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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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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19, 2018 03:40에 작성됨.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2)】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뜻밖이네요. 먼저 연락을 할 거라곤 생각 못 했습니다.”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 싸인, 서재로 추정되는 작은 방 안에서 한 남자가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리는 그는 평소엔 늘 검은색 계통의 정장을 걸치고 다니는 남자였지만, 지금은 움직이기 편한 트레이닝 복 바지 위에 흰색 셔츠를 대충 걸치고 있었다.


“하하, 아니요. 불만 같은 게 아닙니다. 이런 변방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신경 써주시는 게 참 황송해서 말이죠. 아, 관심이 있는 건 이 쪽이 아니던가요?”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군요. 그래서, 그 남자는 뭐라고 하던가요?”


다시 한번,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던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니 별 수 없지요. 어찌되었든 결정권을 준 것은 사실이니까요. 네, 그럼 그 때 다시 뵙도록 하죠.”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를 바지 주머니로 집어 넣으면서, 그는 방 가운데 놓여진 책상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무용 의자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던 그는 의자의 회전속도가 느려지자 그제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참, 이제 와서 메리엇 스튜어트라니……어제까지만 해도 동네 드라마였는데, 이거 하루 아침에 블록버스터가 되어버렸군.”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3)】




레이첼과 만난 그 다음 날. 프로듀서는 출근과 동시에 사장실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인지, 프로듀서가 사장실의 문 앞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비서는 사장실의 문을 활짝 열고는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사장은 평소처럼 창가 앞의 자신의 자리가 아닌, 사장실의 한 가운데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를 제외하고도 선객이 있는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사장님,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프로듀서인가, 좋은 아침이군.”


그 선객이란, 다름아닌 신데렐라 걸즈의 총괄이사를 맡고 있는 미시로 상무였다.


“좋은 아침일세.”


프로듀서의 인사를 받으며 사장은 손을 들어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그가 자리에 앉자, 사장은 비서가 막 가져온 찻잔을 그를 향해 스르륵 밀었다. 잔을 받은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기를 기다리던 사장은 그가 찻잔을 다시 내려놓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아침부터 부른 이유는 자네도 대강은 짐작하고 있을 거야. 일과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라도 한번 들어보자 싶어서 말이지.”

“상무님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그래. 어찌되었든 자네의 직속 상관이니 말이지. 내가 말해 주었다네.”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사장의 옆에 앉은 채 말하는 상무의 말에 프로듀서는 손을 내저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보고를 늦게 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런가.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군.”


사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저녁에 그 쪽에서 연락이 왔다.”

“먼저 연락이 왔습니까?”

“그래. 네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하더군.”

“네. 이쪽으로는 전혀 손해 볼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따지고 본다면 이득만 보는 것에 가깝다고도 생각했고요.”

“그렇지. 다른 곳도 아니고 메리엇 스튜어트다. 그 이름의 무게를 생각해보면 단순히 경력에 한 줄 집어넣는 것 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이득이 되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이다. 그 치들이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던가?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었는지’라던가 말이야.”

“문서에 적혀 있던 내용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듣기로는…….”


프로듀서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했다.


“……저를 원한다고 하더군요. P가 아닌, ‘윌리 존슨’을.”

“역시 그랬군……그게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그런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

“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는 않았거든요. 이번에 이렇게 접촉한 것도 제가 선수 시절 그들에게 지웠던, 메트로의 빚을 갚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일부러 메리엇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고 대답했다. 그가 직접 겪어본 그들의 정보력이라면 이 정도의 정보를 통제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별 다른 입단속 없이 그를 내보낸 것도, 그 한 사람 정도의 규모라면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을 만한 자신감이 있기에 내보낸 것일 터였다.


“은퇴한 선수에 대한 예의 같은 건 아닐까요?”


그의 이야기를 듣던 상무의 질문이었다. 사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그럴 거였으면 영구결번이나 돈 좀 쥐어주고 퉁쳤겠지.”


사장은 다시 프로듀서를 쳐다보았다.


“너는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겠지?”

“그럼요. 메리엇 스튜어트라는 게 어떤 이름인지는 잘 아시잖습니까.”


그의 대답에 사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다. 그럼 일단 한번 부딪혀 보도록 하지. 그 쪽에서 가지고 온 게 진짜 선물인지, 아니면 선물의 탈을 쓴 깜짝상자인지 말이야.”


그 때, 사장의 책상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에서 삐빅, 하는 짧은 알람이 울렸다.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향하자, 직감적으로 이 자리가 끝났다는 것을 느낀 프로듀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안에 든 것을 입 안으로 쭉 털어 넣었다. 차가 적당히 식어 있었기에 잔을 비우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휴대전화를 살펴보던 사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그 일에 관해서는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다만 상무와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보고를 해 줬으면 좋겠어. 일단 우리들도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알아야 할 테니까 말이야. 그 정도는 괜찮겠지?”

“네, 당연한 일이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프로듀서는 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결정권을 자신에게 넘기겠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까지 자신이 짊어지게 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득을 취하기 쉬워지는 한편, 꼬리를 잘라내기도 쉬워진다.


“자네도 오늘 예정이 있겠지. 이제 그만 돌아가도 좋네.”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과 상무를 향해 꾸벅, 깊게 허리를 숙였다.








