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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속 (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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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1, 2018 09:58에 작성됨.


 "집에 가자."


 그 목소리는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은, 마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거짓인지 진실인지 애매한 나의 생각을 따르기보다는 확실한 진심을 담고 있는 린의 의견을 따르는 게 옳겠지. 아니, 분명히 린이 맞을 거다.



 린은 탑 아이돌이고,


 나와 린은 그 약속을 했고,


 원래 린과 나는 집에 함께 돌아갔었으니까.







 -----



 린과 함께 생활을 한지 일주일이 넘었다. 나는 이례가 없을 정도로 편한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가끔가다가 가슴 한 구석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린.. 저기 말이야."


 "응? 뭔데?"


 "내가 밖에 나갔을 때 뭔가를 두고 왔던가?"


 "무슨 소리야? 프로듀서는 밖에 나간 적 없잖아. 집이 좋다고, 안나갈 거라고 부르짖을 때는 언제고."


 후훗하고 웃는 린의 앞치마가 살짝 흔들렸다.


 그렇겠지? 린은 진실만을 말하니까.


 스스로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오니 소파에 놔둔 핸드폰이 울렸다.


 "또 그 사람들이야?"


 "..응."


 진동만 듣고도 아는 건지 린이 살짝 인상을 구기면서 말했다. 하루에 세 번씩, 각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문자가 날아온다.


 나를 그리워한다- 어디로 갔냐- 라는 식의 문자였지만 린은 '그냥 스팸메일이야' 라고 한 마디로 일축시켰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문자를 보면 약간의 향수와 함께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다. 마치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한..




 "프로듀서. 약 먹을 시간이야."


 "아. 그랬지. 고마워."


 린이 약과 함께 물을 건넸다. 아무래도 건망증이 심해진 것 같다고 스스로 이렇게 챙겨주고 있다. 정말이지 이런 손이 많이 가는 남자를 보살펴주다니. 린도 참 고생이 많다.


 내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이는 것을 뚫어져라 바라본 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남자는 다르구나."


 "응? 왜?"


 "아무것도 아니야. 아, 매일하던 거 할게."


 그렇게 말하면서 린이 내게 입술을 가져왔다. 순간 약간의 당혹과 위험함이 뇌리를 훑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사랑해."


 달콤한 향기가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긴 시간동안 나와 입을 겹친 린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 촉촉한 입술에서부터 이어진 실이 내 입술과 이어지고 있었다.


 "나도."


 나는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린의 말에 동조했다.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잠에 든 린이 새근새근 숨소리를 흘린다. 나는 파란색의 이불을 살짝 걷어내고 핸드폰을 잡아들었다.


 진동이 울렸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에서 뭔가가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린은 그냥 스팸이라고 했고 나도 그 말을 믿고 있지만 이걸 본다고해서 해가 되는 건 없을 거다. 단순히 문자를 보는 것만으로 돈이 빠져나가지는 않을테니까.



 ....


 [아이들이 전부 울고 있어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어디로 가신 건가요! 이대로 가다가는 사무소가 위험해질 거예요!!]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프로듀서, 빨리 돌아와주세요.]


 [..저희는 당신이 지금 한 행동이 작은 일탈이라고 믿어요.]



 핸드폰의 수명이 닳을 정도로 울리는 진동의 원인은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다.


 단순히 글자임에도 이상하게 감정이 담긴 것 같았다.


 ..무언가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기억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연 상태였다.


 "..사무소."


 이윽고 나는 뭔가를 더듬어가며 찾아가는 것처럼 몇몇 메세지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단어를 나열하여 읽기 시작했다.


 "..프로듀서."


 뭔가가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아이들."


 린과의 생활은 솔직하게 말해서 더 없이 좋았다. 하지만 기억 안쪽에 꼭꼭 숨겨진 뭔가가 매일마다 나를 귀찮고 짜증나게, 가끔은 슬프게 만들었다.


 이어서 나는 메세지를 보낸 사람들의 이름.. 으로 추정되는 단어을 하나씩 입에 올려봤다.


 "....!"


 흡- 하고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그에 이어서 나는 도망치듯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게.. 이게 뭐야..!"


 지금까지의 행적이 마치 필름이 지나가듯 짧은 순간에 지나갔다.


 나는 대체 뭘 한 거지? 뭘 당한 거지?


