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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Tokyo Gh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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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14, 2018 06:22에 작성됨.

케이트는 오늘 털실이 담긴 한 잔의 잉글리시 가든을 마신다. 혹시 자신의 집 앞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던 너른 녹지가 그리웠던 걸까. 연녹색의 잉글리시 가든은 도쿄와 어울리지 않게, 또는 어울리며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 케이트는, 그것을 바라마지 않는지 잉글리시 가든이 든 잔을 아름답게 기울여 마신다.


가벼운 여행. 케이트가 일본에 온 것은 분명히 가벼운 이유였다. 일본의 문학은 분명히 서양 문학사에서 끗발을 날리고 있는 영국 문학과는 다른 동양의 미가 있었으니까. 혹은 이시구로 가즈오가 그녀를 이곳으로 인도했을지도 모른다. 케이트 그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더 이해하기 위해서, 더 알아가기 위해서 온 여행이랄까.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던가. 어느 것이든 좋았다. 무엇이었던 스무 살의 문학도에 불과했던 케이트가 이곳에 온 것은 그런 가벼운, 조금 심하게 말하면 시시한 이유였다. 그래도 좋았다. 그때는 떠날 수 있었을 테니까.


케이트가 그 남자를 만난 것도 가벼운 우연의 산물이었다. 너무나 가벼워서 너무나도 어이없어했던 케이트의 표정. 한순간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스무 살의 외국인 여성으로서 당연한 표정. 하지만 이내 남자의 진지한 표정과 열정적인 강론에 케이트는 묘한 감동을 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상한 양복 차림을 한 남자의 제안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오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라. 케이트의 허락을 본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감성적으로 되어, 감성적인 제안을 받아들인 케이트. 그 순간부터 케이트는 떠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가볍게, 또 가볍게 지나쳐버리게 되어버린다.


케이트가 허락한 일은 일본의 아이돌 일. 이백 명이나 되는 아이돌들의 틈에 끼어 경쟁하고, 울고, 때로는 아무리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보컬 연습을 하는 나날. 한 장의 그림과 한 장의 금색 테두리가 되어 사진으로 남게 되는 나날. 그래도 케이트는 좋았다. 자신을 감성적으로 만든 그 남자는 아직도 자신의 옆에 남아있었으니까. 영원히 지속하는 오필리아에 대한 햄릿의 사랑 같다고나 할까. 별 진전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충동적인 감성을 꽤 오래 가지고 있었다. 그래야 사랑이라는 듯이, 그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기술하지 않았던 감성이라는 듯이.


케이트는 시간이 날 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좋아했던 것은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가벼운 여행이 어느샌가 무거워져 버린 자신이 투영되어서였을까, 몇 번이고 읽어 책이 너덜너덜해져도 케이트는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왜 그 책을 읽는 거냐고 묻는 남자의 말에, 케이트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한마디만을 했다. 사랑. 어쩌면 그 안에는 케이트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랑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그저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도쿄, 도쿄, 도쿄. 그것이 케이트가 그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라고.


가끔 일정 상으로 도쿄를 벗어날 때가 되면 케이트는 있는 대로 창을 내리고는 창밖으로 느껴지는 바람의 상쾌함을 느끼며 환한 미소를 짓고는 했다. 일정 상으로 다른 곳으로 가 본다고 해봐야 요코하마나 치바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케이트는 미소 지었었다. 도쿄가 수용소 같았던 걸까, 운전하고 있던 남자는 백미러로 케이트의 표정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도쿄는 케이트라는 가벼운 여행객의 발길을 잡아놓은 도시이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 남자는 더 생각하려다 그만둔다. 그러면 괜한 무게만 늘리게 될 테니까. 지금은, 최소한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거야.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를 조금 더 빠르게 몰았다.


치바에서 돌아왔던 날이었던가, 밤늦게 사무소로 돌아와 퇴근할 준비를 하는 남자에게 케이트가 살짝 다가와 오늘 한 잔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케이트가 술에 약한 것을 알고 있는 남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괜찮겠냐고 물었지지만, 그녀는 한 잔 정도라면 괜찮다는 듯이 빙긋 미소를 짓는다. 어차피 요 앞 일주일간은 케이트의 레슨 말고는 잡힌 일정도 없기에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그러자고 한다. 괜찮은 바가 있다면 알아두는 것도 괜찮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며, 남자는 케이트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옮겼다.


바에 들어와 케이트가 시킨 것은 가벼운 차. 뒤따라 들어온 남자에게는 식전주를 기념해 애플 사이다 하나를 권한다. 애플 사이다, 영국에서는 꽤 흔한 가벼운 과일 탄산주라고 하던가. 케이트의 권유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얼마 차이나지 않는 시간 안에 바텐더가 애플 사이다 한 병을 내민다. 잔에 가득 따라 한 잔 마시는 남자. 상큼하고 가벼운 애플 사이다의 맛이 났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야 가볍게 한 잔 마시자고 한 자리였고, 술을 전혀 못 하는 케이트도 잉글리시 스타일 블랙 티로 가볍게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그저 가벼운 자리.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잉글리시 가든 플리즈, 블랙 티를 다 마신 케이트의 주문에 바텐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분주하게 움직여 진과 애플 주스, 그리고 엘더플라워를 섞은 영롱한 빛깔의 칵테일을 내온다. 케이트가 저런 칵테일을 알고 있었던가, 조금은 당황한 남자의 시선을 뒤로 하고 케이트가 바텐더가 내온 음료를 한 모금 마신다. 상큼하면서도 가벼운 맛. 케이트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쳐다본다. 왜일까, 그 미소에는 호숫가의 오필리어처럼 슬픔이 담겨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같이, 금방이라도 빠져버릴 것같이.


연녹색의 잉글리시 가든에는 은은하게 케이트의 모습이 비친다. 그러고보니 저, 털실이라고 쓸 수도 있는것 같아요라고 케이트의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털실은 혼자 움직일 수 없다. 털실은 미궁에 갇힌 영웅을 구해내기 위해 필요한 것. 하지만 영웅이 털실을 잡을 생각이 없다면, 털실은 그저 미궁 속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저 자신을 사랑해 줄 한 사람의 남자를 위해서, 소중하게 자신을 사용해줄 남자를 위해서. 수용소에 갇힌 케이트처럼, 털실도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남자는 알 수가 없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을 본 케이트는 살짝 미소 짓고는 자신의 칵테일에 얼음을 집어넣는다. 조금 더 차가워질 필요가 있다는 듯이, 조금 더 머무를 필요가 있다는 듯이.


케이트는 오늘도 털실이 담긴 한 잔의 잉글리시 가든을 마신다. 혹시 자신의 집 앞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던 너른 녹지가 그리웠던 걸까. 연녹색의 잉글리시 가든은 도쿄와 어울리지 않게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 케이트는, 그것을 바라마지 않는지 잉글리시 가든이 든 잔을 아름답게 기울여 마신다. 빈 잔에는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용소에도 달이 떠오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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