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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아스카, 18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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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9, 2018 15:43에 작성됨.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지 마는지, 자신의 그동안 만든 향수병들이나 살펴보는 시키를 보며 아스카는 화제를 바꿔 질문을 던져보았다. 오래된 약병들의 라벨을 보며 '이것도 아니고...저것도 아니고...'라며 혼잣말을 하던 시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음? 그야, 여기와는 다른 다중 우주에서 찾아온, ‘니노미야 아스카라고 자아 프로그래밍 된 단칸방의 침략자.” 

아냐.”  

그럼, ‘플라잉 에쿠스테종족에게 신체를 빼앗긴 채 소멸해가는 이름 없는 외계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 기억나는 거라곤 니노미야 아스카’라는 알 수 없는 암호문.”  

상상력을 그런 쪽으로 밖에 발휘할 수 없는 거야?”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실험실에 겁도 없이 제 발로 찾아와 자아를 찾아달라며 면접을 보고 있는 실험 자원자.”  

매드 사이언티스트 부분 빼곤 다 틀렸어.”   

흐음? 그럼, ‘에쿠스테가 없는 자신을 아스카라 믿지만 세상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오밤중에 찾아온 갈 데 없는...가련한 소녀’?”  

포기하도록 하지. 몇 번을 이야기해도 결국 너는 나를 니노미야 아스카로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결론이군. 마지막 대답은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야. 그리고 가련한은 빼라고.”

글쎄? 지금까지의 네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보다 더 적절한 정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 지난 시간들 동안 니노미야 아스카로 살아온 나의 삶과 모든 것이! 이렇게 쉽게 부정될 순 없단 말이다!"  

 소녀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는 통에 비커들이 하마터면 굴러 떨어질 뻔 했다. 시키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화내는 모습마저 아스카와 엄청 닮았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한때 '에쿠스테'라는 개성으로 자신을 증명한 소녀, 니노미야 아스카였던 그녀는 지금 눈물이 차오른 공허한 두 눈으로 시키를 바라보고 있다. 그럴때마다 시키는 소녀가 차고의 두드리며 자신을 찾아 왔을 때를 상기했다.

 무슨 일이에선지 기숙사를 박차고 나와  꾀죄죄한 몰골이 되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소녀, 그런 그녀에게서 에쿠스테를 하지 않은 지금의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소녀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치노세 시키는 그녀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고작 머리 장식 하나 하지 않았다고 니노미야 아스카를 못알아 볼리 없으니까. 시키 역시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소녀와 대화를 거듭할 수록 소녀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니노미야 아스카는 정말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비록 니노미야 아스카는 변했더라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니노미야 아스카들이 버젓이  TV 영상 속의 뮤직 비디오, 플라스틱 장난감, 브로마이드 포스터, 음반의 앨범 자켓 그 어디에서나 프로듀서와 동료들, 팬들을 열광시키며 실재하고 있었다. 예의 그 화려한 에쿠스테를 휘날리며. 그런 니노미야 아스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에쿠스테를 갖추지 않은 18세의 소녀는 더 이상 '니노미야 아스카'가 될 수 없었다. 설령 그녀가 더운 피와 부드러운 살을 가진  '진짜 니노미야 아스카'이더라도. 지난 4년 간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해답이라 생각해 온 '에쿠스테'에 의해 놀라울정도로 간단하게 소녀는 자신의 존재가 대체되고 말았다. 시키는 그제서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것 같았다.  

 “그럼...'니노미야 아스카'라는 의미가 너도 모르는 사이 에쿠스테에 의해 빼앗겨버렸고, 이제 너는 '무의미'해져버린 존재라고 하면 될까?  어떻게든 잃어버린 의미를 되찾기 위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미심쩍은 나 같은 녀석의 손을 빌릴 정도로  너는 필사적이지만 여의치 않고 말이지?"

 떨어지려던 비커잔을 붙잡아 테두리를 부드럽게 매만지던 시키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의 손 끝에서 유리 특유의 날카로운 공명음이 낡은 실험실의 적막을 깬다. 

