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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It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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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1, 2018 21:02에 작성됨.

그녀는 목욕 후에 옷을 입지않는다. 아무것도 하지않고서 욕실을 나온다. 그 욕실 밖에 어떤,... 남자라도 있는가하면. 아니, 없다.
오히려 남자가 없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자기를 기다릴, 누구보다 사랑해줄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조금은 다를지도. 가운이나 타올로 가린 몸을 스르륵하고 드러내며 끌어당긴다던가. 그런걸 보여줄 상대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이 좋지만은 구태여 말하자면 이불이 있다. 아침에 나설 때 정리조차 되지않고 구겨진 그대로 구겨져있는 이불. 욕실을 나선 직후에, 몸을 이불 위에 눕힌다. 아직 식지 않은 몸을 파고드는 이불의 미묘하게 서늘한 감각은 마음에 든다. 막힌 숨을 한꺼번에 내빼는 것처럼 큰 숨을 한 번 내쉬고서 몸을 완전히 이불에 놓아버렸다. 이불을 한껏 끌어당긴다. 케이트의 손을 따라, 이불은 절제 없이 그녀의 몸으로 스며든다. 다리 사이로 이불을 잡고 온 몸으로 끌어안았다. 금발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싶은대로 헝클어지게 내버려둔다. 옆으로 돌아누웠다. 돌아누운 그녀에게 벽이 너무 가깝다.
코로 숨을 한 번 빼고서 다시 몸을 돌려 천장을 보았다. 중앙의 조명이 눈 아파서, 청록색의 눈동자를 구석으로 밀어내버렸다.
.....얼마나 되었을까. 한껏 울어버려서, 시나브로 이쪽을 향하는 벽지. 한껏 망가진 것이 오늘도 조금 다가오고 있다. 어두침침한 방안이지만, 케이트에게는 모든 것이 확실하게 보였다. 볼 수 밖에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천장을 향하던 눈이 끝끝내 아파와서, 눈을 감아버렸다. 그것으로 부족했던 걸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러기도 어렵군. 그녀를 감싸 안고, 몸 사이사이를 파고들어간 이불이 거치적거렸다. 아까까지 돋아나던 소름은 없다. 아래로는 붉은 혈색 언뜻언뜻 흐르는 하얀 나체는 이불을 밀쳐내고 일어났다.
속옷이 얌전히 포개어져있는 서랍...에서 몸을 돌려,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흔히 냉장고를 열었을 때, 조금이라도 날 법한 덜그럭 소리는 나지 않았다. 냉장고의 입장에서 변명해주자면, 내고싶어도 내지못했겠지, 안에 들은 것이 없는 건 냉장고보다는 주인의 탓이니까.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한기와 희뿌연 빛이 안타까울 정도로 비어있었다. 그나마 우유팩 하나가 간신히 이 냉장고라는 물건의 존재의의를 지탱해주고있었다.
이것을 두고서 케이트가 한숨을 흘리기는 했지만, 그것에 감정이 실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제와 오늘 같은 일상이 실려있었다. 그녀는 무덤덤하게 우유팩을 집어들었을 뿐. 너무 일상이 되어버린 일이고, 이것까지 신경쓰기에는....뭐랄까..이미 너무 많은걸.조금 봐주면 안 될까. 마침 잔소리하거나 봐줄 사람도 없겠다. 정도의 마인드를 읊으며 냉장고를 등지고 컵을 꺼낸다.
묵직한 팩을 비교적 가냘픈 손으로 한껏 잡아 기울였다. 진한 백색의 액체가 기세좋게 왈칵 쏟아져나왔다. 컵을 한 가득 채운 몇몇의 거품과 광택을 몇 초간 감상하던 그녀는 단숨에 컵을 기울여 우유를 들이켰다.
물보다는 좀 더 끈적하고, 무거운 마지막으로 차가운 백색 액체가 입에 약간 들러붙는 듯이 꿀럭꿀럭 넘어가더니 허파를 꾸욱꾸욱 눌러가며 속으로 떨어져내린다.
케이트의 고개가 뒤로 젖혀져서, 쭉 뻗은 목이 꿈틀거리기를 몇 번 반복했다. 이윽고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서 소리가 들렸다. 탁-하고 컵을 내려놓는 소리도 섞였지만, 그것보다도

푸하아앗-

난폭하게 쏟아지는 우유에 막혀있던 숨이 그때서야 뚫린 것이다. 컵을 내리고 입술 위에 살짝 도톰하게 남은 우유를 손으로 스윽- 닦아낸다. 그때, 케이트는 무언가 불편한 듯 부자연스럽게 몸을 멈추었다.
미처 빠져나오지못한 숨이 요란하게 목을 긁으며 입밖으로 빠져나왔다. 바깥에서의 버릇이 남아서, 손으로 가리기는했지만 트림을 한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두지는 않았다. 우유를 먹고나면 으레하는 것 이거니와,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래 그게 중요한거고 좋은거다. 아무도 없다는 거 말이지. 우유가 차있는 복부를, 정확히는 배꼽보다 약간 아래의 배를 지그시 손바닥으로 눌렀다.

