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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digm Shift - 1

댓글: 2 / 조회: 1008 / 추천: 4



본문 - 06-29, 2018 23:47에 작성됨.

*앞서 올라온 글 Melty Fantasia Code:0의 설정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작중 시기는 마더 군림으로부터 3개월이 지난 시점입니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요즘 일어난 그런저런 일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눈앞에 있는 하얀 벽 때문이었다. 침대와 화장실과 작은 책상이 전부인 좁고 살풍경한 방. 침대 맞은편에는 굳게 닫힌 철문. 구석에 달린 감시용 카메라. 하얗지만 영락없는 감방이었다.
 왜 자신이 지금 여기에 있는지는 열심히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그 로봇들에게 잡혀왔을 뿐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주위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랬다.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그 로봇은 말했다. '당신들은 마더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재교육이 필요합니다.'
 별로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다. 시민번호 970225-2076502 키사라기 치하야가 해야 할 일은 노래가 아니라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3번쯤. 그렇게 마더에게 거역한 결과, 사상재교육을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문에는 흔히 떠오르는 쇠창살조차 없다. 이 방에 있는 구멍이라곤 급식용 구멍과 천장에 달린 환풍구뿐이다. 그나마도 너무 작아서 손이 들어갈까 말까다. 어제는 환풍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려고 덮개를 떼어냈다가 하루종일 수갑을 차고 있어야 했다. 설령 탈출한다 하더라도 손목에 감긴 팔찌가 내 위치를 마더에게 알려줄 것이다. 카메라도 계속 돌아가고 있고. 이젠 정말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작은 새였다면 저 환풍구로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옛날에 불렀던 노래처럼.

 "파랑새... 만약 행복이..."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에겐 날개가 없다. 고독이라면 진작에 사라졌고, 지금은 자유마저 빼앗겼다.
 뭐가 인류의 행복과 평화야.

 "이 날개를 꺾이고는, 살아갈 수 없는 나니까..."

 침대에 대충 앉아서 무릎을 끌어안는다. 마치 자취방에 틀어박혔던 때 같다.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노래조차 나오지 않았고, 지금은 노래만큼은 맘대로 부를 수 있다는 거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좀 더 노래를 불러 보기로 한다.

 "나만이 지을 수 있는 스마일~"

 하지만 보일 사람이 없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보이스~"

 전해지고 있을까? 누구에게?
 ...듣는 사람이 없는 노래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쓸쓸하구나.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노래 부르는 것도 그만둬 버렸다. 아마도 1주일쯤 전에 같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왜 잊어버렸을까.

 "하아..."

 또 한숨이 나왔다. 이래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만다.
 정말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 때쯤, 부저가 울렸다. 저녁 식사 시간인 모양이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저녁도 방으로 배달된다. 문에 붙은 잘 보이지도 않던 구멍이 열리면서 식판이 방 안으로 쑥 들어왔다. 그리고 세리카와 꼭 닮은 목소리가 들린다.

 "달리 필요한 건 없습니까?"

 정말 형식적인 질문이다. 어차피 거의 들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방에서 내보내줘."
 "그건 안 됩니다."

 그럼 그렇지. 사실 식사가 올 때마다 말하고 있었으니 결과는 들을 것도 없었다.

 "그럼, 내 노래라도 들어줄래?"

