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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6 - 트라우마Trauma : 타카가키 카에데 下

댓글: 7 / 조회: 1233 / 추천: 2



본문 - 06-03, 2018 18:03에 작성됨.

 “조금 놀랐어요.”

 “무엇이, 말입니까.”

 “너무 조용하게 반응하셔서요. 그러니까…… 겨울P라고, 불리셨죠?”

 “애들이 지어준, 별명입니다.”

 “귀여운 이름이네요. 갑자기 말을 걸었는데 놀라지 않으시는 게 정말 겨울 같으세요. 제가 좀 눈에 띄는 편인데.”

 “저도 일단은, 업계 사람이라. 고충을 이해합니다. 쉴 때는, 편히 쉬고 싶으시겠죠.”

 “제가 왜 말을 걸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으시네요?”

 “여기서 그나마, 아는 얼굴이니까요. 총선거 방송 때문에, 오다가다 몇 번, 멀리 있는 타카가키 씨를 본 적 있습니다. 오늘 방송도, 같이 출연하고요. 마찬가지로 타카가키 씨도, 저를 본 적 있으시겠죠. 저 또한 눈에 띄는 인상이라, 기억하셨을 것이고. 업계인이니까, 사정을 말하면 알아주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셨을 거라 여겼습니다.”

 카에데가 입을 다물었다. 신비로움을 거두고 솔직하게 놀라움이 드러났다. 가까이 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니었나 보다.

 “대단한 분이시군요. 사정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제 마음을 단숨에 알아맞히시다니.”

 “별 것 아닙니다.”

 “방송 스태프 분들한테 소문을 들은 적 있는데 이런 능력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한국에서 오셨다는 건 알았는데.”

 “여기에 온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말이 아직, 서툽니다.”

 “한국이라. 한 번도 가본 적 없어요.”

 “괜찮은 곳입니다. 좋은 곳이 많아요.”

 “한 번 가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 시간이 없네요.”

 아쉬움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모자챙 아래에서 나는 표지의 카에데를 살폈다. 한껏 신비로움을 뽐내는 사진 밑에 ‘무관의 여제, 드디어 왕관을 쓰다’라는 문구가 찍혀있었다.

 카에데는 현 일본 연예계에서 명실상부 ‘톱 아이돌’이라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아이돌이었다. 빼어난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으로 데뷔 때부터 대중의 시선을 끌었고, 과거에는 잠깐 모델을 했을 정도로 옷걸이도 좋았다. 화보든 앨범이든 내기만 하면 성공하는 사람. 올해로 데뷔 5년차 만에 모든 아이돌들의 워너비가 되었지만 총선거에선 매번 1위를 놓친 무관의 여제.

 올해는 숙원을 이뤘으니 다행이려나. 늦었지만 인사치레라도 하자 싶어 잡지를 집었는데.

 “이 스틱, 정말로 멋져요.”

 “…….”

 슈거스틱을 들고 카에데가 저런 말을 했다. 후훗, 하는 작은 웃음소리도 함께. 나는 슈거스틱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포장이나 성분이나 특별할 거 없는 양산품인데, 독특한 취향인가. 존중해주자 싶어 적당히 긍정했다.

 “멋지군요.”

 “요새는 당분을 보충해두지 않으면 일 할 때 힘들어지더라고요.”

 “여름이라, 날씨가 더우니까요. 방심하면, 금방 힘이 빠지죠.”

 “그렇죠. 지금은 8월 후순. 더위도 여름도 비슷하니까요.”

 또 작은 웃음이 뒤따랐다.

 뭘까. 이 사람. 방금 대화에서 어디가 웃긴 거지? 원래 이렇게 웃음이 헤픈 사람인 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자꾸 어딘가 걸렸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먼저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오는 건 내게 뭘 요구하고 있는 걸까. 대체 뭐지.

 머리를 굴리는 데 카에데가 눈을 돌렸다. 내가 쭉 잡고 있던 아이돌 매거진이었다. 의도를 잘못 파악했는지 숄더백에서 펜을 꺼내곤 내게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거절하기도 뭐해서 그대로 내밀었다. 점원이 불러서 카에데가 주문한 물건까지 받아왔을 때 사인은 끝나있었다. 세로로 쓰인 ‘타카가키 카에데高垣 楓’라는 이름 아래 ‘일을 할 땐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세요.’ 라고 격려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좋아하시는 잡지인가요?”

 “공부 중입니다. 이제부터, 좋아하게 되어야죠.”

 “저는 온천을 좋아해서 온천 잡지를 구독 중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취미가 온천 순회, 맞으시죠?”

 “근래에는 바빠서 가기 어려웠어요. 이젠 슬슬 시간이 나려고 하지만. 한국에는 어떤 온천이 있나요?”

 “일본에 비하면, 좋은 곳은 적습니다.”

 “실은 일본도 진짜 좋은 곳이 아니면 가짜가 많답니다.”

 카페를 나와서도 이야기가 계속 됐다.

 저는 술도 좋아해요, 특히 온천에서 나온 뒤의 한 잔을요, 한국에는 어떤 술이 있나요? 저는, 술을 못하지만, 아는 형님 분께선 막걸리를, 좋아하셨습니다. 막걸리, 마셔본 적 있어요, 선물 받은 적 있거든요. 그 외에, 동동주, 소주, 매실주, 복분자주, 여러 가지 있습니다, 마셔본 적은 없지만. 추천을 받기는 어렵겠네요. 안주는, 많이 먹어봤습니다. 안주도 중요하죠, 저는 주로 닭꼬치나 구운 은행을 먹어요. 제가 아는 형님께선, 완두콩을…….

