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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터의 어떤 하루 _ 리츠코, 치하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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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20, 2018 11:43에 작성됨.

 [지금 사무실에 리츠코랑 같이 있어. 사무실로 올 수 있어?]


 프로듀서로부터의 메시지였다. 자율 레슨에 한창이던 치하야는 스마트폰에 시간이 표시되어 있음에도 굳이 아날로그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는 오후 6시에서 약 10분 정도 미치지 못했다.


 [상관은 없습니다만 무슨 일 있나요?]


 꾹꾹 한 자 한 자 정자로 터치해 나간 후 메시지를 전송했다. 물이나 한 잔 먹을까 싶어 폰을 내려두려는 찰나에 진한 진동이 울렸다.


 [음.... 있기야 있지. 그러니까 얼른 와 줘. 기다리고 있을게.]


 치하야는 메시지를 한 번 읽고 갸웃했다. 다시 한 번 읽었다. 무슨 일이 있으니 기다리고 있겠다라. 혹시 그 전에 했던 일들 중에 실수한 부분이라도 있던 것일까 괜히 기억을 더듬어봤다. 약 2주 전까지의 행적을 뒤져봤지만 마음에 집히는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리츠코와 같이 있다고 했지. 그냥 별 거 아닌데 부르는 거 아닐까. 마침 시간도 저녁 시간이다.


 [알겠어요. 바로 가요.]


 사무실이라 해 봐야 몇 십 보만 움직이면 닿을 거리였다. 레슨실의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에 현재 모습을 한 번 비춰봤다. 살짝 땀이 나긴 했지만 보기 안 좋을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만 몇 번 만지고는 레슨실을 벗어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대기실에는 몇몇 시어터 멤버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스쳐지나가며 살짝 훑은 후 사무실의 문을 노크한 후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각각 의자에 마주 앉아 있던 프로듀서와 리츠코는 손바닥을 보이며 치하야를 맞이했다.


 “그냥 오셔서 불렀어도 좋았을 텐데요.”


 “프로듀서가 치하야를 절대적으로 방해할 수 없다 하시더라고.”


 “그게 뭐예요.”


 살풋 웃으며 치하야는 리츠코의 옆에 앉았다. 리츠코는 이온 음료 하나를 치하야에게 건넸다. 고마워. 입꼬리를 당기며 음료수를 받은 치하야는 열지 않고 제 앞에 놔두었다.


 “그나저나 프로듀서공. 이제 치하야도 왔겠다. 본론을 얼른 얘기해주시죠?”


 리츠코가 프로듀서 앞 탁상을 통통 두어 번 두드렸다.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케줄 보드 앞으로 가더니 매직 뚜껑을 따고 뒤에 꽂았다. 리츠코와 치하야는 영문을 모른 채 강의를 듣는 수험생처럼 보드판과 프로듀서를 번갈아 바라봤다. 프로듀서는 어느 한 날짜를 콕 찍어 선택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일주일 뒤, 요일은 금요일이었다.


 “이 날 말이야. 지상파 방송국에서 어떤 행사를 하는지 아니?”


 “...... 그걸 우리가 알 리 있나요.”


 리츠코가 볼멘소리 비슷한 걸 냈다. 그럼에도 프로듀서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합동 콘서트 생방송을 한단다. 아이돌 사무소 합동 콘서트 말이지.”


 “합동 콘서트라 하면... 모든 아이돌 사무소의 아이돌들이 참여한다는 건가요?”


 “치하야의 말이 맞긴 한데, 모든 사무소의 모든 아이돌이 출연하면 미어터지겠지. 선정된 사무소의 선정된 멤버들이 출연하게 되는데. 놀라지 마라. 얘들아.”


 프로듀서는 어깨를 쫙 펴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가득 띤 채 고의적인 정적의 시간을 가졌다. 뜬금없이 스케줄 표 앞에서 자신만만한 표정이라. 리츠코는 대충 프로듀서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예측이 가자, 그 행동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꾹 참고 치하야를 쳐다봤다. 치하야의 머리 위로 CG가 표현된다면 구름 모양 말풍선 안에 동그라미 3개가 땡땡땡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치하야가 나가게 됐어. 그것도 단체 엔딩 직전이자 솔로, 유닛무대의 엔딩 무대를 장식하게 됐어.”


 쾅. 프로듀서는 보드 판을 한 번 후려치더니 매직으로 글자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치하야. 합동 콘서트 무대. 엔딩에 별 3개.


 “방송국 공연의 엔딩 무대인가요? 그렇군요.”


 치하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새로이 생긴 스케줄을 머릿속에 담았다. 그 반응에 프로듀서는 방금 전 득의양양하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머리 위 가득 물음표를 띄웠다.


 “감흥이 없니. 치하야? 쟁쟁한 사무소가 모이는 합동 콘서트의 엔딩이라니까?”


 “어..... 좋아해야 하나요?”


 “프로듀서. 치하야는 음악 방송뿐만 아니라 여러 행사에서도 엔딩 무대를 이미 여러 번 선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라고요?”


 프로듀서는 말 그대로 좌절의 포즈를 보여주듯 어깨에 힘을 쫙 빼며 실망했음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그래도 말이다. 난다 긴다 하는 사무소의 아이돌들이 모인 공연 엔딩 무대라 하면 좀 와아-. 할 줄 알았어.”


 “......와아-.”


 “치하야, 그거 아웃. 영혼이 없다.”


 “나는 가득 영혼을 담았어. 나름대로.”


