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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터의 어떤 하루 _ 미라이, 이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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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13, 2018 00:30에 작성됨.

 똑똑똑-. 노크 소리에도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 조심스레 문고리를 열고 두리번. 두리번. 앞으로 살금. 살금... 휙. 뒤꽁무니 따라잡는 이 없음. 다시 두리번. 왼쪽 오케이. 두리번. 오른쪽 오케이. 발뒤꿈치 살짝 들고서 열 몇 걸음 호다다다다다다다닥. 닫혀있는 의상실 커튼을 살포시 걷어 사태 파악. 목표 포착. 그 안으로 슝!


  "미라이!"


  "시, 시즈카쨩! 목소리가 커!"


  "하지만 의상실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괜찮을거야. 자."


  괜히 한 번 양 옆을 다시 확인한 시즈카는 조직의 비밀이라도 캐 온 스파이가 된 것 마냥 신중을 기해 미라이의 손에 고이 가져온 물품을 올렸다. 그 분위기에 맞물려 물품의 앞, 뒤, 양 옆면을 주의 깊게 확인한 미라이는


  "와핫. 이거! 와! 얼마만인거야 이거!"


  언제 조심스러웠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물품에 빨대를 꽂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소리가 크다고 타박을 주더니만 말이다. 어이가 승천한다는 걸 온 몸으로 표현해봤자 지금 미라이에겐 닿지 않을 것이다. 미라이는 아주 그냥 세상 행복을 혼자 다 빨아들이겠다는 기세로 시즈카가 건네준 걸 빨아댔다. 초코 우유. 그래 그거 맛있지. 달지.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그 별것도 아닌 음료를 이렇게까지 해서 마시고 싶다고 사정사정을 해서 어울려 준 자신에게도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를 이렇게 맛나게 마시는 미라이를 보니 그래도 동조해줘서 다행인건가 싶기도 했다. 이 커튼이. 대관절에 아주 그냥 활짝 펼쳐지기 전에 말이다.


  "안에 누구 있나.... 어? 미라이쨩?"


 "......이. 이쿠쨩."


 "그거... 뭐야?"


 "이거 초코... 아, 아니야. 이거. 그러니까. 이쿠쨩.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야."


 "......정말. 미라이쨩.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어?"


 "이쿠쨩. 이건 사연이 있어. 정말이야!"


 커튼은 노크해봤자 소리가 나지 않잖아? 그런데 얘도 참. 커튼이 닫혀 있으면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인지 했어야지 않겠니. 서로의 조심성이 엇나간 우연이 빚은 사연 있는 비극 사이에서 시즈카는 이도 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했다. 초코우유 하나에 상처 받은 이쿠와 어쩔 줄 몰라하는 미라이. 그 와중에 한 번 먹기 시작한 초코우유를 멈추지 못하겠는지 결국 미라이는 호로록. 초코우유의 밑바닥을 봐버렸다. 그리고 그 호로록 소리는 마치 벼락처럼, 이쿠에게 크나큰 크리티컬을 줘 버렸다.


 "나. 나는....... 미라이쨩. 미워!"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의상실을 뛰쳐나가는 이쿠.


 "아앗, 저기, 그게 아니...!"


 말을 채 마치지 못한 채 초코우유의 잔해를 시즈카에게 맡긴 후 뒤이어 뛰쳐나간 미라이. 그리고 빈 초코우유 곽과 함께 남겨진 시즈카.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와 시즈카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려다 한 쪽 손에 쥐고 있는 초코우유 곽을 보고는 허탈웃음을 터트렸다. 왜 미라이가 초코 우유를 몰래 먹을 수 밖에 없었는지. 그래서 시즈카가 대신 가져다 줄 수밖에 없었는지. 초코우유를 먹은 미라이를 보고 이쿠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약 한 달 하고도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




 A! Ace! B! Best! C! Choice!


 와-! 이쿠쨩! 영어단어 외우는거야? 어디어디... ABC?


 미라이쨩! 이건 영어 단어가 아니라구! 우유계의 새로운 질서! ABC를 세우기 위한 이름하야 에이스한 베스트 초이스! ABC 우유라는거야!


