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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6 - 트라우마Trauma : 타카가키 카에데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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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31, 2018 17:27에 작성됨.

 백야야. 집에 안 가냐?

 집 돌아가기도 귀찮고, 사무실에서 자려고요.

 술시중 들기 싫으면 그냥 그렇게 말해.

 술시중 들기 싫습니다.

 되바라진 새끼.

 강이 형님만 가면 모르겠는데, 다른 형님들은 떡이 되도록 마시잖습니까. 여름에 그런 고역 못 버팁니다. 메서드만 데려가십시오.

 그럼 집에 쳐가시던지. 사무실에 틀어박혀선 안 나간다고 뻐기니까 형님들이 자꾸 너 데려오라 시키잖아.

 일 할 때는 나갑니다. 그 외엔 여기가 나아요.

 이럴 거면 대체 집은 왜 구한 거냐? 구리다고 안 들어갈 거면 좋은 집을 구하던가.

 형식적으로 구한 집입니다. 가끔씩은 들어가고요. 돈이 없어서 딴 집은 못 구합니다.

 업계 톱이 돈 없긴…… 지랄.

 이 돈은 편안한 노후를 위한 거예요. 언젠간 이 바닥을 떠나 혼자 조용히, 또 시원하게 살 수 있는 집을 구해야죠. 카페라도 하나 운영하면서. 가끔씩 형님들이랑 동생들도 초대하고. 그 때는 즐겁게 술시중 들어드리겠습니다.

 떠나긴 할 거냐. 여기.

 나이 들고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면 어쩔 수 없이 떠나겠죠.

 그럼…… 거긴 어떠냐.

 어디 말입니까?

 거기 말이야, 거기. 너 있는데.

 여긴…… 사무실인데요.

 이 사무실 말고, 그 사무실.

 무슨 소리십니까? 오늘 따라 이상하십니다. 왜 그런 얘기를…… 왜…… 왜 녹고 계신 겁니까? 사무실도 다 이상하게…… 형님? 뭐야, 대체. 여기 왜 이렇게 더운…….


 *


 눈을 떠보니 새벽이었다. 오전 5시. 평소 기상 시간보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고 낡아빠진 집의 천장만 시야에 들어왔다.

 전날 몇 시에 잠들었더라.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밤새 더위에 시달린 까닭이었다. 다시 눈을 감아도 잠들 자신이 없어 하루를 빨리 시작하기로 했지만, 본래 템포대로 아침 운동을 하는 건 무리였다.

 그냥 쉬자. 간신히 몸을 일으키니 밤새 흘린 땀으로 이불이 축축했다. 손에도 얼굴에도 목덜미까지도, 끈적한 땀으로 젖어 있었다.

 불쾌해.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더위도 불쾌하고 통풍 안 되는 망할 놈의 집도 불쾌해. 젖은 옷을 벗어던지자 거울에 내 몸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가득한 흉터에 새겨진 불쾌한 어린 시절이 배경처럼 환상이 되어 나타났다.

 연필 대신 칼을 쥐고 책가방 대신 시체를 짊어져야 하던 때. 같은 처지의 고아들끼리 싸움을 벌여 상처투성이 승자가 피투성이 패자를 짓밟던 시기. 나는 악착 같이 달려들어 승리를 거머쥐었다. 어느 순간 애들 사이에서 최강이 되었고 고아원장의, 학수의 총애를 받았다. 내 주먹에 쓰러진 아이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저주를 보냈다.

 샤워기를 틀어 물을 맞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도꼭지를 오른쪽 끝에 두고. 땀과 함께 망상을 씻어 내렸다. 샴푸와 바디워시, 치약으로 몸 구석구석을 닦고 한참을 다시 찬물만 맞았다.

 욕조가 있었다면 그 안에 잠겨있었겠지만, 거실을 반쯤 차지한다면 모를까 좁아터진 욕실에 그런 사치스러운 물건을 둘 순 없었다.

