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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7 - 경계境界 : 닛타 미나미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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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28, 2018 18:27에 작성됨.

 “다녀올게요. 프로듀서.”

 기차 앞에서 아나스타샤가 인사를 건넸다. 다시 못 만날 것도 아닌데 어딘가 서글픈 목소리였다. 왜 그러냐고, 기운차게 다녀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정작 내가 기운이 없었다.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었다. 내 걱정에 발을 떼지 못하는 애한테 어딜 양심도 없이. 그나마 가진 쿨팩을 보이며 말했다.

 “걱정 마. 안 죽어.”

 죽을 만큼 더울 뿐이란다. 본능이 뱉으려던 뒷말을 잘랐다. 인사치레를 덧붙이는데 옆에서 시키가 밉살맞게 말했다. 솔직하게 가지 말라고 하는 건 어때? 미오가 개그 프로처럼 과장된 태클을 걸었다. 뭔 소리여, 그럼 안 되지! 뭐라도 반응해줄까 하다가 떠오르는 게 없어 무시했다.

 “도착하면, 연락하고.”

 “Да(네). 꼭 연락할게요.”

 “백야는 우리가 잘 돌볼게. 너무 걱정하지는 마.”

 “까분다.”

 “아냐 부럽다. 온천 여관이라니. 사진 많이 찍어서 보내줘!”

 “Посмотрите вперед. 기대하세요!”

 “선배 말, 잘 듣고. 선배가 없으면, 카와시마 씨. 다른 애들하고도, 호흡 잘 맞춰서 일해. 무리는 말고.”

 “아…….”

 안내방송이 울려 아나스타샤의 말을 차단했다. 이제 곧 출발인가. 짐은 다 옮겨놨지만 얼른 착석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한 말들을 그대로 돌려주려던 것을 참고 아나스타샤는 마지막으로 미소를 남겼다.

 선배가 찾아와 아나스타샤를 데려갔다.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하자 선배도 가볍게 손을 들어보였다. 부탁드립니다. 맡겨둬라. 짧은 신뢰가 오가고 신칸센과 함께 나의 북풍이 떠나갔다.

 가버렸네. 응응, 가버렸어. 미오와 시키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덩그러니 남은 나는 쿨팩을 볼에 비비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제부터가 ‘진짜’ 여름이었다. 애써 외면해 오던 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더위를 머금고 축축한 작당질을 벌이는 걸로 보아 이때만을 기다려온 게 분명했다.

 아나스타샤의 로케는 그리 길지 않다. 오늘부터 해서 나흘이면 스케줄은 종료되고 닷새째에 돌아온다. 프로 중에 프로인 선배가 있으니 스케줄 연장은 없을 것이다. 그 사이에 나는 미오와 시키를 돌보고 선배가 맡긴 일들을 대신하고 최대한 멀쩡한 외형을 유지하도록 노력만 하면 된다.

 세 번째가 가장 어려웠지만 동시에 전문분야이기도 했다. 다만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을 뿐이다.

 터미널을 나오다 잠깐 건물 안에서 멈춰 섰다. 조금이나마 시원한 실내에 서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굳이 알 필요가 있는 걸까, 괜히 후회만 하는 건 아닐까. 고뇌하다 결국 인터넷에 접속했다. 어차피 닥쳐올 거 미리 알고 편해지는 게 낫겠지. 그런 마인드로 어플을 눌렀다가 나는 절망에 빠졌다.

 뉴스를 틀자 폭염주의보가 떴다. 오늘 기온 32℃. 날씨는 맑음. 밖으로 나서자마자 빌어먹을 햇빛이 쨍쨍하게 모자 위로 내리쬈다.