사장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곧이어 오전의 일정까지 마친 프로듀서가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전 열한 시를 막 넘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저 왔습니다.”

“아, 프로듀서 씨! 수고하셨어요.”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사무실 가운데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치히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왔다.


“별 일 없었습니까?”

“별 일은 없었는데요, 방금 프로듀서 씨 앞으로 우편물이 왔었어요.”

“네? 저한테요? 뭐였습니까?”

“편지봉투였는데 이게 죄다 영어로 적혀 있어서요……자리에 올려 놨으니 한번 확인해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자신의 자리로 향한 프로듀서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우편물을 발견하곤 그것을 집어 들었다. 봉투입에 새빨간 밀랍 봉인이 찍혀 있는 봉투의 앞면에는 선명하게 각인된 메리엇 스튜어트의 인장이 그려져 있었다.


‘끝내주는 행동력이군. 아니, 어쩌면 내 대답도 이미 상정 범위 안에 들어있던 건가.’


내심 감탄하며 그는 밀랍 봉인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그 안에 든 것은 레이첼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한 장의 문서였다.

내용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인지, 슬그머니 그의 뒤를 따라온 치히로는 우편물을 읽고 있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자신보다 적어도 머리 두 개는 큰 프로듀서의 팔 너머로 까치발을 서 가며 어렵사리 편지의 내용을 보았지만, 그런 그녀를 반긴 것은 꼬불거리는 필기체로 적혀 있는 외국어의 파도였다.


“저…...프로듀서 씨, 무슨 편지인가요?”

“저번에 영업 나갔던 곳에서 온 편지네요. 그곳 담당자 분이 타카가키 씨와 카와시마 씨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와, 어디인데요?”


치히로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그는 고개를 돌려 스케줄 보드를 확인했다. M공원에서 카에데의 화보 촬영이, 그리고 S잡지사에서 미즈키의 인터뷰가 적혀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문득 아침에 잠깐 사무실로 나왔던 카에데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M공원이면, 야외 촬영인가요?』

『그럼 프로듀서도 같이 가겠군요?』

『그런가요……? 그렇다면야 별 수 없지요. 바쁘시다면야…….』


함께 갈 수 없다는 그의 대답에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생각을 마친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치히로를 바라보았다.


“’메리엇 스튜어트’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어……글쎄요, 처음 듣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오늘의 숙제입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메리엇 스튜어트’가 뭐 하는 곳인지 조사할 것.”

“엑.”


그 말을 듣는 순간 괜한 말을 꺼냈나, 라고 생각한 듯 치히로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프로듀서는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이따 갔다 오거든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저는 타카가키 씨와 카와시마 씨를 픽업해서 영업처로 갈 테니, 아이들 오거든 바로 지하로 보내 주세요. 그러면 다음은 트레이너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상무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릴 테니까요.”

“네, 맡겨만 주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빙그레 웃어 보인 뒤, 프로듀서는 자신의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도쿄 도내의 번화가에 위치한 M공원은 커다란 신사를 둘러싸고 있는 상당한 규모의 공원으로, 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관광 명소 중 하나였다. 이 공원에서 카에데는 신사와 숲을 배경으로 한 화보를 촬영하고 있었다.



“필름 교체를 겸해 잠시 휴식하겠습니다!”


휴식 사인이 떨어지자 카에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곧게 펴고 있던 허리에서 힘을 뺐다. 꽤 오랫동안 직사광선 아래에 서 있었기 때문인지 가볍게 현기증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싸늘한 칼바람에 외투며 목도리를 꽁꽁 싸매고 다녔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날씨는 장소에 따라서는 따뜻함을 넘어 더위를 느낄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TV에서 말하는 이상기후라는 것일까.


“휴우…….”


그런 생각을 하며 촬영장을 내려오던 카에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좀처럼 집중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그냥 머리를 비우고 흘려 보내면 될 텐데, 오늘은 그것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점심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아니야, 그걸 조절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사실 정확하게 돌이켜보면 미스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저 미묘해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던 장면에서 몇 번인가 재촬영을 했을 뿐이었지만, 모델로써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서 오늘의 자신은 썩 마음에 드는 모습은 아니었다.


“타카가키 양.”


그 모습을 본 것인지, 그녀와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디렉터가 촬영장을 나서는 그녀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아주 좋았네. 날씨 때문에 힘든 건 이해하지만 조금만 더 고생해주게.”

“네, 감사합니다. 조금만 쉬고 나면 괜찮아 질 거에요.”


고개를 끄덕인 디렉터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스탭들 사이에 있던 한 여성이 한 손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물병을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녀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에는 ‘일일 어시스턴트’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거 드세요. 햇빛이 많이 뜨겁죠?”

“감사합니다. 날씨가 참 금방 더워지네요.”

“후반부 촬영도 힘내주세요! 든든한 지원군도 오셨으니까요!”

“지원군……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말을 채 듣지 못한 것인지, 어시스턴트는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는 다른 스탭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시 뛰어갔다.

아이스 박스에서 금방 꺼낸 듯, 그녀에게서 받은 플라스틱 물병의 표면에는 이제 막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병을 건넨 여성은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에 다시 스탭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에데는 발걸음을 돌려 휴식 장소로 향했다. 그러던 그 때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어째서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이 복잡한 것인지, 그 원인이 떠오른 것이다.