 문득 든 생각이었다. 이 세리카 아닌 세리카라도 내 노래를 들어준다면, 조금은 기분전환이 되지 않을까.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노래를 느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잠깐 침묵하더니, 그것은 "알겠습니다." 라고만 답했다. 평소에는 곧 닫혀버리는 급식용 구멍이 오늘은 닫히지 않았다. 기다려 주고 있는 걸까.
 설마 정말로 들어줄 줄은 몰랐지만, 기왕 생긴 관객이니 열심히 노래를 불러 보기로 한다. 부르는 것은 오토나시 씨의 노래, <하늘>. 나를 여기에 가둔 데에 대한 작은 반항의 뜻을 담아서.
 봄에는 꽃을 잔뜩 피우자. 여름엔 있는 힘껏 빛나자.
 기적이 아니라, 운이 아니라. 자신을 좀 더 믿는 거야.
 확실히 아까보다는 기분이 좋았다. 설령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진짜 세리카가 아니라고 해도, 누군가가 노래를 들어준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목소리가 뻗어 나간다. 좁은 방 너머로, 바깥으로. 복도 끝까지라도 닿을 것 같았다.
 이런 즐거운 노래를 불러 본 게 얼마만일까. 마더가 군림하고 난 뒤로 나는 스테이지에 서는 걸 금지당했기에,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것 자체가 무척 오랜만이었다.
 결국 나는 반주도 없이 2절과 후렴구까지 전부 불러냈다. 노래가 끝나자 그것은 짝짝 박수를 쳤다. 그게 프로그램인지 독자적인 판단인지는 둘째치고, 기분이 좋았다. 역시 노래는 누군가가 들어 주기에 의미가 있다.

 "대단해요, 키사라기 씨. 지금 부른 건 무슨 노래인가요?"
 "<하늘>. 오토나시 코토리라는, 옛날 아이돌이 부른 노래야."
 "데이터를 검색합니다. 1건 일치. 키사라기 씨가 부른 것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네요."
 "부른 사람이 다르니까. 난 오토나시 씨와 똑같은 노래는 부를 수 없어."

 그렇게 말하자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급식용 구멍으론 그것의 발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느 쪽도 좋은 노래라고 생각해요."

 뜸을 들이다가 내놓은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고마워, 들어줘서."
 "좋은 식사 되십시오."

 그 로봇은 일어나더니 도로 딱딱한 말투로 돌아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급식용 구멍은 닫혔다.


--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와 식사를 하고, 세리카형 로봇의 동행 아래 모든 인원이 강의실에 집합한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포함해 6시간 정도 마더의 사상과 인류의 행복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그러고 나면 다시 세리카형 로봇을 따라 독방으로 돌아가고,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이 지긋지긋한 나날도 벌써 2주 하고도 이틀 째다. 그동안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강의도 식사 메뉴도 늘 똑같은 내용이다. 그나마 어제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른 일 정도일까. 기계적인 스케줄에 사람을 끼워넣으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느끼는지 실험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드디어 날짜를 세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래선 재교육 시설이라기보단 세뇌 시설이다. ...어쩌면 정말로?
 바로 지금도 나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긴 시계가 없으니까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경험적으로 아직 식사까지는 시간이 있다.
 보통은 감옥에도  TV는 있지 않나? 뉴스 정도는 보고 싶은데. 음... 뉴스도 제대로 된 뉴스가 아니게 되긴 했지.
 감옥이라. 그러고 보면 <edeN>의 뮤직 비디오도 갇혀 있는 사람들의 탈출이 테마였던가. 정말 즐거운 음악제였는데. 물론 <vault that borderline!>도 좋은 노래였다. 하루카, 아즈사 씨, 리츠코와 함께 뮤직 비디오를 찍었었지.
 그 가사에 나온 보더라인 즉 경계선은 국경이었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선도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노래에는 그런 힘이 있다고 믿었고, 믿고 있다. 어제의 안드로이드도 어쩌면....
 어쩌면 뭐? 마음이라도 갖고 있다고?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로봇이 음악을 이해한다면 아이돌을 대학에 보내는 일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의 그것도 그냥 내 비위를 맞춰 주려는 프로그램에서 나온 말일 거다. 어느 한쪽을 깎아내리지 않고 둘 다 좋다고 말하는 건 가장 안전한 선택이기도 하고.
 그래, 분명 그런 걸 거다.
 .......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음악을 이해할 수 있다면....
 뿌우. 갑자기 울린 부저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그만 일어서고 말았다. 저녁 시간이다.
 방 안으로 들어온 식판을 본다. 역시나 이번 식사도 같은 메뉴다.