 *


 자기 전에 수면제를 4알 먹었다. 카코가 구해준 물건으로 효과 확실하고 부작용도 비교적 적어 애용했었다고 들었다. ‘애용’이라는 단어에서 매우 불온하고 긍정적이지 못한 쓰임새가 느껴졌으나 피곤한 관계로 깊이 파고들진 않았다. 과거형이니까 괜찮겠지, 그럴 거야. 의심을 떨쳐내고 뚜껑을 열었다. 카코에게 들은 적정 복용량이 있었지만 생각을 너무 덜어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집히는 대로 손바닥에 담아 물과 함께 삼킨 게 4알이었다.

 물맛의 역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방금 막 사와서 처음 개봉한 생수에 이물질이 가득 담긴 느낌이었다. 간신히 입안에 담아놓고도 목구멍을 쉽사리 열지 못 하는데 뒤통수에 통증이 일었다. 누군가 물속에 두통을 풀어놓은 듯 천천히 뇌를 잠식해 갔다. 견디기 위해 고개를 들었더니 어둠속에 여자가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형체를 확인했다. ‘메서드’였다. 한국에서 같이 일한 동료.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연기를 잘 해서 메서드. 녀석이 옆에 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물 한 모금을 못 삼키냐? 까탈스러운 놈.”

 고개를 푹 숙인 백야가 답했다. 예민해서 그래.

 “여름에는 모든 게 살아나. 풀도 동물도. 그런데 나는 반만 살아나거든. 몸은 무기력한데 감각만 날카로워져서 머리가 못 따라가는 느낌이야. 생수에 섞인 짠맛마저 느낄 정도니 말 다했지.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

 “가위도 눌리고 그러냐?”

 “심하면. 정말 심하면.”

 “지금은 어떤데.”

 “죽을 것 같아.”

 물속에 퍼진 약성분이 혀에 닿았다. 쓴맛이 구내염 치료제처럼 타오르자 본능적으로 뱉어버릴 뻔했다. 간신히 고통을 삼키고 사무실 소파에 누웠다.

 집에서는 잠들기 힘들었다. 거지같은 집주변은 여전히 더럽게 시끄럽고 더럽게 더러운지라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스트레스였다. 특히 피자 가게 놈들. 여전히 새벽에 양아치들이 몰려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를 냈다. 장사를 할 마음이 없으면 얼른 문이나 닫을 것이지. 이대로 가다간 안 그래도 더운 시기에 불을 질러버릴 것 같아 알아서 피신을 택했다.

 그나마 회사는 직원들이 퇴근하면 조용한지라 집보다는 나았다. 소파의 감각이 편하지만은 않지만 크게 불편하지도 않아 견딜 만 했다.

 누워 있는 동안에도 메서드와 백야는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 그리운, 그렇지만 지금은 달갑지 않은 대화가 이어졌다.

 그보다 여기 맞는 거겠지? 난 더 이상 이동할 기운이 없어. 확실해, 스토커의 심리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꼬우면 네 직감으로 확인하던가. 하도 민감해져서 말이야, 이 새끼랑 마주하면 바로 폭발할 것만 같아. 그럼 안 되지, 아껴둬야지, 꾹꾹 눌러두다가 아주 싸그리 박살내야지.

 메서드가 담을 타고 넘어갔다. 안에서 문을 열어주곤 쓸모없는 물음을 던졌다. 그 상태로 일할 수 있겠냐?

 백야가 들고 있던 스포츠 백을 열어 송곳을 꺼냈다. 나 말고 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한단 거야.

 자기도 연장을 받아든 메서드가 낮은 조소를 흘렸다. 그렇지, 그래야지. 낡아빠진 문을 따고 들어간 백야가 폭력을 손에 쥐었다. 오늘 밤은 아주 길 거야.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는 놈을 밟고 또 밟았다.

 쾅, 쾅, 쾅. 폭음을 터뜨리다 찢어지는 비명을 날카롭게 쑤시려는 순간 자각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뒤바뀐 공간에 아나스타샤의 굿즈들이 가득했다. 낡은 맨션의 103호. 사방에 깔린 파란색 눈들이 나의 행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천장이 울리더니 층간소음이 귀에 꽂혔다. 낭랑한 세 여고생들의 목소리가 고막을 때리자 다시 두통이 일었다. 쥐어짜는 것처럼 근육이 뒤틀리고 몸이 웅크러졌다.

