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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5 - 서시序詩 : 타카후지 카코

댓글: 9 / 조회: 1197 / 추천: 2



본문 - 05-13, 2018 21:06에 작성됨.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음악 방송 출연. 드라마 조연. 라디오에서 신곡 홍보.

 오늘 하루 동안에 내 담당 아이돌들이 한 일들이다. 각각 아나스타샤, 미오, 시키의 순서대로. 보면 알겠지만 그라비아나 예능 프로그램 같은 일은 없다. 특히 전자는 앞으로도 절대 찍을 생각이 없으며 비슷한 일조차 받을 생각이 없다. 이것은 나의 신념이자 일본 예능업계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이었다.

 한국 아이돌을 볼 때도 그랬지만 나는 과도한 노출과 섹시 컨셉을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성욕이 인간의 본능 중 하나라지만 다른 방식으로 해소할 수도 있을 텐데, 왜 굳이 지상파 방송에서 저 따위 옷을 입히고 노골적인 춤을 추게 만드는 걸까. 저 따위 기획을 할 바엔 포르노를 보는 게 낫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으며, 그나마 나는 포르노도 안 봤다. 그래서 성상납과 관련된 의뢰가 들어오면 다른 것보다도 더 악랄하게 가해자를 족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과도하다 싶을 수준이었다.

 그런 나에게 일본의 그라비아 잡지라는 물건은 자기개발서 미만의 가치를 지닌 폐기물 덩어리들이었다. 그 따위 책에 내 아이돌들의 존귀한 모습을 내비친다고 생각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예능 프로그램도 마찬가지. 게임에서 지면 옷을 벗어야 하는 토악질 나오는 물건들이 당당히 방송되고 있었다.

 당연히 그런 프로그램의 출연제의가 들어오면 전부 거절했다. 가끔 천박한 방법으로 대응해오는 족속들이 있었지만, 백야의 영역에서 은밀하게 처리했다.

 사실 일일이 불만을 가진다면 끝도 없는 일이었다. 당장 회사에서도 미성년자들의 신체 사이즈를 요구해 왔으니까. 제 정신인가 싶었지만, 여기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 동네에는 죄다 변태새끼들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라도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다행이라면 내 기준에서 건전한 프로그램들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그나마 우리 회사는 나의 이런 막나가고 용감한 행보를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우리 회사는 뭐라 할까, 때로는 내가 평범하게 보일 만큼 여러모로 개성적이었으니까. 아이돌도, 프로듀서도.

 그런데 어떤 의미로는 개성의 끝을 달리는 인간을 여기에서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 했다. 그 사람은 내가 평소처럼 사무실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씻고 업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미 회사에 찾아와 있었다. 하루 일정을 정리하고 있는데 선배가 그 여자와 같이 사무실에 들어온 것이다.

 깔끔한 단발에 미소를 머금은 얼굴. 잘 보면 꽤 고급스러운 평상복을 화사한 스타일로 센스 있게 연출한, 남들이 보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여자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선배가 얼른 소개했다.

 “이쪽은 오늘부터 내 담당 아이돌이 된 타카후지 카코야. 이름이 꽤 특이하지? 어제 신사 근처를 산책하다 만났는데, 아침 일찍부터 찾아왔더라고.”

 “안녕하세요. 일에 후지, 이에 매, 삼에 카코 씨, 이렇게 기억해 주세요.”

 안녕하십니까. 나는 무심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선배가 작게 웃으며 카코에게 대신 설명했다. 원래 좀 무뚝뚝해, 외국에서 와서 아직 말도 좀 서툴고. 카코도 싱긋, 하고 미소로 답했다. 개성 있으신 분이네요.

 그러면서 위아래로 내가 입은 정장을 슬쩍 훑어봤다. 옷이 굉장히 잘 어울리세요. 내가 감사하다 말하자 카코의 시선이 위를 향한 채 멈춰 있었다. 내 모자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곤 재미있다는 듯 또 웃었다. 그것도 굉장히 멋지네요.

 “나 잠깐 자료 좀 가지고 온다.”

 “같이, 가드릴까요?”

 “됐어. 전에 말한 이벤트 기획서나 준비해줘.”

 선배가 휙, 나가버리고 나는 단 둘이 사무실에서 불편한 자리를 가졌다. 내가 한숨 쉬는 모습을 카코는 역시 웃으면서 보고 있었다. 심히 불길하고 속내를 알기 힘든 분위기였다.

 내가 물었다.

 “여기서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제가 추천한 인재 분이 일을 잘 하고 있나 보러 왔죠.”

 “그런 것쯤은 사람 시켜서 몰래 확인해도 되잖습니까.”

 “당신을 상대로 몰래 지켜본다는 게 가능할 리 없잖아요. 전직 업계 최고의 해결사신데.”

 진해진 분위기를 직감이 감지했다. 타카후지 카코가 조금이나마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걸 숨기기엔 얼굴가죽이 너무 얇았다.

 “일은 잘 하고 계신가요? 백야 씨.”