 새삼 지금 내가 사는 방을 둘러보았다. 욕실 문에 가린 좁은 공간이 실제와 거의 차이가 없는, 사람 하나 누우면 거의 꽉 차는 크기. 싱크대는 있어도 주방이라 부를 공간은 없고, 교도소 징벌방만한 공간에 화장실과 욕실이 붙어있었다.

 카코에게 부탁하면 대궐 같은 집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딱히 쓸모가 없어 말하지 않았다. 집이라는 공간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 게 일상이니까. 무엇보다 괜히 얘기했다가 그 여자가 무슨 짓을 벌일지 미지수였다.

 물기를 닦고 나오자 방안과 욕실의 온도차가 극명하게 닿았다. 입맛이 뚝 떨어져 아무것도 먹기 싫었다.

 더위에 휩싸이기 전에 얼른 속옷부터 입고 와이셔츠와 정장을 갖췄다. 어제 세탁소에 맡겨 다림질 해놓은 덕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옷 안에 쿨패치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각을 맞춰 모자를 쓴 뒤 서류가방을 들고 문을 나섰다.

 햇빛이 덮쳐들어 몸을 덥혔다. 모자를 쓰지 않았다면 눈을 찔렸을 것이다. 아침부터 이 정도라니. 일본의 여름은 분명 한국의 여름보다 더웠다.

 가방에서 쿨팩을 꺼내는데, 간밤에 꾼 꿈이 아른거렸다. 녹아내리는 한국의 사무실과 강이, 그리고 나. 거긴 어떠냐. 강이가 물었다.

 늙기도 전에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쳐 그 바닥을 떠나 새로이 정착한 곳. 조용하지도 않고 카페도 아니고, 평생 형님들과 동생들은 초대할 수 없는 이곳. 그렇게까지 해서 도착한 여긴…… 여기는…….

 “더워요. 여기도.”

 손 안에 쿨팩을 꼭 쥐었다.


 *


 회의실에서 업무를 보던 중 아나스타샤가 들어왔다.

 도브로예 우트로Доброе утро. 슬슬 발음을 알아들을 만큼 익숙해진 아침 인사 뒤에 바로 표정을 찡그렸다.

 “프로듀서, 괜찮나요?”

 길가에 버려진 고양이를 보는 눈이었다. 연민의 감정이 들어 당장이라도 주워가고 싶은 모양새. 한눈에 보기에도 내 상태가 심각한 것이다. 회사에 오는 내내 여름에게 지독히 시달린 탓이었다. 최대한 티 안내려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주워가는 건 사양이라 애써 괜찮은 척을 했다.

 아나스타샤가 에어컨 온도를 낮춰주었다. 에어컨 바람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여름엔 특히 소음에 민감해지는지라 일에 집중이 안 되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거라도 없으면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온 것만으로도 방 안이 시원해졌다. 평소 원망스러워 했던 감각이 이럴 때는 고마웠다. 아나스타샤는 내 옆에 앉더니 자연히 바닥에 눈꽃을 피웠다. 에어컨 바람에 섞인 눈송이에 정신이 팔렸을 때 오늘 일정에 대해 물어왔다.

 “미오랑 밤에 Главная вечеринка, 홈파티를 열기로 약속했어요. 시키도 오겠다고 했는데, 프로듀서는 오늘 저녁에도 일이 있나요?”

 “아니. 오후에, 일정이 끝나면, 너흴 바래다주고 쉬려 했어.”

 “그러면 프로듀서도 같이 놀아요.”

 짙은 속눈썹 속에서 푸른색 눈동자가 부담스러운 빛을 냈다. 홈파티라. 아나스타샤가 천체관측과 함께 좋아하는 취미였다. 조용해 보이지만 사실 왁자지껄함을 즐기는 반증이라고 할까. 떠들썩함으로 외로움을 잊고 온기를 느끼려는 이유라고 생각하면…… 너무 비약이려나.

 나하고 맞는 취미는 아니지만, 거절할 이유까진 아니었다. 애들끼리 노는 데 보호자로 참여한다 생각하면 되겠지. 미성년자들 상대로 술시중을 들어야 할일도 없을 것이고. 또, 나는 시끄러운 게 싫은 것이지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마저 싫은 것은 아니다. 자진해서 야근을 할 바에야 애들과 어울리는 게 낫겠지.