차갑다.

그제서야 케이트는 몸을 다른곳으로 돌려 숙였다. 목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옅은 금발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잡아 사락 위로 넘겨준 다음, 서랍을 잡아당겼다. 얇고 보드라운 느낌의 천조가리가 손가락에 집혔다. 속이 시나브로 비치는 끈 속으로 양 다리를 넣었다. 골반보다 살짝 위쪽의 하복부를 조이고, 고간부를 들어올리듯 감싸안는다. 허리를 돌려 확인했을 때, 몸에 완전히 들어맞았다.

지그시 하복부를 조여오는 온기를 안고서, 케이트는 다시 이불에 구깃구깃 몸을 눕혔다. 다리를 잠깐 꼬아 이불을 말아 잡았다. 딱히 할 일도 없이 있으려니 깜빡깜빡 잠이 오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잠들지는않았다. 누워서 무얼하느냐라고 한다면, 글쎄 특별히 그런 것도 없는데. 바로 잠들고싶지는 않다. 왠지...잠들어버리면 억울하달까. 집에 들어오자마자 하는 일이 씻고 자버리는 거라니. 자버리면 또 내일 아침이 되버리겠지. 억울해. 아무튼. 잠깐 누워서 책을 들여다보았지만, 책을 읽을 정도로 여유가 남진않은 것 같다. 읽으려고해도 어느샌가, 골반 즈음에서, 유혹적으로 휘어진 장식을 무심하게 툭툭 건드리며 페이지만 팔랑팔랑 넘겨버리고있었다. 도무지 집중될 기미가 없었다. 책을 덮어버리고 푸욱- 누웠다.

“resurrection(부활)”

자신이 제법 좋아하는 영화 중, 마음에 드는 대사였다. 단지 중후한 목소리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자신을 조여오는 모든 것에 대해서 무덤덤하고 단단한, 그 느낌을 흉내내서 읆어보았다. 역시 같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나름대로 좋아하는 만큼 최선이다. 소리의 여운이 가실 때 즈음에, 방 안은 밤처럼 고요했다. 하복부를 조이는 느낌이 약간 간질간질해서, 그 속으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핸드폰을 집었다. 무언가를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핸드폰이라면 당연히 보여주는 숫자가 묵묵히 케이트를 압박했다. 그래, 자야겠지. 잔다는 건 보통 쉬는 일인데도, 자야한다고 생각만 하면 왜인지 해야할 일이 닥쳐오는 피곤함과 손해보는 듯한 억울함이 몰려온다.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지만 이걸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다리와 팔을 마주 꼬아 위아래로 쭉 당긴다. 몸의 곡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정도로 당겨진 몸이 파르릇- 떤다. 입술 사이로 반쯤 꼬여서 흔들리는 소리를 짤막하게 내지르자, 그제서야 몸이 좀 놓여버리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말이지 역시 부족하다. 부족하다고. 하지만 이유는 알고있으니까 케이트는 스스로와 이제쯤 타협하려고했다. 이제 자야해.

자기 위해서 팔을 위로 뻗어 휘젓는다. 잡았다. 배배꼬인 고무선을 풀 생각도 하지않고 그대로 핸드폰에 이었다. 자그마한 플라스틱을 귓구멍에 집어넣었다. 특별한 이유는 부여하지않고서, 늘 하는 일일뿐이다. 자기 직전에 이러면, 좀 더 편하니까. 터치 스크린을 굴려서, 곡 하나를 집었다. 이런 때일 수록 자신을 안정시켜주는 노래였다.

피아노의 선율이 느릿하게 흐르다가, 말이 나왔다.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케이트의 입술이 달싹달싹 열리면서, 가사를 따라 움직였다.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느리면서도 묘하게 고조되는 흐름 속에서 스며드는 언어에 안심된다. 스며들다가, 푹 젖어버릴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되는 말에 조금씩 흘러가버린다. 오늘도 흘려보내고 시나브로 없어져서, 가벼워진다.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감긴 태엽이 모두 풀려가는 오르골처럼, 노래를 따라하는 케이트의 입술도 느려진다. 청록색 눈이 흔들리다가 푹 감겼다.

And when the broken-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 agr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이윽고 숨소리만이 조용했다.
그렇게, 오늘이 끝났다.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그리고 끝난 오늘만큼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내일이 온다.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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