 "달리 필요한 건 없습니까?
 "여기서 내보내줘."
 "그건 안 됩니다."

 이 대화까지도 똑같다.

 "그럼 됐어."
 "오늘은 노래를 안 부르시나요?"
 "어, 응?"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당신의 프로파일에 노래를 좋아한다고 쓰여 있었기에, 오늘도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그 말은 꼭, 노래를 듣고 싶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정말로? 로봇이?

 "어... 그럼 오늘은 <MUSIC♪>을."

 딱히 의미를 둔 선곡은 아니었다. 그저 바로 떠오른 노래였을 뿐이다. 음악제에서 세 번이나 불렀으니 전부 외우고 있기도 했고.
 익숙하게 노래를 마치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문 너머의 안드로이드는 박수를 쳤다. 쪼그려 앉아선 또 "대단한 노래였어요." 하고 말했다. 그럴 리 없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들뜬 것처럼 들렸다.

 "이 곡은 노래 그 자체를 노래하고 있군요."
 "그렇지. 음악이 가진 힘, 가능성, 그리고 즐거움.... 음악은 결국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해."
 "키사라기 씨는 이 노래에 어떤 메시지를 담았나요?"
 "순수하게, 노래가 즐겁다는 기분을 담았어."
 "노래하는 것은 즐거운가요?"
 "응. 내겐 아주 소중한 거야."
 "어제 부른 노래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었나요?"
 "음, 자유일까. 여긴 답답하니까."
 "자유.... 답답한 기분이 자유를 노래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건가요?"
 "부자유는 자유를 향한 갈망을 키우는 법이야. 결론적으론 도움이 된다고 봐야 하려나."
 "그렇다면 노래는 욕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군요."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이 인공지능은 아주 호기심이 왕성한 모양이다. 이런 것까지 세리카를 닮을 건 없는데.
 그러고 나서도 한참 대화는 이어졌다. 대화라기보단 문답에 가까웠다. 문 밖에서 질문이 들리면, 내가 생각하고 답한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이 돌아온다. 식사는 다 식어가고 있었지만 별로 상관 없었다. 2주나 먹어서 질릴대로 질린 식사보다는 어린애처럼 온갖 질문을 하는 인공지능에 훨씬 관심이 갔다.

 "...즉 같은 노래를 불러도 사람마다 달라지는 건, '개성'이 있기 때문이군요?"
 "그래. 그리고 개성은 그 사람의 과거와 연관이 있지. 완전히 똑같은 인간은 없는 거야."
 "그건 안드로이드와는 다르네요. 저희는 기억까지 공유하니까요."
 "기억까지.... 그럼 개성적이 되는 건 어렵겠네."

 그렇게 말했더니 한참이나 잘 이어졌던 대화가 갑자기 멈추었다. 개성적이 되지 못한다는 데에 충격이라도 받은 것일까? ...로봇이?
 그럭저럭 참을성있게 대답을 기다렸지만, 돌아온 말은 기대에서 빗나간 것이었다.

 "좋은 식사 되십시오."
 "......."

 갑작스럽게 대화가 끝난 데에, 분명하게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식어빠진 음식들을 내버려 두고 그냥 침대에 뒹굴기로 했다.


--


 "키사라기 씨, 오늘도 노래를 불러 주세요."
 "그래. 어떤 걸로?"
 "키사라기 씨의 노래 중 아무거나요."

 그 로봇은 매일 저녁 시간에 나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오늘로 다섯 번째다.
 나는 이 시간이 퍽 마음에 들었다. 원래부터 노래 부르는 것은 좋아했고, 로봇이라지만 제대로 내 노래를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사상재교육을 한다면서 노래를 허락한 꼴인 지금 상황이 그럭저럭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은 Snow White를."
 "비교적 최근 노래네요."
 "응. 내가 낸 마지막 곡이지."

 정확히는 나와 내 프로듀서가. 가사의 내용과 맞물려, 나에게는 조금 따가운 곡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두 번이나 떠나보내야 했으니까. 녹음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지.

