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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치하,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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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13, 2018 14:30에 작성됨.

오후의 카페는 햇살만이 멤돌며 빈 공간을 채우고 있어서, 그 곳에 혼자 앉아있는 장발의 여인을 옅게 만들었다. 장발의 여인은 햇빛에 자신의 피부가 옅어지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 듯 싶었다. 주위에는 들리지 않게 자신에게는 들리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어폰을 꽂은 채, 여인은 테이블 위의 악보를 보고 있었다. 

여인 「새하얀 눈처럼, 빛나는 눈처럼 이, 마음을 새하얗게-」

  그 여인은 그 덕분에 다른 여인이 들어와서 자신의 뒤에 서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그렇게 열중하고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던 다른 여인은 그 모습을 처음 본다는 듯 귀여워하며 웃는다.

여인2 「후훗」

여인 「아, 왔어?」

여인2 「연습하고 있었어, 치하야?」

치하야 「왔으면 왔다고 얘기하지 하루카」

  그 말에 하루카는 그저 웃으며 햇살마냥 치하야 옆에 앉는다.

하루카 「다음주 라디오였지?」

치하야 「응, 잠깐 그거 체크하고 있었어」

하루카 「아아, 치하야는 여전히 일에 열심히네」

치하야 「당연히 할 걸 하고 있을 뿐이야」

  하루카의 웃음이 조금 바뀐다. 귀여워하던 웃음의 음색에 회색빛이 섞인다.

하루카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도, 변함이 없네」

  그 회색빛을 본 치하야는 머뭇거린다. 즉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곧 말을 꺼낸다.

치하야 「하루카...」

하루카 「...응?」

  하루카는 언제나처럼 치하야의 대답을 기다려준다. 덕분에 치하야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치하야 「2주일 못 만난 걸로 그러지 마」

하루카 「히잉」





  둘은 카페를 나와 걷기 시작했다.

하루카 「그래도 2주일이나 못 만났던 건데, 좀 더 살갑게 대해줘도 되잖아」

치하야 「어제 저녁에도 통화했었잖아」

하루카 「키힝, 치하야 차가워」

치하야 「하루카가 너무 어리광부리는 거야」

하루카 「어리광부리면 안 돼?」

치하야 「...나이를 생」

하루카 「아아, 스톱 스톱! 그거 NG!」

치하야 「그래, 그러면...」

하루카 「그러면?」

치하야 「...」

하루카 「...♪」

  이번에도 하루카는 치하야의 대답을 기다려준다. 20년 동안 그녀가 배운게 하나 있다면, 치하야의 대답을 얌전히 기다려주면

치하야 「...그래, 어리광부려」

  치하야가 진다는 작은 사실 하나이다.

하루카 「우웅, 치하야쨩~~~」

치하야 「쨔, 쨩은 빼라고!」

  여인이 다른 여인에게 볼을 비빈다.

하루카 「2주일치는 하고 싶은데에」

치하야 「정말이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하루카가 치하야에게서 볼을 떼낸다.

하루카 「아니? 딱히?」

치하야 「왜 이리 어리광이 심해졌어...」

하루카 「치하야가 너무 좋으니깐!」

치하야 「정말...」

  치하야는 불평을 하면서도 하루카를 쓰다듬어준다.

하루카 「좀 더 쓰다듬어줘」

치하야 「됐어, 이 정도면」

하루카 「그러면 다른 부탁 들어줘」

치하야 「그래, 맛있는 거라도 사줄까」

하루카 「응, 하지만 사주진 말고!」

치하야 「응?」

하루카 「밥먹자, 치하야 집에서」

치하야 「그럴까」

  두 사람의 발걸음은 익숙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하루카 「어라, 크림 다 떨어졌네?」

치하야 「응, 어제 다 썼어」

  냉장고 안을 뒤지던 하루카는 대신 우유를 꺼낸다.

하루카 「뭐 우유가 있으니 대신 써볼까」

치하야 「크림 스파게티 하게?」

하루카 「응! 간단하게 해먹고 싶어」

치하야 「그래, 그러면 면은 내가 삶을테니깐」

하루카 「응? 이건 치하야가 만든 거?」

  하루카가 냉장고 구석에서 슈크림을 발견하여 꺼낸다.

치하야 「어제 만든 거야, 밥 먹고 먹-」

  하루카는 치하야의 슈크림을 바로 하나 입에 넣는다.

치하야 「어, 하루카」

하루카 「으음, 맛있네, 이번엔 잘 됐는데!」

치하야 「그렇게 배웠는데 이제 실패 안 할 때도 된 거 뿐이지」

하루카 「으음, 선생님은 기쁘단다, 치하야쨩!」

치하야 「곧 밥 먹을 거니깐 밥 먹고 먹으라니깐」

하루카 「으음~ 맛있어~」

치하야 「어차피 하루카 주려고 만든건데, 아무도 안 뺏어먹는다니깐」

  물론 하루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세번째 슈크림을 제 입에 넣는다. 스파게티 면이 담긴 냄비만이 보글보글 끓으며 조용히 저녁이 익어간다.





치하야 「무슨 일 있었지?」

  저녁을 다 먹고 난 하루카가 다시 네번째 슈크림을 입에 넣으려던 순간, 치하야는 입을 열었다.

