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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12, 2018 18:28에 작성됨.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곳에는 나무가 있다. 광택이 더해진 갈색의 나무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곡선으로 역할과 모습을 갖추고 있다. 쏴아아....나뭇잎을 타고 쏟아져오는 숲의 바람소리처럼 카페의 노랫소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카페의 한 켠에 앉아있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손님은 아직도 몸의 열기가 식혀지지 않았나보다. 부채질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왼손에는 단추가 몇 개 풀린 상의가 잡혀있다. 옷 속에 꽉 차있던 끈적이는 열기를 조금이라도 더 빼내기 위함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주위의 시선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 와중에, 드러난다. 하얀 손으로 하얀 셔츠를 잡아당기는 것만큼, 하얀 복숭아의 속살이 드러난다. 드러나서, 더 이상 하얗다고 생각할 수 없을 때까지 드러난다. 그것을 바라보던 누군가의 입술이 충동적으로 염원이라도 하듯 보인다.라고 달싹였다. 그 말대로 보였다. 아주 잠깐, 아주 조금, 아주 살짝이었지만 보였다.

투명한 하얀색 아래 어른거리는 옅은 홍조. 그것에 달라붙은 끈적거리는 과즙에 케이트는 연신 덥다는 영어를 말하며 몸을 비틀었다.

 

툭툭, 얼굴에서 떨어져 흰색 상의를 절제없이 물들이는 땀방울이 겨우 그쳤다. 부채질도 몸비틀기도 모두 지쳐서 의자에 걸린 듯이 앉아있을 때였다.

 

“What did you see?”

 

발음이 거친 느낌으로 끊어지는 영국식 악센트가 고개를 들어 서있는 남성을 향해 날아갔다.

 

손님의 눈동자를,”

 

옆에 누가 이 문답을 보고있었다면, 와 진짜 뻔뻔하다.라고 감탄도 했겠지만 그것은 두 번째였을 것이다. 가장 먼저 카페 오너의 담담한 무표정에 경악을 했을 것이다. 손님을 받을 때부터, 남자로서 눈이 가게되는 곳으로 눈동자를 내린 지금까지도 그 표정은 가면이라도 씌운 것 같았다.

 

eyes는 여기가 아닌데요?”

 

그랬다고치죠.”

 

대화를 이어가봤자 손해를 볼 사람이 누군지는 서로에게 뻔했기 때문에, 오너는 적당히 얼버무리고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아 케이트의 관심을 돌리려고했다. 어느 쪽의 의도대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케이트는 음식 쪽으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따뜻한 밀크티에, 스콘, 딸기잼, 클로터드 크림, 그리고...”

 

일본치고는 나름대로, 런던 출신의 유학생에게도 기대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오랜만에 본 크림티에 대한 기대는 아이가 선물꾸러미를 풀어보듯이 하나하나 쟁반 위의 메뉴를 세는 모습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메뉴를 세어가다가, 보통의 크림티에서는 찾을 수 없는 메뉴가 마지막으로 하나 더 붙었다.

 

“Blacktea icecream.”

 

그건 크림티 이외에 따로 주문한 것이었다. 왜 시켰느냐 하면 당연히 더우니까 시킨거긴 한데... 본래 크림티는커녕 영국에도 없는 메뉴인지라, 여름한정메뉴에 대한 기대감보다도 묘한 의구심이 눈에 띄었다

 

, 아이스크림부터 드시는건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스크림의 스푼부터 집어드는 모습에 카페 오너는 표정과는 대조적으로조금 놀랍다는 내용의 문장을 사용했다

 

차부터 마실까 생각도 했지만은... 녹아내리려는 아이스크림이 안타깝네요우.”

 

그러십니까라는 미소를 건네고서 오너는 자리에 앉았다. 느긋하게 잡지를 들어 방금 전까지 읽던 부분을 뒤적거리는 오너와 대조적으로 케이트는 숟가락을 들고서 아이스크림과 대치중이었다. 스콘, 딸기잼, 클로터드 크림, 밀크티.왈츠의 4분의 3박자와도 같은, 크림티의 4박자를 어긴다라는 건 무언가 알 수 없는 찌릿한 기분이 든 듯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라는 의구심이 잠깐 들었지만, 그녀는 여름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을까.라는 합리화를 되뇌였다.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쉽게 숟가락에서 떨어져나오질 않아, 뒤집어서 쯥- 빨아냈다

 

“Ummmmm......”

 

차가움이 자극을 주고 홍차 특유의 쌉싸름하면서도 오묘한 향이 목구멍까지 간지럽히는 기분. 입에 넣어 이로 씹었을 때 이의 끝에서 살짝 느껴질 정도의 쫄깃함이 있지만,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깔끔하다.

 

“Delicious!”