 간신히 자세를 틀자 쿵, 소파에서 떨어졌다.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내장까지 뱉을 기세로 녹다만 수면제를 토했다. 목구멍에서 쓴맛이 불꽃처럼 튀었다.

 몸을 일으키자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닿았다.


 직원용 샤워실에서 뭉개진 정신을 가다듬었다. 정장과 모자, 쿨패치 등 항상 하던 준비를 마치고 정식으로 출근해 제일 먼저 아나스타샤를 데리러 갔다.

 애들은 제 시간에 일어났지만 늦게까지 놀았는지 다들 졸려보였다. 나와 아나스타샤가 짐을 챙기고 미오가 널브러진 시키를 챙겨서 신속히 출발했더니 제일 먼저 도착해버렸다.

 건물 안 식당에서 애들 밥 챙겨 먹이고 지루한 시간을 견딜 때 쯤 선배와 그 담당 아이돌들이 도착했다. 카미야 나오, 호죠 카렌, 시라사카 코우메. 좀 더 기다리니 카와시마 미즈키도 도착해 모든 멤버가 모였다. 열차 출발 20분 전. 여유롭게 짐을 옮기고 작별인사를 마치고 한 번 절망한 다음 애들을 데리고 회사로 돌아왔다.

 일정을 정리했다. 우선 애들은 일찍부터 레슨. 그 동안 나는 기획서를 정리해야 한다. 시키는 오후부터는 오프, 미오에겐 잡지 화보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외근을 돌고 그대로 퇴근 하면 되는데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회사로 돌아와 기획서를 보완하기로 했다. 그래야 몸이 피곤해도 마음은 편할 것이다.

 컴퓨터 전원을 켜고 자리에 앉자 어깨에 좀이 쑤셨다. 원래 일하기 직전이 제일 게으르다고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였다. 이틀이나 아침 운동을 못 해서 몸이 약해진 것이다. 남들에겐 미세한 차이일지 몰라도 내겐 심각한 사유였다. 운동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몸이 약해진다는 감각을 견디기 힘들었다.

 “프로듀서님.”

 치히로가 등 뒤에서 불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자 책상 위에 스태미너 드링크를 올려주었다.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목이 마르지는 않은데.

 “마시는 게 아니라 식히시라고요.”

 “아.”

 그제야 느릿하게 손을 뻗어 캔을 잡았다. 방금 막 뽑아서인지 냉기가 살가죽에 착 달라붙었다. 기분 좋다. 목 뒤에 갖다 대고 실컷 즐겼다.

 “상태가 심각하신 것 같네요. 말만이 아니라 행동에도 버퍼링 걸리신 줄 알았어요.”

 “면목 없습니다.”

 “그 상태로 오늘 업무는 잘 하실 수 있겠어요?”

 “해야죠. 어떻게든, 할 겁니다.”

 “오늘은 저도 없는데.”

 “아. 그러고 보니.”

 치히로는 오늘 반차를 내고 진료를 받으러 가야 해서 오후 촬영엔 동행할 수 없었다. 촬영장 스태프들은 하나 같이 베테랑. 내가 할 일은 많지 않다. 오히려 일단 시작된 촬영은 오롯이 그들의 영역이라 나는 방해만 안 되면 다행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선 내 의견도 필요하고, 만약에 상황에 현장을 조율하는 것은 내가 해야만 한다.

 선배도 치히로도 없이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들면서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진료를 다른 날로 미룰까요.”

 “아니요. 그래선 안 되죠. 다녀오십시오. 진료, 꼭 받으셔야 합니다.”