 로봇 같은 리액션과 굳이 그걸 지적하는 리액션 감별사의 대화를 보며 프로듀서는 생각했다. 그래, 내가 너희들에게 더 이상 무얼 바라겠니. 치하야가 엔딩 무대에 선다는 건 중요하긴 해도, 이 둘을 동시에 부른 필수의 이유는 아니었기에 프로듀서는 다음 말을 이었다.


 “뭐, 사실 리츠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긴 하지. 아예 곡까지 보내와줬거든? 파랑새 1절 부르고 약속으로 넘어갈 거 같아. 약속은 후반부 부분을 조금 줄인 형태일 것이고 따지자면 한 곡 반 정도 부르게 되는 거지. 정보는 이 정도인데... 문제는 말이다.”


 “왜 이 소식을 전하시는데 저를 불렀을까. 라는 거죠.”


 역시 리츠코였다. 이미 치하야의 이 스케줄과 자신의 상관관계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얘기하기 좀 더 편해지겠다 싶어 프로듀서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스케줄 보드를 잘 보렴. 뭔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지?”


 프로듀서가 살짝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스케줄 보드의 뷰를 넓혔다. 치하야와 리츠코는 문제 풀이를 하듯 열심히 동공을 움직이며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짝-. 박수소리와 함께 리츠코가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키며 허공에 동그라미를 쳤다.


 “출장이 있으시네요. 그것도 거의 일주일씩이나 말이죠.”


 치하야는 리츠코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점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닿은 부분을 중심으로 찍어 작게 머리로 원을 그렸다. 금요일이 낀 6일 동안 남쪽 섬으로 화보 촬영을 겸한 로케 일정이 잡혀 있었다. 무려 시어터에서 6명의 멤버가 동원되는, 규모가 큰 스케줄이었다.


 “화요일에 갔다가 일요일에 오게 되는 스케줄이거든. 그래서 치하야의 일에 내가 신경을 쓰지 못할 것 같아서... 리츠코에게 치하야의 서포트를 부탁해도 될까. 아무래도 이런 스케줄을 홀로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방금 전 치하야의 새로운 스케줄에 뿌듯해 하던 모습과 다르게 프로듀서는 양 손을 모은 채 전력으로 리츠코에게 부탁해왔다.


 “프로듀서.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 안 하셔도 된다고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반드시 돕는다고요. 이런 일의 부탁이라면, 제가 거절할 리 없잖아요.”


 흔쾌히 부탁을 수락한 리츠코에게 프로듀서는 연거푸 고맙다는 말을 꺼냈다. 아무리 리츠코가 프로듀서로서의 업무를 보고, 사무원의 일을 도와도 엄연히 이 사무소에 아이돌로서 소속된 일원이기에 같은 동료의 서포터가 되어 달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마음 한편이 편치 않다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걸 헤아려준 걸까. 그 속까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한 시름 크게 덜었다.


 “그런고로, 치하야. 이번 스케줄의 프로듀서, 아키즈키 리츠코야. 잘 부탁해.”


 안경을 한 번 고쳐 쓴 리츠코가 치하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훗. 치하야는 가벼이 미소 지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적당한 악력이 듬직했다. 몇 번 손을 흔들다가 서로 웃음이 터져 손을 놓았다. 아, 이 말 해줘야지. 치하야는 한 번 크흠. 목을 다듬고 리츠코에게 화답했다.


 “잘 부탁해. 프로듀서.”


*


 프로듀서와 해당 스케줄의 멤버들은 화요일 이른 아침 공항으로 떠났다. 그 전날 프로듀서에게 이번 치하야의 스케줄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전달받은 리츠코는 자신이 할 일이라고는 당일에 현장으로 치하야를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정도가 전부라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 공연 전까지는 며칠이나 남았는데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허점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프로듀서로서의 서포트가 아니라 픽업 운전기사로서의 서포트가 전부일 거 같은데. 아무렴 뭐 어때. 그 만큼 프로듀서가 자신의 빈자리에 대한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고자 애썼다는 뜻일 테니, 그 뜻을 가만히 받들면 그만이었다.


 '혹시 행복이 가까운 곳에 있더라도.....’


 치하야의 노랫소리가 레슨실의 방음을 뚫고 들려왔다. 스케줄이 정해진 후 오게 된, 콘서트에 쓰일 MR을 치하야는 온 힘을 다해 연습하고 있었다. 파랑새와 약속이라면 이미 이골이 나도록 부르고 불렀던 노래였음에도. 잠깐 감상에 젖어 레슨실의 문 앞에서 리츠코는 새어 나오는 노랫소리에 집중했다. 해 떨어진 밤 울려 퍼질 치하야의 노래. 환호하는 관객들의 에너지. 상상만으로도 벅차오르는 이미지였다. 막상 머릿속에 그려보니 엔딩 무대를 펼치게 되었다며 뿌듯해하던 프로듀서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리,츠코?”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정신 차리고 보니 레슨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에는 치하야가 궁금증 가득한 표정을 띄운 채 리츠코를 쳐다보고 있었다.


 “응? 응. 연습 끝난 거야?”


 지금 내 모습을 거울로 보면 굉장히 멍청한 표정이었겠지. 리츠코는 일단 벌리고 있던 입을 닫고는 괜히 안경을 한 번 추슬렀다.


 “밖에 누가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방해 됐던 모양이구나.”


 “아니, 방해라기 보단 이따가 유닛 연습도 있어서 혹시 그 멤버들이 아닐까...”


 “유닛...? 아, 이터널 하모니 말이지.”


 “응. 내가 연습하고 있어서 못 들어오는 건가 싶어서.”


