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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아스카, 18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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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8, 2018 03:24에 작성됨.

냐하하~ 마이 랩에 프레쨩 말고 다른 손님이 찾아 온 건 정말 오랜만인데?”  

“...........”  

그나저나....아까, 네가 한 말 모두 사실인거야?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라서 말이지.”  

 간이 실험실로 개조된 차고 안, 차분하게 침묵을 지키는 단발의 소녀 앞으로 비커에 담긴 커피가 담겨져 나왔다. 녀석은 오랜만에 재미있는 장난감이 생겼다는 듯 흥이 난 모양이다. 이치노세 시키, 소녀의 사무소 동료들 중 가장 수상한 녀석의 거처에 신세를 지게 되다니 평소라면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으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뭔지 모를 생물들의 박제 표본과 해골 표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지워진 약장들, 메스로 난도질 한 자국이 역력한 한 눈 없는 인체 표본과 표본실이라는 캐비닛 안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부스럭거림. 이런 것들은 가능한 한 무시하도록 하자. 여전히 신경 쓰이지만.   

, 그럼...니노미야 아스카.....아니, 아스카라고 주장하는 너. 다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겠어?”  

 시키는 손에 들고 있던 녹음기를 작동시킨다. 소녀는 입술을 깨문 채 비커 속 검은 액체를 바라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면 위로 누군지 모를 얼굴이 비친다. 어제까지만 해도 확실히 니노미야 아스카였지만, 이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그 얼굴. 한심하다. ‘존재 증명이라는 게 나의 영역 밖의 일이었다니, 우리가 이다지도 타인에 의존하는 존재였던가.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나약하고 무지한 존재.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나란 말인가. 피식 웃음 지은 소녀는 마침내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불과 몇 시간 전만하더라도 그녀는 이곳에 오리라 상상한 적도 없었다. 그만큼 그때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한숨 자고 나면 이 기분 나쁜 꿈일지도 모르는 일이 해결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물론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아침에만 해도 멀쩡히 작동하던 기숙사 방의 자동 도어 락이 열리지 않는 것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층 수, 호 수도 정확히 아침의 그대로였지만 어째서인지 카드가 인식되지 않는다. 아니, 인식하는 소리는 나지만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문을 힘껏 두드려보지만 여전히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는다. 욕지기가 치민다. 주먹만이 아니라 발로도 문을 걷어 차본다. 무생물에게마저 무시를 당한 기분이다. 이 방은 그 주인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어쩌면 이 성역마저 에쿠스테녀석에게 빼앗긴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민다. 놈은 어디까지 날 우롱할 셈인가.   

이런 바보 같은....열어.....문 열어! 거기서 나와! 나오라고! 거긴 내 방이야!”  

 무심하리만치 인기척이 없는 방 안. 불은 꺼져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던 신성한 공간은 어이없이 함락되어버린 건가. 갑작스런 복도의 소란에 몇몇 아이들이 문을 열고 이쪽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문득 머쓱해진 그녀는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떡할까. 관리실에 의뢰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할까. 그렇지만 이미 그들에게 있어 니노미야 아스카가 아닌 소녀에게 니노미야 아스카의 방을 열어줄 리는 만무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오전 내내 시달리고도 아직도 인정할 수 없었지만 소녀는 서서히 자신이 더 이상 니노미야 아스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좋든 싫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더욱 화가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젠장, 시즈오카로......돌아갈까?’  

 고작 떠다니는 에쿠스테에 이름을 빼앗겨서 도망치듯 귀향해야한다니 정말이지 넌센스한 일이지만 소녀는 이런 생각이 결국은 마지막 선택지가 되지 않을까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미 그 녀석은 소녀에게서 너무도 많은 것을 아주 간단하게 가져가버렸으니, 다음은 또 어떤 것을 잃어야만 하는 걸까.  

후미카 언니, 그래서 꼬발료프 아저씨는 어떻게 된 건가요?”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났더니 코가 없어져버린 8등관 꼬발료프가 당황한 것도 잠시, 페테르부르크의 거리를 방황하다가 자신의 코와 꼭 닮은 코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초라한 자신의 행색과 달리 그 코는 커다란 깃을 세운 금실로 수놓은 정복에 양가죽 바지를 입고, 5등관 깃털 모자를 쓴 채 허리에는 대검을 찬 모습이었죠. 멋대로 사라져버린 자신의 코에게 돌아와 달라고 사정하던 8등관 꼬발료프는 5등관 행세를 하는 자신의 코에게 보기 좋게 조롱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코한테 깝치다 큰 코 다친 거네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하루의 스케줄이 끝난 저녁의 기숙사 내 홀 한쪽에서 후미카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후미카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읽어나가는 이야기에 푹 빠진 아이들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다.  