 

약간의 긴장을 타고서 만난 홍차 아이스크림은 예상 외로 만족스러웠다. 더위가 아이스크림을 따라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서늘한 공기가 옷 속으로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더위와 긴장이 풀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코끝에서는 그리운 홍차의 갈색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무식하게 단 맛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향을 극대화했군. 본래 밀크티보다 약간 과장된 감이 있기는 하지만, ...나쁘지않다

 

의구심이 만족으로 바뀌자, 도자기 그릇과 입술 사이를 오가는 스푼이 훨씬 더 경쾌하게 움직였다.

 

빳빳하게 식은 입안에 뜨뜻한 거품의 홍차가 닿기 시작하자,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런 감각은 예상치 못했지만, 재밌다. 다만, 향이 부족하다. 섣불리 판단하기보다 케이트는 한 모금 더 마시는 것을 선택했다

 

잠깐 흐려질 듯했던 표정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빙긋 미소지었다. 비행기로 12시간. 그만큼 멀어져있던 고향이 여기, 도쿄의 카페에서 조금 가까워졌다. 만족감이라고할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동. 한 방울이지만, 파음을 만들어내는 잔잔한 감동. 가슴 안으로 차오르는 온기가 비단 밀크티만의 것은 아니다. 또 그러나, 이 밀크티가 없었더라면 시작되지도않았을 차오름이리라. 한 모금, 또 한 모금. 입으로, 입으로 마신다.

 

첫 번째는 네가 누군지 알고 비로소 만났음을 실감한다.

두 번째는 맛을 느낀다.

 

뜨뜻한 우유의 고소함과 그 뒤의 진하고 풍부한 풍미의 홍차향, 그것은 말차와 다르다. 깊이 발효된 향. 목을 타고 흐르는 거품의 부드러움이 편안함을 배가한다. 맑고 깔끔하진 않지만, 약간은 쌉쌀하면서 풍부한 향이 배부른 기분을 더해준다. 안도감에 깊이 숨을 내쉬는 코 끝에서 피어오르는 그리운 향을 따라 여러 가지 일이 떠오른다.

 

일본으로 오기 전의 삶의 순간순간에 빠짐없이 들어있던 것이 밀크티고, 일본에서는 그토록 찾아 해매던 것이 이 밀크티이다. 케이트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수많은 삶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밀크티을 찾아헤매다가 생겼던 일이다. 편의점에서 밀크티를 자칭...아니, ‘사칭!’하면서 마치 영국을 모욕하는 듯한 그 단물들에 속았던 일. 그 후에 프로덕션의 모두가 일주일 내내 케이트 앞에서는 절대로 편의점 홍차를 마시면 안 된다는 암묵의 룰이 생겼을 정도였지

 

그 때의 일이 떠오른 이유가 결코 불쾌함이 생겨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잠깐 웃을 수 있었을 뿐이다. 홍차에 녹아 풀어지는 우유의 거품처럼 다 흘려버리고서, 케이트는 컵을 잠시 내려놓았다. 밀크티는 만족스럽지만, 아직 전부 다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왜냐면 아직도 스콘과 잼, 크림이 남아있으니까. 이것들마저 홍차와 맞추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좋은 크림티라고 할 수 있다

 

광택 어린 접시 위에 두툼하게 놓인 스콘을 한 번 바라본다. 그 옆에는 크림과 잼이 있다. 통은 주먹으로 감싸면 쏙 들어가 보이지않을만큼 앙증맞은 크기다

 

양 손에 각각 스콘과 나무칼을, 아 이 나무칼이 생각보다 높은 포인트였다. 왠지 친숙한 느낌이라 편한 마음이 든달까. 나무칼을 집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몇 안 되는 기회, 얼마만의 크림티. 그럴 때일수록 신중하게 음미해야한다. 의구심을 가졌던 처음과 다르게도, 케이트의 얼굴은 참을 수 없는 기대감을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아이스크림과 밀크티의 만족감이 곧장 기대감으로 이어진 것이리라. 스콘 속으로 나무로 된 나이프를 밀어넣어 움직이는 동작은 그 기대감을 견딜 수 없어 몸을 이리저리 꼬는 것과 같기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스콘을 자르는 중에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그 중 무릎에 떨어지는 큰 조각을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맛이 느껴졌다. 식감은 스콘답게 조금 포슬포슬하고 뻑뻑하다. 씹을수록 슬며시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고소함. 조그만 조각을 떼어먹으려니, 당장 먹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스콘을 먹고싶은 건 아니었다.

 

잼과 크림이 생각났다. 만약, 크림과 잼에 젖은 스콘을 아앙 크게 입에 넣는다면...제대로 생각을 끝맺기도 전에 꿀꺽- 침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읍...!

 

그 소리가 생각보다 큰 나머지, 케이트는 자기자신에게 놀라 입을 가렸다. 카운터 너머에서 장난기가 묻은 시선이 느껴졌지만, 거기에 대해 따질 여유는 지금 없다

 

크림티 때문에 봐준다...’