 “좋아. 장소는, 너희 집이지? 음식은, 어떻게 할까?”

 “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를 만들기로 했어요.”

 “내가 해줄게. 주방, 써도 되지?”

 “프로듀서가 요리하는 건가요? Да(네)! 꼭 먹고 싶어요!”

 아나스타샤는 곧장 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슬쩍 훔쳐보니 미오에게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었다. 프로듀서가 한국요리를 만들어 주기로 했어요, 라니. 입 밖에 낸 적 없는 말이 기정사실로 변했다.

 적당히 냉국수라도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기대치가 너무 올라가 버렸는걸. 급하게 머릿속으로 메뉴를 정했다.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한식이 뭐가 있으려나.

 인터넷 검색 중에 선배가 들어왔다.

 “미안. 기다리게 해버렸네.”

 “아닙니다. 저희도, 방금 모였습니다.”

 “привет. 가을P.”

 인사하자 선배가 만족스럽게 받았다.

 ‘가을P’는 최근 선배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내게 겨울P라는 별명이 붙어 회사 안에서 알게 모르게 유행하자 “나도 별명 하나 있으면 괜찮지 않겠냐?” 라면서 미오에게 부탁해 지은 것이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여름P와 봄P도 생겨나 사계절이 완성됐는데, 선배를 제외한 두 놈과는 그다지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농부처럼 성실하다 해서 가을P. 본인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그 이름으로 명함을 새로 팔 기세였다.

 선배는 분명 유능하고 멋진 사람이지만, 이런 식으로 일 외의 이상한 곳에서 열을 쏟는 버릇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 입장에선 적잖이 깨는 성격이다. 나도 처음에는 선배를 괴짜로 여겼으나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렇지 않으면 따라가기 힘들다.

 오늘 선배와 만난 이유는 아나스타샤의 다음 일정 때문이었다. 단체 곡을 새로 받아 연습을 해야 하는데, 유닛 멤버끼리 모여 합숙을 보내기로 결정이 난 것이다. 이미 사전 협의는 끝났고 남은 건 최종확인 뿐이었다.

 떠나는 건 바로 내일. 합숙 동안은 나와 떨어져 있어야 했고 그 동안의 보호자는 선배가 맡게 되었다.

 이 한 여름에 아나스타샤와 떨어져야 한다…….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졌으나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좋은 곡에 좋은 동료들, 선배가 만든 좋은 무대까지. 이번 일 하나로 아나스타샤에게 주어질 것들을 세어보면 나의 짧은 고통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애초에 더위 타는 체질 때문에 아이돌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따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무엇보다 그 기간 동안은 미오와 시키에게 전념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아나스타샤가 제일 일이 많다 보니 소홀해지는 일이 많아 만회해야만 했다.

 “전에 한 번 말했지만, 이번 합숙 장소는 그저 그런 짝퉁 여관과는 차원이 달라.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숨은 명소거든. 음식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인데 풍경이 좋아서 그 분위기에 일단 취하면, 크으!”

 왠지 따라가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는 꽤 주당이라 잘못했다간 휘말릴 게 뻔했다. 억지로 먹이지는 않아도 술도 못 하는 내가 어울릴 상대가 아니었다.

 “굳이 이런 관광지를 정한 이유는 당연히 이번 르포 일 때문이야.”

 “르포? 그건 어떤 일인가요?”

 “간단히 말하자면 리포터 일이지. 이번에 가는 온천 거리의 멋진 점들, 가령 음식이나 배경 등을 찍어서 잡지에 소개하는 거야. 짧은 코멘트도 달고 신나게 노는 모습도 실어서 사람들이 오고 싶도록.”

 “хорошо(좋아요)! 정말로 прекрасно, 훌륭한 일이에요.”

 “이런 일에, 숨은 명소를 쓰신다는 건…….”