 *


 한바탕 일을 치룬 뒤로 시키는 빠르게 주변에 적응해 갔다. 제멋대로인 점만 잡아주면 자유분방하고 재능 많은 아이였으니까. 아나스타샤와 미오와도 금방 친해져 어느새 자신을 시키냥이라 부르고 다녔다. 거의 자기 혼자 친해진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도 자연히 시키를 받아들였다. 지난 주말에는 다 함께 시키의 집을 청소해주러 간 적도 있는데, 오전에 시작해 저녁에야 끝이 보였다.

 여전히 골치 아픈 점은 이 녀석이 나를 실험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음료수에 수상한 약을 타오는 건 기본이요, 사무실 문을 열었더니 부비 트랩이 작동한 적도 있었다. 그 중 유효했던 것은 없지만 오히려 호승심을 자극한 건지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남들 눈도 있고, 무엇보다 위험한 만큼 조치를 취해야 했는데, 다음번에 또 이러면 포르말린에 절여주겠다 했더니 요새는 빈도가 줄었다. 역시 사람은 대화를 해야 한다.

 미오는 솔로 곡을 받아 데뷔를 마쳤다. ‘세 개의 별’이라는 제목인데, 별처럼 밝고 긍정적인 매력을 그대로 담은 곡이었다. 내 취향에도 맞아 이건 꽤 잘 되겠다 싶었는데 실제로 음원 사이트 1위를 차지해 조촐한 파티를 열기도 했다.

 데뷔한 뒤부터 아나스타샤와 미오의 학교에서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여고생 특유의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면 학교의 명물이자 재산, 보물, 오른팔과 왼팔, 쌍성이 되었다나 뭐라나. 언젠가 정말로 그렇게 만들어주겠다 하자 발작이라도 할 만큼 기뻐하며 안겨댔다. 함부로 약속을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아이돌로서 훌륭히 성장 중이었다. 제일 처음 데뷔한 만큼 유명세도 높아서 현재 가장 많은 일을 받고 있었다. 부모님과의 통화 내용을 얘기해줬는데, TV에서 노래하는 딸을 보니 믿기지 않으면서도 눈물이 나셨다고 한다. 이런 게 바람직한 가족의 모습이겠지. 흐뭇하게 생각하다가도 나는 금방 고개를 저어야 했다. 대화할 때 아나스타샤가 다가오는 거리가 줄고 있었다.

 이 홋카이도 소녀의 흥미로운 점은 쿨하게 보이지만 사실 별로 쿨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점이 매력이지만 나로서는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깊고 아름답고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며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부탁하면 거절하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아, 그거 나도 알지. 미오는 십분 공감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몇 번이나 순수성의 피해를 본 것이다. 아냐는 드립을 진지하게 받아. 말 한 마디만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뻔히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시키가 들어온 뒤부터. 나를 공략하기 위해 쓸모없는 노력을 기울이던 녀석은 아나스타샤가 나의 약점이라는 것을 알아챘고, 그 뒤로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아나스타샤를 앞세웠다.

 아냐가 하자는데. 아냐가 먹고 싶다는데. 아냐가 말했는데. 이 마법의 주문들은 나로 하여금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지갑을 열게 했으며, 곤란함을 부추겼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여기에 미오까지 가세하자 굉장한 시너지를 일으켰다.

 아나스타샤가 서정적인 표정으로 날 바라보면, 미오가 따라서 서정적인 표정을 짓고, 재밌어 보인다며 시키까지 서정적으로 비 오는 날 버려진 고양이 흉내를 내는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연쇄작용은 한 번도 나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 특히 퇴근한다고 거짓말 하고 늦게까지 일 하다 걸리는 날은 서정적인 눈빛을 하루 종일 당하는 형벌에 처해져야 했다.

 잔인하고 불합리한 처사야. 습한 여름밤의 거리를 느릿느릿 걸으며 생각했다. 일을 한다는데도 혼나다니. 그러다 어느 가게 유리창에 비친 내 꼴을 보고 납득했다. 깊어가는 여름 더위에 푹 익은 남자가 있었다.

 사실 알고 있다. 이런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사무실에 올 때마다 죽어가는 모습을 보였으면서, 말도 지지리 안 듣고, 거짓말이나 하고. 혼날 이유가 충분했다.

 사과해야겠지. 그런데 무엇으로? 눈을 깜빡거리다 유리창 안쪽으로 장식된 우산을 발견했다. 가게로 들어가 살펴보니 안쪽에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상상했다. 비 오는 날 이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아나스타샤의 모습. 분명 기뻐할 거야. 슬슬 자주 비가 내릴 시기니까. 언제 어디서라도 별빛 아래에 있을 수 있겠지. 마치 내 모자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망설임 없이 그 물건을 사고 말았다. 오래도록 고민한 모자에 대한 답례까지 겸할 수 있다니. 수지맞은 장사였다. 다음 날, 나는 우산을 갖고 쨍쨍한 아침 해 아래 회사로 출근했다.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지만 이 날씨는 좀 너무한 것 같은데. 선물 주기도 민망하고, 몸도 마음도 힘들고. 심지어 이런 날에 선배 따라 외주업체 시찰까지. 속으로 불평이란 불평은 다 하면서 회사로 돌아오니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책에 푹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내 자리에서, 내 책을 보며. 뭐해? 놀란 아나스타샤가 몸을 틀자 책 제목이 보였다.