‘아아, 맞아. 그렇구나.’


그것은, 아마도 혼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야외로 촬영을 나올 경우에는 프로듀서가 동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프로듀서 역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늘 동행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함께 다닌 횟수가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월등히 많았다.

하지만 2주 전의 데뷔 무대 이후로 이야기가 달라졌다. 프로듀서가 담당하는 아이들의 수가 늘어난 만큼 개개인에게 쏟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혼자서도 행동할 수 있는 25살의 당당한 성인. 프로듀서가 그녀 대신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어른이었으니까.

오늘도 그랬다. ‘벌써 몇 번째 야외 촬영인데, 이번만큼은 함께 가 주지 않으려나’ 라고 생각했건만, 오늘 아침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업무가 밀려 있어서 함께 가기 힘들겠다”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나도 참,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머릿속에 떠오른 남자의 모습에 두 뺨을 가볍게 부풀리던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는 물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시자 머리에 올라오던 현기증이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카에데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는 간이 펜스가 설치된 신사의 경내로 들어갔다.


“어머나……?”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긴 스커트의 옷자락을 두 손으로 들어올리고, 의상에 먼지가 붙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경내를 가로질러 걸어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와 함께 이곳에 온, CG프로덕션 소속의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어야 할 휴식용 천막 아래에는 매니저 대신 다른 선객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활동적인 분위기로 짧게 자른 머리카락 아래에는 뿔테 안경을 쓰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갖춰 입은 정장 차림의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다름아닌 그녀의 프로듀서, P였다.


“날씨가 너무 좋아도 탈이네요. 시원한 커피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요 앞에서 사왔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에는 밝은 갈색의 액체가 들어 있는 플라스틱 컵이 들려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걸음을 멈추었던 카에데는 이내 작게 웃으며 발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아까보다는 조금 빠른 걸음걸이로 테이블에 도착한 그녀는 그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아, 조금 전까지 남자가 들고 있던 컵을 낚아채듯 집어들었다. 물방울이 맺혀 있는 컵에는 빨대 두 개가 꽂혀 있었다. 하나는 이미 사용한 듯 목이 꺾여 있었지만 나머지 한 쪽은 새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목이 접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못 본 척 나란히 서 있는 빨대로 입을 가져갔다.


“어? 잠시만요. 제가 썼던 거 빼야 되는데.”

“됐어요.”


프로듀서가 뒤늦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가볍게 팔을 휘둘러 그의 손을 떨쳐내고는 빨대 두 개를 모두 입에 물었다. 내용물을 빨아들이자 커피 특유의 향에 뒤이어 메이플 시럽의 달콤한 냄새와 향이 혀를 자극했다. 두어 모금 정도를 더 마신 카에데는 휴우,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잔을 내려놓고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뭐에요. 그런 거 신경 쓸 거였으면 처음부터 두 개 사 오시던가 했어야죠?”

“아니 뭐, 마실 생각은 없었지요.”

“헤에, 그랬어요? 그런데 빨대는 왜 두 개일까요? 거기다 하나는 쓴 것 같은데…….”


카에데는 지긋이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추궁하는 듯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프로듀서는 슬그머니 시선을 낮추었다.


”……너무 시원해 보여서 그만.”


시선을 피하며 대꾸하는 그의 모습에 카에데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후훗, 천하의 프로듀서도 더위에는 별 수 없네요?”

“……제가 더위에 약한 거 잘 아시잖습니까.”


그의 말대로, 자세히 살펴보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늘 아래에 있음에도 그의 이마에는 아직 채 마르지 못한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못 나오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매니저 씨는요?”

“퇴근시켰습니다. 제가 왔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갑자기 나갈 일이 생겼기 때문이고요.”

“나갈 일이라뇨? 영업인가요?”

“네. 이번 촬영이 끝나는 대로 카와시마 씨와 합류해서 약속 장소로 갈 겁니다.”


카에데는 커피를 마시려다 말고 그에게 되물었다.


“저도 말인가요?”

“그럼요. 그러지 않고서야 제가 왜 여기에 왔겠습니까?”


그녀가 커피잔을 내려놓자 프로듀서는 재빨리 자신이 사용했던 빨대를 잔에서 뽑아냈다.


“이번 일의 오퍼에는 두 분이 다 포함되어 있었거든요.”

“무슨 일이길래요?”

“글쎄요, 그건 가 봐야 알겠죠. 제가 들은 건 두 분을 뵙고 싶어한다는 것 뿐이라서요.”

“그렇군요.”

“타카가키 씨! 후반부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그 때, 신사의 담장 너머에서 촬영 재개를 알리는 스탭의 외침이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에데는 자신을 뒤따라 일어서는 프로듀서를 돌아보았다.


“다음 일이 있다니, 여기서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겠군요.”

“그런 셈이죠.”

“좋아요. 그럼 진지하게 가 볼까요?”


그렇게 말하는 카에데의 얼굴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경쾌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원하던 것을 얻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




“오케이, 완벽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금껏 단 한 순간도 카메라의 뷰파인더에서 떨어질 줄 몰랐던 사진사의 시선이 그의 뒤에 서 있는 디렉터에게 향했다. 그에게 OK 사인을 보내자, 고개를 끄덕인 디렉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간이 확성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다들 수고 많았다. 마무리하고 가자!”