 “밑천 까발리는 거지. 여관 사람들하고는 다 얘기해 놨어. 급하게 장소 변경을 해버리는 바람에 무리한 부탁이었지만 아는 얼굴이라 봐주신 거야. 여기에 이런 일 전문이라 할 수 있는 카와시마 씨도 함께 가니까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라 봐야겠지.”

 카와시마 미즈키는 전직 아나운서 출신의 아이돌이다. 올해 28살로 10대들로만 이루어진 이번 유닛에선 혼자 툭 튀어 보이나 유일한 어른으로서 다른 아이돌들을 돌봐줄 수 있는 위치였다. 전직의 경력을 살려 리포터 일을 자주했기에 르포 일에는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솔직히 감탄스러웠다. 이번 일을 준비하는 내내 선배를 옆에서 지켜봤기에 더욱. 혼자서 십 수 명의 아이돌들의 수십 가지 일들을 한 번에 준비하며, 적재적소에 인재를 투입하는 모습을 보면 이 사람의 능력이 실감 났다. 이런 능력 덕에 선배는 회사 안에서 개인 실적으로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 한다고 했다. 아이돌의 매력을 발굴해 키워내는 사람을 프로듀서라고 한다면, 선배야 말로 최고의 프로듀서였다.

 역시 이 사람은 가을이야.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선배가 놓치지 않고 물었다. 네가 봐도 내가 좀 대단하지? 속으로 깨면서 답했다. 네, 대단합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격지심이 들었다. 낙하산으로 입사한 주제에 어쩌다 좋은 아이돌, 잘 나가는 선배를 만나 빌붙어 가는 신세. 이런 내가 회사 안에서 어떻게 비치는지 알고 있었다. 남들이 물어뜯기 좋고, 전부 사실이라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받아들이고 묵묵히 일 하는 게 정답이겠지만 견딜 수 없을 때도 있었다. 내 아이돌의 매력을 내가 전할 수 없을 때. 내가 아닌 남이 만든 기획이, 노래가 나보다 더 도움이 될 때. 나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욕을 먹으려고 왔나. 병풍처럼 서서 맞아주려고 왔나. 프로듀서의 탈을 쓰고 해결사 짓을 하려고 왔나. 이럴 바엔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그건 아니라며 금방 고개를 젓게 된다.

 대체 나는 여기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거지? 나는…… 내가 되어야 하는 프로듀서는 어떤 모습이지? 나로 인해 오히려 애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야. 뭐해.”

 선배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아. 멍청한 소리를 내고 상황을 파악했다. 아나스타샤가 또 걱정스레 나를 쳐다보고 선배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직감이 반응하지 않다니. 감각을 동원하다 이내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직감이 조소를 지었다. 너 혼자 멍 때리고 있던 거야.

 “죄송합니다. 오늘, 컨디션이 좀…….”

 사과하는 나를 선배가 제지했다.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며 아나스타샤를 안심시켰다. 미안, 내가 요즘 너무 일 시켰나봐.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올라가서 좀 쉬자.”


 회사 옥상은 직원에게 항시 개방되어있다. 딱히 개방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이용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자물쇠가 잠긴 것도 아니라 누구나 언제든 사용 가능하다. 다만 용도는 제한되어있다.

 일단 펜스가 쳐져있어 부정적인 목적으로 쓰는 건 사실상 금지. 전에 몇몇 아이돌이 야구를 하다 걸린 적이 있어 운동 목적으로 쓰는 것도 금지. 그 외 수다나 선배가 후배에게 꼬장 부리기 등은 자유. 그러한 연유로 나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본래 업무에 복귀도 못 하고 직속상관에게 붙잡혀 올라왔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느냐, 낙하산 주제에 내가 우스워 보이느냐, 그 따위로 일할 거면 때려치워라, 사회부적응자 불쌍해서 오냐오냐 해줬더니. 기타 등등. 회사원 마음에 스크래치 낼 법한 말들이 십 수 가지나 떠올랐다.

 이제 펜스를 기어올라 금지된 행동을 실행할 찰나 선배가 망상을 지웠다.