 와-! 이거 한 번 어디... 꿀꺽. 우와! 완전 맛있잖아?


 이 우유 먹으면 분명 엄마에게 칭찬도 많이 받겠지?!


 응응! 키도 쑥쑥 자라서 훌륭한 톱 아이돌이 될 수 있을거야! 데헤헤-




 자라나는 미래의 톱 아이돌과 함께 업계의 탑을 노립니다. ABC 우유ㅡ




 "오오오. 이게 이쿠링이랑 미라잇치가 찍었다는 그 광고란 말이지? 으으으응!! 귀여운 걸!!"


 30초의 TV CM의 여운을 제일 먼저 깨트린 멤버는 우미였다. 특유의 붕붕거리는 포즈로 자신이 찍지도 않은 광고를 자기가 직접 찍은 것 그 이상의 하이텐션으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곤 같이 관람한 멤버들은 한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요~ 이쿠쨩도 미라이쨩도 정말 귀엽게 나왔네요~"


 "흐응. 첫 광고라 떨리니 어쩌니 유난은 다 떨었으면서 뭐야. 괜찮게 나왔잖아."


 "모모. 내심 걱정하고 있던 거구나?"


 "걱정은 무슨! 프로답지 못했을까봐 신경 쓰였을 뿐이야."


 "모모코쨩이 신경 써 준 덕분에 저 두 사람이 잘 찍었나보네요~"


 "그러니까 미야씨. 그런 게 아니... 쓰, 쓰다듬지 말.....!"


 모모코를 사이에 둔 미야의 줄리아와 대화에 우미는 꽁트를 보는 것 같다는 감상과 함께 빵 터지며 여전히 높은 텐션을 자랑했다. 그 소란들을 코토하는 방청객처럼 바라보며 웃었다. 하여튼간 못 말린다니까. 지금 대기실에서 광고의 감상을 나누고 있는 이 멤버들은 약 1시간 후 보컬 레슨을 하게 될 멤버들이었다. 프로듀서에게 우연히 오늘부터 미라이와 이쿠가 찍은 우유 광고의 TV CM이 방영될 거라는 소식을 들은 보컬 레슨 조 멤버들은 광고를 찍은 당사자인 미라이와 이쿠가 없음에도 한데 모여 TV CM을 감상하자는 의견으로 단결했고 그는 약 한 시간 이른 출근으로 이어졌다. 아무 방송 채널 하나 틀어놓고 수많은 광고들을 지나친 게 몇 십분. 드디어 미라이와 이쿠가 텔레비전을 통해 광고 모델로 데뷔한 순간을 캐치한 것이다. 다른 멤버들이 열렬히 감상하던 30초 동안 코토하는 약 두 장의 사진을 찍었고, 그를 이쿠에게 보내준 상태였다. 봤을까? 괜한 기대심에 라인을 보니 확인은 한 상태였다. 답이 올 것 같아 켜 둔 상태로 기다렸으나 답은 따로 오지 않았다. 음. 바쁜가보구나. 넘겨짚으려는 찰나에 라인 알람이 울렸다.


 [우와이뻥ㅛ신ㄱ1]


 풋. 잔뜩 오타가 났지만 무슨 의미인지 해석은 쉽게 되었다. 급하게 타자 치느라고 잔뜩 오타가 났나보다. 코토하는 옆에서 줄리아를 톡톡 두드렸다. 막내가 보낸 이 귀여운 문자를 어서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모모코와 미야와 대화의 열중하던 줄리아는 코토하의 의도대로 빨리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 참. 이거 빨리 보여주고 싶은데. 조금 더 세게 찰싹 치려는 찰나


 안녕하세요---!!!!!!!


 활력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나는 목소리가 복도를 넘어 문 닫힌 대기실 안까지 쩌렁쩌렁 울려댔다. 원체 밝은 목소리를 가진 아이지만, 잔뜩 들떠 있다. 그렇지. 들떠 있을 수밖에 없지. 왜냐하면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늘 첫 TV CM 데뷔를 한 아이니까!


 "미라잇치!!"