 금요일의 합동 콘서트 솔로 무대 건 말고도 치하야에게는 최근 새로운 작업이 하나 생겼다. 시어터조의 멤버들과 함께 유닛을 결성하여 극장에서 무대를 선보이게 된 것이 그것이었다. 유닛 멤버들과 맞춰보고 있다는 걸 들었는데 그 날 중에 하나가 오늘인 모양이었다.


 “유닛은 어때? 잘 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


 “다들 재능 있고 근성가들이더라구. 그 사이에서 리더라니. 아직도 잘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


 “으음. 재능 있는 근성가라면 그 중 제일가는 건 치하야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놀리지 마.”


 쑥스러워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리츠코는 후훗. 하고 웃음 지었다. 그나저나 라이브의 연습마저도 이토록 철저하면 정말로 프로듀서적인 업무에서는 손 볼 일이 전혀 없었다. 이거야 원, 양손을 합장하며 부탁하던 프로듀서는 대체 무엇을 부탁한다는 거였을까. 가만히 받들면 그만이라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거저먹는 거잖아. 애초에 치하야에게 허점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었고.


 “별 일 있으면 연락할게. 괜히 시간 빼앗는 것 같네.”


 “시간을 빼앗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 리츠코도 수고해.”


 “수고할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들 정도로 내가 할 일이 없어. 간만에 수완을 좀 보일 일이 생길까 싶었는데 말이지.”


 리츠코의 능청에 이번엔 반대로 치하야가 웃음 지었다. 치하야는 아이돌로 활동하면서도 간간히 프로듀서적인 업무를 보는 리츠코가 항상 대단하다고 생각해왔었다. 시어터 멤버들이 입사하면서 그 업무적인 재간을 보일 일은 시어터 멤버들 한정이었다. 리츠코에게 스케줄의 도움을 받는 건 정말 간만의 일이었다. 프로듀서가 리츠코에게 갖는 믿음만큼 치하야는 리츠코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이번의 라이브 무대가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어-. 치하!”


 가까이서 줄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치하야와 리츠코는 동시에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봤다. 줄리아를 필두로 후카, 에밀리, 마츠리. 이터널 하모니의 멤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봐야겠다. 수고해.”


 치하야에게 손을 흔든 리츠코는 다가오고 있는 유닛 멤버들에게도 손을 흔들며 인사를 대신한 후 사무실로 향했다. 졸지에 만남의 손 인사이자 작별의 손 인사를 동시에 받은 멤버들은 엉겁결에 리츠코에게 가지각색의 인사를 보냈다.


 “리츠코씨랑 대화하고 계셨던 건가요?”


 에밀리의 물음에 치하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얘기 들은 거예요.”


 “얘기?”


 마츠리의 말에 치하야는 핵심의 단어만을 되물었다.


 “리츠코쨩이 이번에 치하야쨩의 프로듀스를 맡게 되었다면서?”


 후카의 말에 치하야는 마츠리의 말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와전되어 있었다.


 “프로듀스라기 보단 이번 금요일 스케줄에 리츠코가 프로듀서의 자리를 대신 하기로 했어요. 아시다시피 프로듀서가 출장을 가셔서.”


 “이야... 그 행사, 엄청나다지? 웬만한 사무소의 이름 있는 아이돌들이 다 모인다던데.”


 줄리아의 말에 치하야는 수줍게 웃었다. 딱히 더 이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시게 되었다는 거 말이죠? 저도 그 말 듣고 역시 치하야씨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줄리아와 에밀리의 말을 시작으로 이번 합동 콘서트의 무대에 대한 말이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갔다. 콘서트에 대한 정보는 오히려 치하야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소속사에 이런 멤버도 나온대, 저 소속사에선 이런 그룹이 나온다지? 같은 말들. 참가자의 이름이나 그룹명이 치하야의 귀에도 익숙하게 들어오는 걸 보니 프로듀서의 말이 허튼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치하야에게는 그저 여러 스케줄 중 하나의 일 그 이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다만 오고가는 여러 말 중에서 살짝 귓가에 신경 쓰이게 들리는 대목이 있었다.


 “주제가 ‘청춘, 청량한 한 때.’ 라죠? 상당히 시적이고 멋진 주제인 것 같아요.”


 에밀리의 언급으로 알게 되었다. 청춘과 청량을 주제로 잡은 합동 콘서트. 그러고 보니 방송사가 주최하는 합동 콘서트란 건 알았지만 정확한 콘서트의 이름이나 주제에 대해서는 전해들은 게 없었다. 그저 무대만 선보이고 오면 되는 출연자의 입장이지만 그래도 그 콘서트를 통달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있었다. 치하야는 유닛 연습이 끝나는 대로 리츠코에게 콘서트에 대한 정보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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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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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서트의 정확한 이름은 청춘 프라임 콘서트라는데 그냥 청춘 콘서트라고 통칭하는 거 같아. 아아. 주제는 그게 맞아. 청춘, 청량한 한 때. 그거. 아무래도 출연진들이 다 아이돌이고 나이도 어릴 테니까 청춘을 주제로 잡은 게 아닐까싶은데. 응. 응. 그래. 오늘 여러모로 고생 많았고, 집에 가서 푹 쉬어. 밥 꼭 잘 챙겨먹고! 응.”


