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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터의 어떤 하루 _ 나오, 츠무기, 히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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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26, 2018 22:12에 작성됨.

 "욧샤! 내 왔다아! 다들 미리 와 있다꼬 얘기 들었다카......"


 발칵! 힘차게 문을 열어젖힌 나오는 자신의 텐션 높은 목소리 톤과 달리 축 쳐진 대기실 분위기에 하던 말의 끝을 맺지 못했다. 혹시 잘못 들어온 건가 싶어 대기실 앞 팻말을 확인했다. 765프로 요코야마 나오, 시라이시 츠무기, 키노시타 히나타. 오탈자 하나 없이 세 개의 이름이 제대로 쾅쾅 박혀 있었다. 나오는 손으로 대기실 안 머릿수를 하나씩 셌다. 거울 앞에 앉아 명상 비스무리 한 걸 하고 있는 가오리 머리의 한 명. 대기실 소파에 앉아 사과 주스 하나를 멍하니 빨고 있는 사과 머리 한 명. 그리고 문 앞에 나.


 "분위기 와 이 모양이가. 둘이서 계속 그러고 있던 기가?"


 문을 열 때와 달리 느리게 문을 닫으며 나오는 두 사람의 중간에 딱 섰다. 애매한 일자선의 삼각 구도는 어색함이 가중되어 나오의 말이 짝을 찾지 못하고 둥둥 떠 다녔다. 일단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그래도 뭐라도 먹을 정신이 있으니 패스, 거울 앞 자기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저 영장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나오는 넋을 가출하고 있는 츠무기의 양 어깨를 손으로 탁 잡았다. 꺄앗! 하이 톤의 목소리가 3옥타브 솔을 톡 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뭐, 뭔가요. 갑자기 등장하셔서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긴장한 모양새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안카나. 츠무기는 이런 식의 무대 첨 아이가?"


 "그, 그걸 알면서 놀라게 하는 심보라니..."


 "곡해하지 말라카이! 심보가 아니라 힘 풀라는기다. 내 다 겪어봤다 아이가. 긴장 해 봐야 나중에 목에 담만 온다."


 나오는 몇 번 츠무기의 목 뒤를 주물렀다. 사람이 살면서 이 부근이 안 뭉쳐있을 리 만무했기에 츠무기는 몸을 베베 꼬며 아픔을 삼켰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츠무기를 뒤로 하고 이번엔 여전히 무념무상 사과주스 드링킹에 여념이 없는 히나타의 옆으로 앉았다. 얘도 넋이 나갔다. 이번엔 히나타의 허벅지 위로 묵직하게 손을 올렸다. 들썩하며 놀란 히나타가 가득 동공을 확장하곤 나오를 쳐다봤다.


 "츠무기야 첨이니까 그렇다 치고, 히나타 니는 와그라노?"


 "나오씨. 뭐랄까. 뭔가 그냥 버라이어티에 출연한 게 아니라 공연을 홍보하러 나왔다 하니 가슴이 두근거려서 말여."


 "아, 그 뭔지 알 것 같다."


 오늘 나오, 츠무기, 히나타. 이 세 사람은 765프로 시어터 멤버들의 대규모 공연을 만천하에 홍보해야 할 숙명을 가지고 이 버라이어티에 출격하게 됐다. 츠무기도, 히나타도 따로따로 놓고 보면 참 인재이긴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조합이 아니냐고 나오가 스리슬쩍 물었을 때, 프로듀서의 입에서 나온 건 '요즘 이런 인선이 꽤 잘 먹히더라고'하는 무책임한 문장이었다. 거기다가 녹화 전에는 들리지 못하고 녹화가 끝날 때 데리러 오겠다는 2연타 무책임 어택까지. 뭐, 프로듀서가 바쁜 건 시어터 안팎 미물들도 아는 일이니 나오는 거기에 '내만 믿으라'하는 호언장담을 내뱉었다. 여기 와서 살펴보니 그 말에 장담은 못하겠다.  


 - 슬슬 준비 부탁드리겠습니다!


 복도에서 스태프의 안내가 울려 퍼졌다. 거울 앞에서 또 다시 츠무기가 경직되어버렸다. 히나타의 무릎을 몇 번 주무르는 것으로 히나타에게 격려를 마친 나오가 다시 츠무기에게로 갔다. 의자를 뒤로 끌며 일어나는 츠무기의 허리를 몇 번 토닥였다. 손길에 놀란 츠무기가 잔뜩 움츠린 채 나오를 쳐다봤다. '내만 믿으라'는 호언장담을 장담 못하겠다고 생각한 게 방금 전인데 그 장담을 또 해야 할 판이다.


 "마, 히나타도 그렇고, 츠무기도 그렇고. 내 다른 건 몬해도 브라이어티라믄 쪼매 이골이 났데이. 내만 믿으라."


 주먹으로 가슴을 두 번 치며 히나타와 츠무기 양 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의심 반 믿음 반의 츠무기, 무조건적인 믿음의 히나타. 그 사이에서 나오는 남몰래 한숨 섞인 웃음을 잠시 지었다가 거뒀다. 별 일 있겠어? 그냥 평소랑 다를 바 없는 녹화겠지. 시답잖은 마인드컨트롤을 하며 나오는 두 사람을 이끌고 녹화장 안으로 입성했다.


*


 게스트 라인업은 총 세 곳의 사무소였다. 765프로의 세 사람. 무슨 프로에 세 사람, 어떤 프로에 세 사람. 아이돌은 많고, 출연할 수 없는 무대는 한정되어 있다는 방송계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타파해보자는 기획의도 하에 나왔다는 이 프로그램은 3팀이 3가지로 구성된 랜덤 스테이지를 하나 선택해서 주어진 미션과 함께 공연을 하면 된다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무대라는 게 운이 좋으면 정말 꽃길을 걸으며 꽃밭에서 무대를 보일 수 있지만 반대로 운이 나쁘면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 시궁창에서 무대를 선보여야 할지도 모르는 순전히 복불복 게임 같은 형식이었다.


