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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아스카, 18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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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02, 2018 16:40에 작성됨.

 정오의 미시로 카페, 식사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내부는 한적했다. 흐린 하늘 위 구름들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쉼 없이 물결치는 바다처럼 일렁이는 구름 떼 아래에서 남자는 니노미야 아스카였던 소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에쿠스테를 내던져버린 채 프로덕션을 뛰쳐나간 이후로 그녀의 짧은 단발머리에는 더 이상 에쿠스테가 붙어있지 않았다. 그날 이후 프로듀서를 먼저 찾은 건 아스카였다. 아스카의 일탈 이후 그는 의도적으로 아스카를 피하고 있었다. 아스카의 행방불명에 대한 경위서를 쓸 때나 아스카에게 프로덕션의 지시 사항을 전달할 때도 그녀를 대면하지 않았다. 표면상으로는 스트레스성 쇼크를 겪은 아스카의 안정을 위한 조치라고 둘러댔지만 남자 자신도 그것이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그는 변해버린 아스카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다. 아스카는 여태껏 그와 그녀가 함께 찾아낸 정답을 어째서인지 부정하고 있다. 완벽하게 증명된 그녀는 다시금 미지의 존재가 되려한다. 혹시 시키의 수상한 향수 때문일까? 확실히 그날 이후, 저항의 향기를 입고서 아스카는 완전히 변한 것 같았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비로소 깨달은 것처럼. 그녀가 과감하게 과거의 자신들에 맞설수록 그녀는 새로운 무언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에쿠스테를 포기하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려는 그녀를 보며, 프로듀서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아스카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블랙커피, 무리해서 마실 필요는 없어.”

 설탕을 넣지 않은 채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는 아스카를 보며 그는 습관적으로 설탕을 건넸다. 그가 알던 아스카라면 분명 쓸데없는 참견이야.’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티스푼 가득 설탕을 집어넣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아이 다루듯 하는군.”

“18살이라곤 해도 넌 아직 충분히 철없이 어리니까.”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아스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커피의 쓴맛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언제부턴가 소녀는 놀라울 정도로 우유부단해져버린 그를 두고 '변절자'라 불렀다. 한때 비일상 속에서 그녀와 함께 '니노미야 아스카'를 증명하던 그였지만, 이젠 자신이 밝혀낸 '니노미야 아스카'라는 존재가 다른 무언가로 변치 않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세상이 니노미야 아스카에 대해 원하는 것이 '에쿠스테'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라 믿고 싶었다.

프로듀서, 그런 점에서 넌...조금도 성장하지 않았어.”

  아스카는 보석이 달린 에쿠스테가 담긴 상자를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아스카를 데려온 날, 그녀가 눈을 뜨면 건네 달라고 치히로씨에게 부탁했던 물건이다. 명목은 망가져버린 에쿠스테를 대체할 새로운 장신구였지만, 실상은 그대로 있어 주길 프로듀서 자신의 마음을 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아스카가 그의 진의를 받아들였다면 분명 지금쯤 이 물건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휘감겨 빛나고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아스카의 오렌지빛 머리카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세공품이었기에 프로듀서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가올 이벤트에 쓰일 새로운 악세사리는 이제 주인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새 것을 주문...”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젠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에쿠스테와 소녀를 번갈아보며 그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그가 더욱 필사적으로 그녀를 움켜쥐려 할수록 그녀는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다.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니노미야 아스카는 점점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에쿠스테만 남은 채 텅 비어버린 아스카의 방처럼, 병 속을 빠져나가 사라진 과거의 향기처럼. 이젠 그 무엇도 그녀를 완전히 붙잡아 둘 수 없어 보였다.

에쿠스테가 없는 니노미야 아스카라니. 그거야말로 넌센스라고 생각하지 않아?”

“14살의 나라면 분명 그랬겠지. 하지만 프로듀서, 너의 니노미야 아스카는 이제 거기 있지 않아.”

아스카. 지금껏 우린 에쿠스테로 만든 길을 걸어왔어. 너나 나나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버렸다고.”

정말 그럴까? 그 속엔 한때 나와 네가 있었지. 그렇지만 이제 남아있는 건 너 혼자뿐이야.”

하지만 네가 이룬 것들을 봐, 여기서 뭘 더 가지려는 거지? 이미 반항아 놀이는 끝났어. 뭘 더 바라는 거야?”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래내가 변하면 그동안 네가 나를 통해 이뤄왔던 모든 것들이 부정되어 버린다고. 내가 다른 존재가 되는 순간, 그것들 역시 변해갈 테니까.”