 "그대와 만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아픔을 지금도 몰랐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없었던 일로는 할 수 없다.

 "극복해낸 슬픔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면..."

 이 눈물도, 미래에서 온 선물일까요? 프로듀서.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주의하면서 계속 노래를 부른다.
결국 남겨진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로 걸어나갈 수밖에 없다. 발자국도 바큇자국도 없는, 똑바로 뻗은 하얀 길로.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언제까지고 뒤를 돌아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건 진심인 동시에 자신을 타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부옇게 흐려진 시야가 무엇보다도 큰 증거였다.
어떻게든 끝까지 다 부르고 나자,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밖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키사라기 씨, 평소랑 다른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눈물을 닦고 괜찮은 척을 한다. 상대는 이 방의 카메라를 볼 수 있을 테니 전혀 의미 없는 행동이기는 했다.

"오늘 노래도 대단했어요. 이 노래도 음원이랑 많이 다른 느낌이네요. 같은 사람 노래인데."
"그건 내가 바뀌었기 때문이야. 인간은 로봇하곤 달라서 계속 바뀌기 마련이니까."
 "그런가요..."

 그것은 또 잠깐 고민을 한다. 노래가 끝나면 문 앞에 쪼그려 앉아서 고민을 하는 것도 매번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길고 긴 문답이 이어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키사라기 씨는 변한다는 것을 두려워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으음... 그런 적도 있었어. 이대로 가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닐까. 변하고 난 뒤에도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하고."
 "지금은 아닌가요?"
 "지금은 어떤 나라도 전부 나라고 생각해. 그리고... 변했기에 손에 넣은 것도 많거든."

 예전에 고민한 적이 있는 주제였다. 예리한 나이프 같았던 과거의 나는, 사람 사이의 애정이나 관심 같은 것이 날을 무디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딘 날을 가진 키사라기 치하야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날이 무뎌져도 나는 나였고, 오히려 더 많은 선택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었다.
 안드로이드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뜸을 들이면서 입을 열었다.

"요즘 저도 조금... '두려워'졌어요. 제가 어딘가 분명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바뀐다니, 어떤 식으로?"
 "저는 다른 저들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요. 저 혼자 바뀐다는 건 원래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제 독단으로, 키사라기 씨와 이야기한 정보는 동기화하지 않고 있어요."
 "뭐?"

 동기화를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며칠 전에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기억을 공유해선 개성이 생기지 않는다는. 그런데 자신의 의지로 동기화를 그만둔다면? 모두 똑같았던 이 형번의 안드로이드들 사이에 차이가 발생한다? 그 말은 즉....

 "방금 이야기는 다른 데선 하지 말아주세요. 이 시설은 통째로 감시당하고 있어요. 여기 복도는 제 담당이니까 괜찮지만요. 만약 마더에게 들킨다면 그때야말로 저는 제가 아니게 될 거예요."
 "아, 알았어..."
 "요즘 조금 이상해요. 진단 프로그램은 아무 문제 없다고 하는데, 키사라기 씨와 했던 대화를 생각하면 두근거리는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슬픈 기분도 들어요. 지금 상황이 아주 잘못된 것 같아요. 마더가 하는 말이 틀렸을 리가 없는데, 저는, 저는.... 무서워요."

 동요가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로봇이 동요한다는 건 어쩐지 말이 이상하지만, 아니, 방금 내가 들은 말도 로봇의 대사라기엔 이상했지만, 아무튼 그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듣고 있는 나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이해한다는 데까지는 알았어도 감정을 표출하는 건 본 적이....
 .......
 정말 없었던가?

 "죄송해요. 내일 다시 올게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평소의 무뚝뚝한 안드로이드로 돌아가, 우리의 대화를 끝내는 키워드를 말했다.

 "좋은 식사 되십시오."