 치하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극장 사무실에서 볼 수 없는 일 때문에 리츠코는 사무소로 건너와 있던 상태였다. 치하야는 공연의 이름과 주제 등에 대해 물어본 후 전화를 끊었다. 치하야에게 이에 대해 정확히 전달하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니 프로듀서마저도 합동 콘서트의 엔딩 무대라는 점만을 강조하며 스케줄의 소식을 전해 왔었다. 하여튼 간에 이 프로듀서, 허점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라니까. 그래도 이 정도의 실수는 실수축에도 끼지 않으니까 리츠코는 웃어넘기기로 했다. 대충 사무일을 마무리 짓고 기지개를 펴니 밤 9시를 지나 있었다. 일은 이쯤하고 이제 들어가 볼까 생각하며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검색창에 키사라기 치하야를 검색해보았다. 별 다른 기사는 없었다. 치하야의 이름이 많이 나올 때라면 곧 오게 될 이번 주 금요일 정도일 것이다. 그러다 문득, 치하야의 이름이 포함된 검색 기사에서 시선을 당기는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지상파 주최 합동 콘서트, 459프로 '신예' 사쿠사 미치로도 출연]


 459프로? 신예? 기사를 눌러 읽어보니 막상 내용은 별 거 없었다. 합동 콘서트에 사쿠사 미치로라는 아이돌이 출연하고, 그 콘서트에는 이러이러한 아이돌들이 등장한다는 정도의 홍보 기사였다. 위화감을 느낀 건 합동 콘서트에 관련된 기사는 아직 뜬 것이 없었고, 이 기사가 거의 유일한 기사라는 점이었다. 방송사에서는 아직 오픈하지 않은 걸 이 소속사에서 미리 오픈했다는 뜻일 텐데. 하지만 단 하나의 기사로 섣부른 추측도 위험했다. 신예라는 건, 주목받는 신인 아이돌이라는 의미일 테니 합동 콘서트에 출연한 업적을 알리고 싶었던 거 아닐까. 그 이유라면 합당할지도. 별 거 아니겠지 싶어 리츠코는 포털 사이트의 모니터링을 그만 두었다. 내일과 내일 모레는 그저 똑같이 할 일 하면 되고 금요일에만 좀 신경 쓰면 되겠구나.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리츠코는 퇴근을 위해 주섬주섬 짐을 정리했다.


*


 띠리리링-. 띠리리리링-.


 알람인가? 내가 알람을 이토록 재미없는 음으로 맞춰놨던가?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뜬 리츠코는 머리맡을 몇 번 더듬거린 끝에 손에 잡힌 휴대폰을 집어 올려 액정을 확인했다. 아직 잠에 취한 시야는 액정의 글자를 쉬이 알아보지 못했다. 최대한 가까이로 가져다대니 ‘프로듀서’ 넉 자가 들어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래그에 성공한 리츠코는 귓가에 털썩 휴대폰을 가져다댔다.


 “여...보세요...”


 ‘리츠코, 미안.'


 “아녜요. 무슨 일.... 있나요?”


 ‘방송국에서 어제 무슨 연락 받은 거 있었어?’


 “방송국이요? 음.... 아니요. 어제 별 다른 일 없었는데요.”


 ‘별 다른 일 없었다고? 아무런 연락 받은 것도 없어?’


 프로듀서의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서서히 잠이 달아난 리츠코는 잠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나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침에 기사가 떴는데, 엔딩 무대가 바뀌었다더라.’


 잠깐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리츠코는 머리를 굴리며 ‘엔딩 무대가 바뀌었다’에 맞을 법한 일을 찾았다. 아직 뇌가 잠에서 완전히 깬 게 아닌지 지끈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순간 총알이 스치듯 확, 날카롭게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치하야 스케줄 말인가요?”


 ‘나한테 연락이 안 와서 사무소 쪽으로 합의 된 상황인 줄 알았어.’


 “그게 무슨...... 프로듀서. 이따 제가 다시 전화할게요.”


 프로듀서의 대답을 채 듣지 못한 채 전화를 끊은 리츠코는 바로 인터넷 앱으로 들어갔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 볼 필요도 없이 상단에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상파 주최 합동 콘서트, 엔딩 무대에 459프로 '신예' 사쿠사 미치로가 꾸민다]


 459프로, 신예, 사쿠사 미치로. 어젯밤 퇴근하기 직전 봤던 기사에서 봤던 헤드라인과 똑같은 글자들이 들어간 기사였다. 틀린 점은 ‘엔딩 무대’라는 단어가 포함되었다는 것. 바로 클릭해서 기사를 속독하기 시작했다. 데뷔한지 만 1년이 채 되지 않는, 하지만 외모와 실력이 출중해 대중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고 있는 이 시대의 청춘 아이돌 사쿠사 미치로라는 이가 다른 방송사도 아닌 지상파 방송사가 주최하는 아이돌 사무소 합동 콘서트 엔딩 무대에 선다는 내용의 기사. 그 기사의 핵심적인 내용은 다름 아닌 ‘765프로의 키사라기 치하야를 제치고’


 “이게 뭐야.”


 시선이 서걱거렸다. 리츠코는 버퍼링에 걸린 양 ‘765프로의 키사라기 치하야를 제치고’라는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다. 선뜻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 머리를 강하게 긁었다. 생각하자. 리츠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하자. 포털사이트를 새로 고침하자 이 기사에서 파생된 기사들이 하나둘씩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단 집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리츠코는 서둘러 출근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가기 직전, 치하야에게도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일어나는 대로 당장 극장 사무실로 와 줘.


*


 극장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포털 사이트를 확인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화제의 키워드마저도 이번 일에 대한 검색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다시 기사를 확인했다. 기사가 어떤 프레임을 중점으로 쓰여 있는지 우선 알아야 했다. 콘서트의 홍보를 위함인가, 콘서트에 출연하는 출연자의 홍보를 위해서인가, 아님 다른 무언가의 이유가 있는 것인가.