 누구 덕에 이렇게 됐는데 염치없이 굴어선 안 되지. 치히로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도 모잘랐다. 나는 책상 귀퉁이에 코팅된 쪽지를 확인했다. ‘당신이 하는 일은 프로덕션에서 (특히 제가) 많이 도와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손만 벌릴 수는 없다. 천천히 걸음마라도 떼야지.

 “몸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요. 허리도 좋아졌고 금단증세도 많이 줄었어요. 얼마 전까진 정말 못 버틸 것 같았는데 고비를 넘기니까 세상이 새로 보이더라고요. 요새는 잠도 잘 자요.”

 “나아지셨다니 다행이지만, 계속 주의하셔야 합니다. 스트레스, 최대한 피하시고요.”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인 걸요.”

 그렇게 말하는 치히로의 얼굴엔 생기가 있었다.


*


 “아냐예요. 프로듀서.”

 “응. 도착했구나.”

 “방금 짐을 풀고 지금은 휴식중이에요.”

 “숙소는, 어때? 괜찮은 곳이야?”

 “Да! 정말로 멋진 여관이에요!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고, 온천도 커다래요. 프로듀서하고도 오고 싶어요. 피로를 푸는데 제격이라고 여관 아주머니가 말하셨어요.”

 “온천.”

 “프로듀서는 온천 좋아하나요?”

 “그럭저럭 좋아하지만, 별로 가본 적은, 없어.”

 “프로듀서는 온천 초보군요. 그럼 아냐가 가르쳐 줄게요. 온천에선 목욕 뒤에 한 잔이 최고, 라고 해요.”

 “그건 또 어디서…….

 “미오에게 들었어요.” ”무슨 뜻인지는, 아는 거니?”

 “음. 미즈키는 ‘어비’라고 했는데.”

 “비어……. 안 돼. 하지 마. 허락 안 해.”

 “후후. 아냐도 알고 있답니다. 괜찮아요. 미오에게 들은 건 Молоко. 우유니까. 그리고 온천에선 유카타를 입어야 해요.”

 “그거, 전통복장이었나.”

 “Да. 지금도 입고 있는데 조금 복잡해서 미즈키에게 도움 받았어요. 시원하고 움직이기 편하니까 프로듀서도 좋아할 거예요.”

 “글쎄.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

 “분명 어울릴 거예요.

 “묘하게 적극적이네.”

 “실은, 정장 말고 다른 옷을 입은 프로듀서가 보고 싶었어요. 아, 그리고 밤에는 탁구도 치고, 베개싸움도 할 거예요. 물론 그 전에 일을 열심히 하고. 르포, 처음 해보는 일이라 긴장돼요. 여관하고 온천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는데…….”


 *


 오후가 시작할 무렵 미오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방금 막 샤워를 해서인지 샴푸 냄새가 희미하게 감돌았다.

 시키냥은 레슨 끝나자마자 실종 됐어. 가방을 뒤적거리며 미오가 보고했다. 됐어, 오늘은, 안 찾아도 돼. 마지막으로 기획서를 검토하고 저장했다. 상사에게 메일로 보내고 확인 부탁드린다는 메시지도 썼다.

 컴퓨터 전원을 끄고 일어났더니 미오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 하고 미니선풍기에 대곤 외계인 같은 목소리를 냈다. 감정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돌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고 싶어?’라고 묻는 듯해서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의견을 묵살하고 선풍기를 들이밀었다.

 자자, 사양 말고! 생각보다 강한 바람이 얼굴을 쓸었다. 그래도 입은 벌리지 않았지만.

 사무실을 나가며 말했다. 시원했어, 많이.

 “이런 것도 있어. 수건에 쿨 스프레이를 뿌리고 목에 감으면, 짜잔! 시원하지?”

 “감촉이 좋아.”

 “비싼 수건이거든. 레슨하고 땀 닦을 땐 다른 거 쓰니까 사양할 필요 없어.”

 “비싼 거면, 네가 써야지. 이런 데 쓰지 말고.”