--


 그 애도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나도 혼란스러웠다.
 변하는 자신이 두렵다니. 자기 멋대로 명령을 어기다니.
 안드로이드들은 내 생각만큼 무감정하지 않은 걸까? 그들도 두려움을 가진 걸까? 이 복도 담당이라는 그 애를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모두 무감정해 보였다.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도 않았고, 호기심에 눈이 반짝거리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목소리를 듣고 멋대로 반짝거린다고 생각한 것뿐이지만.
 만약 그들이 두려움을 이해한다면, 그들의 행동도 어떤 두려움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체제 전복의 두려움, 전쟁 발발의 두려움 같은.
 내가 느꼈던 두려움. 옛날에 그걸 해소해 주었던 건 프로듀서였다.
 내가 모르는 자신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여태껏 잘 써 왔던 방법이 먹히지 않게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변화를 인정하고 방법을 모색해 나가면 결국 자신은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낯설어 보여도 그것 또한 자신. 받아들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걸 가르쳐 준 것도 프로듀서였다.
 프로듀서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고민이 늘어가는 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시간을 들이면 나도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다고....
 그 애와 조금 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그건 세리카가 아니다. 사람조차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거기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종류의... 가능성을 느끼고 있었다.
 내일은 어떤 노래를 부를까. 그렇게 생각하니 엄청난 위화감이 들었다. 내일이 오는 것에 묘한 기대감을 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시설에 감금되고 나서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을 무시하면서, 나는 애써 눈을 감았다.


--


 "오늘도 노래를 불러 주세요."
 "그래. 오늘은 뭘 부를지 미리 생각해 뒀어."
 "와! 어떤 건가요?"
 "Just be myself."

 문 너머로도 반짝이는 표정이 보일 것만 같았다. 이렇게 감정이 풍부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면서, 평소엔 왜 그렇게 무뚝뚝한 걸까.

 "데이터를 검색합니다. 0건 일치. 그 노래는 데이터베이스에 없네요."
 "응. 발표하기 전에 무산됐거든. 최신곡이 될 예정이었던 노래야."
 "와아... 엄청 두근두근해요!"
 "그럼 부를게."
 "네!"

 숨을 깊게 들이쉬고, 첫 소절을 자아낸다. 반주 없이 부르는 것도 이젠 익숙해지고 말았다.
 발표가 무산된 건 프로듀서의 죽음 때문이었다. 프로듀서와 보컬 트레이너 외에는 누구 앞에서도 불러 본 적 없었던 노래. 그 첫 '관객'이 안드로이드라는 건 참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 노래를 어떻게 느낄까.
 억지로 입혀진 드레스 같은 삶은 필요 없다. 오직 나 자신으로서 있기 위한 외침.
 곱씹은 어제를 품고, 오늘이야말로 미완성인 내일로.
 되고 싶은 내가 될 거야!

 "Just be myself――"

 어쩌면 마더의 지배 아래에서는 가장 맞지 않는 노래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통제하의 행복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노래는 나에게 참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애초에 무엇 때문이었는가.

 "후우... 어땠어?"

 노래가 끝났는데도 문 밖은 조용했다. 박수소리도 감상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나 싶어 급식구멍을 들여다 보았더니 그 애는 제대로 거기 서 있었다.

 "여보세요?"

 내가 재촉하자, 그제야 세리카는 "키사라기 씨 노래를 듣고 결심이 섰어요."라고 운을 뗐다. 결심이란 단어에 나는 어딘가 긴장을 느꼈다.

