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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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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0, 2018 21:13에 작성됨.

린하고 프로듀서가 주인공, 살짝 얀데레, 살짝 어두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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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나간 시간이 한 달이나 두 달 같은 짧은 시간이 아니라 5년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허무해지기도 한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담당하는 아이돌도 점차 성인이 돼가거나 조금 더 성숙해지시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내가 가장 처음으로 프로듀스를 한 시부야 린. 그녀는 결국은 탑 아이돌이 되었다.


 본인의 노력이 가장 컸다지만 그래도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고 내 덕이야- 라는 생각을 약간 가미하니 조금이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제 린은 TV에서 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내가 일을 관뒀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저 해가 넘어가는 순간마다 담당이 바뀌었으니까 그런 것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은 커녕 꽤 오래전부터 보지 못했구나. 내 생애 첫 아이돌을 TV로만 보게되니 조금 그립기도 하다. 이제 나도 베테랑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정도가 돼서 많은 아이돌을 담당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처음 스카우트하고 함께 길을 걸은 아이에게 정이 더 가나보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점차 눈물이 늘고 있다. 아니, 린이 톱 아이돌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눈물이 많아진 것 같다.


 담당했던 첫 아이돌이 최고가 되었다니. 당시에는 감격스럽기 그지 없어서 핸드폰을 열고 문자를 보낼 뻔했다. 얼마 안가서 진정했지만.


 지금도 린과는 대화를 하지 않고 있다. 아니,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가 없는 거지. 린은 최고가 된 이후로 최고가 되려고 했던 때보다 더 바빠졌으니까.


 "린이라면 될 줄 알았다니까."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내 목소리가 퍼졌다.


 "정말?"


 "응. 정말."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흠칫 놀랐다. 아무도 없어야하는 사무실에 내가 너무도 잘 아는, 만나지 않은 채로 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는 그 목소리가 뜬금 없이 들렸기 때문에.


 아, 그렇다면 환청인건가. 확실히 내가 너무 마음에 두고 있었나보다. 스스로 한 생각이 린의 목소리로 필터링이 돼서 재생이 되다니..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을 멈췄다. 린은 린이고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해야한다. 잠시 감상에 젖은 건 아마 일을 하기 싫은 순간에 문득 린이 떠올라서 그런 거겠지.


 "프로듀서는 여전히 이런 시간까지 일하고 있나보네."


 "그렇지. 오히려 예전보다 더 바빠졌어."


 "내가 그립거나 하지는 않은 거야? 지치지는 않았어?"


 탁- 하고 환청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책상에 놓인 잔을 잠시 쳐다보고 눈을 비볐다.


 너무 비벼서 뻑뻑해진 눈을 살며시 떠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이제는 관계가 없어진 거라고 스스로 단정을 지었던, 내가 처음으로 담당했던 아이돌이 서있었다.


 미흡했던 모습은 없는 완연한 탑 아이돌의 모습으로.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아니, 약간은 더 성숙해진 그 얼굴로 린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봤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라.."


 나는 놓여진 잔을 살짝 들고 웃으며 말했다.


 "어제도 봤잖아."


 "14시간이나 만나지 못했잖아."


 여전히 차분하고 쿨한 태도로 나의 반박을 일축하는 그 모습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나의 그 웃음을 환영의 의미로 착각한 건지 린이 살짝 웃으면서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말이지.."


 어리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차분하면서도 당돌한 그 행동에 겨우겨우 참고 있었던 피곤함이 몰려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 계속 '이제 린을 만나기가 힘들다', '이제 린은 나를 신경쓰지 않을 거다' 라고 단정을 지어봤자 그건 그저 내 뇌내망상이었다.


 언제나 같은 시각. 내가 담당하는 아이돌들과 치히로 씨가 모두 퇴근하고 10분이 지난 시간에 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내게 다가온다. 이제는 공포영화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탑 아이돌이라는 칭호는 무사한 걸까. 잠은 잘 자고 있는 걸까. 라는 식의 여러가지 질문과 걱정이 머릿속을 멤돌지만 언제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등장해서 그런 질문을 할 의욕이 사라져버린다.


 "예전이라.. 그립네."


 내가 한 말의 앞부분만 들은 린이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확실히 그 때가 그립기는 하다. 초짜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리뛰고 저리뛰는 것도 나름대로 성취감이 있었고 가끔가다 일을 잡아올 때면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다. 그 때는 거의 사업적 파트너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셜록과 왓슨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하지만 어쩌다가 이렇게 관계가 틀어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히 내가 담당에서 빠지겠다고 말했을 때 린이 엄청나게 분개했던 것은 기억한다. 그 쿨했던 린이 그런 반응을 보였으니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담당에서 빠지고 반 년 이후, 내가 담당에서 빠진 걸 이해하지 못했던 린이 이제는 이해를 한 건가 싶어서 안도를 했었다.