 [0월 0일 금요일 오후 6시부터 시작하는 지상파 방송사 주최 아이돌 합동 콘서트 ‘청춘 프라임 콘서트 - 청춘, 청량한 한 때.(이하 청춘 콘서트)’에 마지막 솔로 무대를 459프로 신예 사쿠사 미치로가 꾸민다.


사쿠사 미치로는 1년 전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아이돌로 뛰어난 외모와, 상당한 실력으로 한 순간에 입지를 다져 201*년 올해의 뉴스타 부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청춘과 청량함의 이미지로 활동하는 그녀인 만큼 이번 합동 콘서트 주제에도 상당부분 부흥하여 마침내 라스트 무대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이 여러 관계자의 전언이다.


청춘 콘서트는 지상파 방송사 최초로 시도되는 아이돌 사무소 합동 콘서트로 현재 아이돌 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솔로, 그룹의 멤버들이 출연하여 약 두 시간 동안 공연을 펼치며 765프로의 ‘키사라기 치하야’ 또한 출연한다.


소식을 전한 관계자는 765프로의 키사라기 치하야를 제치고 솔로 엔딩 무대를 갖게 된 사쿠사 미치로의 입지가 그만큼 넓어졌다는 거 아니겠느냐 평했다.]


 기사에 고의적인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콘서트의 주제와 사쿠사의 이미지를 연관 짓는 점, 그 수많은 아이돌 출연자 중에 굳이 765프로의 키사라기 치하야를 언급한 점, 그녀를 제치고 엔딩 무대를 갖게 되었다는 이유로 입지에 대한 평을 내린 점. 공연 불과 이틀 전에 기사로 때려버린 점. 턱을 괸 리츠코는 발을 까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공격받은 거다. 주최 측으로부터도, 이 사무소로부터도.


 "리츠코. 불렀어?"


 사무실 문을 열며 치하야가 들어왔다. 연락을 보자마자 바로 온 것 같은데 외향으로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리츠코는 자신의 옆으로 의자를 하나 놓고 치하야에게 손짓하며 빈 의자를 팡팡 두드렸다. 치하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오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미안하지만, 치하야. 일이 좀 꼬인 거 같아.”


 리츠코는 더 길게 말을 늘일 필요도 없이 해당 기사를 치하야에게 보여주었다. 치하야는 진지한 표정으로 기사를 정독해 내렸다. 기사를 보는 치하야를, 리츠코는 기사와 번갈아가며 반응을 살폈다. 심각해 보이는 표정이지만 미동은 없다. 속을 짐작할 수 없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치하야는 집중하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곤 리츠코를 쳐다봤다. 치하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멀뚱멀뚱 시선만 마주할 뿐이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리츠코였다.


 “소감은?”


 “그렇구나.”


 “끝이야?”


 “......별로 상관이 없지 않을까 싶어서.”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치하야는 여러 고난을 헤치며 이 일을 지속적으로 해 오면서 많이 유해지고,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무대에 있어서는 외골수였다. 애초에 치하야에게 이 무대의 엔딩 무대를 맡았다느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거겠지. 이해하지만, 이제는 수긍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주최하는 쪽은 하물며 통보조차 없었고, 추측일 뿐이지만 새로이 엔딩 무대를 맡았다는 쪽은 치하야를 이용하고 있었다.


 “아니야. 치하야.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까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지만.”


 “무대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그저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해. 꼭 엔딩 무대일 필요는 없잖아.”


 꼭 엔딩 무대일 필요는 없다. 아니, 없을까? 치하야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묻는다. 그 ‘어떻게’에 확답을 줄 수 없었다. 공연까지는 단 이틀이 남았다. 어영부영하다가는 꼼짝없이 눈뜨고 코 베인 채 공연을 해야 한다. 리츠코는 가만히 생각했다. 차근차근 짚어 나가보자. 지금 이 상황을 분개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란 무엇인가. 주최측의 무례함? 타 사무소의 언론플레이? 단지 이것뿐일까? 기사에서 굳이 강조한 ‘765프로의 키사라기 치하야를 제치고’란 멘트는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있지, 치하야.”


 “응?”


 “그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확실해진다면, 너도 생각을 좀 바꿀 수 있겠지?”


 좁혀진 미간에서 리츠코의 온갖 고뇌들이 느껴졌다. 그 고뇌를 마주하며 생각했다. 치하야로서는 지금 이 기사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직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시간조차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면 그 뒤의 일들에 휩싸이다 무대까지 휘말리는 것 보다는 어찌되었든 준비된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는 분명 그저 공연하는 사람으로 출연하는 출연자로서의 방안이라는 것 또한 치하야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스케줄에서 프로듀서로서 자신을 뒷받침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리츠코가 유일했고, 리츠코는 이 해프닝이 단순히 순번의 이유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같은 바닥을 구르고 있지만 서로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사뭇 달랐기에 지금으로서는 공연 이외에 치하야가 할 수 있는 건 리츠코를 믿는 것이다.


 “나는 언제든지 생각을 바꿀 수 있어.”


 치하야의 답이 나오자마자, 리츠코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 빈자리를 치하야는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미처 리츠코가 끄지 않은 컴퓨터 안의 기사를 다시 정독했다. 청춘, 청량한 한 때. 청춘과 청량함의 이미지로 활동하는 그녀인 만큼 이번 합동 콘서트 주제에도 상당부분 부흥하여......


 과연 노래를 부르는 나에게 청춘과 청량함의 이미지가 있을까?


