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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의 편지

댓글: 1 / 조회: 514 / 추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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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25, 2018 21:24에 작성됨.

주의사항 : 밝은 글이 아닙니다. 꽤 우울합니다. 여러분이 우울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제가 좀 잘 썼다는 거네요. 우와.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혹시 모르니까 기분이 좋지 않으시거나 느낌이 좋지 않다 싶으신 분은 읽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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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가 죽었다.

자살이었다.


한동안 기자들의 질문세례를 받은 뒤 나는 방에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메일함에 들어온 안즈의 편지를 읽어보았다.


- 프로듀서, 오랜만이야. 아니지 이제 '전' 프로듀서인가?


안즈와 키라리는 은퇴했다. 그야. 나이를 꽤 먹었으니까. 그게 잘못이었나. 아무튼, 둘은 은퇴하고서도 사이좋게 지냈고 가끔 아이돌이 아닌 연예인으로서 잠깐씩 TV에 얼굴을 비추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안즈는 별로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키라리가 하자고 하면 별수 없이 하는 수준이었고. 키라리는 다른 동료들과 다시 얼굴을 보기 위해서 일을 이리저리 찾아봤다. 가끔은 키라리 혼자서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꽤 자주 그랬다.


- 어느 쪽이든, 아마 지금 꽤 충격...받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네. 프로듀서니까.


그래. 사실 충격받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후타바 안즈의 자살을,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변명처럼 들려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녀의 자살을 막을 권리가 없었다.


- 프로듀서나 회사 사람들에겐 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아마 안즈의 자살로 꽤나 피해가 갔을 테니까.


프로덕션은 뭐... 다행히 안즈가 은퇴하고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에 프로덕션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냐고 따지러 오지는 않았다. 다만 짐작이 가는 바가 있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사측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그녀가 얼굴을 비추는 일은 지극히 적었다는 답변만을 전했다.

일단, 사실이다. 아마 프로덕션 내에서 안즈의 자살을 예견한 사람은 나뿐일 것이다.

그리고 재차. 나는 그녀가 자살할 것을 알면서도 누구에게 말하지 않았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 일단 프로듀서한테 보낸 유서 말고 별도의 유서를 남겨놨으니까 문제는 없을 거야.


덕분에, 기자들은 그 유서를 방송에 내보냈고, 그 유서를 본 많은 사람이 혼란에 빠졌다.

그 유서에 안즈의 성격이 있는 그대로 담겨있었기에, 그것이 이상함에도 이상하다고 반론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겨워서 이제 그만 은퇴합니다.'

짧은 한 줄이었다.


- 솔직하게 말하자면, 키라리가 사고로 죽고 난 뒤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잘 생각나질 않아.


원인 하나, 모로보시 키라리가 사고로 사망했다. 지극히 평범한 사고사였다. 상대측 과실이었으며, 많은 키라리의 팬들이 분노했고, 안즈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안즈의 팬들은 안즈가 괜찮은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 자살도 키라리의 죽음과 연관 짓는 내용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 그렇다고 키라리가 사라져서 자살한 건 아냐. 어느 정도 이유는 되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전체에서 한 5%나 차지하려나? 아, 키라리가 죽은 건 정말 슬펐어. 방안에서 온종일 울었다고? 아니. 하루가 아니라 몇 주를. 응. 그렇지만 역시 키라리에게 안즈의 죽음을 떠넘기는 건 미안하니까.


굳이 말하자면- 키라리는 안즈의 브레이크였다. 키라리가 없었다면 안즈는 아이돌 활동 중에도 충분히 자살했을 것이며, 아마 아이돌 활동을 시작했을 가능성조차 지극히 미비했을 것이다.


- 솔직히 안즈가 아이돌 하게 된 건 기적이었지. 우연히 오디션에 붙었고, 마침 그 자리에 같이 있던 키라리가 붙었고. 만약 그게 아니라 안즈만 붙었다던가... 아니면 아예 아이돌을 시작하지 못했다면... 어땠을 것 같아?


안즈를 뽑은 건 나였다. 안즈의 발언이 너무나도 나를 자극했기에, 나는 그녀를 반드시 뽑아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어필했으며-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내 첫 연애보다도 뜨거웠고, 첫 출근보다도 열정적이었으며, 첫 기획 때보다도 많은 애정을 부었다. 뭐, 내가 비교 대상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좀 있겠지만.


- 응.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졌네.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미안하단 말이야. 그렇지만 견딜 수 없었는걸.


안즈는 솔직하게 유서를 썼다. 나에게 보낸 편지는... 그래. 아마도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고. 그녀에게 빠져서 살았다는 것을. 그렇기에 아마 사죄의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 지겨웠어. 웃긴 이야기지만, 안즈는 꽤 어렸을 때부터 '왜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했으니까.


잘 알고 있다.


- 목표는 없어. 특별히 뭘 하기 위해 살아야겠다는 최종도착지가 없었어.


그렇기에 활력이 없다.


- 그저 당장 오늘 하루가 즐거우면 그만이었어.


그것이 유일한 낙이다.


- 그렇지만, 그런 내일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이 가장 큰 공포다.


- 내일이 즐겁기 위해서 귀찮은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것이 제일 높은 벽이다.


- 처음에는 인세를 이용한 인생 설계를 하는 것으로 도피했지.


그렇게 현실에서 눈을 돌렸다.