 "그렇다면! 제일 중요한 순서입니다. 각 팀의 대표자는 나와서 뽑기를 하나씩 뽑을 겁니다. 1,2,3 세 숫자가 있는데 이 숫자는 바로 여러분들의 무대가 준비되어 있는 스튜디오입니다. 2번을 뽑으셨다면 2번 스튜디오로 가서 무대를 하시게 되는 거죠. 그럼 대표 한 분씩 나와 주세요!"


 대표라는 말과 함께 히나타와 츠무기는 나오를 쳐다봤다. 나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표라 해봤자 하는 건 뽑기일 테고, 이 뽑기는 절대로 편집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한 컷은 버라이어티 걸음마를 막 뗀 아이에게 응당 줘야 마땅할 것이다.


 "츠무기. 니가 해보래이."


 "네? 분명 요코야마씨가 본인만 믿으라고..."


 "내 믿제? 이건 나가야한다. 원 샷의 기회라 안카나."


 나오가 옆에서 등을 떠밀었다. 츠무기는 얼떨결에 일어나 세트 중심으로 향했다. 불안함에 계속 나오와 히니타쪽을 쳐다봤지만 나오는 빙긋 웃으며 어서 가라는 손짓뿐이었다. 그 옆에서 히나타가 '츠무기씨 힘내는겨'하고 양 손 불끈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분명 자기를 믿으라더니 이런 중요한 순간에 떠미는 나오를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운데 이미 세트 중심에 서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의 빨간불과 뭐라 뭐라 시끄럽게 떠는 사회자.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765프로 시라이시 츠무기양!"


 "네? 네. 네."


 "765프로는 무려 저희 프로그램 첫 출연입니다. 일단 그 소감을 묻고 싶네요."


 그렇지. 나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건 각 잴 것도 없이 제대로 된 원 샷이다. 나오는 뿌듯하게 팔짱을 끼며 자신의 선구안에 스스로 감탄했다.


 "그, 그걸 꼭 말로 해야 아시는건가요."


 츠무기가 예상도 못한 답변을 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아?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오는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버렸다.


 "츠무기씨. 아무래도 긴장이 가시지 않았나벼."


 아니 말로 해야 아시는건가요? 라니. 말하라고 깔아준 판을 왜 본인이 다시 돌돌 말아 버리는 거야. '좋다고 말해! 좋다고!' 과한 몸짓과 함께 나오는 입모양으로 나 홀로 고요 속의 외침을 벌였다. 츠무기가 흘끗거리며 나오의 발광을 봤으나, 도대체 뭐라고 사인을 보내는지 알 수가 없다.


 "아으. 대체 우짜라는겨..."


 "시라이시양. 이왕이면 말로 해 주시는 게 모두가 알기 좋으니까요. 다시 한 번, 출연 소감이 어떠신가요?"


 좋.다.고.말.해. 나오는 또박또박 한 음절씩 음소거한 채 외쳤다. 그제야 눈치 챈 츠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게 되어서... 좋습니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을 받은 것 같은 멘트군요."


 사회자가 나오를 쳐다봤다. 이목이 집중됨을 느낀 나오가 과장되게 두리번거리며 양 손으로 엑스 자를 만들며 입을 앙 다물었다. 작게 녹화장에 웃음이 터졌다.


 "자, 그럼 시라이시양. 이 안에서 뽑기를 뽑아주세요. 과연 어떤 스튜디오가 765프로를 맞이하게 될까요?"


 츠무기는 조심스럽게 뽑기 상자 안으로 손을 넣었다. 종이 쪼가리를 뽑게 될 줄 알았으나 안에 3개의 공이 굴러다녔다. 하나씩 주무르며 만지던 츠무기는 손에 차지게 감긴 공 하나를 뽑아 들었다.


 "765프로의 스튜디오는 3번 스튜디오입니다! 3팀 중 마지막으로 스튜디오에 입성하시게 되겠군요. 축하드립니다! 부디 그 스튜디오가 최고의 공연을 선보일 수 있는 스튜디오였으면 좋겠군요."


 "그 말은 제가 뽑은 이 스튜디오가 공연을 선보일 수 없는 스튜디오일 수도 있단 건가요?"


 "무대는 확실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최고의 공연을 선보일 수 있는 스튜디오였으면 좋겠다고......"


 아이고 두야. 나오가 한 쪽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히나타를 몇 번 툭툭 쳐 츠무기를 향해 턱짓했다. 히나타가 앞으로 나갔다.


 "츠무기씨. 얼른 들어오는 게..."


 "......아!"


 저질러버렸다는 표정이다. 히나타는 보호자마냥 츠무기의 손을 잡고 되돌아왔다. 임무 그 이상을 마치고 돌아온 츠무기에게 나오는 일단 잘했다는 말과 함께 격려했다. 그러나 츠무기는 여전히 찜찜함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부디 그 스튜디오가 최고의 공연을 선보일 수 있는 스튜디오였으면 좋겠다니. 이 말은 제가 뽑은 그 스튜디오가 최고의 공연을 선보일 수 없는 스튜디오란 뜻 아닌가요?"


 "복불복 진행에 흔하디흔한 멘튼기다. 사회자 멘트에 일일이 넘어가버리믄 니만 힘들다. 걍 그런가부다. 하고 넘기뿌라."


 "응응. 츠무기씨. 그냥 사회자분이 한 말일겨. 하나하나 신경 쓰지 말어."