"여전히 이 세상 한 구석에는 에쿠스테에 현혹되지 않는 누군가가 아직 있을것이라 넌 믿고 있어. 그런 사람을 찾아 자신이 여전히 니노미야 아스카임을 증명받고 싶어하지. 아마 나를 찾아온 것도 그런 도움을 바라고 온 것이겠지만.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내가 정말 네가 누구인지 밝혀 줄 수 있다고 생각해?  프로듀서? 아냐, 그 한심한 녀석은 지금 네가 여기 와 있는 줄도 몰라. 이미 에쿠스테들에 눈이 가려져 진짜 '니노미야 아스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도 않아. 동료들도 에쿠스테들이 자아낸 목소리에 귀가 멀어 너의 진짜 목소리를 를 귀담아 들을 수 없어. 팬들도 에쿠스테가 없는 니노미야 아스카는 상상할 수 도 없지.  사실상 모두가 니노미야 아스카를 잊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야,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상은 아무도 모르는 존재. 아마 지금의 너 자신 역시 그런 모습이 아니고서는 다시는 니노미야 아스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 소녀는 시키의 말에 문득 자신도 여태껏 에쿠스테에 크게 의지해왔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에쿠스테가 없어졌다고 해서 이토록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건, 그녀 역시 에쿠스테에 상당히 잠식되어 있었다는 증거일까. 시키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를 쏘아보았다. 

"그렇지만 아직 방법이 완전히 없는 건 아냐. 내가 아는 한 아직 니노미야 아스카의 본래의 모습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으니까.”   

 시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품 속에서 오래된 향수병을 꺼내들었다.

"프루스트 효과라는 말...들어본 적 있어?"

 뚜껑을 살짝 열였을 뿐인데도 소녀는 자신을 감싸는 약병 속에 담겨 있던 무척 진한 향기에 휘감겼다. 부드럽고도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선 이 향기는 소녀를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게 한다. 일순 다리가 후들거리며 휘청거렸다. 오랫동안 앉아있다 보니 맥이 풀려버린 것일까. 아냐, 그런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시야가 몽롱해지면서 세상이 빙글 빙글 돌기 시작한다. 서서히 눈이 감기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시키가 동공에 비쳐지는가 싶었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다. 시키는 소녀가 테이블에 얼굴을 박기 전에 능숙한 솜씨로 소녀를 부드럽게 안아 일으켰다. 향기에 취해 축 늘어진 그녀를 시키는 낡은 소파에 뉘였다.   

" 4년 전의 향기지만 여전히 짙고...거친, 반항적인 느낌. 네 안의 너라면...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향기지? "    

 빈 약병의 라벨은 '니노미야 아스카, 14세', 약효가 그렇게 강하진 않으니 아마 별 탈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너는 지쳐있었으니까. 약간의 자극에도 무너질 수 밖에. 평소대로라면 널브러진 너의 향기에 흠뻑 취해 곁에서 잠들었을테지만.  지금의 너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향기도 맡을 수 없는 걸, 대신... 시키는 잠든 소녀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니노미야 아스카를 잃어버린 소녀는 이로써 잠시나마 니노미야 아스카가 될 수 있겠지, 혼란스러워진 감각을 속이는 것까지는 시키의 힘이지만 그 다음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다. 아스카, 누구보다 존재 증명을 잘 해왔던 너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 존재 증명이란 결국 너 자신만이 끝마칠 수 있다는 것을. 

 오렌지빛 짧은 머리의 ​소녀에게 랩 가운을 덮어준 후 시키는 그 사이 수 십 통의 메세지가 와 있는 그녀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프로덕션 연락망, 기타 유닛 모임 등지에서 사라진 니노미야 아스카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를 이 지경으로까지 무너질때까지 내버려둔 것은 프로듀서의 태만과 무능한 프로덕션측의 책임이 크지만, 그래도 프로듀서는...프로듀서니까.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 시키는 짖궂은 표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 , 프로듀서! 그래, 나야 시키. ? 아스카? 냐하-! 너의 아스카라면 지금 내 옆에서 자고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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