 뛰고 또 뛰었다. 린의 눈에 띄지 않게, 린이 일어나지 않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들이 조잡하게 봉합된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떠오른 기억이 확실한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직감이 말했다. 진실을 떠올렸다고 말이다.


 나는 최대한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택시를 부른 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린은 어차피 언젠간 일어날 거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치히로 씨에게 신신당부해서 비밀로 한 내 집을 찾아낸 것이 린이다. 어딘가에 도청장치를 붙여놨을지도 모른다. 머릿 속 한 켠에서는 설마라는 단어가 구름처럼 피어났지만 지금까지의 린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여러가지 경우의 수가 머릿속에서 섞였다. 약간의 두통과 함께 나는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입밖으로 흘렸다.


 그렇게 입밖으로 내어진 단어, '사무소'는 이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택시에서 내려서 뛰다시피한 발걸음으로 사무소의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벌컥 열린 문이 벽에 부딪히면서 큰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치히로 씨와 일이 늦게 끝난 건지 이런 시간까지 사무소의 안에 남아있던 몇몇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시간이 천천히 지나간다.


 그 길고 긴 정적을 깬 것은 치히로 씨의 목소리였다.


 "..어디.. 가셨었어요..?"


 비판도 비난도 아닌 슬픈 목소리. 그 질문에 답을 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기억이 모호하게 이어진 나는 입을 쉽게 열 수 없었다.


 멍하니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고개만 숙이자니 폭하고 작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윽.. 흑.."


 안겨있는 건 눈물을 내 셔츠에 닦듯 얼굴을 묻어버린 리카. 슬쩍 시선을 올려보니 다른 아이돌들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조금만 건드리면 눈물샘을 터트릴 것 같았다.


 나는 리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은 후 조심스레 말했다.


 "..죄송했습니다."


 "..프로듀서 씨가 사라진 후로 제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아세요?"


 그런 말을 하는 치히로 씨의 눈은 눈물 없이 자애로 가득했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비틀기 위해 억지로 옅게 웃으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일탈을 해보고 싶었어요."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바보 같은 변명. 하지만 다행히 그런 나의 변명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간 있었던 일보다는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한 걸까.


 "P씨, 이제 사라지지 않을 건가요?"


 "응. 절대로."


 "절대로..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말아줘.. 약속.."


 "알았어."


 모든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결심이 섰다. 린이 톱 아이돌인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이돌들의 길을 막아서는 안됐다. 이 아이들은 아직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 연예계에 무지한 사람이 아닌 프로듀서가 말이다.


 모두가 나를 걱정하고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준다. 천천히 쌓아간 세월이 보답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럼 일단은.. 밀린 일을 처리해볼까요?"


 "..네!"


 치히로 씨와 다른 아이돌의 안심한 표정과 목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비어있었어도 여전히 깨끗한 나의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따라 쇼코가 놔둔 책상 밑의 버섯 향기가 참 좋다고 느껴졌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오늘 분량의 일만 끝낸 후 치히로 씨와 다른 아이들에게 지금 린의 상태를 말하고 할 수 있다면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게 영화였다면 아마 내가 확실하게 마음을 굳힌 지금이 클라이막스 혹은 종장이겠지.






 -----





 "프로듀서 씨, 퇴근은 안하세요?"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일단 전 이거만 정리하고 끝내려고요."


 "그런가요? 음.. 같이 해드릴 수도 있는데.."


 "괜찮습니다. 얼마 안걸리니까요."


 "그래요? ..프로듀서가 그렇게 말하신다면.. 사실 오늘은 약간 급한 일도 있고요."


 치히로 씨가 그렇게 말하면서 끝에 덧붙였다.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목소리 자체는 작았지만 주변이 너무도 조용해서 똑똑히 들었다.


 나. 사랑 받고 있구나. 괜스레 마음이 울컥해져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시계침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사무소를 메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차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첫째,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린이 내게 접근하지 않았다.


 둘째, 나는 린을 버리고 왔고, 린은 나를 찾을 수단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셋째, 나는 오늘 린을 만나지 않았다. 건물의 안을 꽤나 돌아다녔는데도 말이다.


 넷째, 간만의 일에 들떠서 상황을 살피지 않았다.


 마지막, 지금 사무소에는 나 혼자다.