 네? 카에데가 눈을 껌뻑였다. 강이에 대해 말하다 무심코를 한국어를 말한 탓이었다. 엔도마메エンドウ豆를 한국에선 ‘완두’라고 읽는다고 알려줬더니 카에데는 작게 중얼 거렸다. “완두…… 완두…….” 하고.

 뭐가 또 마음에 든 건진 모르겠지만 대화가 끊겨 다행이었다. 더운 공기를 맞으며 모르는 주제로 대화를 잇는 건 솔직하게 말해서 힘드니까. 그렇다고 카에데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은 호감이 가고 호기심도 들었다. 저 오드아이 안쪽에 무엇을 감추고 있을지, 벌써 드러냈는데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엘리베이터 안은 에어컨이 틀어져 있어 시원했다. 그런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몸이 조금씩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기다리라니까 왜 굳이……. 모자챙을 올려 맞이할 준비를 했다. 예상대로 겨울의 정경을 배경으로 아나스타샤가 서 있었다. 날보고 뭘 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는 카에데를 보고 놀랐다.

 “안녕하세요. 타카가키 카에데라고 해요.”

 “아 Меня зовут, 아나스타샤. 제 이름은 아나스타샤입니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나스타샤가 대기실 쪽을 가리켰다.

 “방송 전에 인터뷰가 있대요. 스태프 분들이 와서 프로듀서한테 알려주려 했는데…….”

 그러면서 내 폰을 꺼냈다. 당황해서 주머니를 뒤졌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그렇지. 이렇게나 정신을 팔고 있었다니. 여유롭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대기실로 돌아가니 촬영 준비는 이미 끝난 뒤였다.

 스태프들에게 사과하고 우선 대본부터 살폈다.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미리미리 읽어둬야 내용 파악이 됐는데 갑작스럽게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애들을 믿고 맡겨야 하나. 혹시라도 곤란한 질문이 섞여있으면…….

 그 때 카에데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혹시 괜찮다면.

 “인터뷰, 저도 같이 진행해도 될까요?”

 방안에 이목이 쏠렸다. 미오는 유명인을 알아본 충격에 입을 벌렸고, 시키는 상황 자체를 재미있게 여겼다. 스태프들이 뭔가를 의논하다 내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아나스타샤는 내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직감의 속삭임에 귀 기울였다.

 해. 명령조로 뒤통수를 쑤셨다.

 “괜찮을까요? 타카가키 씨.”

 “네. 한꺼번에 진행하는 게 더 순조로울 거예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인터뷰는 아나스타샤부터 진행했다. 평소처럼 서툴게나마 일본어로 이야기했는데,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옆에서 카에데가 설명해줬다. 다음은 미오. 문답이 오고가는 중에 카에데는 작은 추임새를 넣어 분위기를 띄웠다. 시키가 답변할 때도 종잡기 어려운 센스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이끌었다.

 관록이라는 건가. 볼수록 감탄이 나왔다. 카에데의 인터뷰를 보는 세 아이들도 같은 감상이었다.

 “카에데 씨, 자연스럽네요.”

 “응. 갑자기 참여한 건데도 전혀 떨지 않아. 그리고 엄청 예뻐.”

 “아이돌 선배가 내는 독특한 풍미. 재미있었어!”

 카메라 앞에서 이 사람은 ‘톱 아이돌’이었다. 그만한 능력이 있고 매력도 있었다. 덕분에 한시름 놓은 나는 작은 의문에 빠져들 뻔했지만, 미간을 꼬집어 벗어났다. 이런 생각은 예의가 아니지. 시답잖은 망상에서 나왔을 때 인터뷰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 일이 끝나면 긴 휴가를 갖다오려고 해요. 지금껏 쉼 없이 달려오느라 많은 것을 놓쳐왔거든요. 많은 분들의 성원을 받아서 너무나 감사하지만, 아이돌 타카가키 카에데로서 쌓아온 것들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다음에는 저를 지켜봐주신 분들 만이 아니라 더 많은 분들까지도 깜짝 놀라실 만한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모르셨던 타카가키 카에데로.”

 그렇다고 너무 크게 기대하지는 말아주세요, 실망하실 지도 모르니까. 이 멘트를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종료. 사전 인터뷰 덕에 본 촬영도 순조로이 지나갔다. 애들이 메이크업을 푸는 사이 나는 카에데의 대기실을 찾아가 인사했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아뇨,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를 하게 해주신 보답이에요. 인터뷰 중에 뚫어지게 바라보신 건 신경 쓰였지만요.”

 “그건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서…….”

 “어머, 어떤 부분이 신경 쓰였던 걸까. 말해주실 수 있나요? 괜찮으시면.”

 한 순간 카에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마치 바람을 갈아 만든 칼처럼 예리해 그것이 촬영 뒤에 피곤한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뺨에 아릿한 고통이 일자 나는 아까 전 의문에서 해답을 얻었다. 아, 그렇구나.

 이 사람도 가시밭길을 걸었구나. 선배의 말처럼 처음부터 톱이었던 건 아니구나. 수많은 산을 넘어 여기까지 올라와 드디어 결실을 맺었구나.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이 사람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까. 이 사람에게선 지금 무엇이 결여된 걸까.

 물어볼 수는 있다. 괜한 참견일지라도 물어보는 것 자체가 죄가 되진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누군가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기에.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카에데의 미소가 엷어지더니 이어폰과 폰을 꺼냈다. 이번에 신곡을 녹음했어요.

 “정확히는 예전 곡의 리메이크. 총선거 1위 기념으로요. CD를 드릴 수 있으면 기쁘겠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예전 작곡가 분까지 모시고, 몇 번이나 재녹음을 하는 중인데도 좀처럼 OK 사인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어째서인지 들어봐 주시지 않겠어요?”

