고 있는 이였다.


"저어, 그.....죄송해요. 방해, 해버린 것 같은데....."


식별번호 22. 보급형 안드로이드. 통칭, 세리카형. 그렇게 불리는 존재는  더이상 그런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모두에게 미안함을 고했다. 이제껏 보여주고 있던 무감정하고 차분한 언동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다른 셋이 머리 속에 생겨나버린 오류를 수정하는 것보다 좀 더 빠르게, 치하야는 동그랗게 뜬 눈을 거두고는 대신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기쁘게 손짓했다.


"아니, 괜찮아. 어서 오렴."


세리카. 끝에 그렇게 부르려던 치하야의 입술이 동작을 멈췄다. 그 애가 머뭇거리면서도 완전히 문 틈새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 이름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세리카의 뒤에, 정말 면목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이가 있다. 틀어올린 머리와 검은 수트, 그리고 안경이 어울리는 여성이었다. 치하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그 여성은 움찔하더니 뒷걸음질치려고 한다. 그렇지만 세리카가 손을 꼭 붙잡고 놔주질 않아, 결국 치하야를 피할 길 없이 마주해버린다.


"어서 와."


놀라움. 기쁨. 반가움. 안타까움. 치하야는 색색깔로 흘러넘치려는 감정을 애써 추스리고는, 그녀에게도 부드럽게 말을 건네었다. 전처럼 치하야보다 조금 체구가 작아진 그녀는, 얼떨떨한 듯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이윽고 입술을 꾹 깨물고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신기하군요....."


그 광경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미즈키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꿈이라는 것은 어쩜 이리도 형편 좋게 흘러가는 걸까. 세리카가 자신들과 같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니. 미즈키는 멀쩡하게 동작하고 있는 시각 센서로 검은 수트의 여성을 살피고는 쓰게 웃었다. 이렇게는 처음 보는 이였다. 그렇지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정보와는 좀 달랐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그래, 저 여성은....


"마더....."


미즈키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츠무기가 먼저, 그 여성을 불렀다. 시호도 착잡한 심정으로, 자신들의 창조주를 바라보았다.


"됐, 어. 이제, 와서, 그렇게, 부를 것까지는.....없어."


리츠코로, 좋아. 고개 숙인 여성은 상당히 힘겹게 더듬더듬 말을 뱉어내고는, 뿌옇게 된 안경을 벗어버린다는 걸 그만 내동댕이처버렸다. 그러고는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아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 취해야하는 동작도 지금의 리츠코에게는 상당히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미, 안."


결국 눈물을 닦아내는 것은 포기하고, 리츠코가 사죄의 말을 입에 담는다. 그만 같이 울어버릴 것 같아진 치하야였지만, 곧 다시 웃는 얼굴을 만들어내고는 가늘게 떨고 있는 어깨를 감싸안아주었다.


"괜찮아. 그렇지, 이제 막 다과회를 하려고 했는데.....어때."


다과회.....그 말이 뜻하는 것을 찬찬히 되짚어보던 리츠코는 물기 어린 눈을 다른 모두에게 향했다. 세리카는 말없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시호는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자리에 일어났다. 그리고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늘었네. 뭐어, 여분의 찻잔 정도야 이 저택에는 얼마든지 있는 것 같으니까 상관은 없겠지만."

"차과자도 모자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4명 분치고는 조금 많이 구워버렸다고 생각합니다. 6명이라면, 마침 딱 맞겠군요."

"어머, 당신 정도나 되는 안드로이드도 실수를 다 하는 구나."

"그, 그건....."

"농담이야. 미즈키는 어때. 괜찮겠지?"

"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즈키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 들었지? 모두 괜찮다고 하니까, 그렇게 부담가지지 않아도 돼."


치하야가 근처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입고 있던 셔츠 자락으로 대강 닦고는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리츠코는 여전히 어설픈 동작으로 그걸 받아서 끼고는 입술을 뭉그러트렸다. 너무나도 오래간만에 짓는 탓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


"치하야, 정말 능숙하게 되었구나."

"후후, 아무리 서투른 거라도 계속 하다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니까."


쪼르르륵. 치하야는  아직 뜨거움을 간직하고 있던 티팟을 들어, 흠잡을 곳 하나 없는 동작으로 두 개 분의 찻잔에 남아있던 차를 적당량 따라내어, 두 방문객들에게도 대접했다. 그저 가만히 있던 리츠코와는 달리, 세리카는 차를 따라내는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대접받자마자 두 손으로 공손하게 찻잔을 들어, 입에 가장자리를 대고는 슬쩍 기울였다.


"와아, 정말 좋은 향이네요!"


이윽고 탄성이 터져나왔다. 치하야를 비롯한 다른 모두는 그런 세리카를 마치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와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신에게로 집중된 시선에 세리카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알고는 있었어요. 기억에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실제로 접해보는 건, 처음이라서."