  소녀의 말에 프로듀서는 정곡을 찔린 듯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14살의 소녀는 니노미야 아스카라는 아이돌이 된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에쿠스테를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처음엔 분명 그것이 그녀와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18, 에쿠스테가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게 자라버린 소녀의 눈에 남자가 강요하는 에쿠스테반항이라는 이름의 거짓말과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잘 팔리는 상품일 뿐, 그녀 자신이 아니게 되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악세사리인가, 반항과 저항을 노래하는 아이돌이 자신을 속이고 거짓을 몸에 두르고 있다니.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낌 없이 거짓을 소비한다. 그런 우스꽝스런 행렬의 맨 앞엔 자신을 망각한 옛 혁명 동지가 서있다.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낡은 자유는 새로운 족쇄가 된다.’는 그녀의 말을 들은 프로덕션의 여러 어른들과 담당 프로듀서는 의아해 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사람들은 그녀에게 열광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지금 이 순간, 아이같은 변덕에 따라 순조로운 매상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소녀의 목표가 톱 아이돌이 되는 것이었다면 그들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갑작스런 이미지 변화에 따른 아이돌 경영의 위험성은 이미 많은 선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회사의 입장에서도 공연히 다 된 밥에 초를 칠 필요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톱 아이돌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것을 위해 아이돌이 되었으니까. 한때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여겼지만, 이젠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점차 확신했다. 그 어떤 성공과 명예, 무대 위의 영광도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대신 이루고 있을 뿐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를 잘 만들어진 모조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을 무렵, 그녀는 자기 안의 본연의 니노미야 아스카가 온 데 간 데 없어진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스카, 그게 바로 지금까지의 세상이 원한 니노미야 아스카. 나나 너의 동료들 역시 그렇게 믿고 있어. 그런 니노미야 아스카가 더 이상 니노미야 아스카가 아니게 된다면. 넌 대체 뭐지? 뭐가 될 수 있다는 거야? 에쿠스테가 없는 넌 뭐지? 넌 그걸 설명 할 수 있나? 세상은 이미 에쿠스테가 없는 니노미야 아스카를 상상할 수 없다고!”

우리가 지금껏 정답이라 믿어 온 것들이 시간이 지나 더 이상 정답이 아니게 되었을 때, 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여전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지. 넌 내게 그렇게 해서 세상을 속일 수 있다고 말했지만, 넌 그저 자신을 속였을 뿐이야. 세상도, 니노미야 아스카도 그리고 너도 모든 것은 변하고 있어. 프로듀서, 우리가 누구인지 잃어버렸을 때 진정으로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야. 우린 끊임없는 질문들 속에서만 우리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있어.”

  지난 수년간 세상이 바라본 니노미야 아스카는 언제나 특별하고 멋진 스포트라이트에 감싸진, 화려한 허상. ‘잘 포장된 반항분칠한 저항앞에서 현학적인 수사들을 남발하는 조숙한 아이. 그렇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언제까지 그런 거짓이 나를 연기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언제부터 니노미야 아스카가 그런 꼭두각시 같은 녀석이었지? 그 모든 것은 지나간 시간들 위에 서있지만 그건 그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의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건, 지금 여기의 자기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한때 시대가 원하는 정답이었던 그녀는 또 다른 질문이 되고자했다.

이제까지의 니노미야 아스카를 부정하고서도 니노미야 아스카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난 그다지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내가 아는 니노미야 아스카는 운명과 타협하지 않아, 운명에 도전하지.”

그렇게 된다면 너는...에쿠스테를 가졌던 너의 과거와 싸우게 될 거야. 네가 걸어온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너를 가만히 두지 않겠지. 에쿠스테가 없는 너는 네가 그토록 부정하고 도망쳐 왔던 것 초라한 자신과 마주하게 될 거야. 그런 너의 본모습에 여태껏 너를 사랑하던 이들 역시 실망하고 돌아서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되었을 때, 누구를 원망해도 소용없어. 그 모든 일은 네가 자초한 것이니까. 그래도 넌 후회하지 않을 건가?”

  남자가 바라본 소녀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문득 전에 맡아보지 못한 매캐한 독기서린 알 수 없는 향기가 자신을 엄습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잊고 있었던 저항의 향기가 바로 이런 것일까. 자신의 품속에 더 이상 가둬둘 수 없는 18살의 니노미야 아스카를 보며, 그는 마침내 자신이 그녀에게 묶어 두었던 그 많은 에쿠스테들이 모두 끊어져버렸음을 인정했다. 니노미야 아스카는 멈추지 않는 질주이자, 정의되지 않는 빈 칸, 구속할 수 없는 바람, 무엇보다 자유로운 존재였으니까. 본래부터가 세상에 던져진 거대한 의문이었으니까. 그녀의 존재에 정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걱정마, 프로듀서. 어느 순간 어디에 있든 ,그 어떤 모습이라도, 나는 니노미야 아스카를 증명해 보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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