 제일 먼저 달려 나간 건 역시나 우미였다. 자동문보다도 빠르게 문을 열어젖힌 우미는 미라이를 보자마자 동동거렸다.


 "이야! 미라잇치! 우리 봤어!! 완전 귀여웠어!! 어?"


 "우미씨. 너무 격렬하게 미라이쨩만 반겨주는 거 아니야?"


 "아아아니! 이쿠링도!!!!"


 "아니 잠깐! 우미씨! 이런 환영은 괜찮다구!"


 이쿠를 번쩍 들어 올린 우미는 다른 때와 다른 무게에 살짝 흠칫했다. 그제야 살펴보니 이쿠의 양 손엔 터질듯이 뭔가 가득 채워진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발버둥 칠 때 마다 무게감 있는 비닐봉지가 우미를 퍽퍽 쳐댔다. 아파! 아파! 입으로는 아프다고 연신 말하면서도 대기실 안까지 이쿠를 대령하고서야 땅에 두 발을 딛게 했다. 그러고 보니 이쿠 뿐만이 아니었다. 미라이도 양 손에 뭔가가 가득 담긴 비닐을 들고 있었다.


 "이쿠. 그건 뭐야?"


 모모코의 물음에 표정이 환해진 이쿠는 잔뜩 어깨를 피곤 입을 열었다.


 "이게 바로 그거야! ABC 우유!"


 이쿠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라이는 봉지를 뒤적이며 병 우유를 잔뜩 꺼내들었다. 떨어져서 깨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에 코토하와 줄리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미라이를 거들었다.


 "한 손에 하나씩 쥐어도 괜찮다구. 미라이."


 "그렇게 들다 다치려고!"


 코토하와 줄리아가 연달아 한 마디씩 타박을 던졌으나 미라이에겐 타격감이 제로였다. 그를 웃음으로 무마한 채 나머지 손에 쥔 우유를 우미와 미야에게 건넸다.


 "호오-. 여기 잘 보니 미라이쨩이랑 이쿠쨩 캐릭터가 있네요~"


 미야가 미라이와 이쿠의 캐릭터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모티콘처럼 단순화 된 동글동글한 얼굴 모양이 'ABC 우유' 옆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었다.


 "완전 귀엽지? 이거 우리가 앞에 편의점에서 잔뜩 사가지고 온 거야! 급탕실 냉장고에 넣어둘테니까 언제든지 마셔!"


 "응응! 편의점 아저씨한테 '저희 당분간 엄청 사갈 거니까 잘 부탁드려요!' 하고 말하고 왔어요!"


 "우와. 대단해!!!!!!!"


 "우미씨. 어서 마셔봐. 모모코쨩도 하나 마셔봐!"


 "주, 준다면 마시지만 말야... 저 정도 양은 분명 시어터 사람들 한 잔씩 돌려 마셔도 남을 거 같은데..."


 모모코의 말마따나 이쿠와 미라이가 들고 온 우유의 양은 실로 엄청났다. 웬 학생 두 명이 들어와 같은 브랜드의 우유를 크기 상관없이 마구 쓸어 담는 광경을 목격했을 편의점 직원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직원에게 감정이 이입될 정도의 엄청났다. 대체 얘네 둘은 이걸 어떻게 들고 온 걸까.


 "아, 설마. 이쿠쨩. 문자 오타가 그러면..."


 순간 코토하는 이쿠에게서 날아온 귀여운 문자가 떠올랐다.


 "아하. 그거. 이쿠쨩 손이 부족한데 저도 손이 부족해서 이쿠쨩이 화면을 보여주고 제가 겨우 터치해서 보낸 문자에요!"


 TV CM에 대한 기쁨의 오타가 아니라 동일 브랜드 우유들의 무게를 못 이긴 오타였다니. 이건 이거대로 귀엽긴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근데 말야. 아무리 광고 모델이 되어서 기쁘다고 해도 이렇게 과하게 사 올 필요는 없지 않아?"


 우유의 뚜껑을 오픈하며 줄리아가 물었다. 재빠른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느긋하게 뽕 하고 뚜껑을 따고는 한 모금 입에 넣고 우유를 굴렸다. 그리고는 꿀꺽. 음. 맛있네. 고소해. 줄리아가 우유의 맛을 평할 때 까지 이쿠와 미라이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줄리아씨. 그거 물음이었지?"