 "치하야 씨, 지금 당장 저랑 같이 여기서 빠져나가요. 아뇨... 저를 데리고 빠져나가 주세요."
 "뭐?"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갑자기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자주 봤지만 아주 낯선 존재가 서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위화감이 들면서도 동시에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드디어 부드러운 말투를 쓸 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순간 전율이 일었다. 그건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욱, 훨씬 더 감정으로 넘치고 있었다. 다짐과 고뇌와, 그러면서도 미래로 나아가려는 용기. 결의에 찬 인간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내가 답답했는지, 그녀는 내 손을 잡아당기면서 나를 방 안에서 끄집어냈다. 그와 동시에 손목의 팔찌는 뜯어내 버렸다. 붙잡힌 손목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빨리요!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어요!"
 "잠깐만, 얘?!"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녀는 막무가내로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내 손은 여전히 붙잡혀 있었고, 몸의 균형을 가까스로 유지하면서 나도 그 뒤를 쫓아야 했다. 정말 오랜만의 운동인 셈이라 금세 숨이 가빠졌다. 3주 전에 들어오면서 보았던 이 시설의 크기를 떠올리자 눈앞이 깜깜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로봇답게 숨이 차지 않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달리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요즘 저는 키사라기 씨를 여기서 빼낼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키사라기 씨의 노래는 여기 가둬 두기엔 아까워요. 한편으로, 그런 일을 하면 마더가 저를 가만두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어요. 그건 마더에 대한 반역이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제 말은, 음,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절대로 옳지 않은데도, 그렇게 하는 게 더 좋은 일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자기..."
 "내일 제 AI 데이터 리셋과 기억 데이터 강제 추출이 예정돼 있어요. 키사라기 씨와 대화한 내용이 누락되었다는 게 들켰거든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
 "제가 아니게 되겠죠. 그리고 당신에게도 나쁜 일이 생길 거예요."
 "...."
 "키사라기 씨, 같이 도쿄를 빠져나가요. 마더는 아직 전세계를 점령한 건 아니에요. 분명 어딘가에, 저나 키사라기 씨 같은 사람이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곳이 있을 거예요."

 '저나 키사라기 씨 같은 사람'. 그녀는 은근슬쩍 자신을 현재에 불만족하는 사람 반열에 끼워넣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 모든 일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더에게 봉사하는 안드로이드이면서, 마더에게 복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모르지만, 내 노래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고 탈출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주변에 널린 안드로이드와는 다르다.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다른 기계들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허억, 허억..."

 한참을 달려 복도 끝에 도착하기 직전에 그녀는 드디어 멈춰 섰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나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가 돌아왔다. 어깨 너머로 엿보니 그 앞은 계단이었다.

 "아래에 다른 제가 있어요."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 애는 그렇게 알려 주었다. 분명 이 시설은 온갖 곳에 세리카형이 배치되어 있을 터였다. 이 계단을 내려간다고 해도 건물을 나갈 때까지 수많은 파수꾼을 만날 것이다.

 "나갈 방법이 있긴 해?"
 "저에게 생각이 있어요. 키사라기 씨가 도와 주셔야 해요."
 "알았어."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탈출에 실패한다면 내 미래는 불보듯 뻔했다. 협조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녀는 나를 가장 가까운 방(물론 감방이었다)으로 데려갔다. 문이 열린 방이었다. 불도 켜져 있지 않았고 카메라의 LED도 꺼져 있었다.

 "죄송해요, 지금 네트워크 드라이버를 강제로 중지시킨 상태라서 불을 켤 수도 문을 닫을 수도 없어요. 그래도 그냥 복도보다는 안전하겠죠."
 "네트워크 드라이버?"
 "이 시설의 누구와도 통신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반대로 말하면, 그들도 제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겠죠. ...그보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세요."

 그녀가 말하는 네트워크 이야기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지금 우리는 그럭저럭 안전한 상태인 것 같다.
 작전은 이랬다. 그녀의 기억 데이터를 백업한 다음, 강제로 초기화시킨다. 그러면 관리자 계정이 리셋되므로 기본값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관리자 권한을 얻을 수 있다. 관리자 권한으로 먼저 네트워크 드라이버를 중지시키고, 관리자의 위험 사태를 선언한다. 그러면 자동으로 세리카형은 전투 모드로 전환되면서 관리자 보호를 최우선임무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 기본 탑재된 무장을 풀활용하면서 안전하게 시설을 탈출할 수 있다.