 버라이어티에 통달한 것 같은 나오와, 사긋하고도 나긋한 히나타의 말에 츠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첫 번째 스튜디오로 향하게 될 팀의 무대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1번 스튜디오 팀이 녹화장을 벗어났다. 거대한 스크린에 1번 팀을 팔로우하는 중계 화면도 떴다. 대충 저거 보믄 우리도 어케 해야 할 지 예상할 수 있지 않캤나. 나오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부하는 마음가짐으로 화면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


 1번 스튜디오는 동물의 왕국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실제 살아있는 동물들이 날뛰어 다녔다. 오랑우탄과 바나나 쟁탈전을 벌이고 멍멍거리는 강아지들의 불협화음을 지휘해야 했으며 뱀으로 목도리를 하고, 나무늘보들 앞에서 자장가 저리가라 할 정도의 느려터진 무대를 선보였다. 이른바 애니멀 스테이지였다. 1번 팀의 정신없는 중계를 시청하던 세 사람은 점점 심각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첫 판부터 장난이 아니잖아 이거.


 "아하하하. 첫 판이 저런거믄 우리가 좀 더 나은 스튜디오란 거 아니겠나."


 자신의 표정도 잘 관리가 안 됐지만 나오는 두 사람이 안도할 수 있을법한 말을 던졌다. 그러나 그 후 2번 스튜디오의 중계 상황은 1번보다 더 심각했다. 스튜디오 입성하자마자 웬 쌈질이 난무하더니 어깨 가득 용이 날아다니는 문신으로 옷을 대신한 거대한 덩치들이 사이비 종교 저리 가라할 집회를 벌이고 있었다. 저거 누가 봐도 야쿠자인데. 소위 그들의 보스를 만족시켜야 풀려날 수 있는 무대라나 뭐라나. 준비된 곡은 한 두 곡 정도였던 거 같은데 그 이상을 요구해버리니 그 후로는 무반주 아카펠라 재롱잔치였다.


 "저게 뭐꼬..."


 츠무기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나오씨. 첫 스튜디오도 두 번째 스튜디오도 저 모양인거 보면 우리는 괜찮은 거겠지?"


 "하모. 그럴끼다. 그래야만 할끼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오는 지레짐작 할 수 있었다. 이 세 개의 스튜디오는 모두 그지같은 무대들로 가득 찬, 순전히 '예능용' 무대란 것을.


 자, 이제 3번 팀! 3번 스튜디오로 출격해주십시오!


 사회자의 외침이 당장 지옥으로 꺼져 버리라는 뜻으로 들리는 건 너무 왜곡된 걸까. 스튜디오로 향하기 직전 머리 위로 개인 캠을 하나씩 다는데 이마저도 심상치 않았다. 제발 꽃길에서 벌이는 무릉도원 무대 같은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적당히, 무난한, 버라이어티의 상식선으로 무대가 준비되어 있기를. 부처님, 예수님, 무슨님, 타코야키님. 갖은 님을 찾으며 간절히 바라고 바라며 스튜디오로 향했다. 스튜디오 문 앞에 선 세 사람은 마치 짠 듯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별 거 아닐끼다. 긴장하지 말레이."


 "요코야마씨야말로 긴장하신 건..."


 "내만 믿으라꼬 안했나."


 "......나오씨. 넘 세게 쥐지 말어. 손이 아퍼."


 "....... 이 힘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이다."


 둘, 셋. 문이 열렸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 거지. 발을 맞춰서 세 사람은 스튜디오 안으로 입성했다. 뚜벅.뚜벅.뚜벅. 조명하나 없이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복도는 이상하게 길었고 그 복도의 비추는 조명은 형광등도 아닌 전구 하나가 전부였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세 사람은 최대한 붙어서 쭉 걷기만 했다.


 "요코야마씨. 저 끝에 뭐가 있습니다."


 츠무기의 손짓을 따라가 복도 끝에 다다르니 화장대 위에 과일바구니와 편지 하나가 꽂혀 있었다.


 "화장대 위에 과일이랑 편지는 매치가 쫌 이상하지 않나."


 "편지는 읽어보라는 거겠지?"


 히나타가 편지로 손을 뻗었다.


 "키노시타씨. 조심하세요."


 "응응. 최대한 조심히..."


 슬로우 모션마냥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히나타는 과일바구니 위에 편지 모서리 끝을 잡아 살살 뽑아들었다. 나오와 츠무기는 그 옆에서 그 행동을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그 때, 화장대가 갑자기 덜컹거리기 시작하더니, 팟!!!!!!


 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거울에 피갑칠을 한 귀신 하나가 팟 등장하더니 거울 안에서 손으로 있는대로 퍽퍽 쳐댔다. 그 여파에 화장대 위에 과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니, 미칬나. 이게 뭐꼬!"


 질끈 눈을 감았던 나오가 실눈을 뜨며 상황 파악에 나섰다. 츠무기는 옆에서 자신의 왼손을 구명줄마냥 꼭 쥐고 있었다.


 "나오씨. 뭐가 어케 된겨."


 상대적으로 히나타는 태연한 것 같았다. 손에 쥔 편지를 꼭 쥐곤 나오에게 몇 걸음 다가가는데 푸싯. 뭔가 물컹하게 밟히면서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내, 내도 모른다 아이가. 분명 거울인디 귀신 저게 어데서 나온기고오오오오! 히나타! 니 발밑에 말이다아!"


 히나타가 밟은 정체 모를 물체에서 뻘건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발 밑에...... 히익. 이게 뭐여. 나오씨. 나 방금 전 물컹한 걸 밟아버렸는디..."


 "피, 피 아이가 이거!!!!"


 ".....뭐, 뭐꼬 대체. 이거... 토마토..."


 주저 앉아있던 츠무기는 히나타 발밑의 상태를 제일 가까이 살펴볼 수 있었다. 히나타 발에 장렬히 터져버린 토마토의 즙과 향을 직격으로 마주했다.


 "토마토. 아. 정말이네. 츠무기씨 고마운겨."


 뭘 밟았다는 거에 잠깐 멘탈이 나간 듯 했던 히나타는 금세 평온을 찾았지만, 나오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미쳐부리겠네 이거. 이런거라꼬 말이라도 하나 해주믄 으디 덧나냐꼬!"