 "뭐, 아무래도 좋지만 말야. 모모도 궁금하지 않아?"


 "뭐 이쿠쨩이면 몰라도 미라이씨라면 충분히 기뻐서 저렇게 사올만 하다고 생각해."


 모모코는 미라이와 이쿠쪽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두 사람은 우미의 리액션에 푹 빠져 우유에 대해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꺼내며 홍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새 우미는 우유 하나를 클리어 한 상태로 또 다른 우유를 손에 들고 있었다. 우유들은 우유대로 산더미처럼 널브러져 있고, 우미쪽은 소란스럽고, 줄리아와 모모코의 대화도 붕 뜨고 있고, 미야는 미야대로 우유의 캐릭터만 무념무상 감상하는, 정돈되지 않은 소소한 소란함.


 짝!


 코토하는 박수를 한 번 쳤다. 모두의 시선이 한 데 모아졌다.


 "미라이쨩. 이쿠쨩. 우유 이렇게 상온에 오래 노출되면 상하니까 얼른 냉장고에 집어넣어야 해. 우미쨩은 우유 그만 마시고. 그러다 탈날라. 미야도 마시려면 마시고 안 그러면 냉장고에 넣는 게 좋을 거야. 레슨 가야 할 멤버들은 이제 슬슬 준비하자."


 각자 개성 있는 대답들이 나왔다. 이쿠와 미라이가 우유를 정리하려 자신들이 가져온 봉지를 다시 들었다. 낑낑거리며 나가려는 뒷모습들을 보고는 코토하는 또 해야 할 말이 파삭 떠올랐다.


 "아, 두 사람! 그리고 앞으론 먹고 싶으면 나가서 사 오면 되니까 너무 이렇게 싹쓸이 해 오지 마."


 "그게... 저랑 이쿠쨩은 앞으로 이 우유만 마셔야 하는걸요."


 방금 전과 같이 네-! 또는 응-! 하는 대답이 들려올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긴 문장에 코토하는 말들을 놓쳐 어? 하고 되물었다.


 "미라이쨩이랑 나는 앞으로 이게 물이고 음료수야!"


 이쿠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쿠쨩. 성장기라 해도 우유만 먹는 건 좋지 않아요~"


 "미야씨. 그러니까 이건 광고 모델들만의 특급 비밀인거야. 그치? 미라이쨩?!"


 "응응! 당분간은 우유 잔뜩 마시는거예요!"


 "그럼 정리하러 갈게! 모두들! 수고해요!"


 활기 넘치게 대기실에서 사라진 두 사람에게서 코토하는 순간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코토하 뿐만 아닌지 코토하의 시야 안에서 줄리아도 고개를 갸웃했다.


 "있지. 뭔가 위험하진 않지만 위험할 것 같은 말을 들은 기분이 들어."


 눈이 마주친 코토하에게 줄리아는 가감 없이 자신이 방금 느낀 기분을 토로했다. 똑같은 감상에 동조의 끄덕임을 줄리아에게 보냈다. 그리곤 본능적으로 이 안에서 가장 상식인으로 보이는 모모코에게 공감을 원하는 시선을 동시에 보냈다.


 "뭐, 뭐야. 두 사람. 바보 같아."


 "뭔 일 있겠어요? 우유 열심히 마시면 키도 쑥쑥 클 테니 좋을거예요~"


 "응응! 나도 미라잇치랑 이쿠링 따라서 열심히 마셔볼테야!!"


 "그러니 코토하쨩. 줄리아쨩. 걱정 말고 우린 우리 할 일 하러 가죠."


 세상 걱정 없는 미야의 나긋한 말투는 당장의 불안함을 진정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코토하도, 줄리아도 미라이와 이쿠가 그저 엄청난 우유의 양을 수습하려는 말로 던졌겠거니 싶어 순순히 미야의 말에 따랐다.



*



 미라이쨩! 그 음료수는 뭐야?