 “제가, 말입니까.”

 “제 3자의 의견도 중요하니까요. 겨울P라면 왠지 알아내주실 것 같아요.”

 묘한 압박감이 드는 목소리였다. 거절해선 안 되는 명령 같았다. 순순히 이어폰을 꽂자 연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


연풍 –화엽-


메마른 바람이 마음을 빠져나가네

넘치는 내 마음 데려가 줬으면 해

두 사람의 그림자 아무것도 아닌 대화도

질투하고 애달파 이런 게 사랑이야?


당신 밖에 보이지 않게 돼서

사랑은 커져갈 뿐

괴로워, 미소의 가면조차 만들 수 없다니


꽃잎 흩날리면 돌아오는 연풍

가득한 사람들을 빠져 나가

떨리는 내 마음도 몸도

모두 무너지기 전에 사랑이 필요해


말로는 할 수 없는 아픔을

분명 사랑이라 부르는 거겠죠

처음으로 사랑해서 태어난 이 순간을 느끼고 있어


당신 밖에 보이지 않게 돼서

사랑은 커져갈 뿐

괴로워, 미소의 가면조차 만들 수 없다니

사랑해서 생겨난 이 순간


(The Wind of Love)


 *


 노래가 끝났다.

 나는 이어폰을 접어 카에데에게 돌려줬다. 감상을 묻는 재촉, 혹은 압박이 동공에서 빛났다. 생각할 시간 정도는 주려는지 바로 캐묻지는 않았다.

 떠올렸다. 이 곡의 원본, 타카가키 카에데의 데뷔 싱글 곡. 라디오나 방송 등에서 여러 번 들어봤고 그 때마다 좋은 노래라 생각했다. 원본은 시작부터 웅장한 음색으로 과장 좀 보태서 세기말이라던가, 심하면 종말 같은 심각한 단어가 어울렸다. 물론 이런 비틀린 감상 말고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연심, 이루어지지 못 하는 괴로움 등이 잘 표현되어 마음을 울린다는 느낌도 받았다.

 ‘화엽’은 이와는 전혀 다른 곡이었다.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리메이크인 줄도 몰랐을 정도로. 원본보다는 밝고 잔잔하며 또 다른 애절함이 곡에서 느껴졌다. 그러나 노래는.

 “조화롭지 못 합니다.”

 “조화?”

 “배경음과 코러스는, 맞물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컬은, 그렇지 못 합니다.”

 그건 즉 저에게 문제가 있다는 소리군요. 카에데가 끼어들었다. 기분 나쁘시다면, 죄송합니다. 카에데는 고개를 저었다. 더 말해주세요. 계속 감상을 구했다.

 “혼자서만, 다른 곳을 보고 있어요. 어디선가, 뒤틀려 있죠. 길이. 쭉 같은 곳을 향하다, 거리가 벌어졌다고 해야 하나. 흔들리고 있어요. 무언가가 빠져버려서. 타카가키 씨와 곡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독특한 비유네요. 길이 뒤틀려 거리가 벌어지고 있다…….

 “무언가를, 이미지로 파악하는 것이, 특기입니다.”

 “저와 곡이…… 멀어지고 있다. 그렇게 들리는 군요. …… 조언 감사해요.”

 “조언이라고 할 건 없지만, 도움이 되었다면, 저야 말로 기쁩니다. 좋은 곡, 기대하겠습니다.”

 “저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어요.”

 프로듀서. 어느새 다가온 냉기가 뒷목에 닿았다.

 “집에 갈 준비, 거의 끝났어요. 미오랑 시키는 조금 남았지만.”

 “알았어. 금방, 들어갈게.”

 이 모습을 지켜본 카에데가 케이크를 내밀었다. 아까 카페에서 사놓고 인터뷰를 하느라 먹지 못한 물건이었다. 괜찮다고 거절했으나 억지로 떠넘겼다.

 “이건 감상과 조언에 대한 감사 표시예요. 케이크를 먹고 기운 내세요. 마침 개수도 딱 맞아서…… 아.”

 카에데가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완두’였다. 한국어 발음으로. ‘엔도마메’는 한국어로 완두…… 완…… 두. 손가락을 피더니 나와 아나스타샤를 차례대로 가리켰다. 완, 두. 이어서 저 멀리 가리키며.

 “쓰리, 포.”

 아마 아직 준비 중인 미오와 시키를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또 후후, 하고 작게 웃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까부터 이 여자가 무슨 연유로 이런 행동을 했는지 나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말장난이었어. 시답잖은 말장난. 완두의 발음을 이용해 완두 쓰리 포라니. 아까부터 계속 이런 개그를 시도한 거겠지. 일본어로 되어있어서 내가 못 알아들은 거야. 밀려오는 허무감에 내 옆의 소녀가 묵직한 돌을 던졌다.

 “파이브!”

 아나스타샤가 외쳤다. 카에데를 가리키며. 말뜻을 이해했는지 우쭐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나에게 눈길을 보냈다. 동조를 구하는 것이다. 얼른 눈을 피하는 데 그곳에선 카에데가 동조를 구했다. 세 가지 빛의 눈동자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식스.”

 사람은 더 없지만 그렇게 작게 말했다. 원하는 것을 얻은 두 아이돌은 만족한 듯 마주보았다. 이대로는 곤란한 상황만 생길 것 같아 아나스타샤에게 케이크를 주고 미오와 시키를 데려오라 했다. 떠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카에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법에 걸린 기분일 거예요, 지금은.