하루카 「응?」

  우물우물. 단 맛만이 입에 퍼진다.

치하야 「있었지?」

하루카 「으응, 엄서느데」

  우물우물.

치하야 「우리끼리 있을 때 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아」

  단 맛만이 입에 퍼져야 하는데. 하루카는 입안의 슈크림을 금새 삼킨다.

하루카 「그게...」

치하야 「응」

  이럴 때의 치하야쨩은 참 엄격하단 말이지

하루카 「아하핫, 별 건 아니야」

치하야 「응」

하루카 「그... 그러니깐」

치하야 「응」

  괜한 죄책감이 하루카를 망설이게 한다. 하지만 치하야도 알고 있다. 이럴 때 계속 하루카의 대답을 기다리면 하루카야말로 진다는 점을.

하루카 「엄마가 또 맞선 가져왔어」

치하야 「난 또 뭐라고」

하루카 「엩」

  치하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챙긴다. 싱크대로 그릇을 나르는 치하야를 따라 하루카도 일어나 따라간다. 물론 제 빈그릇을 들고.

치하야 「그럴 때마다 너무 침울해하지마」

하루카 「히잉, 하지만」

  달그락. 치하야가 가져온 빈그릇이 싱크대에 쌓인다.

하루카 「뭔가 치하야쨩한테 미안한걸」

치하야 「나한테 미안할 거 없대도」

하루카 「말은 그렇게 해도 치하야쨩 조금 섭섭해할 거 같은데」

  달그락. 하루카가 가져온 빈그릇이 치하야의 빈그릇 위에 쌓인다. 치하야의 손도 하루카의 머리 위로 올라간다.

치하야 「괜찮대도」

하루카 「우우웅...」

치하야 「하루카 어머니가 그러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말이지」

하루카 「우우우우웅....」

  하루카가 치하야의 손에 녹는다.

치하야 「그나저나」

  치하야의 손이 멈추자 하루카도 그만 녹는다.

치하야 「어떻게 했어, 선은?」

하루카 「으응, 대충 거절했어」

치하야 「그러면 안 되지 않아?」

하루카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마음도 없는데 나가봤자 상대방도 나도 시간낭비니깐, 이게 덜 폐 끼치는 거겠지」

치하야 「하긴, 그건 그렇네」

  대답을 마치며 치하야는 찬장에서 찻잔을 꺼낸다. 하루카에게 뭘 먹을지 묻지도 않으면서 그녀는 자스민차를 찻잔에 넣는다. 하루카는 남은 테이블을 정리한다. 어느새 어두워진 밖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그녀 둘이었다.





하루카 「그러면 내일 사무실에서 봐, 치하야」

치하야 「...」

하루카 「치하야쨩?」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치하야는 조용히 있다가, 말을 잇는다.

치하야 「오늘, 자고 갈래?」

하루카 「응, 그건 좋지만... 오늘은 일단 패스, 에헤헤」

  하루카가 미안하다는 듯이 양 손을 맞댄다.

하루카 「출장 때문에 집 비웠으니깐, 한 번 점검하고 싶어」

치하야 「그래, 그렇지」

  잠시 동안 신발 신는 소리만이 들린다.

하루카 「자, 그럼 내일 봐」

치하야 「그래, 내일 봐」

하루카 「오늘 밥 맛있었어, 다음엔 우리집에서 먹자」

치하야 「그럴까」

하루카 「그럼」

  쪽.

하루카 「갈게, 치하야쨩」

치하야 「...응」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 뒤로 멀어지는 발소리만이 작게 퍼진다. 혼자 남은 치하야는 잠깐 옛날을 생각한다. 옛날 같았으면 저런 기습에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얼굴도 빨개졌을 거고, 소리도 질렀겠지. 하지만 20년이나 지나서는 이젠 익숙하다. 치하야는 그렇게 옛일을 잠시 떠올리며,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스스로의 얼굴이 약간은 빨개진 걸 모르는 채로.
  그렇게 두 여인의 20년의 일상 중 하루가 지나갔다.





~ Epilogue

하루카 「와인, 꽤 맛있네?」

치하야 「아즈사씨한테 추천받은 거니깐 말이야」

하루카 「흐응」

  하루카가 치하야에게 스윽 다가간다. 조용히 몸을 기대면서 치하야에게 응석을 부리고는 묻는다.

하루카 「옛날에 말이야, 치하야쨩 아즈사씨랑 같이 산 적 있지?」

치하야 「응, 그랬지? 되게 옛날이네 그것도」

하루카 「그 때, '무슨 일' 없었어?」

치하야 「무, 무슨 일?」

하루카 「예를 들면 말이야」

  하루카의  손이 치하야의 허벅지로 올라온다.

치하야 「하, 하루카? 질투하는 거야, 20년 전을...?」

하루카 「질투 아닌 걸, 아즈사씨랑 사귄 것도 아니었잖아」

치하야 「물론 그렇지, 자, 잠깐, 방금 밥 먹었잖아」

하루카 「뭐 어때, 오늘 우리집에서 자고 갈 거잖아?」

치하야 「그, 그건 그렇지...」

  가벼운 질투에서 시작한 밤은 그렇게 이어진다. 두 여인의 20년의 일상 중 하나가 그렇게, 깊은 밤과 함께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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