 그리고 1년. 린이 조금씩 사무소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 때는 기뻤다. 나를 만나러 와준 거니까. 조금 어색했지만 이내 서로 근황 얘기도 나누고 평범한 얘기도 주고받았다. 이 정도의 거리감이 내가 바라던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 년 전부터 지금. 매일 린이 이곳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것만이면 다행이겠지. 다른 아이들과 잠시 얘기를 할 때마다 시선이 느껴지고 묘하게 우리 아이돌들의 촬영장소에 린이 등장하는 일이 잦아졌다.


 "..잠은 자는 거야?"


 "물론이지. 오히려 난 프로듀서가 더 걱정되는데."


 "..이제 정말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건강 걱정도 좀 해놔. 아, 담당에서 빠진 내가 할 말은 아닌가?"


 하하- 하고 약간 작게 웃음을 흘리니 린이 책상을 탕하고 쳤다. 순간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하고 떨었다.


 "..그 때의 약속, 기억해?"


 물론, 기억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첫 라이브를 성공한 날 너무 기뻐서 했던 언약. 린의 사기를 증진시켜주기 위해서 무턱대고 했던 말인데.. 요즘 들어서 린이 진심으로 그 약속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워졌다. 아니, 진심으로 그 약속을 생각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래서 나는 눈치 없는 놈을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약속에 관한 내용은 프로듀서.. 는 둘째치고 린의 아이돌 생활에 직접적인 위협을 주는 내용이었으니까.


 "기억 안나."


 "..그래.."


 린은 말을 잇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내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아이돌. 그것도 톱의 자리에 있는 아이돌의 바싹 다가오는,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그 거리감이 무서웠다.


 한 때 동고동락했던 첫 아이돌의 속이 보이는 행동도 두려웠고 린이 현재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아직도 린은 자신이 최고라는 걸 실감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알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거나.


 "..린, 이제 오는 건 그만둬."


 나의 말을 들은 린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제 너는 톱 아이돌이고 너를 생각해주는 팬이 한 가득 있잖.."


 "어째서? 그쪽이 먼저 나를 떠나보냈으면서 왜? 멋대로 그런 약속을 한 건 프로듀서잖아. 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톱 아이돌이 돼서 프로듀서가 약속을 지켜줄 그 날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아.. 어.. 난 그 약속을.."


 "잊지 않았잖아?"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지금 린의 상태는 이상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린이 탑 아이돌이 되고 두 달 정도가 지난 이후로 이상해지기는 했다만.


 그 이유가 뭔지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린이 내게 호감이 있다는 걸 긍정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돌아갈게."


 밤 늦은 시간. 린 같은 여자아이가 길을 거니는 건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나보다 몇 배는 잘 버는 린에게 택시 비용을 쥐어주는 것 뿐이었다.




 -----




 "P씨, 조금 힘드신 거 같은데요?"


 "..아뇨. 괜찮습니다."


 "..괜.. 찮으세요?"


 "아. 응.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은 현 상태를 숨기면서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가 봐도 지금 내 모습이 말이 아니였다. 다크서클은 기본에 머리는 푸석푸석하고 양복까지 주름이 져있었다.


 빛나는 인물들에게 괜찮냐는 소리를 들은 걸 위안을 삼아봐야 피곤한게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피곤에 찌든 이유를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탑 아이돌인 린의 행동을 밝힐 수는 없었다.


 탁하고 책상에 뭔가가 놓였다. 그 소리가 어제의 소리 없이 놓인 찻잔을 연상케해서 이미 말라버려서 없는 침을 꿀꺽하고 삼키게 만들었다.


 "드시고 힘내세요. 아니면 오늘은 쉬시는 게 나을까요?"


 놓인 건 찻잔이 아니라 드링크 병. 말을 건 사람은 린이 아니라 치히로 씨였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의 그 반응에 치히로 씨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수상하다는 아우라를 뿜어댔다.


 "..감사합니다."


 평소와 같은 구매 여부를 묻는 말이 없는 걸 보니 정말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나보다. 괜히 남들을 걱정시키는 게 미안해져서 드링크의 병을 따고 한 달음에 마셔버렸다.


 빈 병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고개를 살짝 끄덕여 괜찮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럼 상관 없지만요.. 아, 오늘은 사무일만 있으니까 정 힘드시면 오늘 일은 저한테 맡기고 들어가셔도 돼요."