 “겨울P 다음에 나도 쓸 거야. 아, 그러면 간접…… 뭐라 해야 하지?”

 “글쎄.”

 “반응 좀 보여 봐. 기껏 가져온 건데. 겨울P 이런 거 많이 쓰잖아. 쿨팩이랑 쿨패치랑. 운동부 도우미 할 때 배웠는데 그것보단 이게 훨씬 편하고 시원해.”

 “참고할게. 그리고, 반응 없어도, 서운해 하진 마. 정말로 고마우니까.”

 “겨울P는 무뚝뚝한 건지 솔직한 건지 모르겠어. 맞다. 아냐한테서 사진 왔는데 봤어? 무려 유카타 복장이라고!”

 “봤어. 즐기는 것 같더라.”

 촬영장은 약 20분 떨어진 거리. 회사에서 임대한 스튜디오였다. 신호가 딱딱 맞아떨어져서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다. 눈에 띄는 특징이라면 아주 넓다는 것. 스튜디오만이 아니라 건물 자체가 크고 처음 온 사람은 길을 잃기 좋았다. 미오도 건물에 들어온 뒤로 연신 “크다!”를 반복했다. 같이 촬영을 하러 모인 아이돌들도 많았다.

 스튜디오를 둘러봤다. 오늘 촬영은 여러 소속사 아이돌들이 2인 1조로 팀을 짜서 진행할 예정이었다. 당연히 미오의 파트너가 될 아이돌도 있고,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원래 선배의 담당 아이돌이지만 오늘만 내가 맡게 된 것이다.

 저기 있군. 전문분야인지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발을 딛자 구두에 밀려오던 파도가 부딪쳐 찰박이는 소리를 냈다. 양말로 물기가 스며들었지만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 겨울까진 아니고 선선한 여름. 닛타 미나미는 그런 사람이었다.

 “닛타 씨.”

 “겨울P. 오셨으면 연락 주시지.”

 “방금 막 도착해서, 빨리 올라오느라…….”

 “미나밍!”

 미오가 별명을 부르며 미나미에게 안겨들었다. 말릴까하다가 미나미가 받아줘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동생 응석 받아주는 언니 같아 훈훈해 보이기도 하고.

 다만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미나미와 같이 있던 여자로 대학생쯤 되는 걸로 보아 친구인 듯 했다.

 “아, 이쪽은 대학 친구인 사쨩이에요. 촬영을 구경해 보고 싶다 해서 데려왔는데 괜찮을까요?”

 미나미가 뒤늦게 소개를 시켜줬다. 도착 메시지에도 미리 양해를 구했고 스태프들에게도 허가를 받았으니 상관은 없었다.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사쨩이란 여자는 어째서인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눈매가 드러난 건가. 급히 모자를 눌러쓰고 최대한 친근한 티로 인사하자 쭈뼛거리며 받아줬다.

 나는 빠르게 두 사람의 특징을 파악했다.

 미나미는 앳되어 보이면서도 특유의 눈매나 분위기에서 어른스러움이 물씬 풍겼다. 센스가 있어 스타일링을 할 줄 알고 길게 푼 머리는 청순함을 더해줬다. 대학생 특유의 젊음도 느껴져 바닷가에서 청량음료 광고를 찍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쨩은…… 냉정하게 말해서 한숨이 나오는 패션이었다.

 길게 푼 머리하며 패션까지 전부 미나미를 따라한 모습이었다. 문제는 이목구비나 체형이 달라서 보기에는 조화롭지 못 하다는 것. 나쁘게 말하면 마이너 카피. 안타까웠다. 뜯어보면 귀여운 외형인데 자기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지 못 해서 유행만 쫓고 있다니. 하필이면 친구가 잘 나가는 아이돌인 것이 문제군. 뭘 따라 입어도 비교당할 텐데 자기 개성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뭘 입으면 이 아가씨에게 어울리려나.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중 스태프가 촬영장에 모두를 불렀다. 스튜디어 중앙으로 이동하는데 몇 발짝 떨어진 말소리를 민감한 청각이 잡아냈다.