 아, 이거! 스태프분이 주셨어. 수고했다고 마시래. 이쿠쨩도 자! 포도 주스야!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특히나 밖에서는 마시는 거 조심하랬잖아!


 에에-. 그래도 대기실인걸.


 안 돼. 방송국 관계자 분들이 얼마나 많이 돌아다니는데. 목마르면 이거 마셔.


 또 우유! 이쿠쨩! 아무리 목말라도 우유로 목을 축이진 않는단 말야.




 리오는 대기실의 작은 소란을 모니터 너머로 쇼트 꽁트를 바라보는 것처럼 팔을 괴고 지켜보았다. 광고가 방영된 지 일주일. 시어터 멤버들 중에서 미라이와 이쿠가 벌이는 일상 속의 꽁트를 목격하지 않은 자는 손에 꼽혔고 리오는 그 드문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구전처럼 전해 내려오던 그 광경을 일주일만에 제 눈으로 보게 된 셈이었다. 결국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우유를 전해 받아 마시는 미라이로 끝난 꽁트는 재미 면으로는 10점 만점에 8점정도. 볼만했다. 우유하면 껌뻑 죽던 그 미라이가 우유를 기피하는 신선한 모습을 보게 된 이유가 팔할이었다. 평소의 미라이라면 건네주는 우유를 꽤 기쁜 마음으로 받았을 테니까. 반면 이쿠는 집요할 정도로 우유를 강요한다. 미라이에게만 강요하는 게 아니라 본인 또한 모든 마실 것들을 우유로 대체하고 있었다. 그것도 본인들이 광고한 ABC 우유. 광고주가 본다면 참 뿌듯해 할 광경일 것 같긴 한데 너무 과한 게 아닐까. 하며 꽁트의 품평을 마칠 찰나에


 "리오씨도 드디어 보신건가요?"


 "아... 치즈루쨩. 언제 들어왔어?"


 "들어오긴 아까 들어오긴 했지만요. 아. 이거 드실래요?"


 치즈루가 건네준 건 팩으로 포장된 ABC 우유였다. 지금 보니 치즈루는 양 손에 같은 브랜드 우유를 똑같이 쥐고 있는 상태였다. 아까 꽁트에서 연결된 상황인건가? 리오는 살풋 웃어버렸다.


 "이쿠쨩이 준거야?"


 "맞사와요. 맛이 없는 건 아니니까 리오씨도 드셔보세요."


 리오는 치즈루가 건네준 팩을 받아 오픈했다. 한 입 마셔보니 치즈루가 한 말처럼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맛있다면 맛있다고 평할 수 있는 맛이었다.


 "고소하니 괜찮네. 그나저나 맛이 없는 건 아니니까... 라는 건 치즈루쨩은 여러 번 권해 받았던 거지?"


 "아무래도 고로케에는 우유가 잘 어울리긴 하죠? 오호홋호."


 한 번 가열차게 웃은 치즈루는 마찬가지로 받아든 우유팩을 따고 꿀꺽꿀꺽 마셔 넘겼다. 우유에게서 고소한 맛을 찾은 리오와는 달리 이미 맛에 적응이 된 치즈루의 혀는 흰 우유에게서 더 이상 새로운 맛을 찾지 못했다.


 "그나마 저희같이 잠깐 잠깐 스케줄에서 만나는 정도면 다행인 것이와요. 이쿠쨩과 같이 광고를 촬영한 미라이쨩은 꽤 고전하고 있는 듯 해요."


 "방금 전에도 봤어. 포도 주스 권했다가 이쿠쨩에게 한 소리 듣는 과정을 다 목격해버렸거든."


 "으음. 리오씨. 조금 뭔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솔직히... 확실히 평범하진 않는 거 같지?"


 "모든 것의 시작은 광고가 방영 된 이후인 것 같사와요. 지금 우리 극장 냉장고에 온통 ABC 우유가 들어찬 때도 그 광고가 방영 된 이후인 것이와요."