“예쓰!”

“촬영 수고하셨습니다!”

“자, 자. 빨리 정리하고 들어가서 쉽시다!”


예정보다 조금 빠르게 끝난 덕분인지, 여기저기에서 환호성 소리와 함께 스탭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촬영장을 내려오는 카에데에게 다가간 디렉터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역시 조금 쉰 게 정답이었던 모양이군. 뒤쪽은 완벽 그 자체였어. 표정도 아주 좋았고 말이야.”


잠깐의 휴식이 컨디션 회복에 도움이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프로듀서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후반부의 촬영은 전반부와는 달리 단 한 번의 정지조차 없이 매끄럽게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네, 생각을 정리한 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매니저들은 이미 준비시켜 뒀네. 자세한 이야기는 프로듀서에게 전해 줄 테니, 우선은 옷부터 정리하게.”

“네, 수고하셨습니다.”


디렉터에게 꾸벅 허리숙여 인사를 한 뒤, 그녀는 간이 탈의실이 설치되어 있는 천막 쪽으로 향했다.



“카에데 씨, 수고하셨어요!”
“여러분들도 수고 많으셨어요. 오늘 하루 신세를 졌습니다.”


잠시 후, 촬영용 의상에서 평소에 늘 입고 다니는 소매가 짧은 녹색 튜닉과 짧은 데님 팬츠 차림으로 돌아온 카에데는 촬영장에서 약간 떨어진 벤치에 앉아 프로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그 위에 턱을 괸 자세로 촬영장 한 가운데에서 스탭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듀서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옆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촬영은 다 끝마치셨소?”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움을 품고 있는 그 목소리는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목소리였다. 카에데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하얗게 센 백발을 뒤로 넘겨 정리하고, 검은 바탕에 흰색 자수가 들어간 기모노를 정갈하게 갖춰 입은 초로의 남성이 서 있었다. 신사의 제주(주; 신사를 관리하는 신관의 우두머리)였다.


“아, 신관님……!”

“괜찮으니 앉아 계시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카에데를 손짓으로 제지하고는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진 벤치의 한쪽 끝자락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저……경내를 빌려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히 쉴 수 있었어요.”

“가뜩이나 이목이 쏠리는 곳인데 쉴 때라도 마음 편히 있어야지. 이 신사를 위해 애써 주는 손님에게 당연한 대접을 했을 뿐이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스탭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프로듀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저 젊은이는……아침엔 못 보던 사람인데.”

“어떤 사람 말씀이신가요?”

“저기 저, 뿔테 안경에 정장을 입고 있는 키 큰 사내 말이오.”

“아, 저 사람은 저를 담당하고 있는 프로듀서에요.”

“그렇군. 프로듀서란 말이지……혹시 가까운 사이인가?”

“함께 일한 지는 꽤 오래 되었다고 생각해요.”

“으음……그렇군.”


프로듀서를 계속해서 지켜보던 노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낮은 신음을 흘리며 손으로 수염 자국이 남아 있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 옆에서 카에데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P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무슨 일이랄 건 아니오. 다만, 조금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서 말이오…….”

“……?”


노인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카에데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 때, 노인의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프로듀서가 문득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벤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인은 다시 한번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던가.”

“……신관님, 괜찮으시다면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대답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오.”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옷매무새를 바로잡고는 카에데를 내려다보았다.


“두 분, 혹시 나중에 볼일이 끝나거든 객전(客戰 주; 신사에서 신도나 손님을 대접하는 장소)에 잠시 들러주시오. 내 저 사람에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중요한……일인가요?”

“아가씨에게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저 사내에게는 중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오. 들어서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테니 가급적이면 꼭 한번 들러 주었으면 좋겠군.”

“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소.”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미끄러지듯 신사의 본전(本殿)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이번에는 프로듀서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카에데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로듀서를 향해 다가갔다.


“인사는 잘 마쳤나요?”

“네.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좋은 장면이 많이 나왔다면서.”

“디렉터님도 참, 칭찬이 과하시다니까요.”


프로듀서와 카에데는 서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런데, 방금까지 웬 노인분이 계셨던 것 같은데요.”

“아, 이 신사의 신관님이세요. 그렇지 않아도 P씨더러 한번 뵙고 가라고 하시던데요?”

“저를요……? 무슨 일이길래요?”

“글쎄요……중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들어서 나쁠 건 없다고 하셨거든요. 어떻게 하실래요?”


그녀의 말에 프로듀서는 왼팔의 시계를 한번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시간도 꽤 남았고, 어르신의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겠죠. 가 봅시다.”










‘객전’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지만 신사의 객전은 오미쿠지나 에마, 혹은 기념품을 판매하는 사무소의 옆에 딸린 자그마한 방이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여닫이문을 열자 드르륵, 하는 묵직한 바퀴 소리와 함께 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주전자와 찻잔 세 개가 올라가 있는 가장 안쪽의 테이블에는 이미 먼저 도착한 제주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자신들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선 노인을 향해 다가가 꾸벅, 허리를 숙여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CG프로덕션의 프로듀서인 P라고 합니다.”

“반갑소. 이 신사의 제주를 맡고 있는 사람이오. 이름은……그래, 그냥 신관이라고만 불러 주시오.”