*


 프로듀서에겐 이 일을 최대한 해결해 볼 테니 걱정 말라는 연락을 보냈다. 지금 발걸음을 향하는 곳은 주최하는 방송사였다. 분명 규모가 큰 행사일 테니 해당 콘서트에 투입되는 인력이 많을 것이고, 그 인력들 중에 아는 사람이 없으리란 법 또한 없었다. 전화나 메일을 붙들고 있기엔 시간이 없다. 행동해야 한다. 얼굴 팔린 아이돌이기에 방송국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쉬웠다. 아는 얼굴들과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며 무작정 찾아간 곳은 사무소에서 자주 출연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사무실이었다.


 “어엇? 리츠코쨩?”


 다행이다. 사무실을 기웃거리기 전에 먼저 감독이 아는 체를 해 왔다.


 “아아. 감독님. 어디 갔다 오신건가요?”


 “휴게실에서 잠깐 담배타임을 좀 가졌지.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녹화?”


 감독의 말마따나 진한 담배향이 베어왔다. 살짝 속이 메스꺼웠으나 리츠코는 티를 내지 않았다.


 “녹화는 아녜요. 그게...”


 리츠코. 지금은 아이돌로서 온 게 아니다. 한 명의 프로듀서로서 항의차 방문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았다. 약해지지 말아야 한다.


 “합동 콘서트. 감독님도 혹시 담당하시나요?”


 “합동 콘서트... 아 그 청춘 뭐시기하는 그거 말하는 거구나. 나는 그 일에서 빠졌거든.”


 “그럼 콘서트를 연출하시는 감독님을 찾아뵐 수 있을까요?”


 “그거야 뭐 어렵지는 않지만, 무슨 일 있는 건...... 아.”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리츠코는 그 찰나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아시는거군요.”


 “치하야쨩 강판된 거 말이지?”


 “방송국에서는 강판이라고 표현하나보네요.”


 “그게 말이지.....”


 머뭇거리더니 사무실 안으로 리츠코를 불러 들였다.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감독은 몇 번 두리번거리더니 비밀 얘기를 꺼내는 것처럼 숨죽여서 입을 열었다.


 “후원해주는 업체 중에 제일 영향력이 센 업체가 탄산음료 쪽으로 제일가는 음료 제조쪽 업체거든. 그 업체랑 459프로는 자매 기업이랄까. 이어져있어.”


 “459프로라면...”


 “사쿠사쨩 말이다.”


 “결론은 돈이라는 건가요?”


 흥분한 리츠코가 목소리를 높였다. 감독은 그런 리츠코를 향해 검지를 펴 자신의 입에 가져다대며 목소리를 낮추길 권했다.


 “돈이라고 확정할 순 없지만 단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거야. 아, 원래 이런 거 알려주면 안 되는데. 리츠코쨩이랑 765프로는 우리가 항상 도움을 받고 있으니 말이지.”


 감독은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한참동안 인상을 구기며 고민하더니, 앞에 있던 종이 한 장을 찢어 전화번호 하나를 적어주었다. 다 적어놓고도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다. 리츠코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 모르겠다. 한숨 섞인 육성으로 저 다섯 음절을 뱉은 감독은 리츠코의 손에 전화번호를 쥐어주었다.


 “콘서트 총 책임자 연락처야. 알기론 오늘 미팅이 있다고 해서 자리를 비웠을 거거든. 일단은 이거라도.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이 정도인 것 같아.”


 총 책임자의 연락처라면 생각 이상의 이득이었다. 리츠코는 연거푸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감독은 이 모습이 눈에 띄는 걸 꺼려하면서도 리츠코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사무실을 벗어나자마자 일단은 도움을 준 감독과는 최대한 멀어지기로 했다. 한 층 밑으로 내려가 휴게실로 향했다. 휴대폰에 잽싸게 전화번호를 입력한 후 종이를 여러 갈래로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잠깐만 앉아 있다가 가자. 휴게실에 마련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떠한 거래가 있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기업 간의 야합은 예상하지 못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만도 못할 수 있을 거 같단 불안감이 들었다.


 어어. 765프로씨 아니신지요?


 낯선 목소리에 리츠코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양복을 입은 중년의 신사.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단 알아봐 준 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하... 누군가 했더니 아키즈키 리츠코씨군요.”


 “누구시죠?”


 “그..... 일단은 유감을 표합니다. 심심한 위로의 말씀도 드리지요.”


 말투에 기분 나쁜 웃음이 섞여 들어가 있었다.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리츠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리츠코에게 건넸다. 459프로덕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오고 가는 이 하나 없는 방송국의 휴게실에서 이 사태의 원흉 아닌 원흉을 떡하니 만났다.


 “소식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키사라기씨의 순번이 끝에서 두 번째로 바뀌었다지요?”


 듣지 못했던 사항이다.


 “아아. 알려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하긴 원래 공연 순번은 그 직전에도 바뀔 수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765의 프로듀서는 어디가고 소속 아이돌이 방송국을 홀로 활보하고 다니는 거죠?”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765프로에는 프로듀서도 겸업하고 있는 아이돌이 있다는 걸 말이죠.”


 프로듀서를 겸업하는 아이돌이라는 말에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리츠코는 오기가 발동되었다.


 “그나저나 대단하시네요. 공연 이틀 전에 순번을 바꿔치기하시는 거. 적어도 저희 측에 상의라도 해야 마땅한 도리 아닌가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디 그 엔딩 무대를 가로챈 이유라도 들어보자 싶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쏘아붙였다.