 시집.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일본에서 챙겨온 몇 안 되는 개인 물건으로 회사에서 시간 날 때마다 읽으려고 가져온 것이다. 일본어 공부를 겸해 몇몇 시를 내 나름대로 일본어로 번역하고 있었는데 그걸 아나스타샤가 읽고 있었다.

 부끄러웠지만 티 내지 않았다. 살며시 다가가니 아나스타샤가 내게 책을 건넸다.

 “Извините. 죄송해요…….”

 “아니, 괜찮아. 읽어도.”

 책을 받아 살피자 아나스타샤가 읽고 있던 페이지가 펼쳐졌다. 서시. 글의 서문대신 쓰는 시이자 이 시의 제목. 짧고 쉬운 내용 속에 의미가 깊어 윤동주를 대표하고, 또 나도 좋아하는 시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내게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 시, 본적이 있어요.

 “교과서에서.”

 “이 시가, 교과서에 실려 있다고?”

 “Да(네). 얼마 전에 봤어요.”

 푸른색 깊은 눈이 시의 한 구절을 읽고 소리 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서툴게 쓴 일본어를 서툴게 읽었지만 낮게 깔린 목소리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말이 마음에 들어서 기억하고 있었어요. 프로듀서의 책에서 이 시를 찾았을 땐, поражен. 깜짝 놀랐고요.”

 아나스타샤가 가까이 왔다. 한 발자국 다가온 겨울이 내 옆에 밀착해 물어온다.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그 눈에 가득한 호기심을 느끼고 나는 답했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뜻이야.

 “천상에 있는 별을, 사랑하듯이. 같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는, 화자의 착한 성격을…….”

 우리는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시를 이야기 했다. 나도 아나스타샤도 부족한 점이 많아 서로의 말을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득한 끈기를 가졌다.

 시인의 생애와 작품 세계, 그가 써낸 작품들과 이 시집의 발간 배경, 민감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는 세간의 해석과 나의 해석을 이야기 했다. 그 사이에서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이야기를 정립했다.

 “사람을 사랑했고, 재능을 타고 났고, 그래서 괴로워했고, 그럼에도, 굳은 결의를 다진 사람. 어떤 수식어를 붙이긴 보단, 그냥 시인. 천성적으로 타고난, 시인. 그런 사람이었다고, 나는 생각해.”

 “прекрасно. 훌륭한 사람이었군요. 별을 노래한…….”

 “그래서겠지. 이 시들이, 아름다운 건.”

 위대한 작품은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다. 한 때 배우 지망생이었던 예전 사무소 동료가 했던 말이다. 그 말대로 우리는 지금 수 십 년 전에 쓰인 글들로 소통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시인에게 속으로 인사했다.

 책을 덮고 일어나려는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프로듀서, 괜찮으면.

 “그 책, 저 주실 수 있나요?”

 “이거? 얼마든지. 같은 걸로, 구해줄게.”

 “Нет. 프로듀서의 책을 받고 싶어요.”

 부드러운 손끝이 내가 들고 있는 시집을 가리켰다. 해석도 적혀 있고, 추억이 될 것 같아요. 조심히 이유를 말하고 부탁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될까요?”

 “아니. 괜찮아. 이게 좋다면, 가져도 돼.”

 나는 미련 없이 수락했다. 선물을 건네다 기뻐하는 아나스타샤와 순간 손이 닿을 뻔해 황급히 손을 뺐지만, 다행히 이 소녀는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어린아이처럼 웃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나도 웃음이 나올 뻔 했다.


 *


 사실은 이번에 звезда를 보러 가기로 했어요.

 별? 천문대에 가려고?

 Да. 미오랑 시키랑. 다 같이. 아냐의 비밀 장소로 갈 거랍니다. 그래서 말인데, 프로듀서. 혹시…….

 같이, 가자는 거구나.

 안 될까요?

 괜찮아. 어차피, 너희들 일정은, 내가 조정해야 하니까. 저녁 즈음 출발해서, 밥을 먹고, 별을 보며 산책하자. 늦기 전에 돌아오려면……. 왜 그래?

 프로듀서가 함께 하는 것만으로 Это облегчается. 안심이 돼요.

 그게 내, 역할이니까. 너희들을 보조하는 거.

 статья. 우리들을 지키는 기사군요. 프로듀서는.

 기사라. 나쁘지 않네.

 미오와 시키에게 프로듀서도 간다고 연락할게요.

 그래. 일정은, 조절해서 알려줄게. 그 때까진 열심히, 일 해야 한다.

 Спасибо(고마워요). 프로듀서.


 *


 저녁까진 세 시간. 약속이 있으므로 오늘은 제 시간에 맞춰 퇴근하려 했는데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퇴근 시간을 한참 남겨두고 난 시내에 있는 카페 앞에 섰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난 뒤를 따라 짤랑이는 함께 카페로 들어갔다. 묘하게 은밀해 보이는 구석 자리. 그곳에 타카후지 카코가 있었다.