“그렇군요. 신관님,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휴식 장소로 경내를 빌려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우리 신사와 공원을 위해 와 주신 분들인데 당연한 대접을 했을 뿐이오. 아, 이렇게 서서 이야기 하지 말고 앉으시오.”


그렇게 말하며 노인이 먼저 자리에 앉자, 두 사람 역시 맞은편의 의자에 몸을 실었다. 노인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찻잔에 찻주전자에 담긴 차를 담아낸 뒤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사무실에서 종종 마시는 인스턴트 티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향을 품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프로듀서는 노인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멀찍이서 보긴 했지만, 젊은이에게서 심상치 않은 것이 느껴져서 말이오. 내가 잘못 본 것이었으면 좋겠소만……”


노인은 자신의 앞에 앉은 프로듀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탄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군. 허어, 이것 참……젊은 사람이…….”

“……왜 그러십니까?”

“그대는 살(煞)을 타고난 사람이군. 그것도 아주 강한 역마살(驛馬煞)을 말이오.”

“역마……요?”

“그렇소.”


프로듀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노인은 곧바로 그에게 되물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가족 분들은 잘 계시오?”

“……어째서 그런 것을 물어보십니까?”

“그대가 역마살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오.”

“……?”

”역마의 본질은 ‘정착하지 못한다’는 것. 비슷하게는 방랑벽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 거라면……그냥 놔둬도 별 문제 없는 거 아닌가요?”

“그럴 리가.”


조심스럽게 끼어드는 카에데의 질문에 노인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랑벽 같은 것이라고 했지, 방랑벽이라곤 하지 않았소. 기본적으로 살(煞)이란 그것을 타고 난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기에 살이라고 불리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살벌한 이름을 쓸 이유가 없지.”

“그렇군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카에데의 옆에서 프로듀서는 가만히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기에 역마살은 단순히 떠돌아 다니는 게 끝이 아니오. 근본적으로는 ‘정착할 곳’이 사라지게 되는 운명이지. 그 까닭에 내가 가족의 안위를 여쭈어 본 것이오. 가족은……사람의 몸과 마음이 정착할 수 있는, 어느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고향이니 말이오.”

“아…….”


그제서야 노인의 의도를 알게 된 카에데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젊은이. 아니, P씨라고 하셨지. P씨, 다시 한번 묻겠소. 가족 분들은 잘 계시오?”

“…….”


한참을 망설이던 프로듀서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노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마살을 가진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그 자리를 떠나게 될 거요. 역마차가 떠나듯 지금의 자리를 떠나 다음 역을 찾아가겠지. 그 때가 언제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르오. 단 한 사람, 본인 스스로를 제외하면.”

“저는 알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소. 당신은 그 때가 오면 직감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오. ‘여기에는 더 이상 내가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으음…….”


프로듀서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카에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두진 않을 거에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오. 하지만, 뜻대로는 안 될 거요. 아마도.”

“……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되묻는 카에데에게 노인은 선언하듯 말했다.


“떠나야 할 때를 본인만이 안다는 것은, 그 원인이 결과적으로는 주위 환경에 있다는 것이 되는 셈이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저희들이 원인이 된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카에데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느 새 그는 눈을 뜨고, 자신의 손에 들린 찻잔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수면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고 있을까.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노인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신사를 나선 두 사람은 프로듀서의 자동차를 이용해 미즈키가 있는 S잡지사로 향했다.


프로듀서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자동차 안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가뜩이나 소음방지 설계에 중점을 둔 하이브리드 자동차였기에 엔진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차 안에는 적막감이 더욱 배가되고 있었다.

신호에 잠시 멈춰 선 틈을 타 슬쩍 바라본 계기판 아래의 시계는 오후 4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옆을 바라보면 멍하게 턱을 괸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카에데의 옆모습이 보였다.

프로듀서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슬쩍 내려 뒷덜미를 주물렀다. 평소에 이렇게 둘이서 함께 이동할 때면 늘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였지만, 오늘의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던 것이다.


‘라디오라도 틀어야 하나…….’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손끝으로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던 프로듀서는 더는 못 버티겠다는 듯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 카에데가 입을 열었다.


“……프로듀서.”


그녀의 목소리에 그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말씀하세요.”

“좀 전에 이야기……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노인이 했던 이야기 말입니까? 역마살이 어쩌구 하는 그거요?”

“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프로듀서는 거두어들인 손끝으로 자신의 턱을 긁적였다.


“글쎄요……딱히 별 생각은 없네요. 제 운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러면……정말 만약의 이야기인데요……혹시, 그 때가 되면 정말 떠나실 건가요? 저희들을 두고?”

“안 가요. 여러분들이 저를 필요로 하는 한, 저는 아무데도 안 갑니다.”

“……정말이죠?”

“그럼요. 거기다 저도 일단은 어른입니다. 어딘가로 갈 일이 생긴다면 작별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할 거에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렇게 대꾸하며 카에데는 다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흐음……이상하게 조용하다 싶더니 지금까지 그거 신경 쓰고 있었습니까?”

“그, 그런데요…….”


카에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운전석 쪽을 돌아보았다. 히죽거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졌다. 순식간에 체온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카에데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고 그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런 거 일일이 믿다가는 인생 살기 힘들어져요. 거기다 애초에 그 영감, 믿어도 되는 사람입니까?”