 저 사람 대체 누구야? 프로듀서님이야, 미오 담당이셔. 겨울P란 이름은 뭔데? 별명, 회사에선 보통 그렇게 불리셔. 흐응……. 왜 그래? 아니, 저 얼굴로 아이돌 프로듀서라니, 전혀 안 어울리잖아.

 충격이 고막을 강타했다. 아직 어제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곳에 부딪쳐 금을 더 크게 갈랐다. 그런 말 하면 안 돼. 미나미가 사쨩을 탓했지만 이미 멈출 수 없는 붕괴였다. 일순 호흡이 멈추고 내면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겨울P? 미오가 나를 불러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헛기침으로 넘기고 다시 걸어갔다.

 혹시 들으신 건가? 미나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설마, 이 거리에서 들릴 리가 없잖아. 사쨩의 소극적 어투가 심장에 박혔다.

 스태프가 부른 이유는 촬영 컨셉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떤 의상을 입고 누구부터 순서대로 진행할지를 설명했지만, 흘려듣지 않으려고 애써야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눌어붙은 잡생각이 사고를 방해했다.

 환상 속에서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구두 위에 툭, 떨어졌다.


 *


 미오와 미나미는 후반부 촬영에 배정되었다. 앞 순서에 배정된 팀들이 꽤 있었고, 상황에 따라 촬영 시간은 들쭉날쭉 변하는지라 장시간의 기다림이 예상됐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정신을 가다듬기엔 충분했다.

 신경 쓰지 말자. 들을 만 한 말이잖아. 길 가다 불심검문도 받아 봤다고. 거기에 비하면 양반이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다 거울 속에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매서운 눈매에 덩치 큰 남자, 전직 해결사인 현직 프로듀서. 피로 얼룩진 몸을 이끌고 태양빛 아래 죽어가고 있는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불길한 인상이었다. 오해 받아도 싸, 아니, 오해도 아니지. 한숨과 함께 물을 세면대로 흘려보냈다. 평소보다 깊이 모자챙을 내리고 대기실을 찾았다.

 이미 의상으로 갈아입은 아이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도 특히 미오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미나미 뿐만이 아니라 분명 오늘 처음 만났을 타 소속사 아이돌들과도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 미나밍도 카에데 씨랑 같이 일한 적 있구나?”

 “응. 이번 총선거 시작할 즈음에 잠깐. 같은 라디오에 게스트 출연했었거든. 깜짝 놀랐지 뭐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하필 나랑 같이 나온다고 해서 긴장도 됐고.”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언급만으로 이 정도의 호응을 받다니, 유명인은 다르군.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두 사람은 하나씩 답해줬다.

 “엄청 예쁘고 카메라 앞에서도 전혀 안 떨었어! 저것이야 말로 톱 아이돌! 우리의 목표이자 롤 모델이구나! 라는 느낌이었다니까.”

 “TV로만 볼 때는 멀어보였는데 실제론 그렇지 만도 않으시더라고. 일 하는 환경이나 주변 동료들은 어떤지 먼저 물어봐 주시고, 긴장하지 말라고 격려도 해주고. 또…… 술 약속을 잡으려고 했는데 얼른 거절했지. 못 마시니까.”

 “카에데 씨도 착각한 거겠지. 미나밍은 가만히 있어도 어른의 오오라가 풀풀 풍겨 나오니까.”

 “미오도 참……. 아, 그리고 온천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 일이 끝나면 알아봐둔 곳에 갈 거라던데. 사람들은 잘 모르는 숨은 명소를 찾았다면서.”

 “아, 겨울P! 여기!”