 주문하셔야죠?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어왔다. 웨이터에게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더니 귀엽게 바라보는 눈빛이 따라왔다. 나는 혀를 찼다. 평소라면 아이스커피를 주문했겠지만 이 여자를 앞에 두면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미 씁쓸해 빠진 기분에 뭘 또 쓴 음료를 들이붓는단 말인가.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시죠.”

 “뭘 말인가요?”

 “갑자기 아이돌을 시작하겠다는 이유 말입니다. 그것도 저를 꽂아준 회사에. 수상하기 그지없잖습니까.”

 “멋진 일이잖아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을 보게 될 거랬어요. 선배 분이.”

 “그런 대답이나 들으려고 온 게 아닙니다. 빨리 들어가서 일도 해야 하는데…….”

 “백야 씨가 추궁해 오니 가슴이 떨리네요. 하지만 진짜예요. 우연히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거든요. 오랜만에 백야 씨를 만나보려다가 말이에요. 정말 열정적으로 제의해 오는 선배 분이 멋있었고, 또 재밌을 것 같아서 받아들였어요. 정말 그뿐이에요.”

 만면에 환한 미소가 불길하게 걸렸다. 이 여자가 이런 표정을 지으면 불길함 감 밖에 안 들지만, 일단 거짓은 없어 보였다. 어디까지나 흥미 위주. 재밌어 보여서. 마치 시키가 연상되는 이유군. 아니, 시키에서 이 여자가 연상되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직감이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의 사무실에서 만난 뒤틀리고 위험한 세계를 가진 인간, 일본에서 온 의뢰인 카코를.


 누군가의 행운은 누군가의 불행. 카코를 상징하는 말이자 또한 카코의 좌우명이었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인간. 예쁘장한 얼굴에 재능이 많고 집안의 힘 덕분에 살면서 벽에 부딪혀보지 않은 부류. 말로만 들으면 부럽겠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삐뚤어진 내면을 가진 것이 카코였다.

 행복은 굴러들어오는 게 아닌 쟁취하는 것. 쉽게 얻은 행복은 그 소중함을 알 수 없다. 돈도 재미도 마찬가지. 태어난 순간부터 가득한 행운과 함께 살아온 카코는 인생 전체에서 지독한 권태에 찌들어 있었다. 자신에 대한 애정은 물론이고 일상의 소중함, 인간관계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 했다.

 이럴 바엔 콱, 죽어버리는 게 나을 텐데. 중학생 즈음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실행했다고 한다. 방법은 목매달기. 의자에 뛰어내린 순간의 반동, 목을 조이는 쓰라린 감각과 희미해지는 호흡, 간신히 부여잡은 의식. 순간적으로 귀에 스친 ‘죽기 싫다’는 내면의 외침을 카코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 했다. 마침 가정부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 세상에 없었을 거라면서.

 첫 자살 실패 후 카코는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죽음을 세상에서 가장 검은색이라고 한다면 삶은 그보다는 나은 빛이라는 것이다. 태어나 처음 느껴본 공포 덕에 무미건조한 삶이 조금은 색체를 띄는 것으로 보였다고.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색체에 익숙해진 카코는 더 강한 자극을 원했다. 삶을 행운으로 느끼기 위해 죽음을 필요로 했다.

 두 번째로 택한 방법은 약을 먹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살아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치고 허용치 이상의 수면제를 삼켰는데,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고 몽롱한 정신 속에서 ‘살았다’라는 글자가 떠오르자 다시 세상이 밝게 보였다고 한다.

 온갖 방법을 시도해 봤다고 했다. 긋거나 추락하는 건 기본이고 고속도로 한복판에 서 있던 적도 있었다고. 한 번 죽다 살아날 때마다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으니까. 자기만큼 살인미수를 많이 저지른 인간은 찾을 수 없을 거라며 자부심까지 느끼는 듯 했다.

 자살미수가 아닌 살인미수라. 듣고 보니 신은 공평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카코에게 수많은 것을 준 대신 인간성을 가져간 것이다.

 미쳐버린 딸은 집안 입장에선 골칫거리였다. 무슨 수는 써야겠는데 정신병동에 집어넣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나 뭐라나. 결국 수행원 몇 명을 붙여 감시시키고 여행이든 뭐든 마음껏 시켜주는 걸로 조치를 취했다.

 집안이 이 꼴이니 애가 이 모양이지. 19살의 카코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내놓은 감상이었다. 뭐가 재밌는지 몇 번이나 그 말을 곱씹으며 카코는 생글거렸다.

 카코가 한국에 찾아온 건 삶의 재미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젠 자살도 마음대로 못 하게 됐고, 넘치는 건 시간과 돈 뿐.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만족시켜줄 인간을 찾던 차에 한국에 있는 톱클래스 해결사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카코는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단순히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평생 동안 바라왔던 그런 부류의 인간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사무소는 카코의 지원을 받아 업계에서 명실상부 최고가 될 수 있었다.