 하긴. 리오도 며칠 전 우유에 잠식되어 버린 냉장고 안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었다. 편의점을 탈탈 털어 오는 바람에 극장 냉장고는 우유 보관소가 되어 버렸고, 이쿠와 미라이가 과도하게 마시고 있음에도 우유는 절대 줄지 않는다는 아카네의 증언도 그 자리에서 들었었다. 프로듀서도 우유 처리에 동참하기 위해 매일 마시던 커피의 종류를 카페라떼 하나로 통합해버렸다고 했었다. 그 날 프로듀서가 직접 타 줘서 마시게 된 커피도 카페라떼였다. 카페라떼라 해 봤자 알커피에 뜨거운 물 조금 부어서 휘휘 저은 후 그 위에 우유를 콸콸 부은 커피우유였지만 말이다.


 "물론 광고 모델이 광고하는 제품을 사용하는 게 이상할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좀 과해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이죠."


 치즈루는 이 과도한 우유 파티가 단순히 광고 모델들의 훌륭한 프로 마인드에서 나오는 거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생각에 대답은 내진 않았지만 리오도 살짝 동감하는 바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아까 전 미라이만 봐도 우유를 마시는 걸 벅차하는 느낌이었으니까.  


 "정 그러면 물어나 볼까?"


 "두 사람한테요?"


 "확실히 어떤 이유가 없이는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니까. 이쿠쨩! 미라이쨩!"


 리오는 손짓하며 이쿠와 미라이를 불렀다. 어느새 각자 자리에서 각자의 우유를 빨고 있던 두 사람은 리오의 부름에 순순히 응했다. 이쿠는 빨대 꽂은 팩 우유를 들고 온 채였고 미라이는 우유를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 앞 테이블에 놓은 채 빈 손으로 왔다. 이것 봐. 별 생각 없는 행동이겠지만 미묘하단 말이지.


 "저기. 이건 그냥 우리가 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지. 혹시 너희들. 그 우유만 먹어야 하니?"


 리오의 질문은 직설적이었다.


 "응!"


 그리고 이쿠의 대답은 가감 없이 깔끔했다. 미라이가 뭐라 입을 열려다가 이쿠의 깔끔한 대답에 다시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을, 치즈루와 리오는 일단 하나의 체크 포인트로 저장해두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그...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번엔 미라이의 답이었다. 그 우유만 먹어야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단다. 이게 뭔 말이래.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있을까?"


 "이게. 그게. 그러니까..."


 미라이는 이쿠의 눈치를 살폈다. 첫 질문에는 깨끗한 단답을 선보였던 이쿠도 이 질문은 좀 난감한 모양인지 이쿠 또한 미라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이건 기밀사항이니까!"


 "네. 맞아요. 이건 기밀사항! 프로듀서씨가 그랬어요. 계약서의 내용은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


 "미라이쨩!"


 "아아아! 모, 못들은 걸로 해 주세요! 계약서 그런 게 뭐예요?"


 "아... 그. 그러게. 뭔 지 모르겠네요. 리, 리오씨. 뭐 들었나요 우리?"


 "그.. 글쎄. 모. 모르겠는걸."


 "저, 저희 이제 스태프 분들 만나 봬야 해서... 이쿠쨩!"


  ".....우, 우유 몇 개 들고 가서 스태프 분들 나눠드리는 건 어떨까?"


 이쿠는 부랴부랴 대기실 안에 마련 된 소형 냉장고에서 팩우유 몇 개를 꺼내곤 미라이와 함께 바람처럼 밖으로 나가버렸다. 애들이 당황해하고 난감해해서 덩달아 어쩔 줄 몰라 하던 두 사람은 이쿠와 미라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자신들도 그 당황스러움에 휩쓸려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치즈루쨩. 그래도 대충 수확은 있었지?"


 "우유를 먹어야만 하는 이유가 광고 계약서 때문이 아닐까. 하고 유추해 볼 수 있겠네요."


 "으음.... 결국 방법은 프로듀서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가...?"


 "일단은 기다려보죠.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걸요. 괜히 저희가 물어봤다가 애들이 난감해질 수도 있을테니까요."


 그러려나. 따지고 보자면 그저 한 가지 우유를 과도하게 섭취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딱히 일으키는 문제는 없는 셈이었다. 그걸 문제라고 삼아야 할지부터 사실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리오와 치즈루는 더 지켜보자는 방향으로 서로의 의견을 합의했다.