 “주최하는 곳과 얘기를 나누면 그만 아닐까요? 그리고 솔직히 언제적 파랑새와 언제적 약속이란 말인지요. 파랑새와 약속에서 청춘의 청량감. 청춘의 푸릇푸릇함. 그런 걸 느낄 수 있겠어요?”


 “네?”


 “주최측이 우리 사무소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겁니다. 우리 아이돌은, 치하야가 가지고 있지 않은 청춘의 봄날을 가지고 있거든요.”


 상황을 분개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 리츠코는 그 해답을 찾았다. 이 엔딩 무대의 스틸이 갖는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은 단순히 순서를 뒤집는 게 아니라 순서를 뒤집으며 치하야를 자신들의 서사에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파랑새와 약속, 그 뒤에 이어질 공연의 주제와 부합할 무대. 그 키사라기 치하야를 제치고 엔딩 무대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저기, 하나 말씀드리죠.”


 “뭘 말이죠?”


 “자신들의 작전은 함부로 입 밖에 내뱉는 게 아니에요. 그것도 동종업계 사이에선 말이죠.”


 리츠코의 눈에서, 다른 때에 볼 수 없는 독기가 서렸다. 서늘한 기운이 뒷골을 감쌌다. 피가 식자, 냉정해졌다. 냉정해지자, 길이 보였다.


 “그래봤자 765프로 아닙니까. 착한 사무소라는 그 이미지를 함부로 버릴 순 없을 텐데요.”


 “착하다는 게 마냥 바보처럼 당한다는 말은 아니거든요. 우리를 밟으셨으니, 그에 상응하는 지뢰가 되어드리지요.”


*


 청춘이란 무엇일까. 청춘이란 이미지를 대중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청량하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노래를 부르는 나의 모습에 청춘과, 청량함은 과연 존재할까. 치하야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파랑새의 치하야와 약속의 치하야가 주제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레슨실의 벽에 기대앉은 치하야는 유닛 멤버들의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색의 늪을 헤매고 있었다. 심각한 와중에 한 번씩 치하야는 휴대폰의 액정을 살폈다. 평소의 치하야에게 쉬이 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치하-. 오늘 컨디션이 좀 그래?”


 줄리아가 물을 한 병 건네며 치하야의 곁에 앉았다. 어? 어. 아니. 뭐라 명확한 대답을 해 주지 못한 채 줄리아가 건넨 물병을 받았다. 뚜껑을 돌려 따 한 모금을 꿀꺽 마셨다. 적당히 시원했다.


 “아니면 내일 모레 공연이 신경 쓰인다거나?”


 “음... 줄리아. 내 이미지는 어때?”


 “이미지? 어... 이미지라면 무슨 이미지를 말하는 거야?”


 “음. 음... 그래. 노래 부르는 내 이미지는 어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가희지.”


 “가희라는 건 뭘까?”


 “뭐라 해야 할까. 디바 같은거려나? 으음......”


 “디바?”


 “......저기. 치하. 스무고개 같은 거 하는 건 아니지?”


 “파랑새를 부르는 나는 그저 애절한 보컬리스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려나? 아니 굳이 노래를 부르는 내가 아니더라도 방송에서 볼 수 있는 나의 이미지는......”


 “콘서트 때문이구나.”


 줄리아의 답에 치하야는 말을 멈췄다. 대답 대신 고개를 떨어뜨리듯 끄덕였다. 줄리아는 한동안 치하야에게 해 줄 말을 찾지 못했다. 줄리아 뿐 아니었다. 후카도, 마츠리도, 에밀리도 기사를 통해 콘서트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치하야가 그에 대해서 언급뿐만 아니라 내색조차 하지 않았기에 네 명의 멤버들은 그 소식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래도 치하야니까, 괜찮은 거겠지 생각했으나 섣부른 판단이었던 모양이었다. 치하야는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주저앉아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집중 못 해서 미안해. 연습 다시 해 볼까?”


 “생각이 딴 데 가 있으면 위험하다고?”


 “지금은 생각을 좀 버리고 싶어.”


 “저기, 치하. 우리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혼자 감당할 수 없다면 의지해 줘. 고민이라도 토로해줬음 좋겠고, 행동적인 부분에서라도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싶어.”


 줄리아는 치하야의 앞을 가로 막고 말했다. 시야에 가득한 줄리아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치하야는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응. 그럴게. 속에 있는 응어리를 토해내듯, 귀에 닿을 듯 말 듯 답했다. 치하야는 레슨실의 중간에 서 레슨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방금 전까지 고뇌에 사로잡혔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유닛의 연습이 시작되었다.


.

.

.


 “있지, 치하야. 선곡을 뜯어 고칠 거야.”


 유닛의 레슨이 끝난 후 리츠코는 치하야를 극장의 사무실로 따로 불렀다. 유닛 멤버들과 레슨을 정리한 후 숨을 채 고르지 않은 채 사무실로 가자 맞이한 건 굳은 표정의 리츠코의 돌발적인 발언이었다. 치하야는 의문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선곡을 뜯어 고친다는 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파랑새와 약속을 포기할거라고.”


 “저기, 그 전에. 어디 갔다 왔어?”


 리츠코의 연락을 기다렸다. 고뇌에 빠져 있는 와중에도 한 번씩 흐름을 끊으며 액정을 살피던 건 그 이유였다. 뛰쳐나가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연락이 없더니 사무실로 불러서 한다는 말이 선곡을 뜯어 고친다는 말이었다. 납득하기 위해선 중간 과정을 알아야했다.


 “방송국에 다녀왔어.”


 “혼자서?”