 "괜찮아요."

 괜히 혼자서 힘들다는 아우라를 뿜어대서 주변 인물에게 걱정을 끼쳐버렸다. 사람들의 컨디션과 기분을 헤아려야하는 내가 이렇게 우울한 분위기를 내면 안되지.


 나는 마음 속으로 스스로에게 따귀를 한 번 날린 후 허리를 꼿꼿히 세워 화면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



 책을 넘기는 소리,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백색소음 같은 기분 좋은 소음 덕분에 업무를 순조롭게 끝냈다.


 물론 순조롭게 끝냈다고 말을 해봐야 조금 늦은 밤이었지만 말이다. 오가는 아이들에게 잘가라고 인사를 해주고 얼굴을 비추는 성인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인사를 건넨다.


 이게 아이돌과 프로듀서 사이의 적절한 거리감이 아닐까. 인사와 안부를 건네고 가끔가다 잡담 정도만 하는 사이.


 "그럼 오늘은 제가 먼저 퇴근할게요! 수고하셨어요~"


 치히로 씨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러났다. 손을 흔들면서 수고 인사를 대체했다.


 그리고 다시금 혼자 있는 시간이 됐다. 째깍이는 작은 시계소리만 들리는 공간이 낮 동안 이어졌던 편안하고 기분 좋은 소음이 가득 찬 공간과 대비돼서 약간, 무서웠다.


 탁. 하고 또 다시 책상에 뭔가가 놓여졌다. 순간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소리가 완전히 멎은 것 같았다. 분명히 문은 닫혔고 그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따끈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되려 내 몸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마셔."


 어제와는 다른 조금 강압적인 목소리.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딱히 생각을 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린."


 "응."


 "..이제 그만하자."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이걸로 알아준다면 다행이겠지만..


 "마셔."


 역시 그럴리가 없었다. 내가 한 말을 아예 못들은 체 하고 다시금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 모습이 약간 무서웠다.


 티비에서 나오는 린은 분명히 빛나고 있었다. 본인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은 채로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그러면서도 이전에 말했던대로 차분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린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롤 모델 그 자체였다.


 "..오늘도 수고했으니까, 따뜻한 걸 마셔줘야지."


 내가 대답이 없자 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단순히 전 프로듀서에 대한 호의라면 좋으련만. 아니, 분명히 전 프로듀서에 대한 호의겠지. 첫 파트너에 대한 예의일 거야. 분명히.


 "미안한데.. 이런 건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아무리 '그런 거야' 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봐야 의미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을 해봐야 그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나는 혼잣말 같지 않은 혼잣말을 날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


 말은 듣지 않고 행동만 본 린이 어깨에 손을 살짝 얹었다. 무게감 마저 잘 느껴지지 않는 자그마한 온기가 있는 감촉에 약간 몸을 떨었다.


 "..괜찮아."


 결국 나는 아침에 다른 사람에게도 했던 말을 또 한 번 반복했다. 린은 이미 티비를 틀 때마다 나오는 유명 아이돌이자 사무소의 간판이 되었다. 이제는 다른 프로듀서가 붙었다고 하지만 소속된 사무소의 아이돌의 컨디션은 조절해줘야 했다.


 사무소의 간판이 떨어지면 안된다. 이미 린은 아이들에게는 우상이 되었고 성인들에게는 이정표가 되었다.


 개인의 안식보다는 타인들의 성공이 우선이었다. 나 하나 쯤이야- 라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 해내자고 약속을 한 아이들에게 나의 독단으로 우상이자 이정표가 무너지는 걸 보여주는 건 원하지 않았다. 아이돌들의 텐션을 위해서라도 이런 위태한 관계는 이어져야 했다.


 "..다행이네."


 내 말을 들은 린이 방긋 웃었다. 이전보다 훨씬 성숙한, 완벽한 아이돌의 매력이 가득 담긴 웃음.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나는 그런 미소를 봐도 무력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린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달래듯 천천히 내 볼을 쓰다듬었다.


 "약속, 지켜줘."


 그리고는 또 다시 그 약속을 언급하면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고려해볼게."


 그런 거부를 허용하지 않는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은 이 말뿐이었다.


 린은 그런 것도 괜찮다는 것처럼 웃으면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전과 똑같이 나는 나보다 몇 배는 더 버는 린에게 택시비를 쥐어주었다.


 내가 준 지폐를 소중한 것 마냥 꼭 잡는 린이 사무소의 밖으로 나갔다. ㅡ이번에는 달칵하고, 문소리를 내면서.




 "..어째서 이렇게.."