 "하지만 앞에 무대들을 보면 예, 예견할 수 있었지 않았나요."


 "예견은 무슨. 츠무기 니도 '이게 뭐꼬...'하며 떨지 않았드나. 아이, 그게 중요한 게 아이다. 보면 모르겄나. 우리 이 테마 말이다. 테마. 딱 보믄 모르겠나. 우리 이거 호러다. 호러. 잘못 걸린거라꼬!"


 "나오씨. 호러가 뭐여?"


 "무서운 거. 공포. 엉? 캬오!"


 나오는 손톱을 세워 히나타를 위협하듯 확 얼굴을 들이밀었다. 꺅! 히나타가 깜짝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푹, 푹. 발걸음 하나하나 토마토가 하나씩 터져나갔다.


 "요코야마씨! 흥분 하지 말아주세요! 토마토가 계속 터져버려요."


 "아, 맞네. 흥분하면 안 된데이. 히나타 미안타. 좀 획기적으로다가 한 방에 알려주고 싶었다 안카나."


 "응. 괜찮아. 나오씨."


 "그리고 츠무기 니도 인자 그만 인나라. 은제까지 매달려 있을기가. 내 팔 빠지긋다."


 "분명 요코야마씨가 본인만 믿으라고......"


 "내를 믿으라꼬는 했지만 내한테 매달리라꼬는 안 했다."


 끙차. 츠무기가 나오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나오는 한 번 휘청거렸다.


 "일단 정리해보자. 히나타. 그 편지 한 번 까보자."


 히나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오픈했다.


 "대기실에 너희들을 위해 준비한 간식이 있다."


 히나타의 말이 끝나자마자 덜컹. 조명 하나가 벽 하나를 가리키더니 소리와 함께 벌컥 문 하나가 열렸다. 저건 함정이다. 하지만 저 길을 통하지 않으면 길이 없다. 호랑이 입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츠무기. 히나타."


 나오는 살짝 목소리를 깔았다. 두 사람이 나오를 집중해서 쳐다봤다.


 "브라이어티 아니겠나. 한 마디로 끝이 있이 확실히 있는기다. 응? 그라고 진짜배기 미션이라카믄 결국엔 공연장 가서 공연하는 거 아니겠나. 그거만 어케든 읏챠 해 버리는기다."


 나름 다짐 같은 말이었다. 호러 같은 분위기로 몰아넣었다면, 우리도 이 분위기에서 생존해야 하는 필사적인 주인공 같은 마음가짐으로 임하면 그만이겠지.


 "정말 요코야마씨를 믿어도 되는 건가요?"


 츠무기가 의심 몇 퍼센트를 담은 말을 던졌다.


 "이제껏 믿어놓고 이제 와 그라믄 우짤라꼬? 내도 내가 못미더운디 지금은 내라도 내를 믿어야 엉? 무슨 말을 내가 지금 지껄이고 있는기가?!?! 마, 모른다. 몰라! 못 믿으면 말그래이!"


 기껏 분위기 잡았더니! 김이 푹 새버린 나오가 쿵쿵거리며 앞장섰다.


 "뭐, 뭔가요. 못 믿는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츠무기가 급하게 나오의 뒤를 따랐다. 히나타가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지금 마 그리 증신없게 해버리면 우짜자는기가? 미션이고 나발이고 얼른 해뿔고 텨나가야하지 않겠나! 내, 무서워서 이러는 거 아니데이! 내 무서워가 이러는 게 아니...으갸아아아아아!!!!!!!! 이게 뭐꼬! 와 하늘에서 떨어지는기가!!!!!!!!!!!!!!!!!"


 열린 문 입구에서 한바탕 난리부르스를 춘 나오가 하늘에서 떨어진 뭔가를 들고는 다시 뒤로 줄행랑쳤다. 츠무기가 얼떨결에 그런 나오를 안아들었다.


 "괜찮으신가요?"


 "뭐, 뭐가 떨어졌데이. 이, 이거."


 츠무기의 품에서 벗어난 나오가 자신이 받아 든 무언가를 눈앞에 내밀었다. 기다란 원통형 끝에 달린 손가락 다섯개. 상황파악 못 하던 두 사람은 동시에 비명과 함께 정체불명의 물건을 내던졌다.


 "팔! 팔 아이가!"


 "팔을 왜 잡고 계신건가요!"


 "내사 팔이란 걸 알았드나!"


 "......나오씨. 츠무기씨. 괜찮아. 이거 인형 팔인겨."


 바닥에 떨어진 팔을 히나타가 주무르며 집어 올렸다.


 "정말이여. 이거 가짜..."


 "가짜라도 흉하다."


 "그래도 이런 기다란 거 있으면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히나타는 인형 팔의 끝부분을 잡고 훠이훠이 흔들었다. 그 광경을 두 사람은 넋을 잃고 쳐다봤다.


 "니는 겁이 없는기가?"


 "무서운데, 그래도 나오씨랑 츠무기씨랑 같이 있으니까."


 이 맑고 순수하면서도 남에 대한 믿음이 이토록 강한 애를 어쩌면 좋니. 나오는 히나타에게서 인형 팔을 받아들었다. 히나타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어느 공포영화를 봐도 무기 없는 주인공은 없다. 나오는 그 팔을 츠무기에게 건넸다. 깜짝 놀라면서도 츠무기는 팔을 받아들었다.


 "뭔가 훅 튀어나오믄 이걸로 츠무기가 뚜까 패라."


 "그걸로 충분한건가요?"


 "맨손으로 저항하는 것 보단 낫지 않캤나."


 츠무기는 여러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히나타는 내랑 츠무기 사이로 들어온나."


 "응. 그럴게."


 "내는 앞장....."


 앞장서겠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저 안에 들어갔다가 이번엔 팔이 아니라 머리통이 튀어나올 것 같은 무서움이 훅 끼쳤다. 나오가 두려워하고 있단 걸 눈치챈 건지 히나타가 나오의 허리춤을 양 손으로 껴안듯 잡았다.