 생각을 마치자 어느새 맺힌 식은 땀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왜 안좋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달칵- 하고. 아주 작지만 똑똑히 들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내 귀를 타고 들어왔다.


 "..윽..!"


 너무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덜컹하고 뒤로 밀리는 바퀴 달린 의자가 무언가게 막힌 것처럼 소리를 멈췄다.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컴퓨터도 끄지 않은 채로 도망치듯 사무소를 빠져나왔다. 구두 밑창이 벗겨질 정도로 발을 빠르게 놀렸다. 내가 아는 길이 아닌 모르는 길로 몸을 꺾어가면서 서서히 차오르는 피로감을 억지로 참아냈다.


 발바닥이 욱씬대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뛰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최대한 사람들 사이에 섞이도록.


 ..하지만 뛰고 또 뛰었지만 거리를 걷는 사람은 없었다. 슬쩍 시계를 보니 시간은 벌써 새벽 1시였다. 내가 그 정도로 일을 오래한 건가? 감을 잃은 건가? 치히로 씨는 몇 시까지 남아계셨던 거지?


 지나가는 차도 적고 사람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원래 큰 길은 아니였지만 나름대로 활기가 넘치는 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길고 어두워보였다.



 또각또각.



 소리가 들렸다.


 도플러 효과처럼 그 소리가 들리는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그 소리의 크기는 커져간다.


 "오.. 오지마..!"


 최선을 다해 짜낸 목소리는 땅을 기듯 작은 목소리였다.


 애석하게도 '누가 좀 도와주세요' 라는 나의 마지막 외침은 결국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윽.. 읍.."


 좋은 향기에 감싸인 손수건이 내 코와 입을 가린다.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면 안돼. 프로듀서."


 "으.. 윽.."


 "청소도 해놨고 빨래도 해놨어. 돌아가자. '우리 집' 으로."


 정신이 멍해진다. 최선을 다해 저항을 해봐도 팔은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 한 알인데, 도망치면 어쩌나했어. 역시 프로듀서는 프로듀서구나."


 린의 목소리가 마치 웃는 것 같았다. 마비가 된 것 같은 목구멍 안으로 뭔가가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천천히 안개로 덮여간다.




 "..래도 치히.. 씨에게 센 약을 달라.. .. 수는 없었으니까."


 이제는 말소리가 드문드문 들린다.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려 순식간에 린에게 몸을 맡긴 듯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어.. 으.."


 '어째서' 라고 물어보려 했지만 실제로 입밖으로 나온 말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바보같은 울음소리였다.


 "..듀서."


 눈이 감겼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진다.


 "나. 프로듀서를 위해서 노력했어. 그러니까 칭찬해줘."


 어째선지 린의 마지막 말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도 전에 나는 의식을 잃었다.



















 나는 행복하다.


 한 때 탑 아이돌이었던 모두의 동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을 아내로 뒀으니까 말이다.


 이 사람이 나의 어떤 면에 반해서 인연을 가지고 연인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나를 마치 소중한 인형을 다루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나를 사랑한다. 다른 사람은, 다른 인연은 없어도 된다. 오직 린만. 린만 있으면 된다.


 "고마워. 린."


 "..어? 왜?"


 아무리 그래도 이 감사는 너무 뜬금없었던 걸까. 린이 살짝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나 같은 놈에게 이렇게 잘해줘서."


 "아. 괜찮아.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나는 그냥 '그 약속'을 지킨 것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는데.."


 "내가 기억했고 P씨는 그 약속을 말하는 나를 받아줬어. 그걸로도 충분해."


 "그.. 그런가.."


 "그래.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키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 '평생 너를 돌봐줄게' 라는 약속하고는 조금 다르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그래."


 너무도 행복하게 웃는 린의 앞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됐건 린이 만족한다면 나도 만족한다.


 그도 그럴게, 나와 린은 '그 약속'을 했었고,

 린은 탑 아이돌이었고,

 나는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으니까.




 "프로듀서. 사랑해."


 "그래. 나도."


 가끔씩 변하는 린의 호칭에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애시당초 나는 이 호칭을 좋아했다. 뭔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지니까.


 "..평생.. 이렇게.."


 그 과정이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그 약속' 을 지켰다.


 나는 내게 안기는 린과 입을 맞췄다. 거부감 따위는 일체 느껴지지 않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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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짤렸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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