 “힘드냐?”

 “아닙니다.”

 “뻥 치지 마. 딱 보니 피곤한 것 같던데. 네 표정은 몰라도 행동 패턴은 알아. 신입사원 한 둘 본 줄 아나. 말이나 해.”

 얼른 해라. 선배의 재촉에 바람이 뒤따랐다. 옥상이라 그런 가, 이 시기답지 않은 시원한 바람에 살짝 기분이 누그러졌다. 날아가지 않게 모자를 눌러쓰고 천천히 토로했다.

 제가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스펙도 변변찮고 말도 못 하고 눈매만 사나운 놈인데, 이런 제가 프로듀서에 어울리는 걸까요. 회사와 아이돌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요. 오히려 폐만 되는 건 아닐까요. 모든 게 의문이에요. 선배와 달리 제 역할을 찾지 못하겠어요. 저는…… 마법사는 아닌 것 같아요.

 어느새 난 모자처럼 고개도 푹 숙인 채였다. 선배는 듣는 내내 펜스에 기대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과 함께 바람도 그치자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진지하게 말했다. 겨울아.

 “네가 회사에 도움 안 되는 건, 아주 당연한 거야. 널 너무 과대평가 하지 마.”

 “…….”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넌 이제 입사 몇 개월 차고 난 이 회사 기둥에 건물까지 지은 사람이야. 그런 나한테 네가 비빌 수 있을 것 같아? 안 돼. 현실적으로 차분하게 생각해 봐. 너 그런 거 잘 하더구먼.”

 “보통 이럴 땐, 격려나, 힘이 될 만한 말을…….”

 “너도 그런 말을 못 하면서 나에게 바라지 마라. 네가 더 했음 더 했지. 끊지 말고 듣기나 해. 네 말대로 넌 스펙도 변변찮고 남들이랑 말도 잘 안 통해. 그런 네가 일 잘 하는 거, 최소한 나는 바라지 않아.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딱 세 가지야. 첫째.”

 선배가 하늘을 가리키듯 손가락을 폈다. 성급히 굴지 마.

 “신입들이 제일 먼저 하는 실수야. 의욕만 넘쳐서 빨리 회사에 보탬이 되겠다고 나대는 거. 능력도 없으면서 그런 짓 하다가 헛짓하는 애들이 이 바닥엔 넘쳐. 다행히 넌 의욕이 과하진 않아. 주위를 볼 줄 알고, 그 점은 높게 평가 해. 하지만 넌 능력 없어. 네가 도움이 될 것 같아? 아니야. 넌 도움을 받아야 해. 부담 덜고 일하라고. 그리고 둘.”

 두 번째 손가락이 펴졌다. 입 안이 말랐는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일 잘하는 법을 배워. 잘 나가는 아이돌들과 프로듀서들, 처음부터 톱이었던 거 아니야. 나도 그래. 재능 있는 놈은 있어도 시작부터 정점인 놈은 없어. 그 사람들이 바닥부터 쌓아올린 과정을 보고 네가 갈 길을 찾으란 말이야. 그렇게 천천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해야만 한다고. 그 때까진 내가 널 도와줄 거야. 그게 선배로서 할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세 번째.”

 손가락이 창처럼 날카롭게 섰다. 아이돌들 걱정시키지 마. 가장 아픈 부위를 날카롭게 찔렀다.

 “아이돌은 고단한 일이야. 짐을 덜어주진 못할망정 걱정 끼치지는 마라. 특히 아냐한테.”