*



 글쎄 이쿠가 아침, 점심, 저녁을 다 우유로 처리했다지 뭐야. 미라이쨩이 물을 제대로 안 먹은 지가 벌써 며칠째래. 물 대신 음료수도 그렇지만 물 대신 우유는 정말 아니지 않아? 이쿠와 미라이 사인회 테이블 앞에 물이 아니라 우유에 빨대가 꽂혀 있었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이쿠와 미라이의 우유 괴담은 도시 전설처럼 매번 새로운 내용으로 시어터 내를 떠돌아다녔다. 그 흉흉한 소문들을 시즈카 또한 모를 리 없었다. 지금도 당장 그 괴담의 실체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걸. 쪼로록. 영혼 나간 표정으로 팩우유에 꽂힌 빨대를 입에 지근거리는 미라이의 꼴은 가관이 아니었다. 우유를 한 모금 빨 때 마다 미라이는 서서히 까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러다 연습실 바닥에 녹아내리는 게 아닐까. 도저히 그냥 쳐다보고 있을 수 없어 시즈카는 몸을 일으켜 미라이에게로 다가가 미라이가 마시고 있던 우유를 빼앗아들었다.


 "시즈카쨩."


 활력이라는 단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듣는 이조차 무기력해지는 목소리.


 "미라이. 먹기 싫으면 먹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만 목이 마른걸."


 "그럼 물을 마시지 그래?"


 "물은 맛이 없어."


 "그 무슨... 그럼 냉차라도 가져다줄까?"


 "음... 냉녹차 맛있겠다. 냉보리차도 맛있겠지?"


 "말을 해. 무슨 차 마시고 싶은데."


 "..... ABC 우유-."


 억지로 몸을 일으키더니 시즈카가 빼앗아 간 우유를 재차 낚아채곤 다시 영혼 날아간 표정 그대로 우유를 흡수해댔다. 슈로록. 밑바닥이 드러났다는 신호를 듣고 나서야 빨대에게서 입을 거뒀다.


 "배불러."


 "미라이. 지금 완전 바보 같은 거 알아?"


 시즈카는 굳이 바보라고 일컫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앎에도 바보라는 단어를 탁 던져버렸다. 아니야. 바보 이상의 단어를 선택할 수 있다면 기꺼이 선택했을 것이다. 집에서는 뭘 어떻게 마시며 사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요 근래 극장에서 미라이가 수분을 제대로 섭취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시어터에 떠돌아 다니는 우유 전설들은 모두 사실에 기반한 내용들이란 것을 철저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라이의 모든 수분은 우유로 대체되고 있었다. 지금 미라이를 찌른다면 피가 흐르는 게 아니라 우유가 흐를 거라고 시즈카는 확신했다. 답답함에 시즈카는 미라이의 앞에 풀썩 앉았다.


 "있잖아. 웬만해서는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이쿠도 없고, 연습실에는 미라이랑 나 밖에 없으니까 물어볼게. 도대체 왜 우유만 먹는 거야? 다들 말은 못해도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있어. 와중에 프로듀서는 일이 바쁜지 제대로 말 붙일 시간조차 없고."


 "시즈카쨩. 있잖아..."


 생각보다 쉽게 말을 해 주려는가보다 싶어 시즈카는 조용히 미라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표정이 다채롭게 움직인다. 미간을 찌푸렸다가, 입을 뻐끔거리다가. 내면에서 깊은 씨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럴 땐 끝까지 기다려주는 게 친구 된 자의 도리일 것이다. 터져나오려는 답답함을 마음 속 압축 프레스로 꾹 누르며 시즈카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 있잖아. 계약한 기간이 3개월이거든."


 "응."


 "3개월 동안 다른 걸 마실 수 없어."


 "...응?"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계약이라 함은 분명 광고의 계약을 말하는 것이고 기간이라 하면 광고가 방영되는 기간일 뜻하는 거겠지. 그런데 그거랑 다른 걸 마시는 거랑 도대체가 무슨 상관이라는 걸까?


 "이해 할 수 있게 좀 말 해주지 않을래?"