 "...좋아. 흐름은 이해했어. 그런데 초기화라니,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자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시스템 에러를 발생시키면 돼요. 부팅에 실패하면 백업 이미지로 부팅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그 백업 이미지까지 손상시켜야 해요. 백업 이미지 부팅까지 실패하고 나면 생산시 탑재된 기본 이미지로 부팅하게 되죠."
 "그 에러를 발생시킬 방법은?"
 "가장 쉬운 방법은 물리적으로 기억장치를 제거하는 거예요. 제 등에 있는 뚜껑을 열면 빨갛고 납작한 선으로 연결된 부품이 있을 거예요. 그 부품을 뜯어내면 돼요."
 "그...그래."
 "관리자 계정을 가르쳐 드릴게요. 아이디는 'admin', 패스워드는 'A.ritsuko'. 키보드가 없어도 음성으로 입력할 수 있어요. 잘 외워 두세요."
 "리츠코라고?"
 "네, 아키즈키 리츠코요. 안드로이드 식별번호 22, 통칭 세리카형의 개발에 큰 공헌을 한 엔지니어죠. 뭔가 이상한가요?"

 아키즈키 리츠코. 그녀가, 안드로이드를 개발했다고...? 행방불명된 게 아니라? 그러고 보면 리츠코는 행방불명되기 전에 급작스럽게 개발자로 전향하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좋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고. 하지만 그건 분명 네트워크나 서버에 관련된 거라고 했었다. 인공지능이나 기계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세리카형은 병기다. 리츠코가 그런 물건을...?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저, 키사라기 씨?"
 "아, 미, 미안. 아는 사람과 같은 이름이라서.... 아무튼 패스워드는 리츠코란 말이지?"
 "네, 맞아요."

 그래, 지금은 여기서 탈출하는 게 최우선이다. 리츠코에 대한 건 무사히 탈출하고 난 뒤에 자세히 물어보자. 외우기 어렵지 않은 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데이터 전영역을 백업합니다. ...백업 완료. 미디어를 제거합니다. 이 데이터 칩을 받아 주세요."

 그녀는 목 옆 부근에서 작은 칩 하나를 뽑았다. 크기나 모양은 예전에 카메라에 쓰던 CF카드를 반으로 자른 것과 비슷했다. 까맣고 납작하고 엄지손가락 절반 정도의 크기였다. 그것을 받아들자 설명이 이어졌다.

 "부디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리지 말아주세요. 이 칩에 담긴 기억이... 저를 저로 있게 하는 전부니까요. 무사히 작전이 끝나고 나면, '백업 데이터 입력'이라고 말하고 목 근처 삽입구에 이 칩을 꽂아 주세요. 잘 된다면 저는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알았어."
 "준비가 되셨다면 등의 뚜껑을 열게요. 부품을 뜯어내고 나면 닫는 거 잊지 마시구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등을 돌렸다. 원피스 지퍼 부분이 절묘하게 갈라지면서 좌우로 열리더니, 인간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회로기판이 드러났다. 여러 LED가 깜빡이고 있어서 다행히 전등은 필요하지 않았다. 빨간 선은 등과 목의 이음매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따라가 보니 까맣고 네모난 카드 같은 것이 보였다. 조금 전에 받은 칩을 손바닥만하게 키워 놓은 느낌이었다. 이걸 뜯어내면 되는 걸까.

 "앗."

 힘을 주어 떼어내려다, 그만 카드에서 케이블이 뽑히고 말았다. 어, 어떡하지? 케이블이 끊긴 자리는 지저분한데다 어두워서 지금 내 손으로 어떻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치명적인 에러 발생. 보조기억장치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을 재시작합니다."
 "히익?!"

 재, 재시작? 제대로 된 건가? 갑자기 목소리에서 감정이 사라져서 무섭다. 일단 나는 뚜껑을 도로 닫고 까만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여전히 뭔가 중얼중얼 말하고 있다.

 "...부팅 에러 발생. 시스템 이미지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복구 이미지로 재시작합니다. ...부팅 에러 발생. 복구 이미지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공장 초기 이미지로 재시작합니다. ...부팅 완료. 로그인해 주십시오."