 "이러면 무섭지 않을겨."


 온기가 전해진다. 아아. 이게 살아있는 인간의 온기구나. 나오는 자신의 허리를 양 손으로 붙든 히나타의 그 손을 꼭 쥐었다. 츠무기도 덩달아 무기를 겨드랑이에 끼고 히나타의 양 어깨를 잡았다. 서로가 서로를 붙든 손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기차다! 신칸센처럼 빠른 속도로 돌파해 버리는기다!"


 우와아아. 요새를 점령하려는 장병들처럼 세 사람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것도 잠시,


 쾅!!


 문이 닫히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꺄아앗. 인간 신칸센이 빛의 속도로 무너져버렸다. 여하튼 안으로 들어왔다. 잽싸게 대기실 내부를 파악했다. 유일하게 조명이 비춰지고 있는 건 구형 냉장고였다. 냉장실의 아래 칸, 냉동실의 위에 칸. 어느 칸을 열지 선택해야 한다.


 "분명히 안에 어떠한 장치가 있을 겁니다."


 츠무기의 말에 히나타도 나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 말이다잉. 냉장고 안에 간식이 들어있다카믄, 으데 들어있겠노?"


 "냉동실에 아이스크림도 간식 아닐까?"


 "아....이스크림."


 히나타의 아이스크림 어택에 나오는 설명을 멈추고, 아이스크림이란 단어 그 자체를 힘없이 내뱉었다. 그리고 흐헝헝. 약간 허무한 웃음소리를 냈다가 고개를 빠르게 도리도리 돌리는 것으로 웃음을 떨쳐냈다.


 "내 생각으론 냉동실에는 분명 암것도 없을기다. 간식이라 해도 기껏해야 빵 쪼가리 아니겠나?"


 나오는 힘찬 발걸음으로 걸어가 자신 있게 냉동실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켜지는 빨간색 불빛. 그리고 정면으로 마주쳐버린 눈. 눈? 나오는 마주친 시선을 잠시 옆으로 피했다가 다시 정면을 마주했다. 껌뻑. 동그란 건 얼굴형이고 양 옆에 난 건 눈이고 가운데는 코고 벌리고 있는 건 입.......


 "아."


 마치 뺨 한대 날리는 것 같은 힘으로 냉동실의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리고 느리게 몸을 돌렸다. 이미 츠무기는 멀찍이서 히나타와 함께 일심동체가 되어 있었다.


 "뭐가 있었던겨? 나오씨?"


 ".......냉동실에 얼굴을 보관하나?"


 "얼굴? 머리 말하는겨?"


 "얼굴이라뇨. 잘 못 보신 거 아닌가요?"


 "둘 다 퍼뜩 이리 와 보래이. 내 눈깔이가 삔 게 아님 말이다. 이건 분명 인간 머리통이다!"


 파닥거리는 손짓으로 두 사람을 불렀다. 두 사람이 가까이에 붙자, 잘 봐라. 나오는 냅다 냉동실의 문을 다시 활짝 열어젖혔다. 키야야아아. 괴상한 끓는 신음과 함께 붉은 조명 아래 사람 머리가 발광을 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문을 닫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았던 머리통이었다. 깜짝 놀란 세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각자 방 안을 마구 활보했다. 나오는 더 이상 열리지 않는 닫힌 문을 미친 듯이 두드려댔고, 츠무기는 가지고 있던 인형 팔을 냅다 던지고는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히나타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격한 헤드뱅잉을 멈추지 않는 머리통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나타! 니 퍼뜩 이리 안 오나!"


 나오의 외침과는 다르게 히나타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나머지 열리지 않는 냉장실의 문을 열곤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냉장고 안의 귀신은 손과 발도 마구 흔들어제꼈다. 분리된 머리통이 아니라 이어진 하나의 몸체라는 걸 안 나오와 츠무기는 그제야 히나타의 곁으로 복귀했다. 꼭 좀비 한 마리가 냉장고 안에 갇혀있는 모양새 같았다.


 "마, 간식이라 안캤나? 야를 먹는기가?"


 나오의 말에 일관성이 없던 좀비의 몸짓이 잠깐 뚝 멈췄다. 그러더니 양 손을 가득 피곤 좌우로 흔들었다.


 "말을 알아듣는 거 같은디. 간식은 어디에 있는겨."


 히나타의 물음에 좀비는 냉장고 문 옆 칸을 가리켰다. 빨간색 음료수 3개와 함께 아까 전 화장대 위에 있던 똑같은 디자인의 편지가 꽂혀 있었다. 츠무기가 편지를 재빨리 빼내어 내용물을 읽었다.


 "사라진 영혼은 붉은 향 멜로디를 갈망한다."


 "......암호가?"


 "그저 쓰여 있는 걸 읽었을 뿐입니다."


 "음..... 우리가 공연을 하는 걸 말하는 거 아닐까 싶구먼."


 "사라진 영혼은 죽은 아를 말하는 거 아이가? 아무리 막장이라캐도 시체 앞 공연은 오반데..."


 세 사람이 암호문 같은 문장 하나를 두고 왈가왈부 하는 사이 냉장고 안에서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던 좀비가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인기척에 놀라 세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냉장고에서 급히 멀어졌다.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던 좀비는 냉장고의 옆으로 가 냉장고를 밀기 시작했다. 조금씩 옆으로 밀리자, 통로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멀찍이 무대 같은 게 보이는 것 같았다.


 "가보죠."


 이번엔 츠무기가 앞장섰다. 그 앞을 좀비가 막아섰다.


 "뭐, 뭔가요?"