 "그게 있잖아. 원래 말 하면 안 되는데. 프로듀서씨가 계약은 되도록 따르는 게 좋다고 했거든."


 "계약은 따르는 게 좋다고? 계약에 우유만 마시라고 써 있었어?"


 "그게...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시즈카쨩. 이건 비밀이야. 프로듀서씨랑 이쿠쨩이랑 나만 아는 건데... 우응. 초코우유라도 먹고 싶다. 바나나 우유도! 왜 내가 광고한 우유는 흰 우유밖에 없는 걸까?"


 "그... 그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미라이. 계약 문제라면 뭐라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계약서에 우유만 먹으라고 쓰여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결국 그 말이 그 말인걸!"


 "내용을 말 해 줄 순 없는 거야?"


 "그건... 그러니까... 잘 기억이 안 나....."


 순간 미라이에게 딱밤 한 대를 날려 주고 싶은 충동을 시즈카는 겨우 억눌렀다. 그거 말을 거꾸로 돌리면 기억조차 잘 안나는 계약서의 뭐시기 내용 때문에 거의 한 달간을 우유만 먹고 살았다는 게 되어버리잖아. 자기가 던진 말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내용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라이는 흐느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즈카는 황당함에 입만 떡 벌린 채 미라이의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움직였다.


 "너 어디가?"


 "화장실. 배가 아파."


 "우유를 그렇게나 먹었으니 배가 안 아플 리가!"


 이거 안 되겠어. 이대로 놔두다간 정말 무슨 일이 터지고도 남을 거야. 하지만 뭘 어째야하지? 겪어 보지 못한 사태에 시즈카는 제자리에서 어떻게 상황을 타파해 나가야 하는지 전력을 다해 궁리했지만 백지 상태의 종이에 펜이 아닌 지우개를 들어봤자 지우개만 닳을 뿐이었다. 도리어 자신의 기운이 확 꺾여버리는 것 같아 연습실에 대 자로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저기. 시즈카쨩."


 우왓, 깜짝아! 시즈카는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연습실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미라이가 시즈카를 향해 손짓했다. 온몸으로 쿵쿵 뛰어대는 심장을 여전히 부여잡은 채 시즈카는 미라이에게 향했다.


 "나 아무거나 마실......"


 "아! 미라이쨩! 시즈카씨!"


 "우유! 하나만 이따가 마실까봐. 데헤헤-. 안녕? 이쿠쨩? 연습 나온 거야?"


 "응!"


 "이쿠. 우유 맛있니?"


 "시즈카씨도 마시고 싶으면 냉장고에서 언제든지 꺼내 먹어! 아! 미라이쨩! 나 오늘 마트에 스케줄이 있었는데..."


 가장 추천하는 물품이 뭐냐고 묻는 말에 ABC 우유라고 외쳤어! 와하-! 정말? 이쿠쨩 잘했어. 미라이쨩.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다른 것도 아니고 우유 광고 모델인걸-! 역시 이쿠쨩이야. 기특하다니까.....


 두 사람의 말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이쿠는 미라이에게 팔짱을 낀 채로 재잘재잘 오늘의 성과를 열을 다 해 보고하고, 미라이는 그런 이쿠의 말들에 정성스레 추임새를 넣으며 성과에 갈채를 보냈다. 대화에 신경 쓰느라 둘이 향하는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저 두 사람도 모를 거라고 시즈카는 생각했다. 아마 자신들이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인지 못했을 수도. 그러다 문득, 문을 빼꼼 열고는 어떤 말을 꺼내려던 미라이가 떠올랐다. 아무거나 마실... 이라고 했지. 이쿠가 오지 않았으면 우유를 외치는 게 아니라 필히 다른 마실 것 외쳤을 것이다. 으음. 오늘은 이렇게 넘어가버리더라도 분명 내일도 똑같은 루트가 반복될 게 뻔했다. 정말로 미라이의 말대로 3개월 동안 동일 브랜드의 우유만 마셔야 하는 계약을 이행해야만 하는 상태라면 이 계약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가혹한 계약이다. 미라이와 이쿠를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음을 시즈카는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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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잘리는 관계로 2편으로 나눠 올립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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