 일을 할 땐 되도록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임해, 그게 프로다. 선배가 주먹을 쥐어 내 가슴을 툭 쳤다. 대답을 구하는 눈빛을 보내와서 진중히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선배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분명 자신의 멋진 연설에 감동하는 중이겠지. 재수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전보다 더 존경스러워졌다. 흔해 빠진 격려보다 더 도움도 되고, 무엇보다 나는 이런 스타일에 좋아 죽는 타입이니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위치라니. 롤모델로 삼아 부족함이 없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내 고민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혼자 죽을상 짓고 있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잘 나가는 아이돌들과 프로듀서들, 처음부터 톱이었던 거 아니야.’ 선배의 말을 되새기며 해결사 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한 때 그 바닥에서 폭력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처음부터 최고였던 건 아니다. 힘과 기술은 이미 충분했지만, 그걸 익히기까지의 과정은 끔찍했다.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 받아들이자. 스스로의 위치를 실감하다 문득 걸리는 점이 있었다. 선배의 신입사원 시절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신경 쓰지 않아서 몰랐는데, 왜 말을 안 했을까. 잘난 척하기 좋아하니까 굴욕적인 시절을 알리기는 싫었나. 그렇다고 일부러 숨길 사람은 아닌데.

 옥상을 내려가다 물어보려 했으나 중간에 치히로를 만났다. 마침 잘 만났다면서 종이봉투에 담긴 잡지를 꺼냈다.

 “여기, 다음 호 아이돌 매거진 견본이야. 저번 총선거 기념 인터뷰도 실렸으니 확인할 거지?”

 “지금은 됐어. 당장 내일 로케 떠날 거 신경 써야 해서.”

 손을 휘휘 저으며 선배는 급히 사무실로 내려갔다. 못난 후배를 가르치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한 탓인가. 갈 곳을 잃은 잡지는 내가 대신 받았다. 바로 업무에 복귀하기 전에 치히로에게 물을 게 있어 조금만 딴 길로 새기로 했다.

 선배는 신입 때, 어땠습니까? 선배가 지나간 방향을 가리키며 치히로가 되물었다.

 “쟤요?”

 “두 분, 동기시잖습니까. 분명 아실 거라, 생각해서.”

 “당연히 알지만. 갑자기 그게 궁금해지신 건가요? 일 못 한다고 혼내기라도 했어요? 직접 물어봐도 될 텐데.”

 “갈굼 받았습니다. 물어도, 대답 안 하실 것 같아서.”

 “그건 복수하셔야겠네요. 흠. 지금이랑 별반 다를 거 없었어요. 일에 열정적인데, 과할 정도로 열정적이라 주변이 끌려 다녔죠. 프로듀서라는 일에 목숨을 바친다고 할까. 따라다니다 보면 실적이 보장되니까 고생한 값은 톡톡히 했고요. 그런데…….”

 거기서 치히로가 말을 끊었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자기도 신기하다는 양 목소리를 냈다.

 “지금이랑 그 때랑 똑같아도 너무 똑같은 걸요. 저 포함해서 그 때 동기들 전부 어딘가는 달라졌는데. 능력이나 성격, 경험 같은 면에서. 어쩌면 걔는 처음부터 완성형이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고생을 안 한 건 아니지만.”

 “프로듀서가 되기 전엔,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십니까?”

 “평범하게 대학 다녔다고 들었어요. 이대로 살다간 사회의 톱니바퀴가 될 것 같아서 때려치우고 취직했다나. 아이돌 프로듀스가 제일 열정을 불태울 만한 일이었고, 열정과 실력이 비례했는지 지금은 업계 톱이라고도 불리죠.”

 “두 분이, 이 회사에 입사한 때가…….”

 “5년 전이요. 거기까지 궁금하신가요?”

 “아니요. 그냥 좀, 신경 쓰여서요. 정확히 뭐가 신경 쓰이는 지는, 잘 모르겠는데.”

 “신기하네요. 프로듀서님도 모르는 게 있다니. 그보다.”

 치히로가 시간을 확인시켜줬다. 오전 11시. 오후에는 담당 셋이 전부 출연하는 촬영이 예정되어있었다. 시간은 멀었지만 시키를 붙잡아 밥까지 먹이고 여유롭게 움직이려면 지금 출발하는 게 이로웠다.

 세세한 배려가 섞인 서포트에 감사하며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미오는 프로덕션으로 올 거니까 아나스타샤는 그 때 같이 데려가면 되겠지. 시동을 걸고 한 번 더 움직일 경로를 정리했다. 에어컨 소음과 냉기가 차 안을 채우는 동안 아무것도 없는 먼 곳을 멍하니 쳐다봤다.