“아.”


프로듀서의 말에 카에데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너무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그, 그치만! 프로듀서도 전적이 있잖아요?”

“네? 전적이라뇨?”

”캐서린한테 다 들었다구요. 미국 떠나면서 인사도 안 하고 휙 사라졌다면서…….”

“아니, 그땐 걔가 못 본 거지 분명히 인사 하고 갔거든요. 간다는 얘기도 제대로 했고요.”

“아......아, 아무튼! 몰라요!”


입을 뻐끔거리던 카에데는 그렇게 던지듯 말하고는 홱, 몸을 돌려 창 밖을 향해 앉았다. 올리브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그녀의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 그래도……누가 저를 걱정해 주는 건 참 오랜만이네요. 고맙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신호가 다시 바뀌었다. 프로듀서는 웃음기를 거두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



신사가 있는 공원에서 잡지사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고, 때마침 시간대 역시 점심시간과 퇴근 시간 사이의 교통이 원활한 시간대였기에 두 사람을 태운 자동차는 금세 잡지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야, 여기!”


두 사람을 태운 승용차가 잡지사의 정문으로 다가가자, 정문 옆에 서 있던 한 여성이 도로변으로 뛰쳐나오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무릎을 덮는 긴 하얀색 치마 위에 색조가 옅은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고, 얼굴에는 옅게 선팅이 들어간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미즈키였다.

프로듀서가 재빨리 비상등을 켜고 자동차를 보도블럭 가까운 곳으로 붙이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뒷문을 열고 뒷좌석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안녕!”

“안녕하세요, 미즈키 씨.”

“오늘은 이게 첫 인사군요. 안녕하십니까?”


그녀가 뒷좌석의 문을 닫는 것을 기다린 프로듀서는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미즈키는 프로듀서가 앉아 있는 운전석의 시트에 매달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늦었네? M신사라길래 금방 오는 줄 알았는데.”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으음……조금?”

“신사의 신관님과 조금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기다리실 줄은 몰랐네요.”

”취재가 빨리 끝났나봐요?”


카에데의 말에 미즈키는 다시 조수석을 돌아보았다.


“뭐 늘상 하던 대로였으니까. 인터뷰 좀 하고, 사진 좀 찍고 하니까 금방 끝나더라고. 그래서, 그 출연 오퍼라는 건 대체 뭐야?”

“미즈키 씨도 알고 계셨어요?”

“후반부 촬영 중에 제가 미리 연락을 드렸거든요.”


카에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돌아보자, 프로듀서는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월요일까지만 해도 이번주는 이거 말곤 별 일 없다고 했잖아.”

“그러게요. 그 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는데…….”


미즈키의 말에 프로듀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아침에 그 쪽에서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내더란 말이죠. 여러분들을 한번 뵙고 싶다고요.”

“거기가 어딘데?”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 교차로의 우회전 차선에 잠시 멈춰 선 그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두 분, 혹시’ 메리엇 스튜어트’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메리엇 스튜어트? 글쎄요……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으음……나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긴 한데……가물가물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에데와 미간을 찌푸리는 미즈키를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메리엇 스튜어트’는 아마 그 이름 자체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가 더 유명할 겁니다. 가령 ‘R호텔’ 같은 것들 말이죠.”

“아아, 맞아! 생각났어!”


프로듀서의 말이 힌트가 되었던 것일까, 뒷좌석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앉아 있던 미즈키는 손뼉을 치며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전 세계에 대여섯 개의 호텔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기업, 맞지?”

“딩동댕, 정답입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와, 미즈키 씨. 대단하시네요.”
“아자! 아나운서 미즈키, 아직 안 죽었어!”


미즈키는 앞에 앉은 두 사람을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매달리고 있던 시트에서 떨어져 뒷좌석으로 향했다.


“뭐, 그래도 사실은 70점 정도지만요.”

“뭐……라고?!”


프로듀서의 대답에 흡족한 듯한 표정으로 시트에 몸을 파묻던 미즈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룸 미러를 통해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피식 웃으며 조수석의 카에데를 바라보았다.


“타카가키 씨,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3가지 요소가 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의, 식, 주……이지요?”

“네. 정확합니다.”


카에데의 대답에 프로듀서는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었다.


”‘의’와 ‘식’은 사실상 독점이 불가능하죠. 국가마다 복식이나 식문화는 제각각이니까요. 하지만 ‘주’는 아닙니다.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전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기본’이 되는 숙소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에요. 그렇다면, 그 ‘주’는 누가 공급하는 것일까요?”


곰곰히 생각하던 카에데는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의 주제를 떠올렸다.


“아, 그러면 그게 메리엇 스튜어트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메리엇 스튜어트’는 전 세계의 ‘주’를 독점하고 있는 공룡입니다. 아까 카와시마 씨의 대답에 70점이라고 말씀드린 것도 이것 때문이죠. ‘호텔 대여섯 개’가 아니에요. 전 세계에 지점을 갖고 있는 호텔 브랜드의 약 8할이 메리엇 스튜어트의 소유거든요.”


프로듀서의 말을 들으며 두 사람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은행도 가지고 있지요. 그룹 소유가 아니라 지분에 따른 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수준이지만 말이죠. 그 정도의 자본을 가지고 있으니, 자본이 곧 힘이 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 사람들은 ‘왕’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헤에, 그런 곳이었구나…….”