 그는 냉장고 문 옆 빨간 음료수를 손짓했다. 분명 저 음료수가 토마토나 딸기 같은 붉은 계열의 열매로 만든 음료라는 걸 머리론 아는데도 건드리기 싫었다. 하지만 통로를 막아서서까지 저걸 가리키는 걸 보면 필요한 아이템인 것 같았다. 히나타는 병을 하나씩 나오와 츠무기에게 건넸다. 마시진 않았지만 가지고 있는 걸 확인하자 그제야 좀비는 통로에서 비켜섰다.


 "이제 정말 가도 되는 건가요?"


 츠무기는 굳이 좀비에게 물었다. 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 가려는 츠무기의 뒷 꽁무니를 나오가 살짝 잡았다.


 "아까처럼 흉측한 게 뚝 떨어지면 우짤라꼬."


 "그래도 갈 수 밖에 없지 않나요."


 "그라믄 아까맨치로 가자."


 나오가 히나타를 제 앞에 세웠다. 히나타는 붉은 주스를 주머니에 넣은 후 아까 전 나오를 잡았던 것처럼 츠무기의 허리춤을 붙들었다. 나오 역시 음료수를 허리춤에 마구 쑤셔 넣곤 히나타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놨다. 또 다시 인간 기차가 만들어졌다.


 "츠무기씨. 가는겨."


 "아, 네."


 "기합이라도 넣고 가래이!"


 "......기합!!!"


 기합을 넣으라니까 진짜 기합을 외치더니 뒷사람 생각 안 하고 바로 급 시동을 걸어버렸다. 히나타와 나오는 츠무기의 엄청난 시동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허리춤을 놓치고 자빠져버렸다. 아까 전처럼 하늘에서 신체 일부 모형 같은 게 뚝뚝 떨어져대는데 혼자 저만치 멀어져간 츠무기는 뒷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데미지는 순전히 나오와 히나타가 받아버렸다.


 "츠무기!!!!! 니 혼자 내삐면 우짜...... 이야야약! 심장이다 심장! 내 눈앞에 심장이 있드아!!"


 "나오씨. 아까보다 더 긴 걸 주웠는디...... 다리인가벼."


 "히나타! 쫌! 아무렇지 않게 그 조각들 들고 다니지 말라꼬! 진짜 소름 돋는다 아이가!"


 "그래도 아까 전에 이게 다 인형이란 걸 알아서 그렇게 막 무섭지는 않은겨."


 "그..... 참으로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안카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이다. 히나타. 가자. 츠무기 갸 혼자 있음 불안하데이."


.

.

.


 ".......키노시타씨. 요코야마씨."


 한참을 달리다 허리춤이 휑하다는 걸 인지한 츠무기는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생각보다 거리가 길었던가. 멀찍이 불빛이 보이긴 하는데 저기가 방금 전 있었던 방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뭐에 홀린 건가? 츠무기는 일단 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촛불 같은 게 아른거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그곳에 마이크 세 개가 꽂혀있었다. 그냥 꽂혀있던 게 아니라 촛대에 하나씩 나오, 히나타, 츠무기. 세 사람의 이름을 달고 꽂혀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마치 제단에 초를 올린 것과 같아 츠무기는 서늘함을 느꼈다. 마이크를 들어야 하나. 하지만 혼자 있는데.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는 마이크 앞에서 손을 머뭇거리던 츠무기는 눈을 꾹 감고 마이크를 갈취하듯 잡아들었다. 팟. 뭔가 켜지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 핀 조명 같은 게 어디를 비추는 것 같았다.


 "우... 우짤꼬. 내가 이거 다 건드려봐야 하나."


 이미 한 번 저질렀는데, 다음이라고 못할까. 혼자 있다는 공포감은 얼른 일을 끝내버리자는 재촉으로 변해 나오의 마이크와 히나타의 마이크를 하나씩 다 빼들었다. 팟. 팟. 핀조명 두 개가 똑같은 방향을 비춘다.


 "보기에 저기가 무대 같은데..... 대체 왜 아직도...!"


 설마 아까 넘어졌을 때 부상이라도 입었던 걸까? 아니면 무슨 함정에 빠져서 못 오고 있는 걸까? 갑자기 츠무기는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세 개의 마이크를 품에 꼭 쥐며 츠무기는 왔던 길을 한 발자국씩 되짚었다.


 "요코야마씨..... 키노시타씨......"


 조금씩 내딛은 거 같은데도 벌써 절반은 되돌아 온 것 같았다. 만약에 진짜로. 정말로. 뭔가 잘못 꼬여 버린 거라면 어쩌지. 점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대체 뭐꼬. 진짜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툭 튀어나오는 사투리를 주체하지 못하던 그 때, 확. 어떤 손길이 츠무기의 발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햑!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니라 비명을 삼킨다더니 이게 그거구나. 쥐고 있던 마이크를 다시금 부서져라 꽉 쥔 채,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놀라 컥. 커헉. 억지로 뱉어낸 츠무기는 발목을 잡은 무언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하아. 흐아. 공포에 질린 신음소리가 저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으어어......."


 발목을 잡은 정체는 주온이 내는 귀신소리마냥 꺼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제발. 이것 좀 어떻게 떼어주세요. 허리를 피지도 못하고 숙이지도 못한 채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츠무기는 급기야 흑. 흑. 울음소리 같은 걸 내기 시작했다.


 "아아. 엄마. 아빠. 우리 가게. 집에서 뻐끔거리고 있을 내 금붕어. 우야. 내 녹화하다 비명횡사하려나 보다."


 유언 같은 한탄을 하며 공포에 질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츠무기를, 발목을 잡고 있던 인영이 쓱 올려다봤다. 스르르 발목을 잡고 있던 손이 풀렸다. 그 감각에 츠무기는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폈다.


 ".......츠무기씨. 그..... 많이 놀란겨?"


 "키노시타씨! 대체! 다행입니다. 방금 전 여기 제 발목을 잡은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거..... 나여."


 "........네?"