 미오가 크게 손을 흔들어 나를 반겼다. 나는 슬쩍 손을 들어 답했지만 다가가지는 않았다. 주위 아이돌들에게 경계하는 눈초리가 섞여있었다. 그러나 미오는 먼저 다가와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 프로듀서야.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고! 운동도 잘 하고 머리도 엄청 좋아!”

 무슨 부끄러운 소리를. 얼른 옷소매로 입을 막았다. 운동은 그렇다 치고 머리가 좋다는 건 대체 어디서……. 미오가 과장되게 읍읍 거리는 소리를 내자 아이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경계가 풀려 있었다. 놀라서 그대로 굳어있는데 미오가 팔을 풀고 무리로 들어갔다.

 정말이지, 겨울P는 부끄럼쟁이라니까. 미오랑 엄청 친하구나, 근데 왜 겨울P야? 분위기가 겨울 같아서, 내가 지어줬어. 아까 보니까 말을 좀 띄엄띄엄 하시던데. 외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됐거든. 외국? 어디? 한국, 전에 검색해 봤는데…….

 보였다. 붉게 얼룩진 환상을 뚫고 밝은 색채를 덮어씌우는 유성이. 누구의 영역이라도 상관없이 넘나들며 빛을 뿌렸고, 그 빛이 닿는 곳까지가 바로 미오의 영역이 되었다. 그로 인해 나와 저들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 듯 했다.

 그 때 미나미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잠깐 밖에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우리는 대기실을 나갔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미나미가 조심히 물었다.

 “사쨩 못 보셨나요?”

 “친구 분, 말이십니까. 못 봤습니다.”

 “화장실 갔다 온다고 나가선 아직 안 오고 있어서요. 핸드폰도 두고 갔는데. 혹시 겨울P가 보시진 않으셨나 하고.”

 “이 건물은 조금, 복잡합니다. 길을 잃으신 걸지도, 모르겠네요.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저도 같이…….”

 아니요.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 촬영 시간입니다.

 “닛타 씨는, 미오를 데리고, 스튜디오로 가십시오. 혹시, 다른 팀 촬영이 진행 중이어도, 기다려주시고요. 친구 분은, 제가 찾겠습니다.”

 “저기 그럼.”

 미나미가 망설이다 말했다.

 “혹시 아까 사쨩이 말한 얘기, 들으셨나요?”

 “…….”

 들으셨구나. 대답이 없자 미나미가 한숨을 쉬었다. 죄책감을 주려고 그런 건 아닌데.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사쨩이 좀 말을 직설적으로 하거든요. 학교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있어서 그러지 말라고 말 했는데. 겨울P에게 실례를 범해버렸어요.”

 “신경 안 씁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보다는 얼른, 스튜디오로 가주십시오.”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복도를 걷자 구두에 바닷물이 튀었다. 바지밑단이 젖어들고 말랐던 양말이 다시 스며든 물기를 흡수했다. 냉기가 말라비틀어진 정신을 적셨다. 바다를 좋아하진 않지만 혼자서 몸을 식힐 수 있는 이런 바다라면 두 손 들고 환영할 수 있었다.

 미나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히로시마에서 올라와 홀로 자취하는 대학생. 도전하는 것을 즐겨서 취미로 다양한 스포츠를 배우고 자격증 취득에도 열심이었다. 아이돌 활동도 그 도전의 일환인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이끄는 리더의 모습이 돋보였다. 선배 말로는 대학에서도 비슷한 모습이라고 한다.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면 미나미의 아이돌 활동은 대체적으로 노출이 많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미나미가 아니라 미나미를 프로듀스 하는 선배의 기획, 그리고 이런 기획이 주류가 되어있는 일본 연예 업계가 마음에 안 들었다. 미나미 본인은 어떤 일이든 마다않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그 도전 정신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노선으로 프로듀스 해보고 싶단 욕심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들었다.

 청순한 것도 나쁘진 않지만 여신 같은 매력을 살리는 게 좋겠지. 솔로 활동으로 노선을 잡고 드레스나 제복을 입히고. 비장미가 넘쳐흐르는 곡을 부르면 완벽할 거야.