 “겨울P는 프로듀서를 할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

 그 말을 남기고 카에데는 걸음을 옮겼다. 나는 복도 끝 너머로 바람처럼 지나가는 아이돌의 모습을 그저 지켜만 봤다. 무슨 의미냐고 되묻는 것조차 하지 못 했다. 사고가 정지되어 지금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 했다. 뒤에서 애들의 발소리가 들려도, “겨울P!” 하고 미오가 불러도, 그 모든 것들로부터 동떨어진 채 나 혼자 망상 속에 파묻혀 있었다. 눈처럼 쌓인 그것들이 녹아내리자 모습을 드러낸 학수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어떻게 자랄지는 내가 정해.

 머리털이 곤두서고 더위가 올라왔다. 몸도 마음도 공간까지도 모두 새빨간 피가 되어 녹아내렸다. 시야가 시체로 가득한 과거의 환상을 담자 피 웅덩이에서 불안이 떠올랐다.

 나는 이곳에 필요 없는 존재다. 나를 대체할 인간은 얼마든지 있고, 오히려 내가 있음으로 인해 애들에게 피해를 줄 게 뻔한…… 나는 그런 놈이다.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고, 그것을 숨기고, 핑계나 대는 놈. 진실이 밝혀졌을 때 가장 상처 입는 게 아이들이란 걸 알면서. 프로듀서가 되지 못 하고 계속 해결사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놈. 결국 나로 인해 모두가 피해를 입겠지.

 프로듀서. 겨울P? 아나스타샤와 미오가 나를 건져 올렸다. 왜 그래, 백야? 시키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무 것도 아니야. 목소리가 나오는지도 모른 채 입을 열었다. 가자, 얼른. 모자 그늘 아래 희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발을 움직였다.


 *


 아나스타샤의 집까지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근처에 주차하고 마트에 가려 했는데 아나스타샤가 뜯어 말렸다. Нет(안 돼요)!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오전부터 보인 한심한 행태에 믿음을 잃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료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여고생들에게 장보기를 맡긴 뒤 먼저 맨션으로 향했다.

 맨션은 꽤 괜찮은 2층 건물로 낡긴 했어도 있을 건 다 갖춘 시설이었다. 거실에 딸린 작은 방이 하나, 방 마다 개인 욕실 겸 화장실도 하나. 에어컨 완비에 마트 등 편의시설이 밀집한 지대에 위치했다. 무엇보다 주인아주머니가 친절해서 홋카이도에 사는 부모님이 딸을 맡기기에는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이만한 장소를 구한 것은 나로서도 큰 행운이라 도와준 치히로에게 연신 고개를 숙인 적도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막 도쿄에 올라왔을 땐 이사를 돕느라 이곳에 자주 왔었다. 주민들과 인사도 나누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개선해 줬는데, 최근엔 아나스타샤가 이곳 생활에 많이 적응하면서 방문이 뜸해졌다.

 오랜만에 왔는데도 괜찮은 곳이구나…… 라고 생각할 무렵 화단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나를 쏘아봤다. 새빨간 얼굴로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내왔기에 혹시 나를 부모의 원수와 착각한 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모자챙을 내리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런 눈빛이야 익숙해서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맨션 안은, 금연 구역입니다.”

 충고하자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여기 주민이라도 되느냐면서 무례한 말을 쏟아놓고는 꽁초를 버리고 맨션으로 들어갔다. 103호. 전에는 비어있던 집인데 새로 이사 온 건가. 그러고 보니 주인아주머니께 들은 적이 있었다. 싹싹한 청년 하나가 새로 들어왔다고. 근데 왜 나한텐 저 따위인지. 참자, 참아. 모자를 눌러쓰며 심란함을 억눌렀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맨션을 둘러봤다. 혹시라도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려 했는데 낡은 것 빼곤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그게 좀 신경 쓰인다는 것. 아나스타샤의 방은 2층에 있는데 계단을 오르는 내내 철제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고리에도 이상한 흠집이 나 있고. 지진이라도 나면 어쩌나, 내진설계는 되어있나 걱정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퀴퀴한 냄새가 났다. 내가 후각에 예민한 것을 감안해도 거슬릴 정도의 냄새가. 진원지를 찾다 열려 있는 창문 밖을 봤다. 조금 떨어진 곳엔 아까 전 유료 주차장이, 그리고 바로 앞 담벼락 바깥쪽엔 찢어진 쓰레기봉투 더미가 보였다. 불법 투기한 물건에 고양이들이 몰려들어 추악한 무언가를 해방시킨 것이다. 그것도 이 한 여름에.

 당장 창문을 닫고 방향제를 뿌렸다. 세세하게 뜯어보니 군데군데 어질러진 곳이 있었다.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가만히 둘 수 없어 손을 대다 침실 앞에서 멈칫 했다. 문은 훤히 열려 있는데 그렇다고 들어가도 되는 걸까. 잠깐 고민 끝에 들어가서 어질러진 이불을 바로 개키고 방향제를 뿌렸다.

 정리를 마치고 한참을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여고생 혼자 사는 집에 남자 혼자 앉아서 뭐하는 짓인지. 오만가지 잡생각이 들 때쯤 애들이 돌아왔다.

 “Я вернулся. 다녀왔습니다.”

 “늦어서 미안. 시키냥이 또 여기저기 기웃거려서.”

 “오다가 귀여운 고양이를 봤거든. 그런데, 흠흠? 방향제 냄새가 선명하네.”

 시키의 폭로에 아나스타샤와 미오도 냄새를 맡았다. 나는 창문을 가리켰다. 바깥에서, 쓰레기 냄새가……. 방주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열어둔 줄 몰랐어요…….

