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니노미야 아스카, 18세 6

댓글: 4 / 조회: 1110 / 추천: 2


관련링크


본문 - 09-02, 2018 16:18에 작성됨.

 빨간 불이 켜졌다. 늦여름의 열기가 식은 도쿄의 밤거리는 짙은 어둠이 깔렸지만 교차로 위엔 여전히 수 많은 그림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프로덕션으로 가기 위해 매번 지나는 길이었지만, 항상 이 교차로의 신호는 꽤 길게 느껴진다. 차창 밖의 배기가스 섞인 후텁지근한 밤공기, 날이 흐린 게 머잖아 비가올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벌써부터 성미 급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우산을 꺼내들고 있다. 소나기일까? 아니, 어쩌면 일전에 일기예보에서 말한 태풍이 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한바탕 쏟아질 것에 대비하여 남자는 창을 올리고 에어콘을 튼다. 남자는 반대편 차선의 눈부신 전조등을 한동안 노려보다 초조한듯 핸들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후면경에 비친 소녀는 네온 사인에 휘감긴 챈 잠들어 있다. 시키의 말로는 '프루스트 효과'라는 것을 실험 해본 것이라는 데,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히 둘러대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키가 내민 '니노미야 아스카, 14'라는 기묘한 약병에서 그가 아무런 향기도 맡지 못할리 없으니까. 몇 번이고 숨을 들이켜 봐도, 여전히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시키가 처음부터 빈 병을 준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시키는 틀림없이 저항의 향기가 담겨있다고 말했다. 저항이라는 말이 향기롭게 느껴지기엔 그가 너무 변해버린 걸까. 분명 차 안의 오렌지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틀림없이 '니노미야 아스카'. 그러나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그녀의 짧은 뒷머리를 내키지 않는 눈빛으로 응시하더니 결국 짧은 한숨을 내쉰다 . 이래서야 '그가 알고 있던 아스카'는 여전히 행방불명이나 마찬가지라는 듯.

 아스카가 사라진 것을 알게된 건 프로덕션 내에 흩어진 에쿠스테들 때문이었다. 레슨룸 복도나 정원의 분수대 풀숲에서 아이들은 아스카의 에쿠스테들이 널브러진 것을 발견하고 치히로씨에게 가져왔다. 담당 아이돌의 분실물이라 보내 온 에쿠스테들 한 두개를 보고서 그는 아스카에게도 칠칠맞지 못한 구석이 있구나라며 직접 만나서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 무렵 급탕실에선 오전 레슨이 끝난 트레이너씨가 처음 보는 신입이 룸을 잘못 찾아왔었다고 자매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편에선 다른 부서의 프로듀서는 처음 보는 아이가 유령을 본듯한 얼굴로 자신이 누군지 알아 보겠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들 모두가 그녀가 아스카와 닮았다고 덧붙였지만 그 때만 해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무렴 에쿠스테가 눈에 띄는 아스카를 그들이 못 알 아볼리 없을테니까. 그러나 오후가 될 수록 잃어버린 에쿠스테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저녁 무렵엔 마침내 아스카의 콜렉션의 대다수가 그의 책상 위에 놓이게 되었다. 실수로 잃어버린 것이기엔 그 양이 너무 많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그는 무심코 흘려들었던 말들에 더욱 불안했다. 에쿠스테들을 가지고 기숙사 내 아스카의 방을 찾아갔을 때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살풍경한 방 안엔 그녀가 읽던 책, 그녀의 옷가지 모두 제자리에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니노미야 아스카는 없었다. 바닥엔 아무렇게 내던져진 가위와 난폭하게 잘려진 에쿠스테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메모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진 그녀였지만, 프로듀서는 이 방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았다