 앞뒤를 전부 생략한 말을 하며 나는 린이 가져온 차를 삼켰다. 이 온도가 좋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온도로 알맞게 데워진 게 싫게 느껴졌다.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아니, 잠갔나? ..불은 껐었나? ..요즘 들어 건망증이 조금 도진 것 같다. ..아마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결국 나는 자택까지 거의 다 왔음에도 한 번 더 안전을 확인하러 사무소로 향했다.


 "..요즘 참.."


 피곤하다- 라는 말은 바람 소리에 묻혀서 나에게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집 열쇠를 찾아들었다.


 잠금을 해제하는 소리가 철걱- 하고 뭔가에 걸린 것 같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근 후 쓰러지듯 바닥에 엎어져 곯아떨어졌다.



 -----



 몽롱한 기색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석푸석하게 뜬 머리는 중력을 받아 아래로 잡아당겨지고 있었고, 갓 일어나 힘이 빠진 나는 그것만으로도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도 역시 양복은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져있을 것 같다. 이래서야 아이들에게 모범이 될 수는 없겠는데.


 허탈한 웃음을 흘리면서 냉장고를 열어 간단한 아침을 차려먹은 후 몸을 씻었다.


 그리고 나는 갓 일어났을 때랑은 다르게 조금은 멀끔해진 차림으로 구두를 신은 후 문을 열었다.


 아직도 도어락이 아닌 열쇠로 잠금을 푸는 문이지만 그래도 열쇠에 익숙해져 있어서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역시 세월이 흐르다보니 열쇠를 꽂는 곳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이건 오늘 수리업자를 불러야겠어.



 ------



 "..오늘도 피곤하세요?"


 "아뇨. 오늘은 아주 기운이 넘쳐요."


 "..그래도.."


 치히로 씨는 말을 잇지 않고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둘은 말 없이 업무로 들어갔다. 같이 일을 한 시간이 짧지 않으니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각자 할 일을 시작한다.


 아무도 없이 둘만 있는 사무소에 벌컥하고 아이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밝은 분위기가 된 사무소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윽.."


 깜짝 놀라 몸을 앞으로 숙이며 피하자 뒤에서 걱정을 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괘.. 괜찮으세요?"


 우즈키. 괜찮냐면서 물어보는 것이 그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흐려지기는 커녕 더 해맑아졌던 그 미소가 약간 슬퍼보이는 건 나 때문인가?


 그러면 안돼. 라고 스스로 되내이며 나는 서둘러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깜짝 놀랐어. 요즘 늙어서 그런지 자주자주 놀라거든."


 "그런가요? 하지만 그건 놀랐다기 보다는 무서워한 것 같은.."


 "아냐아냐. 정말로 놀란 거야. 그래서 왜?"


 "아, 프로듀서 씨에게 안마를 해드리려고 한 거예요."


 "안마?"


 "네. 요즘 피곤해보이셔서.. 괜찮으신가요..?"


 그건 어떤 의미의 괜찮냐는 걸까. 내 몸상태인가 아니면 안마를 해도 되냐고 묻는 걸까. 일단 후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몸상태를 걱정해야하는 건 그녀들의 역할이 아니라 내 역할이니까.


 "응. 그럼 부탁해."


 "넵! 열심히 할 게요!"


 언제나와 같은 말을 하면서 해맑게 웃는 우즈키의 얼굴을 보니 살짝 마음이 풀어진 것 같았다. 아이돌로써 높은 자리에 올라왔음에도 우즈키는 겸손하고 친절했다. 아마도 내가 우즈키랑 같은 나이였다면 좋아하게 돼버렸겠지.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주세요."


 소곤대면서 말하는 우즈키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나름대로 걱정을 한 것이겠지만 글쎄, 지금의 나에게는 딱히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차라리 무리를 해서 아무것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말은 입안으로 삼켜넣었지만.


 딱 좋은 강도의 악력이 뭉친 어깨를 풀어준다. 항상 아이돌과 프로듀서의 거리감을 말하고는 하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기 아이돌이 어깨 안마라니. 너무 호사스럽네.


 우즈키의 성격이 옮은 걸까, 마음이 약간 누그러진 것 같았다.


 어깨를 풀어주는 손이 멈췄다. 그 의미가 뭔지는 알고 있었다.


 "아, 슬슬 나갈까?"


 "네!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안마를 받다보니 시간이 조금 빠르게 흘렀나보다. 우즈키도 자신의 일은 알고 있으니 여기까지 한 거겠지. 약간 아쉽다고 생각한 건 숨겨두도록 하자.


 나는 우즈키를 태우고 우즈키의 스케쥴에 따라 방송국으로 향했다.