 형님들은, 특히 강이 형님은 꼴 보기 싫을 만큼 기뻐했지만 나는 착잡한 기분만 들었다. 웬 미친 여자 하나가 인생에 끼어들어 부담스러운 관심을 보내다니. 치가 떨릴 정도였다.

 그래서 ‘그 일’로 인해 업계를 나와야했을 때. 갈 곳이 없어 결국은 카코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땅이 꺼질 만큼 깊은 한숨을 쉬어야 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카코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물어왔다. 어쩐 일로 먼저 전화를 했냐고, 드디어 자기 밑으로 들어올 생각이 들었냐고. 말만 하면 섬이라도 하나 사줄 기세였지만, 상식적인 가치관을 가진 나는 뭐든 좋으니 직업을 하나 구해 달라 했다. 카코는 흔쾌히 승낙하더니 이틀 뒤에 프로덕션의 소개문과 일본행 비행기 티켓을 보내왔다.


 “주문하신 오렌지 주스와 커피, 케이크 나왔습니다.”

 메이드가 서빙을 마치고 종종 걸음으로 물러났다. 잠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더니 앞에서 흥미로운 눈빛이 쏟아졌다.

 저런 게 좋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농담으로라도 그렇다고 하면 큰일 난다. 이 인간은 나에게 저런 옷을 ‘입히고도’ 남을 테니까. 그 정도로 악취미스러운, 일반적으로는 상종하면 안 되는 부류였다.

 대충 할 얘기도 끝났으니 얼른 먹고 떠나자. 그런 생각으로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는데 바로 부탁을 해왔다. 그거 해주실래요?

 “뭘 말입니까.”

 “감으로 파바밧! 하고 맞추는 거요.”

 “주어를 애매하게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응? 무슨 생각을 하신 건가요?”

 “매우 반사회적인 무언가요.”

 얼음을 씹으며 생각했다. 솔직히 해주기 싫은데, 안 한다고 하면 또 뭔 짓을 벌일지 모르고, 칭얼거림 한 번 받아준단 마음으로 해줘야 하나.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카코가 눈을 과하게 반짝거렸다.

 왠지 봐주기가 싫어 냅다 폭탄을 던졌다. 방금 저 메이드.

 “여자가 아닙니다.”

 “네?”

 살짝 쇳소리가 났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주스를 마시며 속으로 메이드에게 사과했다.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런데 부끄럽지 않은 건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건지 카코가 음이탈로 물어왔다.

 “정말로 여자가 아닌가요? 그럼 설마 남자?”

 “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자웅동체라거나.”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정말로.”

 나는 들키지 않게 메이드를 흘겨봤다. 신장 160cm 정도에 신발 사이즈는 24cm 정도. 어깨가 좁고 허리가 가는 여자 체형.

 “아까 제가 가게에 들어올 때 봤던 남학생과 신체 프로필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지금은 화장을 하고 가발을 썼지만 이목구비도 똑같고, 잘 보면 목에 울대뼈가 살짝 도드라져 있어요. 목소리가 가늘긴 해도 분명한 남자입니다.”

 “그것만으로 확신할 수 있나요?”

 “제가 가게에 들어왔을 때 홀에 있던 점원은 웨이터 두 명 뿐이었어요. 학생 한 명, 성인 남성 한 명. 우리 주문을 받아간 건 학생 쪽이죠. 그런데 음료와 케이크를 가져온 건 둘 중 누구도 아닌 갑자기 나타난 메이드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출근해 일하기 시작한 거죠. 카페에 들어갈 때 좀 다급해 보이던데 아마 학교 때문에 늦었나 봅니다.”

 “여장남자 메이드가 일하는 카페라니. 재미있네요. 그런 컨셉이려나요?”

 “만약 그렇다면 메이드의 정체는 비밀이라 할 수 없죠. 메이드는 자기가 남자인 걸 숨기고 있어요. 어디까지나 손님들에게만. 방금 다른 웨이터들과 스쳐지나 갔는데 웃으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뜻이죠. 그렇지 않고서야 남학생 밖에 없을 탈의실에서 여자가 나왔는데 아무렇지 않게 일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덕분에 이 카페는 메이드에게 일터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은밀한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장소군요.”

 “아뇨. 굳이 일터에서 여장을 하는 이유까진 모르겠지만 절대 은밀한 건 아닐 겁니다. 철저히 숨길 거라면 가게에 들어오기 전부터 여장을 했겠죠. 메이드는 자기 자신에게 당당해요. 다만 사회의 시선 때문에 골치 아플 뿐입니다. 카페 안에서의 모습과 밖에서의 모습이 다르고, 명찰에 쓰인 미즈시마 사키라는 이름은 가명일지도 모르죠.”

 남은 음료를 단번에 들이켰다. 한창 사춘기라 고민이 많을 겁니다, 그래도 있을 곳을 찾아 다행이죠. 잔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여장이라.

 그러고 보니 아나스타샤와 미오에겐 남장이 어울릴지도 모르겠어. 보이시한 컨셉으로 밀고나간다면 특정 팬층에게서 큰 인기를 끌지 않을까…….