“어마어마한 사람들이군요…….”


프로듀서의 설명이 끝나자, 미즈키는 다시 몸을 일으켜 운전석의 시트에 매달렸다.


“그런데 P군은 어떻게 그걸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야? 전에 그 쪽에서 일했었나?”

“아뇨, 뉴욕 메트로의 구단주거든요. 메리엇 스튜어트의 대표인 ‘조 메리엇’이.”

“……?!”


그의 대답에 카에데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미즈키의 시선은 프로듀서에게 향해 있었기에, 크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카에데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메트로……? 아. 맞아. P군 거기 팬이었지?”

“팬이라……그렇죠. 비슷한 거에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번에 집들이 갔을 때 트로피 복제품 본 적 있거든. 얼마나 좋아하면 우승 트로피까지 구하나 싶었지.”

“하하, 맞아요. 그거 구하느라 꽤 고생했지요.”


가슴을 졸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카에데는 그가 미즈키의 대답을 적당히 넘기는 것을 본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우리는 왜 찾는대? 잘나가는 다른 톱스타들 놔두고?”

“글쎄요…….”


그 때 신호가 바뀌었다. 자동차의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저 멀리, 높이 솟아오른 R호텔의 건물이 모습을 나타났다. 미즈키의 질문에 말꼬리를 흐리던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건 가 보면 알겠죠. 오늘은 그 이유를 듣기 위해서 가는 거니까요.”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루 만에 다시 찾은 R 호텔 최상층의 방에서 세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정장을 갖춰 입은 레이첼이었다. 자신과 눈을 마주친 프로듀서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그녀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메리엇 스튜어트 동아시아 지부 총괄이사인 레이첼 메리엇이라고 합니다.”

“CG프로덕션의 타카가키 카에데입니다.”

“동 프로덕션의 카와시마 미즈키입니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카에데와 미즈키에게 한 번씩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일본어가 의외로 몹시 유창했던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직책 때문이었다.


‘동아시아 총괄 이사라니……단순히 내 얼굴 보자고 온 건 아니었군.’


레이첼과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프로듀서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곳이라고 추정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첫 만남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객실은 어지간한 객실을 네 개 정도는 합쳐 둔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방이었다. 다른 방으로 연결되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제 그 남자는 안 보이는군. 어딜 간 건가…….’


“이리로 와요. 앉아서 이야기 하죠.”


인사를 마치고, 레이첼은 세 사람을 창가에 마련된 동그란 테이블로 안내했다. 테이블 위에는 보온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전기 포트와 찻잔 네 개, 그리고 쿠키 몇 가지가 올라가 있었다.

포트에 담긴 것은 연하게 우려낸 홍차였다. 그것을 찻잔에 담아 세 사람에게 나누어 준 뒤, 혼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자리에 앉은 레이첼은 일행을 한번 돌아보았다.


“여러분들은 혹시 제가 여러분들을 모신 이유를 알고 계시나요?”

“아, 저, 그게…….”


프로듀서는 옆에 앉은 두 사람을 슬쩍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서는 자신이 나설 차례라고 판단한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레이첼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가져왔다.


“아직 모릅니다. 지금 이 곳에 온 것도 아침의 연락을 보고 온 참이니까요.”

“아침의……아아, 그렇군요.”


프로듀서의 대답에 레이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말씀드릴게요. 저희 메리엇 스튜어트는 여러분들이 소속되어 있는 신데렐라 걸즈와 파트너쉽 계약을 맺었어요. 아직 문서로 남은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공식적으로 발표가 나갈 테고요.”

“뭐, 뭐라고요?! 파트너쉽?!”


눈이 휘둥그래진 미즈키가 프로듀서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의외라는 듯 레이첼이 말했다.


“아직 이분들에게는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네. 아직 계약서도 안 받았으니, 서류 정도는 주고받고 난 다음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았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우리 ‘메리엇 스튜어트’의 얼굴이 되어 주셔야겠어요.”

“구체적으로는 어떤 내용입니까?”


그의 질문에 레이첼은 품 속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두 분에 대해서는 저도 나름대로 조사를 했답니다. 타카가키 카에데 씨는 모델 출신, 카와시마 미즈키 씨는 아나운서 출신이시라고요. 두 분 모두 꽤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고요.”

“평가가 후하군요.”

“어머, 여기서는 자랑스러워 하셔도 된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셨군요. 자,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죠.”


품 속으로 수첩을 집어넣은 그녀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모신 이유를 말씀드리기에 앞서……혹시 프로듀서 님께, 저희 메리엇 스튜어트가 어떤 회사인지 설명을 들으셨나요?”

”네.”

“물론이죠.”


카에데와 미즈키는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겠네요. 현재 일본에 들어와 있는 저희 메리엇 스튜어트의 브랜드는 하나같이 고급 브랜드이거나, 아니면 일본 고유의 문화에 접목시키기에는 조금 애로사항이 따르는 브랜드에요.”

“확실히…….”


시사에도 어느 정도 식견이 있던 미즈키는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꽤나 수익을 건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 세계의 ‘주’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조금 불만스러운 것도 사실이죠. 마침 제가 총괄이사로 발탁되었으니, 이 참에 사업 영역을 확장해 볼 생각이에요. 기존의 서양 호텔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온천이나 중저가형 비즈니스 호텔 쪽으로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을 찾은 거랍니다.”