 *


 일본 아이돌 문화의 독특함은 총선거라는 시스템에 있다. 이름 그대로 아이돌들을 줄 세워 순위기를 매기는 이 놀이는 해마다 빠질 수 없는 행사가 된지 오래라고 한다. 투표는 팬들이 쏟아 붓는 돈으로 이루어지는데, 보통 음반 발매로 투표권을 배포하면 팬들이 인터넷을 통해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사용하는 식이다. 적게는 수십 장, 많게는 수백 장까지 돈을 쓰는 헤비 팬층의 위력은 무시무시할 정도다.

 아이돌 그랑프리는 이러한 총선거 시스템을 차용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총선거 기간 동안 아이돌들의 활동을 방송으로 내보내고 있는데, 아이돌의 성장과정을 판다는 전략이 먹혀 해마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특이하게도 여러 소속사의 다양한 아이돌들이 입후보 할 수 있단 점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방송 중 문자 투표를 받는 식으로 무료 투표권도 배포하고 있다. 그래봤자 작정하고 통장을 꼴아 박는 팬들에겐 비빌 수 없겠지만. 여기까지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이는 일본 아이돌계의 크나큰 병폐라고 할 수 있었다.

 총선거 순위는 아이돌의 생명이다. 참가 아이돌이 많다보니 결과 발표 땐 상위 50위권까지 발표하고 나머지는 권외로 친다. 권외에 들어간 어떤 아이돌은 분함과 서러움으로 발표장에서 통곡까지 했다고 한다.

 50위권에 드는 것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높은 순위를 차지한 보상이라 할 수 있는 음반 참여는 최상위 10위권에게만 보장되는데다, 그 중 정점을 노리는 1위부터 3위권은 피 말리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각 소속사 간의 경쟁, 방송사의 자극적인 편집, 여론의 반응, 팬들의 이목까지. 방송에만 안 나왔지 여러 사람 골로 보내기 딱 좋다는 게 나의 감상이었다. 투표권만 뜯어내고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라오는 음반은 덤이다.

 그 총선거에서 내 담당 아이돌들은 자랑스럽게도 데뷔한지 얼마 안 되어 순위권에 드는 데 성공했다. 50위권 안에서 하위에 속해 앨범 참여는 못 해도 ‘좋은 성적’을 받았음은 틀림없는 사실. 덕분에 여러 방송이나 이벤트에 불려 다니며 여름을 바쁘게 보내는 중이었다.

 오늘 방송도 그 중 하나. 총선거에서 순위권에 든 아이돌들 몇몇을 불러 진행하는 단체 토크쇼였다.

 준비된 대기실에서 쉬던 중 갑자기 한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바빠도 너무 바쁘니까 말이지. 한창 여름인데 바다는커녕 수영장도 못 갔어. 친구들이 단체방에 사진 찍어 올리면 너무 부러워!”

 “домашнее задание, 아, 숙제도 아직 많이 남았어요.”

 “맞다! 잊고 있었어! 틈틈이 한다 해놓고 시간 날 때마다 놀아버렸어……. 바다도 가고 싶고, 숙제도 해야 되고! 어떡하지?”

 미오가 노골적인 시선을 던졌다.

 이번 달 아이돌 매거진을 살피던 나는 당연한 답으로 응수했다. 숙제 해야지, 열심히. 그러자 여고생의 지적이 돌아왔다.

 “아니야, 겨울P! 이럴 때는 ‘방학 끝나기 전에 바다 가서 머리 식히고, 돌아와서 숙제하자!’하고 격려해 줘야지!”

 그런 건가. 내가 아는 상식에선 떠올릴 수 없는 대답이나 일단 미오의 요구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옆에서 아나스타샤가 눈을 빛내는 것으로 보아 이미 두 사람의 요구였다. 상황을 흥미로이 방관하던 시키도 다른 의미로 눈을 반짝였다. 기대를 깨려는 건 아니지만 긍정적인 대답을 해줄 수도 없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난, 바다가, 싫어.”