 "혼자 내달려가 으찌 행동하나 궁금해가 지켜보다가 다시 오길래 장난 좀 쳤데이. 이렇게까지 까무러치게 놀랄 줄은 몰랐......"


 나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츠무기는 손에 가지고 있던 마이크로 나오의 팔을 퍽퍽 쳤다. 아파! 아프데이! 그거 몽뎅이나 다름없다 안카나!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을 치고 싶었던 건가요? 믿으라고 한 건 요코야마씨 본인 아닌가요!"


 "미, 미안타. 그렇게까지 겁먹고 있는 줄은 진짜 몰랐데이."


 "미안혀. 츠무기씨. 버라이어티 녹화다보니까 이런 것도 재밌을 거 같다는 나오씨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정말. 아이돌이란 이런 상식 밖의 일도 견뎌내야 하는 건가요."


 "아이돌이라기 보단 버라이어티니..... 암튼 이건 진짜 내가 잘못했데이. 다시는 내 츠무기를 내다뿔고 안 갈테니께."


 "그건...... 엄밀히 말하자면 제가 먼저 두 분을 놓고 간 셈이니......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잠시의 소동이 진정된 후 세 사람은 다시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츠무기는 자신이 마이크를 얻은 제단 같은 곳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이 촛대에 마이크가 하나씩 세워져 있었습니다. 꼭 제단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촛대에 초가 자리하고 있다면 정말 츠무기의 말마따나 그런 느낌을 받을 것 같았다. 히나타와 나오는 촛대를 이리저리 살폈다.


 "아, 잠깐만. 나오씨. 츠무기씨. 여기 뭐라고 써 있는겨."


 히나타가 촛대 밑에 쓰여 있는 글자를 발견했다. 촛대를 살짝 위로 들어 올리자 온전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붉은 생명수가 우리의 마지막 젖줄이었다.'


 "붉은 생명수라고 하면 이거 아닐까?"


 히나타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붉은 음료수를 꺼냈다. 아까 냉장고가 있던 방에서 간식이라고 얻었던 그 음료수였다. 두 사람도 음료수를 꺼내들었다. 세 사람 다 음료수에는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이걸 하나씩 올리면 되는 거 아닐까 싶은디 말여."


 "키노시타씨의 말이 일리가 있군요."


 "근디 이거 간식이라꼬 줬는디 아예 입도 안 대고 올려도 되는기가?"


 "여기 '우리'라 쓰여 있느니, 이 우리가 우리 세 사람을 뜻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우리'가 우리 셋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안카나."


 "그럼 딱 한 모금씩만 마시는 건 괜찮으려나?"


 히나타의 말은 솔깃했다. 마침 갈증도 난 상태였기에 세 사람은 동시에 음료수 병을 따서 한 모금씩 마셨다. 여러 과일들이 섞인 맛이 났다.


 "딸기랑 사과랑 토마토 맛이 나는겨."


 "뻘건 걸 셋이 이리 들이키니 도원결의 같다."


 "얼른 올려놓기나 하죠."


 "츠무기씨. 우린 순서를 몰라서..."


 히나타의 말에 츠무기는 나오와 히나타의 음료수를 받아 원래 마이크가 있던 위치에 하나씩 놨다. 그러자 이번엔 어디서 기계가 작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파악해보니 스테이지 위로 향할 수 있는 계단이 만들어졌다. 이제 정말 공연만 하면 마무리구나. 끝이 보인다는 안도감에 세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계단을 이용해 스테이지 위로 올라갔다. 이제 이 무대만 끝나면, 해방이다! 해방인데. 해방인데 말이지.


 "아, 진짜 장난하냐고오!!!!!!"


 무대에서 내려다 본 관객들의 꼴은 가관이었다. 삐에로 인형, 어딘가 훼손된 인형, 목이 돌아간 인형들은 그렇다 치고 아예 기괴한 분장을 한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시체마냥 푹 고꾸라져 있었다. 사라진 영혼이 정말 이런 걸 뜻하는 거였다니.


 "됐다. 무대만 하믄 되니께, 신경 하나도 쓰지 말고 노래 한 곡만 제대로 완곡하는기다."


 나오의 말에 히나타도, 츠무기도 비장하게 답했다. 곧이어 이 무대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포지티브 가득한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Thank you for

 만들자 셀 수 없을 만큼의 스테이지

 이 곳에서


 "관객 여러분 안녕하쇼! 요코야마 나오!"


 "시, 시라이시 츠무기."


 "히노시타 히나타여!"


 "다들 뒤져뿌러서 우리 공연이 닿을지 모르지만, 힘내는기다!"


 이 노래만 끝나면 해방이라는 생각이 공포감을 집어 삼켜 세 사람은 호응 하나 없는 무대임에도 방방 뛰어다녔다. 신속한 종료! 재빠른 마무리! 꿀 같은 퇴근! 같은 말을 원동력 삼아서 추임새로 넣으며 박차를 가했다. 박수 하나 없는 무대가 이토록 신난 적이 있었던가. 강제적 신남이지만 알 게 뭐야. 노래는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갔다. 어느덧 마무리. 세 사람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있는 힘껏 하나-둘-!을 외쳤다. 그에 맞게 관객들은 힘찬 함성으로 '고마워!!!!!'를 외쳐줬다. 관객과 하나 되는 무대라니. 역시 무대 위에서 듣는 관객들의 호응만큼 아이돌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건 없었.......


 "잠깐. 고마워라니. 이거. 뭐죠?"


 츠무기의 말에 나오도, 히나타도 제자리에서 멈췄다. 분명 이 앞에 관객은 죽어있는 몸뚱이와 인형들뿐이었다. 육성으로 '고마워'따위를 외칠 상태들이 아니었다. 녹음 된 게 틀어진 걸까? 하지만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그 '고마워'는 육성 그 자체였다.


 "나, 나오씨. 저. 저기 좀 봐 봐!"


 답지 않게 히나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죽은 척 하고 있던 시체들이 하나씩 제자리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무대 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이...... 내가 진짜 몬산다고!!!!"