"후후, 그러니."


세리카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오직 치하야밖에 없는 것 같았다. 어째서일까. 자신이 꾸는 꿈일텐데도 모르는 것이 있다니. 미즈키는 치하야가 지어보이는 어쩐지 쓸쓸해보이는 웃음을 말없이 관찰하다가, 조금 식어버린 차를 입에 머금어봤다. 홍차 특유의 쌉쌀한 향과 함께, 아련한 과일향도 함께 느껴졌다. 


꿈이라는 것은 정말 신기하구나. 미즈키는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분명 폭연 속에서 숨을 거두었을 사람이 버젓이 살아있다. 황무지에서 다 같이 부서져 기동을 정지했을 동료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절대로 이렇게 있을 리가 없는 이들마저, 이 곳에 있다. 같이 다과회를 벌이고 있다. 무척이나 터무니없는 일. 그렇지만 또한 무척 자연스러운 느낌. 마치 원래 이랬던 것처럼. 거기다, 감각 또한 이렇게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실제의 일이 아닐텐데도. 


어떻게 보면 꿈이라는 것은, 일시적으로나마 생성되는 또 다른 세계일지도 모른다. 미즈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는 스콘에도 손을 뻗었다.


".....맛있어."


솜씨좋게 구워진 스콘에서는, 짙은 버터의 풍미가 났다. 미즈키는 츠무기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츠무기는 바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는, 무척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쭉 폈다. 덕분에 미즈키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만큼은 멀쩡하게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실제로는 거의 정지해가는 게 틀림 없을 전자 회로를 타고 흘렀다.


"리츠코. 왜 그래? 혹시 홍차는 별로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각자 차와 다과를 음미하고 있을 동안이었다. 치하야가 리츠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리츠코 혼자서만, 붉은 빛이 감도는 찻물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더, 아, 아니.....리츠코 씨?"


고개를 갸웃하는 세리카에게, 리츠코는 흔들리는 시선을 떨어트린다. 그리고는 몇 마디를 주섬주섬 입에 담았다.


"뭔가, 되게.....음.....뭐라고 해야하지. 표현이, 어려워."


툭툭. 찻잔 표면을 살짝 두드려보기도 하면서 리츠코는 점점 더 말을 정돈해나갔다. 모두는 리츠코를 숨죽여지켜보았다. 미즈키는 그 중에서도 특히 더 주의를 기울였다. 알 듯 말 듯한 무언가를 잡아채려는 듯한 그 모습은 예전, 이제 막 감정을 깨우쳐가려는 자신들과 꽤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너희들과 느긋하게 차를 같이 마실 수 있다는 게.....정말.....아, 맞아!"


그런지 얼마나 지났을까, 리츠코는 마침내 기억났다는 듯이 소리쳤다.


"감개무량! 바로 그거야. 이제야 기억났어."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쉴새없이 계산에 계산을 거듭했을 두뇌는,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내는데에는 무척 인색했던 모양이었다. 


"아아, 정말.....이거 하나 표현하지 못해서 쩔쩔매다니."


겨우 말을 마치고 작게 한숨을 쉬던 리츠코는, 급하게 찻잔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동작으로 말라버린 입 안을 적시려고 했다.


"앗, 뜨거."


후룩, 달그락. 혀를 데이고 만 모양인지, 리츠코가 미간을 찌푸리며 찻잔을 내려놓는다. 세리카는 그 모습을 보고는 무심코 웃음을 터트렸다.


"뭐, 뭐야,"

"푸훗, 죄송해요. 그치만....."

"정말, 웃지마."


쿡쿡. 후후훗. 그 뒤로도 몇 번 더 웃음꽃이 피는 동안, 미즈키는 슬쩍 자기 볼을 꼬집어보았다. 인간들은 혹시 이게 꿈인가 할 때면 볼을 꼬집어본다고 했었지. 아프지 않으면 꿈. 아프면 현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려보면서. 


"아야."

"응? 왜 그래 미즈키."

"아니요. 아무 것도."


놀랍게도, 미즈키는 아픔을 느꼈다. 그렇다면 지금 이건, 현실인 걸까. 그렇지만 그 때. 차가운 비를 맞아가며 천천히 기동이 정지되어가던 감각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게 꿈이고 어느 게 현실일까. 누가 나비이고, 누가 사람일까. 저장되어있던 데이터베이스에서 옛 고서의 구절을 떠올린 미즈키는 쓰게 웃었다. 이건 역시, 꿈이겠지. 너무나도 비합리적이고, 불가사의하고, 형편에 맞으니까. 지금 입에 대고 있는 스콘보다도 훨씬 포근하고, 달콤하게만 느껴지니까.


.....뭐어, 최후에 꾸는 꿈이니까 조금 더 달콤해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 고민하던 미즈키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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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아이커뮤 갱신이로군요! 멜티판타지아가 정말 좋아요. 제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떡밥의 보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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