 물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거니와 덥고 사람 많고 시끄러운 장소. 여름 바다는 내가 싫어하는 대부분의 요소를 갖춘 곳이었다. 아나스타샤의 여름 화보 촬영 외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그나마도 찜통더위 아래 정장 안에서 푹 익어버릴 뻔했다.

 단호한 세 마디가 나오자 두 별은 한숨 팍 쉬며 숙제 이야기로 돌아갔다.

 시키는 흥미가 식은 게 아니었는지 쭉 고수하던 소파 위 편안한 자세를 풀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책을 읽나 기웃거리다가 뭔가 떠오른 것처럼 냐하,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내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다.

 “있잖아, 있잖아, 백야.”

 “성가시게 굴지 말고 간단히 용건만 말해. 뭔데.”

 “나 음료수 마시고 싶어.”

 준비된 냉장고를 가리켰다. 저기 있으니까 마셔. 시키가 고개를 저었다. 저거 말고, 카페에서 파는 거.

 뒷목을 잡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나 엿 먹이는 게 취미지.

 하필이면 방금 그 말에 아나스타샤와 미오도 관심을 보였다. 시키와 달리 날 곤란하게 만들 의도는 아니지만, 내 감은 둘의 진심을 단번에 꿰뚫었다. 이해했다. 협찬 받은 저 음료는 더럽게 맛이 없었다.

 음료수 셔틀을 자행해 1층으로 내려왔다. 보통 실내는 실외보단 시원하나 그것도 장소 나름이다. 복도 같은 경우 창문으로 햇빛이 들이쳐서 항시 위협적인 까닭이다. 의식적으로 햇빛을 피해 걷는 나를 방송국 사람들이 의아하게 봐도 그러거나 말거나. 쿨팩으로 땀을 닦았다. 이마가 얼어붙었다가 금세 녹아내렸다.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카페는 붐볐지만 내부는 시원했다. 기다리는 동안에 잡지를 읽으려는데 예민해진 청각이 불특정 다수의 이야기를 빨아들였다. 날씨가 이 모양이라 다른 사람들도 고역인 것이다.

 날씨 무지 덥지? 언제쯤 시원해질지 모르겠어. 그거 맛있으면 나도 한 입만. 네 돈 주고 사먹어. 쩨쩨하게 굴지 말고. 다음엔 어디로 갈까. 움직이기도 불편한데, 여기 가만히 있자. 이거 봤어? 요즘 완전 핫한 영상인데. 상사 때문에 혈압 올라 죽겠어. 난 일이 해도 해도 안 끝나, 또 카페인으로 버텨야지. 저기, 자리가 없어서 그런데…….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여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바람으로 치면 연풍, 흔히 말하는 산들바람처럼. 낯가림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20대 초반, 어쩌면 그보다 아래로 보이는 동안에 어깨를 내놓은 과감한 복장으로 어른스러움도 돋보였다. 피부색이 옅고 자세히 보면 양쪽 눈의 색이 달랐다. 청록색과 초록색. 밑에 눈물점까지 더해 신비로운 느낌이 강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서로 알고 지낸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알기만 하는 얼굴. 모를 수가 없었다. 읽고 있던 잡지를 덮어 표지 속 여성과 괜히 한 번 대조해 봤다. 양쪽 모두 스물다섯치고는 어렸고,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사진보단 실물이 나았다. 사진으로는 알 수 없던 분위기가 있으니까. 평소처럼 직감적으로 느낀…… 남들에겐 함부로 말 못할 그런 분위기 말이다.

 주위를 살피고 조용히 내 앞에 의자를 밀어 자리를 마련했다. 괜찮습니다, 앉으시죠. 호의를 받아들여 여성도 조용히 앉았다. 감사합니다.

 타카가키 카에데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5월 중으로 이번 편을 완성하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작업이 지체되어 그러지 못 하게 되었습니다.

약속해 놓은 것이 있으므로 오늘은 먼저 상편을 올리고, 하편은 일주일 이내에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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