 “응.”


 “......되게 무모했네. 리츠코.”


 “그래서 좀 승산이 있었지.”


 굳어있는 표정에 말투는 딱딱했지만 아침때와 확연히 다른 점은, 리츠코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에 모든 계산을 마친 것 같았다. 리츠코의 책상 위로는 수많은 자료들이 쌓여 있었고 수기 작업도 있었는지 이면지에 빼곡한 문장들이 채워져 있었다.


 “일단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가를 설명 해줘야 하겠지. 일단, 459프로가 라스트 무대를 노린 이유는 해당 사무소에서 자신들의 아이돌인 사쿠사 미치로를 대중들에게 강렬하게 인상을 박기 위해서. 누구를 이용해서? 바로 키사라기 치하야를 이용해서.”


 “...... 나를 이용해서?”


 리츠코는 컴퓨터에 기사 하나를 띄웠다. 아침에 봤던 그 기사였다.


 “아이돌 합동 콘서트의 주제를 두 단어로 표현하자면 청춘과 청량함이야. 그리고 여기 봐봐. 사쿠사 미치로가 갖는 이미지. 청춘과 청량함. 라스트 무대를 갖는 아이돌의 이미지가 콘서트 주제에 부합하지? 서로 기맥이 통하는 것끼리 마무리를 짓는다. 누구의 무대 후에? 치하야의 무대 후에.”


 “저기, 리츠코. 그렇다면 역시 청춘과 청량함이라는 그 이미지에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지?”


 유닛 레슨 내내 치하야를 괴롭히던 번뇌 중에 하나였다. 그를 리츠코는 냉철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미지를 분석 당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있지, 파랑새와 약속을 부르는 치하야라고 그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어. 내가 그렇게 느끼면 그만이거든. 파랑새를 찾는 치하야를 내가 청춘이라고 느꼈다. 그럼 청춘인거지.”


 “그럼 악곡을 포기하는 이유가 뭐야?”


 “그 악곡에 대항하는 곡을 그들이 준비할 것이기 때문이지.”


 리츠코는 컴퓨터와 화면을 다음으로 넘겼다. 사쿠사 미치로의 악곡 중 하나를 플레이했다. 장조의 흐름으로 흘러가는 노래의 느낌은 전반적으로 밝고, 활기찼다. 이 아이돌의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귀에 못이 박히라 듣고 있는 청춘과 청량함의 이미지를 매치시킨다면 충분히 그렇게 느끼고도 남을 음악이었다.


 “파랑새랑 비교하도 궤가 좀 다르지?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이 음악과 비슷한 흐름을 들고 나와서 선방을 때려버리잖아? 그럼 이야기가 좀 달라질걸?”


 “공연의 분위기를 비슷하게 흘러가도록 맞춘다는 걸까?”


 “비슷한 분위기라면 대중이 더 좋았다, 나쁘다를 판가름 할 수 있는 건 바로 실력이니까.”


 “......떠오르는 노래가 있어.”


 “이거겠지?”


 리츠코는 플레이 되고 있던 노래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치하야의 노래를 플레이 시켰다. 치하야는 노래의 제목을 읊조렸다. Just be myself. 이 노래의 분위기라면 소위 말하는 콘서트의 주제에도 충분히 부합될 것이다.


 “그런데 리츠코. 선곡은 우리가 했던 게 아니었잖아.”


 “응. 그러니까 딜을 해야지.”


 “딜?”


 “빼앗긴 거에 대해서 보상은 있어야 할 거 아니겠어? 얻어올 수 있는 선에선 다 얻어 올 거거든.”


 “잠깐만. 리츠코.”


 리츠코의 말들은 논리 정연했고 치하야 역시 리츠코의 뜻에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이틀이 남은 콘서트에서 딜이란 걸 한다면 얼마나 할 수 있겠으며, 혹여나 그 과정에서 리츠코가 좋지 않은 일에 휩쓸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무리하는 거 아니지?”


 “그거 알아? 얼마 전에 시어터 멤버들 중에 한 명이 인지도가 부족하지 않느냐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할 뻔 한 거.”


 “얘기 들은 적 있어.”


 “시어터 멤버들에게 크던 작던 그런 자잘한 일이 일어나는 게 의외로 비일비재하거든. 이번엔 시어터 멤버가 아니야. 키사라기 치하야라는 유명 아이돌에게 일어난 일이야. 대응하지 않는다면, 얕보이게 될 거야. 그걸 묵과할 수 없어.”


 “하지만 무모하게 움직이다간 뒷감당이 힘들어 질 수 있어.”


 “있지 치하야. 내가 이렇게 날뛰려고 하는 자신감의 원천은 너니까 너는 나를 믿고 오로지 무대에만 신경 써 줘.”


 치하야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것도 잠시 리츠코가 보내는 신뢰의 눈빛을 마주하자 가슴 속에 남아있던 찜찜함과 고민들이 아무런 필요가 없어진 양 사그라졌다. 다시 노래 할 수 있었던 어느 날의 무대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 때 주었던 믿음과, 지금 주고 있는 믿음이 향하는 뜻은 다르겠지만 그 원천의 뿌리는 굳건했다. 리츠코는, 치하야 자체를 믿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잖아.”


 “무대 위를 부탁할게.”


 “뒤를 부탁해. 리츠코.”


 여전히 치하야에게 무대 뒤편, 물밑의 이야기는 힘들다. 그러나 리츠코라는 버팀목이라면 그 물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에게 전적으로 기대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에 있어선 과감히 맡기는 과정도 필요하다. 지금이 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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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으로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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