 니노미야 아스카를 만난지 어느덧 4. 그동안 자신만만하고 당찬 어린 소녀는 그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수 많은 역경을 헤쳐오며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데뷔 초 '철학적 반항아'라는 조숙하고 당돌한 아스카만의 이미지는 그녀를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데 주효했다. 특히나 교복을 입은 자신들과 별다를 바 없는 나이의 그녀가, 무대 위에 니노미야 아스카가 되어 에쿠스테를 휘날리며 혁명 투사로 변신할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반짝 관심을 끌다가 사그라들줄만 알았던 독특한 컨셉의 신예 아이돌이라 연예계의 가십과 달리 니노미야 아스카의 '에쿠스테 혁명'은 점점 달아 올랐다. 또래 아이들뿐 아니라 보다 다양한 연령대의 팬들을 사로잡으며 세상에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오래지 않아 니노미야 아스카의 '에쿠스테'는 하나의 반항의 상징이 되어 세간의 큰 인기를 끌었다. 형형 색색의 아름다운 색상과 빛나는 윤기를 지닌 아스카의 에쿠스테가 사실은 살아있는 본체라는 시시한 농담이 유행할 정도로 아스카에게 있어 에쿠스테는 또 다른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상에 오른 이후에도, 동료 아이들과 협연을 할때도 아스카는 자신만의 색깔로 절호조의 컨디션을 보여주었다. 그 역시 그녀를 최대한으로 서포트하면서 때론 프로듀서로 때론 혁명 동지로 그녀가 '니노미야 아스카'로 거듭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수 많은 이벤트와 콘서트를 뛰며 온몸에 피멍이 들고 손발에 물집이 잡힌데다가, 나중엔 심한 혓바늘의 통증에 꼬이기도 했지만 소녀는 그럴 수록 더욱 빛나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존재 증명'은 그야말로 진심이었기에 매번 공연을 거듭할 수록 자기 존재에 대한 해답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에쿠스테, 그 너머의 아스카는 뭐가 될 수 있을까? 그녀의 또 다른 가능성은 무엇일까? 그 무렵 그의 마음 속 니노미야 아스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향한 저항 그 자체였다. 그것 말고 그녀를 묘사할 다른 수식어는 생각나지 않았다.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앞유리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자 사람들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가게들은 입간판과 좌판을 들여놓느라 분주하다. 와이퍼를 작동시키고서 남자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려다 뒤를 돌아보고는 이내 그만두었 다. 요근래 프로듀서 방침을 두고 아스카와 자주 다투게 되면서 그들 사이엔 대화가 거의 없어졌다. 그때부터 그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뿌연 유리창에 비친 한심한 표정의 남자와 피곤한 소녀의 모습이 방울방울지면서 자꾸만 일그러진다. 잠든 아스카를 안아서 차로 옮길 때, '지금 이 상태의 아스카가, 네가 가장 데려가기 쉬울 것 같아서 말이야~'라던 시키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돈다. 이런 상황에서 감동적인 재회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사라진 아스카를 다시 만났을 때 어떻게 말을 건네야할지 난감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시키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 시키는 소녀와 남자 사이의 이상기류를 알아차린 눈치다. 정점에 이른 이후로 줄곧 내리막이었다. 물론 니노미야 아스카의 새로운 곡과 무대는 여전히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다른 소속사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새로운 컨셉의 젊은 아이돌들이 무섭게 성장하는 탓만이 아니었다. 그 사이 사람들은 열 몇살짜리의 반항을 따라 예전처럼 감동을 느끼기엔 너무 무뎌져버렸고, 당황한 채 길을 잃어버린 프로듀서가 그런 그녀에게 내놓은 최종적인 답은 결국 '에쿠스테'였다. 처음엔 프로듀서 자신 역시 지난날의 성공에 기대는 것이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지금의 방침은 방황하는 이 시기를 타개할 임시방편일 뿐 곧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여태껏 구축한 '에쿠스테가 멋진 잘 빠진 반항아'라는 아스카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방송이나 여러 굿즈 업체에서의 다양한 오퍼를 유치한 후, 프로듀서의 수완으로 니노미야 아스카의 '혁명'은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 되었고 매출은 순조로웠다. 그렇지만 자신이 추구한 가치들에 높은 값이 매겨 팔릴 수록 프로듀서와 아스카의 사이는 점차 깊은 금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니노미야 아스카, 그녀 자신이 이러한 점을 견딜 수 없어했다.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사람'에서 이제는 '금세기의 가장 잘 팔리는 사람'으로 변모한 어느 죽은 혁명가처럼 되는 것을 그녀는 거부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쥔 채 멈춰 서버린 그에게 그런 건 이제 상관 없었다고 느껴졌다. '혁명 놀이'는 끝이다. 그렇게 그는 나아가는 법을 잊어버렸다.

 누구나 손쉬운 삶을 꿈꾼다. 그런 점에서 그와 소녀는 이미 그런 삶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때 니노미야 아스카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있어 소위 말하는 그녀의 혁명은 끝이 났고 이미 빛바랜 구호와 기조들은 이제 먼지가 쌓였다. 영원한 삶이 없듯이, 영원한 혁명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달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껏 그가 바라 본 니노미야 아스카라는 소녀는 우상이 되어 죽은 듯이 살아 가기 보다는, 살아있는 아이돌인 채로 죽어 버리는 것을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맡지 못한 '저항의 향기'가 무엇을 꿈꾸게 만들었는지 그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차의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자신의 아이돌, 니노미야 아스카를 결국 언젠가는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진 않을까 두려워졌다. 그렇기에 다시금 알 수 없는 곳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그녀를 보며 그는 지금껏 더욱 필사적으로 그녀를 에쿠스테로 옭아맨 것인지도 몰랐다. 어느새 파란불로 신호가 바뀌었지만 그는 뒷차의 경적 소리가 울릴 때까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못해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차를 움직이지만 갑작스런 폭우에 차들은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야 프로덕션까진 한참이다. 멀리서 간간이 우레 소리가 들린다. 비는 더욱 거세질 것 같다.


2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