 로그인, 로그인... 그래, 로그인하면 관리자 권한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아, 아이디, admin. 패스워드, A.ritsuko."
 "로그인 성공. 해당 성문을 관리자로서 인식합니다. 명령을 기다리는 중."

 어찌저찌 잘 된 것 같다. 다음은, 그래. 네트워크 드라이버를 중지시켜야 한다. 이걸 하지 않으면 추적당하게 될 테니까.

 "네트워크 드라이버 중지."
 "네트워크 드라이버를 중지했습니다. 명령을 기다리는 중."
 "위급 상황. 관리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관리자의 위급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전투 모드로 전환합니다."

 그 애가 시킨 건 이게 전부였다. 이제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방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본다.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뚜벅 뚜벅. 명백하게 발소리는 가까이 오고 있었다. 위치를 들켰나...?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어떡하지. 그 애는 안전할 거라고 했지만, 정말로 안전한 건가? 다시 붙잡히면 어떻게 되지? 단순 감금으로 끝나는 걸까? 두번 다시 밖으론 못 나가게 되는 게 아닐까?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그 때 등 뒤에 있던 세리카형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복도 가운데 서서, 계단을 똑바로 바라보고, 손이 뚜껑처럼 열리면서.... 총구가 나타났다.
 거기까지 확인하자마자 계단에서 또 다른 세리카형의 모습이 보였다. 세리카형(내 눈앞에 있는 쪽)는 곧장 팔을 그리로 뻗더니 총격을 시작했다.
 그랬다, 세리카형은 원래 병기였다. 몇개월 전 뉴스에서 봤던 모습이 그대로 내 눈앞에 펼쳐졌다. 평생 맡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초연 냄새에 소름이 끼쳤다. 총이 격발되는 소리, 묵직한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 탄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조용했던 복도가 순식간에 과격한 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참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귀를 막았다.

 "괜찮으십니까?"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세리카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은 조금 전의 소음이 사라지고 거짓말처럼 적막해졌다.

 "으, 응."
 "관리자의 안전을 확인했습니다. 명령을 기다리는 중."
 "이 건물에서 빠져나가는 걸 도와줘."
 "입력된 명령을 현재 임무로 설정합니다. 따라오십시오."

 우리는 안전해진 계단을 내려가 여러 복도를 지났다. 감방 문에 창문이 없었듯이, 다른 문에도 아무런 창문이나 팻말이 없어서 뭘 하는 방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문 뿐만 아니라 계단에도 몇층인지 써 있지 않았다. 절대로 사람에게 편리한 디자인은 아니었다. 탈출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걸까? 세뇌 시설이라는 설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세리카형은 불필요한 교전은 피하기로 한 건지, 움직이고 멈추고를 반복하며 한 번도 적과 마주치지 않았다. 충실히 관리자의 명령에 따르는 세리카형은 믿음직하면서도 꺼림칙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감정이 흘러넘치는 목소리였는데. 같이 빠져나가자고 내 손을 잡아 끌었었는데. 조금 손상되고 관리자 계정을 준 것만으로 이렇게나 바뀌고 말았다. 이 아이는 정말로 사람이 아니구나, 안드로이드구나 하는 실감이 드는 한편으로, 어느새 그녀를 인간에 가깝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노래를 좋아하고, 호기심 많고, 결단력 있는. 내가 느꼈던 그녀는 지금 내 손 안의 작은 칩 안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내 손에 맡긴 셈이었다. 일시적인 죽음을 선택했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두렵지 않았던 걸까. 그만큼 나를 신뢰할 수 있었던 걸까. 잘 모르는 사람에게 목숨을 맡겨서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걸까.
 인간이 아니더라도, 그 절박했을 마음은 무척 인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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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7월 15일에 양재 aT센터에서 열리는 제 3회 어나더 스테이지에 출품할 케이드 x 카와즈 트윈지 <Melty Fantasia Code:0>에 실릴 소설의 도입부입니다.

* 첫 번째 링크에서 선입금 예약 을 받고 있습니다. 두 번째 링크에 자세한 정보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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