 망상으로 무대를 세우다 갈림길에서 멈췄다. 오른쪽 복도 끝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는 사쨩이 있었다. 나를 발견하곤 쭈뼛대길래 천천히 다가갔다.

 “길, 잃으셨습니까?”

 “네…….”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마주치지 못 했다. 어깨는 움츠러들다 못해 구운 오징어처럼 말려들 지경이었다. 아까 자기가 한 말 때문에 눈치를 보는 건가. 보고 있으려니 안쓰러운 마음도 들고 왠지 내가 위협하는 구도 같았다.

 “닛타 씨는,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저쪽으로 가셔서, 왼쪽으로 도시고, 그대로 쭉 가십시오. 저는 할 일이 있으니, 먼저 가시고요.”

 길을 가르쳐주니 도망치듯 복도를 횡단했다. 이럴 거면 그런 말은 왜 한 거람. 폰을 꺼내 미나미에게 문자를 보냈다. 친구 분 찾았습니다, 이제 곧 가실 겁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촬영 중인 건가.

 잠시 기다리다가 이동하려는데 치히로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료는 잘 받았는데 물가에 애를 내놓은 것 같아 친히 걱정돼서 연락해 봤다고 한다. 나는 매우 황송해 하며 걱정하시는 일은 없으니 옥체를 보존하시라고 말했다.

 슬슬 돌아갈까. 10분 정도 지나서 스튜디오로 향했다. 이상하게 안이 소란스러웠다. 다른 소속사 아이돌들과 사쨩이 대립하듯 서 있고 중간에서 미오와 미나미가 중재하고 있었다. 당장 달려가서 상황을 파악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쪽 일행 분이 우리 아이돌에게 시비를 걸었어요.”

 타 소속사 프로듀서가 답했다.

 “막 촬영 끝내고 그쪽 아이돌들한테 자리 비켜주는데 옷이 이상하다느니 어떻게 저런 걸 입으냐느니, 막 말을 했어요. 자기 딴에는 조그맣게 말했지만 우리 아이돌한테 다 들렸고요. 그래서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아십니까?”

 나는 사쨩에게 물었다. 정말로, 그러셨습니까? 물었지만 사쨩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분노, 억울함이 담긴 행동에 더 강하게 추궁했다. 하셨습니까?

 “…… 했어요.”

 “왜, 그런 말을 한 거죠?”

 “이상하잖아요. 배는 다 드러내고, 어떤 건 등도 파이고. 감독은 외설스런 포즈나 취하게 하고. 변태 같이. 이런 걸 미나미한테도 찍게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쨩을 제지했다. 더는 들어줄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모자를 벗고 상대측 아이돌에게 허리를 숙였다. 겨울P! 미오와 미나미가 동시에 외쳤다.

 “죄송합니다. 이쪽 업계를, 잘 모르시는 분이라, 실언을 하셨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잠깐만요. 지금 제가 잘못했다는 거예요?”

 “잘못했습니다. 당신이.”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웬만하면 이런 어투를 담고 싶진 않았는데.

 “일반인이 보기에, 이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을 욕해서, 불쾌히 만들 이유는, 절대 못 됩니다. 여기 있는 분들, 아이돌들도, 프로듀서들도, 스태프들도, 전부 이 일에 프로답게, 진지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 열정에 대해, 함부로 말할 이유 따위, 어디에도 없습니다.”

 못 박았다. 사과하십시오, 아이돌 분들에게. 사형선고라도 받은 양 사쨩의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도움을 구하듯 미나미에게 눈빛을 보냈다. 미나미 또한 고뇌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어쩔 수 없군. 사쨩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이런 행동들이, 닛타 씨에게 폐가 됩니다.”

 그 말을 듣자 사쨩이 이를 꽉 물었다. 마지못한 표정을 고개를 숙여 감추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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