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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세 시키 연작선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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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30, 2018 00:36에 작성됨.

더 이상은 떠나가지 말아줘. 더 이상은 멀어지지 말아줘. 네 손을 나에게서 떨어뜨리지 말아줘. 더 이상은...실종하지 말아줘.


빗속에서 시키를 껴안은 채 나는 울부짖었다.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시작과 끝은 하나라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온 끝만큼 새로운 시작에 대한 불확실을 보여주는 것도 없으니까. 어린아이같이 펑펑 우는 나를 껴안고 다독여주는 시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그저 외쳤다. 나스카로 다시 돌아가지 말아줘.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시게키로(始戟路)에서 사라지지 말아줘. 나를 츠이게키역(終戟驛)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아줘. 시키 트리스메기스토스가 아닌 이치노세 시키로서 남아줘. 비어있는 스포이드와 플라스크로 남아있지 말아줘. 제발, 제발 나의 이치노세 시키로 남아줘. 시키는 나의 절규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어보였다.


한참을 울부짖고, 겨우 진정한 나는 내가 사는 곳을 안내해달라는 시키의 말에 말에 그녀에게 나의 돼지우리같은 단칸방 맨션을 보여주러 걸음을 옮긴다. 그러고보니 아이돌일 적에도 내가 사는 집에는 들이지 않았던가.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고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사는 집은 그다지 좋은 맨션도 아니고, 아이돌을 들이기에는 더욱 부족한 공간이니까. 세간의 시선이라는 것이 신경쓰인 탓도 있을 것이다. 프로듀서와 아이돌이란 단단해 보이는 유대의 끈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은 부목에 겨우 기대어 꽃을 피우는 나팔꽃 같이 연약한 것이니까. 나도, 시키도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한 번도 데리고 오지 않았고,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겠지. 한 번 실종된 탐험가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마음을 추스릴 긴 휴식이 필요할 테니까.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다녀왔습니다-라고, 외로운 외침을 들려준다. 평소 같았으면 공허한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았을테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다지 외롭지는 않았다. 그야 소리가 두 개였는걸. 나의 집에 와 즐거워보이는 시키는, 환한 미소와 함께 나의 목소리보다 조금 뒤늦게 다녀왔습니다-라고 외쳐주었다. 마치 안에 누구라도 있었던 것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뛰쳐나오는 한 마리의 샴 고양이같이 그르렁대어주었다. 그러니까 외롭지 않다. 이제 이 곳은, 어딘가에는 존재할 법한 두 사람만의 비밀기지가 되어버린다. 그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비어있는 공간. 자그마한 박스라고 해둘까, 나는 일단 비밀기지의 임시 명칭을 생각하고는 나 혼자 웃어보인다.


시키가 샤워하러 들어가자 나는 저녁을 만들기 위해 주방에 섰다. 오므라이스정도면 적당할거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역시 시키에게는 조금 더 괜찮은 것을 먹여주고 싶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럼 뭐가 좋을까. 나는 원론으로 돌아온 과학자처럼 중얼거린다. 원론이라면 역시 햄버그가 좋겠지. 시키는 햄버그를 꽤 좋아했으니까. 그럼 햄버그를 만들어볼까. 재료가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도, 나와 시키 두 사람이 먹을 정도는 있을테니까.


비가 조금 약해질때 쯤에 샤워를 마친 시키에게 멋들어진 그릇에 담긴 웰던 햄버그를 내민다. 소스는 근처 슈퍼에서 사 온 싸구려품이긴 해도, 고기와 양파, 그리고 갖가지 향신료가 들어간 맛깔난 햄버그를 시키가 거부할리가 없다. 잠시 냄새를 킁킁 맡던 시키는, 자신이 원하던 것이라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포크를 들더니 한 접시를 눈 깜짝할 새에 먹어치운다. 그렇게도 배가 고팠던 걸까.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맛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한 조각 썰어 내 입에 넣어본 나는, 내 몫의 햄버그에서 절반을 떼어 시키에게 넘겨준다. 생각보다 훌륭하게 됐군. 이 정도라면 나는 밥과 같이 먹으면 되니 시키에게 조금 더 주는게 아깝지 않아. 시키도 원하는 듯하고. 시키가 맛있게 먹는다면 나는 조금 덜 먹어도 괜찮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나.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낸다. 창 밖을 쳐다보았더니 소나기의 소리 대신 창문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비가 거세게 내리다가 조금 잦아들어서, 창문에 맺혀 있던 빗물들이 조금씩 하강하며 나는 소리.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물을 끄고 베란다로 나가보았다. 별 것 없는 베란다에는 옛날에 나와 시키가 주고받았던 작은 제라늄 화분이 아직까지도 푸르른 잎을 틔우고 있다. 이상하다. 저 화분은 시키가 사라지고 나서는 관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부활을 알리는 것처럼, 붉은 제라늄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설거지를 끝내고 시키를 찾아본다. 시키는 소파에 누워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그렇게 기대어 한껏 울어제꼈고, 비오는 날에 비도 꽤나 많이 맞았으니까. 나는 집에서 가장 두꺼운 이불을 꺼내 덮어주고 시키의 옆에 앉아 그녀를 쳐다본다. 하얀 살결과 연보랏빛 머리카락, 그리고 붉은색 입술. 서로가 보색이라도 되는 것마냥 시키의 아름다움을 더 부각시켜주는 그 색상의 화려함 앞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볼에 살짝 입술을 대어버린다. 어차피 빗소리가 모든 소리를 지워버려줄테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문득 시키의 입가를 쳐다보니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이렇게나 곤히 자고 있고.


시키가 곤히 자고 있는 소파에 등을 기대어 창 밖을 쳐다본다. 창 밖에는 제라늄, 비, 제라늄, 그리고 비. 비가 멈추면 시키는 사라질까. 시키가 사라지면 저 제라늄도 다시는 꽃을 피우지 못하게 될까. 아까 전부터 그칠 듯했던 비는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비가 우리를 가려주고 있는지도 모르지. 시키를 다시 나스카로 데려가려는 사람들을 막아주는 비.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제까지고 이런 시간이 계속된다면 좋을텐데. 


나를 찾는 시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재빠르게 움직여 시키의 앞으로 다가가자, 빗소리에 잠을 깬 듯한 시키가 눈을 작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손을 뻗는다. 무슨 의미이기 생각하기 전에 그 손을 잡는다. 시키는 천재라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생각을 하면서 무슨 일을 한 적이 그다지 없었으니까. 따스한 시키의 체온이 손에서부터 발끝까지 퍼져나간다. 비를 맞아서일까, 시키가 작게 몸을 떨며 나를 쳐다본다. 그런 시키를 위해, 별 것 없는 나의 체온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불 속을 파고든다. 시키의 몸에 닿아 생기는 부촉매 현상.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다. 시키를 껴안아본다. 따스하다. 내 몸으로 시키를 껴안고 있는 동안에는 그녀가 어디도 가지 못하겠지. 그러니 조금 더 껴안아본다. 빗소리가 조금 더 세차게 들려온다. 장마는 진행 중. 내일도 비는 그치지 않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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