 카코가 케이크를 한 조각 입에 넣었다. 달콤함을 한껏 음미한 카코가 그윽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역시 백야 씨예요. 제가 인정한, 저의 아이돌.”

 “자꾸 기분 나쁜 농담을 하시면 화내겠습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전 정말로 백야 씨에게 푹 빠져있거든요. 어떤 예측불허의 행동을 할지 궁금하고, 비정상적인 저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항상 소유하고 싶었는데, 마침 전화를 걸어오셨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잔을 내려놓았다. 일부러 쿵, 하고 소리 내서. 의중을 눈치 챈 카코가 나에게 집중하고 나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실컷 비꼬던 마음을 집어넣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놀라지 않은 카코가 천천히 포크를 놀렸다. 카페 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달그락 소리만을 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벌써 말해야 했던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타카후지 씨.”

 “카코라고 불러주세요. 백야 씨는 그래주었으면 해요.”

 “네. 카코 씨 덕분에 저도 형님들도, 동생들도 아무 피해 없이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시고 계속 뒤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혀 무리하지 않아요. 저에게 일자리 구해드리는 것쯤이야 쉽죠. 그 일에 관한 건, 솔직히 말해 조금 난감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좋았어요. 제가 가진 것들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거든요. 덕분에 한 동안 재미있었어요.”

 카코가 불길하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가진 것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용한다. 생각보다 큰 기쁨이었어요. 상대가 백야 씨라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제가 백야 씨에게 듣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뭘 말하시는 거죠? 커피를 홀짝인 카코가 말했다. 일에 대해서요, 회사는 어떤가요? 모자챙을 만지며 넘겼다. 제가 어찌 감히 토를 달겠습니까. 카코의 눈빛이 따라왔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별로예요.”

 “그런가요.”

 “항상 음지에서 일하다가 양지로 나오니 너무 덥습니다. 저란 놈은 왜 이렇게 극단을 달리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모로 안 맞는데다 적응하기도 어렵고, 몇 번이나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간신히 참는 중입니다.”

 “말하는 것과 달리 실적으로 보면 순조로이 잘 해나가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건…… 제가 아니라 애들이 노력한 결과입니다.”

 “아이돌들을 말하시는 거군요. 얼마 전 들어온 아이한테 꽤 애먹으신 것 같던데.”

 시키의 일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음료 없이 버틸 수 있을까.

 한 잔 더 주문하려 했는데 잔에 얼음이 녹아 있었다. 그걸로 입술을 적셨다. 바닥을 간신히 채울 정도였지만 이거면 충분하겠지.

 “시키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아이입니다. 항상 혁신적인 방법을 강구하고 정해진 틀에 맞추기보다 스스로 틀을 만들어 가죠. 그런 나머지 남들에게 이해받긴 어렵습니다. 결국 혼자 해나가야 하는데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언젠가는 한계를 맞이할 수밖에 없어요. 어디서 길을 잃을지 모르는 거죠. 옆에서 잡아줄 사람이 필요한데 1차적으로 그 역할을 맡을 부모가 의무를 져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현명하게 해쳐나갈 줄 아는 아름다운 아이입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시키를 옆에서 잡아주고 싶었어요. 그 아이의 자유로움이 저를 틀에서 꺼내주었고, 꼬여있는 그 애의 문제를 제가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애와는 조금 은밀한 얘기들도 마음껏 할 수 있거든요.”

 “이번에 좋은 노래를 발표한 아이는 어떤가요?”

 “미오는 밝고 긍정적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율할 줄 알고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요. 활동적이고 미소가 밝아서 함께 있으면 저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다방면으로 매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찾아주는 재미도 있어요. 하지만 남의 문제엔 민감하면서 정작 자기 문제는 숨기려는 경향이 있죠. 자신이 피해를 준다 생각하는 거예요. 눈치가 좋다기 보단 눈치를 본다고 할까. 항상 웃기 때문에 남들이 문제를 알아채기도 어렵죠. 자신이 의지할 곳을 못 찾았단 느낌도 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했을 때 가장 성장의 폭이 크게 두드러지는 것도 미오입니다. 기대 돼요.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옆에서 지켜보고 싶은 아름다운 아이입니다.”

 “그럼 그 선물을 준 아이는요?”

 카코가 내 모자를 가리켰다. 굉장히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한 악마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카코가 맞춰준 고급 정장 세트에 모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나스타샤는…… 드러나진 않는 강함을 갖췄습니다. 차갑고 신비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소극적인 성격이죠. 하지만 그 안에는 눈처럼 포근하게 남을 감싸주는 상냥함이 있고, 때로는 얼음처럼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도 있어요. 휩쓸리기 쉬워 보이지만 확고한 의지가 있습니다. 아이처럼 순수하지만 절대 약하지 않죠. 단지 성장환경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 오히려 저보다 강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워요. 현재 제가 생각 중인 겨울의 아름다움 그 자체, 그런 아이입니다.”

 “다들 한 가지씩 아픔을 가졌네요.”

 “그리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극복해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요.”

 “마치 신데렐라 같군요. 그러고 보니 선배 분이 그런 말을 했어요. 아이돌들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신데렐라, 자신은 마법사라고. 그 전까지 평범했던 소녀들에게 마법을 걸어 무대로 데려가는 게 자기 일이라고.”