 저녁 메뉴는 비빔국수에 불고기를 만들기로 했다. 거창하지 않으면서 대충 이름만 들어도 한국 요리라는 걸 알 수 있단 점이 좋았다. 마트에서 사온 재료로 양념부터 만들어 고기를 재우는데 시선이 따가웠다.

 겨울P, 요리 엄청 잘해. 미오가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자취생활이, 길었으니까. 다 쓴 재료를 치우고 동선을 정리했다. 불앞에 서자 아나스타샤가 걱정스레 물었다. 도와드릴 건 없나요? 그럼, 물 좀 끓여줘. 기쁜 얼굴로 냄비에 물을 받아왔다. 이거 한 번 먹어봐도 돼? 시키가 고기를 찔러보려 해서 마늘을 물려줬다. 알싸한 맛에 발버둥 치는 녀석을 치우고 비빔국수용 소스를 만들었다. 안 돼, 안 씻은 손으로 만지지 마.

 상을 차리는 사이 애들에게 옷을 갈아입게 했다. 미오는 집에서 챙겨온 반바지와 반팔 셔츠, 시키는 평소에 입던 검은 민소매 옷, 아나스타샤는 별무늬가 그려진 여름용 잠옷이었다. 타이밍 좋게 눈이 마주쳤는데 피하기 애매해서 보고 있었더니 미오가 놀림조로 물었다.

 “어때, 겨울P? 아냐의 잠옷차림.”

 “아름답네.”

 “엄마가 보내준 옷이에요. 인터넷에서 멋진 옷을 찾았다고.”

 “센스 있으시구나. 어머님이.”

 “나는 어때? 어라, 백야 지금 어딜 본 걸까나?”

 “양파 물려주기 전에 다물어라.”

 다 삶은 면을 꺼내 찬물로 씻었다. 전분기가 빠져 탱탱한 식감이 살아났을 터. 그릇에 덜은 다음 소스를 뿌리고 고명으론 오이를 썰어 올렸다. 애들에게 먼저 내놓고 바로 고기를 구웠다. 진짜 맛있다! 새콤한 맛이 좋아요! 오이도 아삭아삭해. 연신 맛있다는 호평이 이어져 오늘 처음으로 기쁜 마음이 들었다. 옹기종기 모인 상 중앙에 드디어 고기를 올리고 나서야 쉴 수 있었다. 자리를 찾는 데 미오가 슬쩍 자리를 비켰다. 아나스타샤의 옆자리. 모르는 척하고 앉았다. 긴장을 풀자 옆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뺨에 서렸다.

 식사 내내 느릿하게 젓가락을 놀렸다. 입맛은 없는 데 미각만이 곤두서서 먹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점심때부터 쭉. 걱정 사기 싫어 티 나지 않게 먹는 시늉만 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대신 애들이 더 많이 먹도록 챙겨주기만 했다. 식사 내내 대화가 떠나지 않아 눈치 챈 사람은 없는 줄 알았으나, 맞은편에 앉은 시키가 순간순간 눈썹을 치켜 올린 걸로 보아 그건 아닌 듯 했다.

 식사를 끝내고 상을 치우려는데 미오가 말렸다. 이 정도는 내가 할게. 눈웃음을 짓고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겼다. 과일을 깎으려 했더니 아나스타샤가 이미 칼을 잡고 있었다. 능숙하게 사과 껍질을 벗겨냈다. 다른 할 일을 찾기도 전에 시키가 내 위로 널브러졌다.

 “아, 편하다!”

 “…… 더우니까 좀 비켜.”

 “그럼 무릎만이라도 빌려줘. 영차.”

 “베개를 베라고.”

 실랑이라고도 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다 벽에 기댔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 이대로 집과 일체화되는 것만 같았다. 여전히 열려 있는 감각들만이 무의미하게 정보를 수집했다. 미오가 핸드폰을 꺼내 영상을 틀고 있었다.

 이거 봐, 아까 봤던 카에데 씨 무대야. Красивая, 정말로 아름다워요. 솔로 라이브인데도 사람이 이 만큼이나 왔어, 굉장해, 우리도 언젠가 이런 무대에 설 수 있을까? 분명 가능할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하수 같은 펜라이트를 흔드는 곳에서……. 카에데 씨 노래 정말 좋다. 연풍…… 사랑의 감정을 담은 바람이군요.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연풍의 원곡. 웅장하면서도 연심을 담은 노래를 배경으로 카에데의 한 마디가 들렸다.

 프로듀서를 할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

 감기던 눈이 깨지듯 뜨였다. 이럴 때가 아니지. 시키를 바닥에 눕히고 일어섰다. 일순 손에 힘이 안 들어가서 힘겹게 중심을 잡았다. 남은 일을 해결해야 해.

 “백야 어디 가?”

 “집. 나머지는, 너희들끼리 놀아.”

 “겨울P, 벌써 돌아가는 거야? 좀 더 있다가 가.”

 “너흰, 자고 갈 거잖아. 더 있을 필요, 없지.”

 “프로듀서…….”