잠시 말을 멈춘 레이첼은 자신의 찻잔에 담긴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온천 쪽에 조예가 깊으신 듯 하니, 타카가키 카에데 씨에게는 온천 쪽의 홍보를 부탁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카와시마 씨에겐 이번에 새로 런칭하는 비즈니스 호텔 브랜드를 맡기고 싶고요.”

“구체적으로는 어떤 내용을……?”

“그 부분은 내부적으로 의논한 다음 전달해 드리죠. 우선은 두 분의 답을 듣고 싶어서 말이에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이첼의 이야기를 들은 프로듀서는 자기 옆의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잠시 동안 그와 눈을 마주치던 두 사람은 서로를 한번 쳐다본 뒤, 각오를 굳힌 것처럼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하겠어요.”

“나도 할게. P군이 가르쳐 줬잖아? 이런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된다고.”

“……그렇다고 하시는군요.”


프로듀서는 다시 레이첼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받아들이신다는 것으로 알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에데와 미즈키 역시 자신의 찻잔에 담긴 차를 쭉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두 분을 직접 만나는 것을 겸해, 대답을 듣고 싶었을 뿐이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과 다시 한번 악수를 나눈 그녀는 이번에는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아, 프로듀서 님. 괜찮으시다면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를요?”

“네. 오래 걸리는 건 아니랍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첼은 만족한 듯 웃으며 그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에게 들려서는 곤란한 이야기이니, 죄송하지만 두 분은 밖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프로듀서 님을 보내드릴테니까요.”

“네, 그럼 이만……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레이첼에게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뒤 객실의 현관으로 향했다.

객실을 나서기 직전, 카에데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프로듀서와 함께 객실 안의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레이첼의 모습이 보였다.


“카에데? 왜 그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앞서 가던 미즈키가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별 거 아니겠지. 이것도 괜히 과민하게 반응한 걸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곧바로 미즈키의 뒤를 따라 객실을 나섰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자료들이 쌓여 있는 방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메리엇 스튜어트와의 파트너쉽, 그리고 그에 따라 미즈키와 카에데에게 들어온 일거리들에 대한 것이었다. 



“일이 너무 잘 풀리는걸. 메리엇 스튜어트라니.”


메리엇 스튜어트.

그녀들의 경력에 이 한 줄이 추가되는 순간, 아이돌로써 그들의 앞길에는 빨간 레드카펫이 깔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메리엇 스튜어트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그런 것이었고, 그렇기에 정말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던 기회이기 때문이다. 헐리우드의 날고 기는 배우들 사이에서도 진정으로 주목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던,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자기들 브랜드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작자들일텐데……어째서 그런 걸 덥석 우리들한테 맡긴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내 머릿속을 비집고 또 다른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메리엇 가문에 대한 이야기. 내 부모님에게서 시작되어, 나에게까지 연결되어 있는 비밀 이야기였다.

나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형광등이 켜져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문득 레이첼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가족'이라…….


레이첼의 이야기와 함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새해맞이……매년 명절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그 모습을, 나는 멀찍이서 부러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가족과 함께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분명, 엄마외 헤어지기 전의 아주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느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잠깐만.”


그 때, 나는 불현듯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이야기를 나누던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주 작은 위화감의 정체는, 그녀의 이야기에 담겨 있던 단 하나의 모순이었다.


……그 작자들, 내 몸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서 어떻게 ‘그 다음’을 보고 있는 거지?’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등줄기를 타고 무언가 서늘한 것이 흘러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뭔가가 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 어쩌면 나에게 일부러 숨기고 있던 것이.’


발소리를 죽인 채 자료실을 나와 거실로 향한 나는 내 개인용 휴대전화를 꺼내어 연락처를 켰다. 저장된 번호 중 하나를 누르려던 엄지손가락이, 퍼뜩 떠오른 생각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만약, 정보의 출처가 그 자라면?’


그 때, 침대가 있는 내 방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방 문을 열어보니, 침대 위에서 자고 있어야 할 시키가 바닥에 내려와 있었다. 이불을 온통 둘둘 감은 모양새를 보아하니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굴러 다니다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음냐~음냐앙…….”

“녀석, 참 맛있게도 자네.”


그 정도면 잠에서 깨어날 법도 한데, 그녀는 고로롱고로롱 참 맛있게도 수면을 맛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훗,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1인용 침대에서 굴러다니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지……엇차.”


고치처럼 둘둘 감은 이불 아래로 손을 넣어 그녀를 침대 안쪽으로 다시 돌려놓고, 나는 왼팔에 차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나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짙은 감색과 밝은 주황색의 그라데이션이 드리워진 하늘에는 서서히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 우선은 자자. 내일을 위해서.”


침대에 올려놓은 그 잠깐 사이에 이불로 된 고치에서 반쯤 빠져나온 시키는 내 베개를 두 팔로 끌어안고 그 귀퉁이를 물어뜯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로 코를 잡아 베개에서 입을 떼어놓고, 그녀에게서 베개를 되찾은 나는 홑이불 하나를 들고 거실의 소파로 향했다.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4)】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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