 "꺄햐!!"


 츠무기가 켜져 있는 마이크를 쿵 바닥에 떨어뜨렸다. 쿵- 쿵- 쿵- 쿵-. 에코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시체.... 아니 좀비들이 속도를 내더니 잡아먹을 기세로 무대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하노! 히나타! 츠무기!!! 그라고 있을 때가 아이다!!!!!!!"


 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소리와 뒤쫓는 좀비 떼들을 원동력 삼아 세 사람은 왔던 길을 그대로 삼십육계 줄행랑쳤다. 그 와중에 스튜디오 안 스피커로 '빰빠카빰-! 미션 성공-!!' 같은 쓰잘데기 없는 팡파레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


 그 후론 어떻게 녹화를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기진맥진한 세 사람은 녹화 마무리까지 정신 나간 상태로 있었다. 재밌었네 어쩌네 하는 스태프들의 칭찬도 다 소용없었다. 집. 집에 가고 싶다. 프로듀서가 데리라 온댔으니까 대기실 안에 있겠지. 기운 빠진 채 세 사람은 서로를 격려하며 대기실로 들어왔다. 회전의자에 앉아있던 프로듀서는 졸고 있던 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프로듀서. 저희 왔습니다."


 츠무기의 말에 프로듀서는 반응이 없었다.


 "프로듀서도 많이 피곤한가벼."


 히나타의 말에 나오가 코웃음쳤다.


 "우리맨키로 힘들었을까. 우리들 왔다꼬예 프로..."


 빙글-. 회전의자가 돈다. 푹 고개를 처박고 있던 프로듀서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이마에 난 상처, 온 얼굴을 뒤덮은 상처 딱지들, 뜬 눈에 보이는 흰 동공..... 캬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


 방송계에는 이런 말이 있단다.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그 깜짝 이벤트에 제대로 나가떨어진 세 사람의 모습은 이번 방송 녹화 분 최고의 1분이었다.








***


 "저기, 츠무기. 내일 스케줄 말인데......."


 "......"


 외면해버리는 츠무기를 보곤 프로듀서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날 대기실에서의 깜짝 이벤트는 방송적으로는 매우 좋은 호응을 보였으나, 그 후로 츠무기의 태도가 생각 이상으로 쌀쌀맞아 프로듀서는 꽤나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게 와 아무른 상의도 없이 그란깁니꺼."


 나오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오까지 저렇게 반응할 정도면 그 날 세 사람의 배신감이 엄청났던 모양이었다.


 "나도 제안 받은거라... 듣기에 재밌을 것 같고 말이지."


 "그라믄 우리가 그 그지같던 좀비떼 무대에 설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단....!"


 "당일에 제안 받은거야. 너희가 그 스튜디오에서 한참 녹화하고 있을 때. 그 때 제안받은거라고. 이건 정말이야. 그렇게까지 놀랄 줄은 솔직히 몰랐어서......."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바보인건가요?"


 한참을 외면하던 츠무기가 울컥한 목소리를 내며 바락 소리쳤다. 프로듀서는 본능적으로 방어의 제스쳐를 취했다. 여기서 대화가 길어지면 필히 불리하다 못해 마구 공격받으리란 걸 직감한 프로듀서는 화제를 다른 말로 돌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히나타는?"


 "그 때의 충격으로 몸져누었다 안캤습니꺼."


 나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히나타는 침착했던 거 같았는데..."


 "그게 바로 프로듀서의 문제입니다. 아직 14살밖에 되지 않은 키노시타씨가 제일 고생했으리란 걸 생각 안 하시나요?"


 ".....그...러려나."


 츠무기의 말이 일리있게 들렸다. 그래도 그 날 봤을 때 세 사람 중에 히나타가 가장 침착해보였다. 히나타의 말로는 나오와 츠무기에 대한 믿음으로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히나타의 그 믿음이 대체 두 사람의 어딜 보고 생긴건지 도통 알아챌 수 없었다.


 "프로듀사-"


 히나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건가? 프로듀서가 문 쪽을 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응? 방금 히나타 목소리 들리지 않았어?"


 "설마 프로듀서. 아직도 저희를 겁 주려는......."


 츠무기가 경멸을 담은 눈초리를 보냈다. 나오 역시 이상한 눈초리로 프로듀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잘못 들은건가?"


 정말 잘못 들은걸까.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가보다 넘어가려는데 프로듀사아-. 다시 한 번 히나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들린다고? 정말?"


 "머. 먼데 그라는데예. 아, 진짜! 그만 좀 하라꼬예. 녹화 끝난지가 언젠디...!"


 영문을 모르겠다는 나오와 츠무기가 도리어 이상하게 보였다. 프로듀서-. 프로듀서어-. 프로듀서어어-! 점점 히나타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프로듀서는 재빠르게 두리번거렸다. 그 때, 갑자기 발목이 확 무언가의 악력에 조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아악! 묵직한 괴성을 내며 프로듀서는 발버둥치다가 의자에서 푹 미끄러졌다. 꼬리뼈에서부터 찌릿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아픈 건 둘째치고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게 뭐지? 주저 앉은 채로도 두리번거리는데 익숙한 얼굴이 뒤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그 얼굴과 눈이 마주치곤 아... 탄식과 함께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나오와 츠무기가 프로듀서의 모습을 보곤 재밌는 구경을 했다는 듯 즐거워했다. 이 작은 이벤트의 주역인 히나타도 방긋 미소지었다.


 "프로듀서가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는겨."


 ".......난 히나타가 이럴 줄 몰랐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게 이런거였구나. 이걸로 그 녹화에 대한 용서를 받았다는게 차라리 다행인걸까. 그 날 프로듀서는 하루종일 꼬리뼈의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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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그들만 몰랐던 납량특집 같은 무언가....입니다. 사투리 어려워요. ㅠㅠ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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