 현관까지 따라 나온 아나스타샤가 아쉬움을 삼켰다. 안녕히 가세요, 내일 봐요. 데리러 올게. 배웅을 끝으로 방에서 나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고개만 든 채 나를 바라보는 시키가 스쳤다. 웃고 있는 건지 서글픈 건지, 의미 모를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


 외부와 내부의 온도가 극명하게 갈렸다. 203호의 문을 닫고 아나스타샤의 영역에서 벗어나자 현실의 여름에 내팽개쳐진 것만 같았다. 오늘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향수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폭력. 잠들어 있던 본성이 해동되어 정점으로 치솟았다. 모자 아래에서 ‘백야’가 날카롭게 눈을 떴다. 발을 움직이며 제일 처음 떠오른 것은 아나스타샤의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집안에서 민감한 냄새가 났다. 애들이 돌아오기 전에 당장이라도 지웠어야 하는 냄새. 불쾌하고 퀴퀴한, 여자애 혼자 사는 방에서 날 리 없는 이른바 홀애비냄새와 담배 냄새. 아이돌에 대한 환상을 품은 건 아니지만, 홈파티를 좋아해서 친구들을 흔쾌히 초대한 아나스타샤라면, 나한테 부끄러운 점을 보여 얼굴을 붉힌 아나스타샤라면 최소한 오늘 만큼은 집안에서 지워버렸어야 할 냄새가 방금 막 묻은 것처럼 선연히 남아있었다.

 “쓰레기 냄새는 맞지. 인간쓰레기.”

 집안은 급하게 치운 것처럼 어질러져 있었다. 하루 종일 비워뒀던 집인데. 역시나 파티를 열기로 한 집인데. 지금은 8월 후순. 방학 중이라 오전에 느긋하게 준비하고 나올 수 있는 아나스타샤가 중요한 장소를 어지러이 방치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 증거로 장을 보고 돌아왔을 때 냄새는 신경 썼지만 내가 정리하고 손 댄 곳들은 이상히 여기지 않았지. 이사 온 뒤로 크게 집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는 뜻.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온 쓰레기 새끼가 있어.”

 삐걱거리는 계단을 내려와 늘어선 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뻐근한 어깨를 풀고 주머니에서 클립을 꺼냈다. 사무실에 굴러다니던 걸 혹시 몰라서 평소 갖고 다녔는데, 설마 이렇게 쓸 줄이야. 길쭉하게 펴서 103호 문고리에 쑤셔 넣었다.

 학수에게서 수만 가지 기술을 배웠지. 요령 있게 꼬챙이를 돌리자 작은 소음들이 났다. 죽이는 법, 청소하는 법, 고문하는 법, 문 따는 법까지도. 크게 힘줄 것도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다 달칵, 잠금 쇠가 맥없이 열렸다. 문은 이렇게 여는 거야.

 “남의 집 문고리에 잔뜩 흠집이나 내는 게 아니라고. 아마추어 새끼야.”

 103호 안은 어두컴컴했다. 바퀴벌레 소굴처럼 축축하고 냄새나고, 온통 신경 거슬리는 요소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거슬리는 건 역시.

 “바퀴벌레지.”

 시야가 환경에 적응하기도 전에 직감이 위협을 잡아냈다. 남자가, 화단 앞에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던 남자가 이번엔 진짜로 날 죽이기 위해 식칼을 휘둘렀다. 아마 나를 도둑으로 여기고 덤비는 거겠지. 시끄러운 소음을 지르면서. 마치 이렇게 하면 상대가 겁먹을 거라는 양 요란하게.

 돌아보지도 않고 칼을 피한 채 팔꿈치를 들었다.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얼굴을 부딪친 녀석이 꼴사납게 현관 앞에 뒹굴었다. 떨어진 칼을 정장 안에 챙기고 모자를 벗어놓았다. 반갑다.

 “오늘 밤은 백야다.”

 복부를 걷어차 거실로 처넣었다. 잔악한 밤이지. 숨이 끊기는 와중에 토해낸 작은 신음을 들으니 이 녀석이 누구였는지 똑똑히 기억났다.

 일 하다가 몇 번 마주쳤지. 악수회나 사인회, 미니라이브와 스튜디오에서. 여름 내내 아나스타샤가 일했던 곳들에서 한 번 쯤은 남자를 본 기억이 났다. 마찬가지로 남자도 한 번 쯤은 나를 보았을 것이고 때문에 내게 적개심을 가졌다. 정확히는 ‘자기 이외에 아나스타샤와 붙어 다니는 남자’에게 말이다.

 거실 안에 빛이라곤 모니터 밖에 없었다. 화면 안에선 아나스타샤가 출연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고, 벽에는 아나스타샤의 브로마이드가 붙어있었다. 어둠에 익숙한 시야가 잡아낸 것들도 온통 아나스타샤였다. 책장에는 아나스타샤가 참연한 음반들이, 그 옆에는 아나스타샤의 펜라이트가. 이어서 아나스타샤의 캔배지, 아나스타샤의 명찰, 아나스타샤의 사진이 들어간 열쇠고리 등등. 내가 꿰고 있는 물건은 물론 자체 제작한 물건들도 있었다.

 여기까지라면 아주 열성적인 팬이라 여길 수 있었다. 프로듀서로서 엎드려 절을 하지는 못할망정 이 늦은 시간 집까지 쳐들어와 깽판을 부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직감이 잡아낸 단 하나의 물건이 우리의 관계를 그릇되게 바꿔놓았다.

 컴퓨터 책상 앞, 녀석이 조금 전까지 앉아있었을 의자 아래. 구겨진 여성용 속옷이 떨어져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침실에서, 아나스타샤의 옷장을 뒤져 갖고 왔을 물건을 보자 몸속에 피가 끓었다.