 카코가 식은 커피를 전부 마셨다. 케이크도 같이. 천천히 음미하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멋진 말이었어요.

 그 때 메이드가 활기차게 다가와 빈 접시들을 치웠다. 지은 죄가 있어 고개를 숙인 나와 달리 카코는 당당하게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상할 정도로 친절한 팁에 감사하며 떠나는 메이드를 끝까지 지켜봤다. 백야 씨도 찾은 거네요.

 “일터 이상의 장소를.”

 “그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걸리는 게 있으신가 봐요.”

 “제가 이곳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요. 저는 마법 같은 건 쓸 줄 모르거든요.”

 “그럼 제가 정해드릴게요. 제가 소개해드린 일이니까.”

 백야 씨는 기사예요. 카코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성으로 가는 신데렐라들을 지키는 사람.

 “피비린내 나는 어둠을 하얀 눈으로 덮어버리는 하얀 기사.”



 *


 “다행이에요.”

 “뭐가 말입니까?”

 “전에, 작업을 할 장소가 필요하다고 하셨을 때, 순수하게 걱정이 됐어요. 일단 소개는 해드렸지만 백야 씨에겐 안 맞는 일인 건가 싶었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아직 완전히 적응하신 건 아니지만, 제가 원하던 백야 씨의 모습이 잘 나오고 있어요.”

 “무슨 모습을 원하셨길래…….”

 “당연히 프로듀서의 모습이죠. 제가 백야 씨를 아이돌로 여긴 뒤부터 쭉 상상해 왔어요. 프로듀서가 된 백야 씨는 어떤 모습일까. 백야 씨가 키운 아이돌들은 어떤 매력을 지녔을까. 제가 가진 행운을 나누어드리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맞았나 봐요. 백야 씨의 아이돌들을 보니 저까지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거든요.”

 “아까는 선배의 말발에 넘어갔다고 하셨잖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마침 겹쳤던 거죠. 어쨌든 같은 회사에서 일하게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전 걱정이 되는데요. 아이돌이 될 만한 장기는 있습니까?”

 “물론이죠! 제가 배춤을 얼마나 연습했는데!”

 “뭐라고요?”

 “코와 입에 젓가락 끼우는 것도 재밌어요. 아니면 수영복 빨리 갈아입기라던가.”

 “…….”

 “못 믿으시는 건가요? 그럼 한 번 보여드릴게요.”

 “아니요. 됐어요. 보기 싫으니까 절대로 하지 마세요. 제가 조언 드리는데 주도적으로 뭔가를 이끌어가려 하지 마시고 얌전히 선배가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십시오. 그게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길입니다.”

 “말을 너무 거칠게 하시네. 아, 이제 어디 가실 일 있나요? 괜찮으시면 집까지 태워다 드릴게요.”

 “그것도 됐습니다. 저녁에 약속 있어요.”


 *


 어릴 적부터 낮보다는 밤이 좋았다. 해가 뜨지 않아 시원하고, 어둠속에 나를 숨길 수 있으니까.

 밤의 공기는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고, 시야를 가림으로서 오히려 날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어둠에 완전히 적응한 덕에 빛 없이 살 수 없는 놈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빛이 나를 비출까봐 두려워했다.

 집이라는 걸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빌라나 주택, 아파트 같은 거 말이다. 괜히 비싸고 시끄럽기만 해서 별로였다. 그곳이 어디든 등 대고 누울 수 있으며 잠만 편히 잘 수 있다면 거기를 나의 집으로 삼았다.

 한국에선 사무실이 그런 장소였다. 내 악명이 높아질수록 감히 우리 사무실을 건드릴 수 있는 놈들은 줄어들었다. 카코가 다녀간 뒤로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도 나의 집은 사무실이었다.

 “프로듀서.”

 낮의 피곤을 달래려고 벤치에서 앉아 졸고 있는데 독특한 발음이 귀에 속삭였다. 아나스타샤가 크고 호수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뜨자마자 마주하기엔 너무 아름다워서 잠깐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문득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자고 있을 땐 특히 예민해지는 내가 이 아이에겐 반응하지 않았다.

 겨울이라서 그런 걸까. 이 아이의 분위기가, 나의 밤을 하얗게 덮어준 걸까.

 “저기에 별이 있어요.”

 “응. 그렇네. 무슨 자리일까.”

 “카시오페아예요. 북쪽 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인데, 이렇게 따라가면 금방 북극성을…….”

 가느다란 손가락이 유성처럼 호를 그었다. 손끝은 쉽게 북극성을 찾았으나 따라간 나의 시야는 오직 손만을 보고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딴 짓을 눈치 챘는지 아나스타샤가 또 나를 쳐다봤다. 아냐의 урок, 아…… 수업, 잘 듣고 있나요?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물어오는데 대답할 수 없었다.

 외형과 말수가 적은 점 때문에 미디어에서 쿨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아나스타샤지만, 실제로는 쿨하다기 보단 귀여운 편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선 적극적이고 순수한 성향이 드러나는데, 지금이 그랬다. 별을 이야기 할 때야 말로 아나스타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다.