이번에 고른....영화는.....‘바디 스내쳐(신체 강탈자의 습격)’....이라는 오래된....영화야.”  

어라, 제법 흥미로운 제목인 걸?”  

으응, 맞아...카나데 언니......외계인들이....지구에 잠입해서.....사람들의 몸을.....빼앗아서 이....행성을.....장악한다는 이야기야...외계인들에게 몸을....빼앗긴....사람들은.....그 존재가....영원히 사라져 버려....”  

....후히....연식이 제법 고전이지만.....코우메가 골랐으니 분명....명작이겠지...후힛.....”  

 다른 한 편에는 영화감상회인가 평소대로라면 소녀 역시 그들 곁에 끼어들어 이런 저런 말들을 던졌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무심히 그들을 스쳐지나가는 와중에도 소녀는 혹시나 에쿠스테녀석을 맞닥뜨리게 될까봐 주변을 살폈지만 어디에도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자기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에쿠스테를 잃어버렸다고 분실물을 신고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그것들의 주인은 더 이상 내가 아닐 테니까. 소녀는 프로덕션을 나왔다.   

 늦여름의 도쿄는 사실상 초가을로 접어들었다. 한풀 꺾인 무더위를 따라 낮의 길이도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아직 밝은 저녁인 시간대지만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하나 둘 별들이 떠오르고 있다. 낮 동안 곤히 잠들어 있던 네온사인이 부리나케 켜지고 도시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 이 별은 두 번째 아침을 맞이한다. 거리엔 쌀쌀한 기온에 긴 소매 옷을 입고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들의 틈에서 짧은 트레이닝복 차림의 단발 소녀는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마치 온 세상에 배신당한 기분으로.

 트위터나 라인, 인스타그램의 사진들이나 포털 사이트의 소식들에서 니노미야 아스카의 지분은 역시 온통 플라잉 에쿠스테가 장악하고 있다. 동료들의 틈에서 떠다니는 에쿠스테는 이제 소녀를 맥이 빠지게 만든다. 오래된 물건에는 영혼이 생긴다는 말을 이전에는 믿지 않았지만, 이젠 마음을 바꿔야 하는 걸까. 지극히 비논리적이지만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이 괴현상 앞에서 소녀는 자신이 마음 깊은 곳까지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다. 이 별에서 태어나 자란지 십여 년 남짓, 그 동안 쌓아온 업적들이랄 것은 대단치 않지만 분명 소중한 것들이었다. 유년시절의 추억들, 처음으로 철학 서적을 접하였을 때의 충격, 남모르는 세상의 비밀을 엿본 것 만 같았던 시절들과 프로듀서를 만나 아이돌이 되고, 영혼을 공명하는 맹우들과의 교감까지.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작은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 또박 적던 한 편의 서사시와 같았던 소녀의 이야기는 이제 자신도 모르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른 장르로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만 같다좋았던 기억들과 아름다웠던 모든 것들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서 소녀는 어느새 에쿠스테의 꼭두각시가 되어 살아오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언제부터 에쿠스테를 수집하고 착용하는 취미가 생겨버렸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확실히 그것은 그녀에게 남들과는 다른 특별함을 느끼게 해주는 마법이 있었다. 가면을 쓴 사람에게 전에 없던 용기가 샘솟듯이 에쿠스테는 소녀에게 있어 또 다른 가면을 쓴 기분이 되게 해주었다. 무대 위에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빛날 때마다 객석은 팬 라이트의 물결을 이룬다. 그 모든 환호와 감동의 순간들마다 소녀의 머리카락은 색색의 에쿠스테와 함께였다. 그래서인지 무대에서 내려와 에쿠스테를 떼고 짧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되돌아가는 순간, 소녀는 아이돌에서 평범한 14살 짜리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발을 치렁거리는 니노미야 아스카가 점점 유명해질수록, 점점 주변 사람들마저도 에쿠스테가 없는 그녀를 뒤늦게야 알아보았으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는 없겠지만.   

 니노미야 아스카의 페르소나가 점점 커질수록 그녀는 종종 자신도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많아졌다. 에쿠스테를 탈착하는 아주 사소한 행위로 일상과 비일상이 교차하는 것 같은 묘한 어색함이 그때부터 그녀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날이 힘을 키우던 에쿠스테는 마침내 생명을 자아와 가지게 되었고 그리고 마침내 소녀의 정체성을 빼앗고 말았다는 걸까. 자신이 기른 개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잠깐, 잠깐. 너 설마 그 말을 진심으로 하는 건 아니겠지? 생명을 가진 에쿠스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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