- 우연히 그 기적이 잠시나마 이뤄졌고.


그렇기에 잠깐 행복했고.


- 그게 오히려 독이 되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그것이 독이 되어 더 먼 미래를 두려워하게 된다.


- 안즈는 계산할 수 없는 내일을 보고 싶지 않았어.


그렇기에 수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었다.


- 그래도 내일은 불투명했어.


그렇게 키라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 그러니까 안즈는 내일이 즐거울지, 즐겁지 않을지, 기다리는 건 그만두기로 했어.


원인 둘. 후타바 안즈는 불확실한 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에 빈둥대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은 귀찮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미래의 변칙성이 커지니까. 아이돌로서 일하는 것은 확실하게 그녀가 계획한 일과였다. 일하기 싫어하는 캐릭터를 전면적으로 내세워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잡은 컨셉. 그녀는 일하기 싫다는 컨셉을 잡고 일하기 싫어하는 아이돌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하기 싫어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를 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자살에 약 40%. 그리고 평소의 일하기 싫다는 발언에 40%를 차지했다.


- 거기에 말야. 시간이 흐를수록 생활이란게 패턴화되어버리잖아.


이것이 가장 큰 이유.

원인 셋. 후타바 안즈는 지겨운 것을 싫어한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 세상 모든 일은 패턴화 되어있으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거나 하는 거지. 안즈는 그 불합리함을 견딜 수가 없었어.


매일매일 색다른 하루. 그런 것이 과연 실존할까? 적어도 내 대답은 '아니오'다. 그럴 수 없다.

아이돌의 활동도.

사회인의 업무도.

일반인의 일상도.

그렇게 쉽게 틀을 벗어날 순 없다. 그렇게 되면 후타바 안즈 같은 사람이 느끼는 하나의 감정이 점차 두텁께 쌓여 뇌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 지겨워졌어.


매일매일, 하루하루, 1분 1초...... 모든 것이 지겨워진다. 어느샌가 심심풀이로 하는 게임의 스토리를 패턴으로 때려맞추고, 심지어 참신하게 비틀렸다면, 그 비틀림의 흔적만을 보고도 대략적인 결말을 알게 된다.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서 적당히 타협하고, 점차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려 노력한다. 그 결과물은 크게 둘로 나눠진다.


- 안즈는,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잠을 택했어.


나는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의존할 것을 찾았다.

잠을 자면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의존할 것을 찾으면 그것에 목매달면 된다. 그 때 얻는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는 것의 쾌락이 얼마나 큰 것인지. 과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줄까? 알아줄까? 그 잠깐의 쾌락을? 생각하지 않았단 것을 생각하고 이해하는 순간 얻게 되는 쾌락과 다시 생각을 시작했다는 절망이 뒤섞인 이 혼란의 결정체들을 누군가는 이해해줄까?


안즈는 나를 이해해줬고, 키라리는 안즈를 이해해줬으며, 나 또한 안즈를 이해해줬다.


- 그런데, 잠에서 깨면 안즈는 또 자신을 몰아붙이는 거야.


나는 왜 이렇게 살까? 이럴 거면 왜 살까?

살 가치는 분명 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가치가 욕구로 무조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되려, 가치가 스스로를 옥죄는 법이다.


- 누군가가 기대해주고 있는데, 안즈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그것이 사슬이 되어, 목을 감는다. 유일한 브레이크는 하나.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 그 사슬을 느슨하게 잡아주던 키라리가, 가버린 거지. 그리고 다시 그 때의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거야.


사실, 조금은 극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스스로의 기대를 저버리고 쇠사슬은 전보다 더 고통스럽게 목을 조인다.

스스로든, 남 덕분이든, 혹은 우연히든. 잠깐 자유로웠던 목은 고통스럽지 않다는 감각을 알게 되고, 다시 조였을 때 더 고통스러워진다.

이쯤 되면 살짝 원망도 생기기 마련이다.


- 차라리 키라리를 만나지 못했으면 하는 못된 생각도 해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다시 자기 자신의 목을 조르고


- 그 탓에 다시 키라리를 원망하고


어느새 쇠사슬에는 가시까지 박혀있어서 피가 흐르고.


- 그런데도 머리는 계속 생각을 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하고.


-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을 싫다고 생각하고


다시 의존하고


- 다시 잠들고.


그런 인생. 당연하게도


- 지겨웠어.


끔찍하게도


- 괴로웠어.


그 모든 것이 원인.

진짜 안즈가 죽은 원인.

후타바 안즈가 여태까지 일하기 싫다면서도 아이돌을 해온 이유.

그리고 지금, 안즈가 사라진 이유.


아직, 편지가 끝나지 않았다.


- 미안해.


괜찮아.


- 안즈 곁에 키라리가 있었다면. 안즈가 죽을 때 키라리가 슬퍼하니까 죽지 못했을 텐데.


키라리는 안즈의 브레이크였고.


- 그랬다면 프로듀서도 더 오래 살았을 텐데.


후타바 안즈는 나의 브레이크였다.


- 어느 쪽이든, 우리는 분명


지옥에서 만나겠지.


- 그러니까 미리 사과할게.


사과하는 편지를 받았다.


- 지옥에서 만나


이제 나도 끝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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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나타나선 우울한 글을 올리는 저였습니다.

안즈가 평소에 일하기 싫어하고, 잠을 자주 자는 것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해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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