 

눈 앞에 크림티가 있잖아

두 쪽으로 잘린 스콘을 내려놓고 잼 쪽으로 칼을 옮긴다. 잼은 젤리처럼 썰린다. 푸딩처럼 파르르 떨리기까지 한다. 프슬프슬, 부스러기가 떨어지려는 흰색 속산 위에 투명한 광택이 어린 잼을 얹는다. 그 다음은...클로터드 크림이지...

 

어라? 콘웰?”

 

크림을 잘라올리려는 찰나에,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Excuse me?”

 

케이트 씨는 런던이 고향이라고 알고있었는데...”

 

, 그러고보니하고서 케이트는 생각해냈다, 잼 위에 크림을 얹는 건 콘웰 지방뿐이지. 허나 그렇다해도 조금 의외였다. 이렇게나 잘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 진짜 영국분에게 크림티를 내놓아 팔 정도니까요... 잘 알고있어야겠죠.”

 

“...그쪽인가요.”

 

크림티와는 달리 영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에 미묘하게 만들어진 미소로 잠깐 오너를 응시했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일관성 넘치는 걸. 남을 놀려먹는 거랑 장사하는 것말고 다른 부분에서도 눈치가 좀 빠를 수 없나. 투정을 좀 부리고싶은 마음으로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마마의 쪽이 콘웰 출신입뉘다.”

 

, 확실히 저번에 스타게이지 파이도...”

 

그런거죠.”

 

크림마저 다 올린 스콘을 베어물었다. 가장 먼저 씹지도않았을 때, 위에 올려진 잼의 단맛으로 시작하지만은 그게 전부는 아니다. 왼손으로 떨어지려는 부스러기를 받치며 조곤조곤 턱을 움직였다. 한껏 우물거릴수록 스콘의 고소한 맛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소리도 없이 뻑뻑하게 입 안을 압박하는 스콘 속에서 토독토독 소리가 들린다. 딸기잼의 씨앗이 연달아 터지는 폭죽처럼 소리를 내며 상큼한 단 맛을 퍼트린다.

 

"우읏.."

 

잼만 넣는다면 너무 달아서 질색했겠지 그래서 크림이 필요한거다. 클로터드 크림, 그것이 버터에 가까워보일 정도로 단단하고 단맛이 빠진 고소함이 단 맛이 스콘을 해치지 않을만큼 적당히 눌러주니까.

먹다가 목이 메일 듯하면 밀크티를 다시금 기울인다. 아이스크림보다는 향이 적고 우유의 고소함이 더 깊다. 온기가 입 안의 스콘에 스며들어 촉촉해졌을 때.... 케이트는 으음~ 신음을 흘리며 몸까지 비틀며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을 표출했다.

 

두 쪽으로 나누어서 한쪽당 2입씩. 이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 대해 체면치레하지도 않고서 스콘과 밀크티의 왈츠를 반복했다.

 

"..."

 

어른 주먹보다도 작은 스콘이었지만, 그것을 끝마치고서 케이트는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뱃속이 행복으로 꽉찬 기분이었다.

 

“Excellent...”

 

미슐랭 스타도 아깝지않다는 칭찬에 수수한 감사인사로 화답하며 쟁반을 치웠다.

 

“Hmmmm....”


약간 아쉬움이 묻어나는 소리로 메뉴판을 응시하던 케이트는 이내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특별하게 써놓을 것 없는 인사를 나누고, 케이트는 카페의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종소리의 여운마저 가라앉고서도 한동안, 오너는 그녀가 나간 문을 응시했다.

 

케이트가 고즈넉하게 카페를 뒤로하고 덥디 더운 도시 속으로 걸어들어갈 때쯤에서야, 오너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


약속대로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본래 생각대로라면 비정기적으로 올릴 옴니버스식 연재작이 되었겠지만, 절필작이 되었네요.

잠깐 절필의 연유를 말하자면

창작토막글에 대해 언쟁에 가까운 지적을 받았던 일이 한 달...정도 전에 있었고, 그때를 기점으로 제 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되었습니다. 분명 원인은 글의 의도를 제대로 살리지못하고 밀어붙이기만한 저에게 있었고, 제가 굳이 문체를 확 바꾸거나 특별하게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평소 글 스타일 중 하나가 쓰기 좀 곤란한 부분은 분위기를 타고 얼버무리듯이 넘겨버리는 점이 강한데, 이 점을 다시 생각해보니 글을 쓰는게 아니라 사기행위를 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생각을 거치고나니 글을 쓰는 일에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여태까지 제 글을 봐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좋은 글이 되지못해 안타깝고 죄송스럽습니다.

혹시라도 천운이 된다면, 사기치는 후고링이 아니라 글을 쓸 줄 아는 후고링이 되어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여러분, (적어도 창작판에서는) 안녕히계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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