 그런 아나스타샤의 말을 흘려들었으니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미안해, 한 번만 더, 얘기해 줄래?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자 아나스타샤는 다시 즐겁게 얘기해 주었다. 좋아하는 이야기라면 몇 번을 얘기하더라도 좋은 거겠지.

 “학교의 수업은 어렵지만 즐거워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쁨, 정말로 좋으니까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운 것을 어떻게 쓰느냐, 라고 아빠가 말해줬어요.”

 “맞는 말이야. 좋은 가르침도, 잘못 배우면 악용되거든. 애초에, 가르침이 잘못 될 때도 있고.”

 “Да. 그래서 전 프로듀서가 좋아요. 제가 모르던 멋진 것들, 잔뜩 가르쳐 줬으니까. 저도 프로듀서에게 가르침 받은 대로 아름다운 아이돌이 될 거예요.”

 “내가 뭘, 가르쳐준 게 있다고…….”

 “있어요, 잔뜩!”

 아나스타샤가 시집을 꺼냈다. 원래부터 좀 오래된 책이긴 했지만 며칠 사이에 많이 읽었는지 전보다 종이가 상해있었다.

 서시를 펼친 아나스타샤가 서툰 발음으로 시를 읽어갔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페이지를 넘기더니 내게 책을 넘겼다.

 무슨 의미일까,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이 답을 알 수 있었다. 내게 직감이 없었더라도, 감은커녕 눈치 따위 없는 부류의 인간이었더라도 당연히 책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히 시구를 읽어나갔을 것이다.

 진득한 눈빛을 받으며 최대한 감성에 젖은 목소리로. 계절이 자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고.

 그리고 이어서.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잎새에 바람이 일었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 내가 창문을 열어 맞이한 그 바람이었다. 꽃샘추위로부터 불어온 그것이 미지근한 봄을 넘어 여름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내게 괴롭게 다가왔다.

 별 하나를 읊조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나의 인생, 그리고 그 안에 가득한 부끄러움. 이 시는 나 같은 놈이 읽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열 살 이후의 모든 삶이 그러했다. 너무 위험하고, 덥고, 더럽고, 치사하고, 잔악하기까지 한 세상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는데, 이제 와선 또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라니. 악취미였다. 역시 카코는 나를 싫어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겨울P! 아냐! 거기서 뭐해?”

 “낡은 책 냄새가 나는데. 무슨 내용이야?”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 갔던 둘이 돌아왔다. 시키가 무거운 봉투를 내팽개치자 미오는 날렵하게 받아서 가져왔다. 시키냥, 던지지 마. 어디어디, 음, 관심 없는 내용들이네. 의미 없는 꾸중과 감성 없는 평가가 이어졌다. 프로듀서가 준 시집이에요. 아나스타샤는 친절한 설명으로 답했다.

 “별에 대해서 적어놓은 말들이 너무 아름다워요.”

 “나도 알아. 교과서에서 본 적 있어.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서 읽는 시집. 로맨틱하군!”

 “아. 여기 번역 틀렸다. 이거 백야가 한 거지?”

 떠들썩했다. 고요한 밤과는 맞지 않는 음량에 대화 내용도 제각각이었다. 생김새도 성격도 개성도, 조화롭지 못 했다. 치히로도 ‘어째서 세 명인가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세요.

 떨어져서요? 지구에서, 우주를 본단 느낌으로. 천체관측을 하란 이야기인가요. 그런 거죠, 우리가 보는 별들도, 실제로는, 제각기 떨어져 있잖습니까.

 하지만 보는 위치에 따라, 장소에 따라, 관점에 따라 그것은 이어져 별자리가 된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백야의 영역에서 본 세 사람은 이 하늘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자리였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게 바로 프로듀서로서 나에게 주어진 길이었다. 카코가 보고 싶은 것도 이런 거겠지.

 홀로 감상에 빠져 있는데 세 소녀의 관심이 갑자기 내게로 옮겨 왔다.

 “프로듀서.”

 “겨울P!”

 “백야!”

 불러놓곤 뭐가 좋다고 웃는다. 방금 그 상황에 어디에 즐거운 부분이 있는 걸까. 평생 가도 이해 못할, 그렇지만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 같은 부름이었다.

 무슨 일인데. 시큰둥한 척 다가가니 책을 펼쳐들고 보챘다. 이번엔 이걸 읽어주세요! 아나스타샤가 순수한 얼굴로 부탁했다. 감성적인 목소리로 부탁해! 미오가 놀리는 음색으로 부추겼다. 아냐가 부탁하는 거니까, 해줄 거지? 시키가 쥐어박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또 곤란한 상황이군. 모자챙을 올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곤란하다 해도 어쩔 수가 있나. 받아들이고 별을 노래할 수밖에. 오늘 밤은 별 헤는 밤이니까.

 시집을 들고 나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불어온 바람이 아직 떠나지 않고 주위를 돌았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받아들이고 나는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번 편의 후일담 + 후기는 내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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