 온 종일 녹아내리던 이성이 발화점의 한계에 닿아 타올랐다. 폭발했다. 인간으로서의 껍데기를 부수고 오직 분노와 증오만이 살아남아 충동을 부추겼다. 무감각한 얼굴 뒤에 숨어 있던 괴물이 행동을 시작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리는 놈에게 달려가 머리부터 짓밟았다. 기절하려는 녀석을 일으키고 안면을 미친 듯이 가격했다. 광대를 박살내는 내내 녀석이 남긴 흔적들이 망상 속에서 재구성되었다.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된 느낌이었겠지. 한참 어리고 아름다운 여자애에게 반해 노래도 듣고 손도 잡아보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 굿즈를 마련하다 애정은 점차 커져만 가. 이에 대한 보상이 필요해졌을 거야. 집 위치를 알아내고 바로 아래에 방을 잡고. 내가 그 아이의 발밑에 있다는, 이젠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할 수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 자연히 집에 침입하고. 그 아이의 체온과 숨결을 느끼기 위해 구석구석 들쑤시고.”

 놈이 힘겹게 눈을 떴다. 어눌한 발음으로 입을 씰룩인 순간 뺨을 후려갈겼다. 입 다물고 있어, 너랑 대화할 맘 없으니.

 “한창 즐기던 중 창 밖을 보니 우리가 왔지. 유료주차장에 차를 대고 사람이 내려. 애들은 마트로, 나는 집으로. 상황이 급박해지자 넌 대충 정리한 뒤 얼른 밖으로 나와. 이 더운 날에 그런 짓을 했으니 얼굴은 새빨개져. 즐거움을 방해한 내가 담배 가지고 핀잔을 주자 죽일 듯이 노려보고 짜증으로 대하고. 나는 팬인데, 팬을 넘어서 그 아이에게 특별한 존재인데, 감히 어떤 놈이 나의 아이돌에게 붙어먹고선 내게 잔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내는 돈으로 벌어먹는 주제에……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그런데 말이지.”

 옆구리에 주먹을 박았다. 난 너 같은 새끼 팬으로 안 봐. 맥박과 함께 손끝까지 꿈틀거리는 놈을 구석에 던져놓았다. 덕질에 자격 따지는 건 아니지만, 우리 애한테 피해를 주잖아. 재킷을 벗고 칼을 꺼냈다. 기분 나쁘게시리.

 책상 위에 폰을 집어왔다. 놈에게 던져놓고 칼을 높이 들어 그대로 쾅, 다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도록 찍었다.

 “불어. 네 동료들.”

 일본어로 말했다. 갑자기 서툰 어투가 나오자 놈이 당황했다. 이미 인간의 몰골이 아니었지만 감으로 알 수 있었다.

 “불라고. 여기, 이 집, 위치 알려준 새끼들. 카드사, 통신사, 그런 데에 취직해서, 너랑 정보 공유하는 놈들. 얼른 불어. 불면.”

 너는 살려줄게. 망가진 눈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폰을 집어 일부러 건드리지 않은 놈의 손에 쥐어주었다. 얼른, 맘 바뀌기 전에. 망설임도 없이 놈이 폰을 집었다. 떨리는 손으로 실수해 가며 천천히 잠금 화면을 풀었다.

 훌륭하구나. 속삭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큰 거울에서, 어두운 방 안 유일하게 붉은빛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내 옆에는 학수가 서 있었다. 박수를 치고 찬사를 보냈다. 내가 기른, 이 업계의 정점답구나.

 “닥쳐.”

 놈이 흠칫 몸을 떨었다. 떨어진 폰의 화면이 꺼졌다. 놈이 익숙한 눈을 보였다. 어릴 적 내 발 아래 피투성이가 된 아이의 눈빛. 원망과 저주가 바뀌어 절망과 굴복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고갯짓으로 명령하자 놈은 다시 폰을 들었다. 잘 길들여졌군. 거울 속에 학수가 놈을 비웃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공포를 심어라, 내가 가르쳤지.

 “닥치라고 했을 텐데.”

 왜 그런 태도지? 내 기술이 분명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 사실을 넌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어. 네 삶에서, 인생 전체에서. 봐라, 지금도 이렇게. 폰을 잡았다면 도움을 청할 수도 있는 데 그러지 못 하고 있어. 네가 무서운 게야. 죽는 게 두려운 게야. 내가, 학수가, 너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너를 이렇게 강하게 키웠다.

 “그 기술에 썰려 뒤진 주제에…….”

 칼을 뽑아 일어섰다.

 “쪽팔린 줄 알면 가만히 있어야지.”

 칼을 던져 거울을 부쉈다. 소리에 놀란 녀석이 또 폰을 떨궜다. 이번엔 잠금이 풀린 상태였다. 명치를 때려 기절시키고 폰을 집었다. 더 볼 것도 없겠군. 메신저에 들어가자마자 위험한 대화를 나눈 기록들이 우르르 나왔다. 스크롤을 내려 놈들의 연락처를 하나씩 찾는 사이 깨진 파편 속에서 부서진 학수가 끝없이 소리쳤다. 네가 어떻게 자랄지는 내가 정한다.

 넌 프로듀서 따위를 할 녀석이 아니야.


 *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신가요? 백야 씨.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카코 씨. 급한 용무입니다.

 작업장이 필요하신가요?

 작업은 이미 끝났습니다. 문제는 사후 처리예요. 최대한 빨리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지친 목소리시네요.

 여름이라서…….

 오늘은 한 잔 마시고 싶은 날이라 가을P에게 괜찮은 술집을 추천받았어요. 그런데 자기는 내일 일이 있어서 함께하지 못 한다지 뭐예요. 혼자 마시기는 외롭고, 그냥 집에 들어가려던 참인데. 제가 술을 못 하는 백야 씨를 지금 주점으로 불러내는 건 실례가 되려나요.

 괜찮습니다. 부탁만 들어주신다면야.

