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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아스카, 18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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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9, 2018 15:31에 작성됨.

시키는 녹음기를 잠시 멈추고서 소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확실히.......어느 정도 사견이 섞여 있다는 점은 인정하도록 하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설은 그러하다만.”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뭐랄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이런 건 증명할 수 없어~.”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네가 보고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 않나.”  

냐하~ 잘 모르는 걸 되는대로 믿어버리는 것도 편리한 방법이지. 그렇지만 그런 편리한 사고가 내겐 더 어렵단 말이야, 하다못해 조금은 더 합리적인 가설? 그런 게 필요한데. 흐음...너 혹시 에쿠스테한테 뭔가 원한 질만한 일이라도 저질렀던 거야? 에쿠스테에게 미움 받을만한 이유라도?”  

그럴 리가 없잖아. 애초에 그건 어디까지나 니노미야 아스카를 나타내는 하나의 기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속에 담긴 진짜 의미는 나였지.”  

흐음...그렇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부속품이 너를 대신해서 니노미야 아스카가 되어버렸다...그 말이지?”   

이해력 하난 빠르군. 그래서 잘난 천재 씨의 생각은 어떻다는 거지? 허공에 떠다니는 에쿠스테가 니노미야 아스카의 행세를 하고 모두가 그걸 믿고 있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그야, 그게 네겐 아니겠지만, 우리들에겐 그게 바로 니노미야 아스카니까? 오히려 그보다는 나는 지금 에쿠스테도 없이 자신을 니노미야 아스카라고 주장하는 내 앞의 소녀가 더 신경 쓰이는 데 말이지. 너는 아스카와 닮기는 닮았지만  아스카의 특유의 맛이랄까...냄새를 잃어버렸다랄까? 무미무취랄까? 그런 상태니까 말야 , 어쩌면 그 향기마저 에쿠스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려나?  

 소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여기 저기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별다른 특별한 향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부끄러워하는 소녀를 보며 시키는 개구쟁이처럼 웃는다.  

“비유적 표현이야. 비유적 표현~  

 소녀는 시키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에 약간 짜증이 났지만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시키는 항상 이런 식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구애받지 않는 제멋대로의 성격.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기프티드라는 굴레마저도 그녀에겐 별다른 짐이 되지 않았다. 단순히 그녀보다 몇 년을 더 오래 산 연륜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바다 건너 저 편에서 생활할 때의 관습이 몸에 밴 탓인지 이 곳의 사람들과도 많이 다른 행동과 사고방식, 그런 점이 때론 그녀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지만 오히려 시키를 시키답게 만든다. 그런 점들은 시키가 자신과는 달리 무척 성숙한 존재로 생각될 때도 있었지만 한 없이 어린 아이 같이 보이게도 만들었다. 소녀가 보기에 그녀는 정의 되지 않는 무언가로 남는 것을 즐기는 존재였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말을 굳이 끌어 오지 않더라도 이미 시키는 한 마리의 고양이 같았다. 어쩌면 시키의 그런 점이 소녀를 이곳에 오게 만든 걸까.  

 시키는 비커에 담긴 커피를 킁킁거리며 홀짝인다. 고양이 혀인가. 소녀는 평소에 가장 미덥지 못한 녀석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장 믿을만하게 느껴지는 아이러니를 애써 외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봐도 괴짜 같지만 확실히 머리 하난 비상하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소녀의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아마 시키가 금세 싫증을 느꼈다면 소녀도 이렇게 시시콜콜한 사연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약간의 고마움은 소녀가 비커 속 커피를 머금은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며 내뱉는 순간 사라졌다몇 번이고 물을 마셔 입가심을 해봐도 쓴 맛이 남아있다. 여태 마셔본 커피 중 가장 쓴 맛이다. 인상을 찌푸린 소녀를 보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시키는 낄낄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정말이지, 악취미로군 시키. 지독하게 쓴 커피야.”  

냐하하. 어쩜 입맛마저 진짜 아스카랑 똑같잖아! 너 점점 재밌어지는 걸?”  

테스트인가. 지금껏 이야기를 들은 너도 여전히 나를 니노미야 아스카로 인정하지 않고 있군.”  