 상당히 중요한 일인가 봐요.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위치는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


 실내는 보통 실외보다 시원하기 마련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다르다. 통풍이 안 되는 공간에서 방금 전까지 격한 폭력을 휘두른 뒤라면 실외가 더 시원할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가면 조금 나아질 거야.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문을 나섰지만 기대만큼 시원하지 못 했다. 낮 동안 내리쬔 열들이 여전히 거리에 머물러 있었다.

 혈관을 타고 올라온 더위가 두통을 일으키자 위장이 수축했다. 그나마 먹은 것들을 토했더니 태반은 액체였다. 목구멍이 따가워 근처 편의점에서 물을 샀으나 한 모금도 못 넘기고 버렸다. 역했다. 침을 삼키는 것만으로 타는 괴로움이 일었다.

 카코가 알려준 주점은 다행히 걸어 갈 수 있는 위치였다. 멀리 있었다면 차를 몰아야 했는데 지금은 운전을 할 만한 컨디션이 아니었다.

 걸음을 딛자 발이 푹 빠졌다. 보도가 눈 녹은 물처럼 질척거려 구두가 젖고 양말이 납처럼 달라붙고 말았다. 가로등 아래서 보니 그 또한 피였다.

 주점은 허름해 보였으나 안에는 제법 손님이 많았다. 주방과 가까운 자리에서 이미 술잔을 기울이는 카코를 찾아 옆에 앉았다.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먼저 말을 꺼냈다.

 “보내주신 연락처들은 이미 조사에 들어갔어요. 오늘 작업한 사람까지 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주변에서 떠나게 해드릴 수 있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인장이 주문한 안주를 내줬다. 카코는 기쁘게 받더니 어린애처럼 자랑했다. 여기는 은행구이랑 닭꼬치가 맛있대요. 김이 나는 꼬치를 베어 물곤 기쁘게 한 잔을 넘겼다.

 “궁금한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왜 모든 처리를 제게 맡기셨는지. 죽인 뒤에 시체 정도는 백야 씨 혼자서도 해결하실 수 있잖아요. 그게 전문이시고. 영원히 행방불명자 처리 되는 걸로 마무리 됐을 텐데.”

 “아나스타샤가 사는 집이니까요. 자기 사는 집에서 행방불명 사건이 생긴다면 불안할 겁니다. 혹시라도 이상한 루머가 퍼질지도 모르고. 또…….”

 “또?”

 “제 머리 바로 위에 그 애들이 있었어요.”

 내가 여기로 향할 때만 해도 아나스타샤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바로 발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줄곧 파티를 즐긴 것이다. 너희가 놀고 있을 때 나는 사람을 죽였다고, 바로 너희들을 위해서 그랬다고는…… 말할 자신이 없었다.

 카코는 말없이 은행구이를 입에 넣었다. 이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겠다는 조용한 배려겠지. 대신 다른 치명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

 “단순히 더위 때문에 그렇다고 보기엔 오늘은 특히 심각해 보여요. 저도 백야 씨의 여름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원래부터 이러시나요? 아니면 다른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백야 씨 같은 사람을 이렇게 만든 일이라면, 꼭 알고 싶은데.”

 가게는 붐볐다. 곳곳이 소란스러웠고 주인장도 종업원들도 바쁘다. 한국어로 조용히 얘기한다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겠지. 카코라면 해결책을 제시해 줄지도 모르고, 때에 따라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해줄 것이다. 맡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장 지워버렸다.

 “일이 힘들어서 그래요.”

 “…… 그것뿐인가요?”

 “네. 이런 일을 해보는 게 처음이라. 카코 씨의 기대에 부응 못 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백야 씨는 잘 하고 계세요. 너무 침울해하지 마셨으면 해요. 아참, 저 또 하나 좋아하는 아이돌이 생겼어요.”

 카코가 가게 안 TV를 가리켰다. 얼마 전 종영한 심야 드라마의 재방송에서 타카가키 카에데가 야경을 보고 있었다. 너무 멋진 사람이라 푹 빠져버렸지 뭐예요. 즐거워하는 카코에게 무심히 대꾸했다. 좋으시겠네요, 여긴 저 사람의 단골집인데.

 네? 카코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지만, 가게 소음에 묻혀 이쪽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카운터 안쪽에 붙은 카에데의 사인 포스터를 가리켰다.

 색이 꽤 바랜 것으로 보아 오래된 물건. 카에데의 데뷔 연도를 생각했을 때 활동 초창기의 물건임이 분명했다. 희귀한 물건의 관리가 소홀하다는 건 주인장은 아이돌에 관심이 없다는 뜻. 그럼에도 사인 포스터를 걸어놓았으니 분명 선물 받았을 것이다. 마침 이곳은 카에데가 좋아하는 닭꼬치와 은행구이가 맛있는 곳. 단골로 드나들다 가게와 개인적인 친분이 생긴 거겠지.

 나는 포스터를 응시했다. 오래된 포스터 속 카에데와 오늘 직접 만났던, 오랫동안 아이돌을 해온 카에데를 겹쳐보았다. 실물에는 사진에 없는 분위기가 담겨 더 좋게 보이기 마련이나, 지금은 달랐다. 나의 감이 느끼기에 지금의 카에데는 포스터 속 카에데 보다 명백히 무언가가 빠져있었고, 빈자리에 깊고 우울한 기운이 들어차 있었다.

 묻고 싶었다. 숙원을 이루고도 부족하신 겁니까. 아니면, 숙원을 이뤘기에…….

 피로가 몸을 잠식했다. 눈이 감기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도 정신만은 망가진 채 깨어있었다. 잠들지 못 하는 암흑 속에서 과거가 환상이 되어 나타났다. 내가 죽여 온 시체들이 온 몸을 짓눌렀다.











후기는 내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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