그야,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만으로는 증명할 수 없으니까. 아무리 네가 아스카와 흡사하더라도 진짜 아스카라는 걸 입증하려면 좀 더 확실한 게 필요하다고 좀 더 아스카다운.....에쿠스테가 있다면 확실하지만, 네겐 그런 게 없지. 그러니까 대신에 좀 더 그럴싸한 가설을 말해보는 건 어때?”  

녹음기가 다시 작동된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소녀는 잠시 시키를 노려보다가 이내 포기한 듯 말을 이었다. 사무소를 나왔지만 별다른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 나이 대의 소녀가 늦은 시간까지 대도시를 정처 없이 방황하는 건, 대개 남모를 고민이 있거나, 갈 곳이 없거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녀의 경우엔 조금 특별했다. 아니 특별하다기 보단 이상했다. 자신의 일부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겨 갈 곳을 잃어버리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벽에 붙은 포스터, 지하철 역의 광고, 음반 매장의 잡지, 고층 빌딩의 미디어 파사드 거리 곳곳에 보이는 화려한 아이돌들의 모습이 머잖아 다가올 페스티벌을 예고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니노미야 아스카라 불리는, 에쿠스테가 떠다니고 있을 뿐.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라든가 매장의 음악들 속에서도 니노미야 아스카의 파트는 전혀 다른 목소리처럼 들렸다. 마치 녹음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의 위화감처럼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도쿄의 불빛들 아래 정처 없이 걷던 소녀는 도쿄 역을 향하던 자신이 발걸음을 돌려, 희미한 기억을 따라 오래된 차고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시즈오카로 가버릴 작정이었지만 번화가를 지나며 모든 자기 자리를 꿰어 찬 에쿠스테녀석을 내버려 두고 고향으로 도망치듯 가봤자, 잃어버린 시간들은 되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혼자서 무리라면 적임자에게 도움을 구하면 된다. 불가해한 사건을 함께 풀어나갈 자, 기묘한 일들에 맞서 포기하지 않는 자, 지금의 이상한 현실보다 더 기이한 세계를 알고 있는 자. 한 때 비일상으로의 문을 같이 열어젖힌 사람이라면 프로듀서...그 녀석이었지만, 고작 몇 년 만에 그 자식은 자기 담당도제대로 못 알아 볼 정도로 너무 겁이 많아졌고 그만큼 늙어버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런 이제 녀석이라면 시키, 그래 그 녀석 밖에 없겠지내키는 대로 기분에 따라 실종되고 마는 그녀가 있을법한 유일한 장소는 멋대로 개조한 차고. 화려한 아이돌로서나 천재적인 과학자로서나 시키에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곳이지만 그녀에겐 이런 곳이 프로덕션보다 더 아늑하게 느끼는지 대부분의 숙식을 여기서 해결하고 있다고 들었다. 아마 열의 아홉은 그녀가 행하는 알 수 없는 실험들이 기숙사 내에서 하기엔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기도 했을 테지만 말이다 

 문전박대라도 당하지 않을까 긴장했지만 의외로 시키는 소녀를 쉽게 맞아들였다. 문전에서 아스카!’라고 환하게 웃는 표정을 짓다가 가까이서는 예의 그 냄새를 통해  이내 여느 사람들처럼 경계하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대화가 거듭될수록 시키는 어느 정도 긴장을 푼 모습이었다. 품속에서 페퍼 스프레이나 몽키 스패너를 꺼내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어쨌거나 일본은 총기소유가 불법이니까. 뭐랄까, 미국에서 살 때의 버릇 같은 거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묵직하고 둔탁한 공구를 보고서 소녀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딱히 그걸 어떻게 쓰려했는가 묻지는 않았다. 대화가 거듭되면서 이따금 이상하네...자신을 아스카라고 주장하는 아스카가 아닌 아이에게서, 내가 아스카에게 마킹한 냄새가 나네.’ 라거나 흐음....여전히 이상하긴 하지만 뭐, 상관없나. 아무튼 새로운 실험체는 언제나 환영이야!’ 같은 괴상한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진 별다른 인체 개조라던가 약물 실험은 당하지 않았다. ‘너무하네~ 시키는 착실하게 뉘른베르크 강령을 준수하고 있다고~ 들어봐, 아직까진 아무도 죽진 않았어!’ 라고 해봤자 더욱 수상한 인상을 풍길 뿐이라는 걸 넌 아는지 모르는지.

그나저나 시키. 지금의 내가 아스카가 아니라면, 넌 나를 대체 누구라 생각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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