 "자. 나는 일단 일정 정리할테니까 열심히 하고 와. 이제 우즈키는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지?"


 슬쩍 등을 떠밀어주자 우즈키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네! ..잘 끝내면, 칭찬해주세요."


 "선처할게."


 우즈키는 내 대답을 듣고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우즈키는 역시 몇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안심했다.


 나는 머리를 살짝 긁으며 대충 의자를 펴고 앉아 핸드폰에 저장돼있는 스케쥴표를 확인했다.


 "프로듀서."


 "..린."


 그리고 우즈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기가 막히게 린이 나와 내게 말을 걸었다. 최근들어 솔로 활동이 많아진 둘이라 약간 소원한 걸까. 하지만 지금 두 명은 같은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텐데. 미오가 참여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나도, 열심히 할 테니까. 잘 끝내면 칭찬해줄 수 있어?"


 아까의 우즈키와 같은 뉘앙스의 발언. 솔직히 말해서 남과 같은 행동을 하려는 린은 귀여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좀 이상했다.


 어째서 나와 우즈키의 대화를 눈치챈 거지? 그냥 말해본 건가? 하지만 '나도' 라는 단어는..


 "프로듀서."


 "어.. 어."


 "열심히 할 거니까."


 "어.. 응.."


 "끝나면 칭찬해줘."


 "..알았어."


 어쩌면 린은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걸지도 모른다. 나는 금전으로 들어오는 보상이 칭찬처럼 느껴지지만, 린은 탑 아이돌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지만 실상은 아직 학생이다. 아마도 사람이 직접 해주는 칭찬을 듣고 싶은 걸지도.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부탁에 스스로 이유를 대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린은 만족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뒤로한 채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왠지 모르게 스케쥴을 볼 생각이 싹 사라져 핸드폰을 닫고 그 자리에서 그저 멍하게 서있었다.


 결국 나는 스케쥴 관리를 포기하고 세트로 향해 우즈키와 린의 촬영을 구경하기로 했다.


 "이야.. 시부야 씨는 굉장한 프로네요. 시마무라 씨도 그렇지만 뭔가 아우라가.. 다르다고 해야하나?"


 "..그렇네요."


 확실히 린은 잘해주고 있었다. 전체적인 흐름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멘트를 날린다. 결코 우즈키가 모자라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린이 너무 압도적이라고 하는 게 맞을 거다 아마.


 "아, 같은 소속사 아이돌이니까 누굴 평가하는 건 좀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하하- 라면서 메인 작가 님이 익살스럽게 웃음을 날리자 나도 웃음으로 회답했다.


 촬영이 끝나자 모두 수고했다며 인사를 나누고 해산을 하기 시작했다. 우즈키가 달려와 내 앞에 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


 "프로듀서 씨, 저 오늘 어땠나요?"


 강아지였다면 꼬리가 휙휙 흔들렸겠지. 왠지 그 모습이 상상이 돼 약간 웃음을 흘리면서 좋았다고 답해줬다.


 "그럼 칭찬해주세요!"


 우즈키가 먼저 대기실로 향하면서 말했다. 나는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는 아버지가 된 기분으로 우즈키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잘했어. 이제 완전히 프로구나."


 살짝 움찔했지만 이내 웃으면서 내게 몸을 맡기는 우즈키가 에헤헤 하며 웃었다.


 "아, 저 잠시 자리 좀 비울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즈키가 방을 나갔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스케쥴을 관리하려고 핸드폰을 꺼내들고 근처 의자에 앉았다.


 혹시나 린이 찾아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린은 자신의 프로듀서와 사무소로 향했나보다.






 나는 우즈키와 함께 몇 가지 일을 더 처리한 후 사무소로 돌아왔다.


 "그럼 우즈키는 이제 일정이 끝났으니까 돌아가도 될 거 같아. 미안, 바빠서 못데려다주고 바로 사무소로 와버렸어."


 "아뇨, 괜찮아요. 프로듀서 씨도 수고하셨어요!"


 사실 우즈키의 일정이 끝난 걸 눈치챈 게 사무소에 도착해서였다. 요즘들어 정신이 팔려있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우즈키가 또 걱정을 하겠지.


 벌써 해는 진지 오래였다. 날이 꽤나 추워져서 옷깃을 여미며 돌아가는 우즈키에게 다시 한 번 잘가라는 인사를 한 후 차문을 잠갔다.


 "프로듀서. 약속, 잊은 거 아니지?"


 차문을 잠그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손을 떨었다.


 "..린도 완벽했어. 이제는 프로듀서가 담당하지 않아도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을 거 같은.."


 실언이었다.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지만 엎어진 물을 이전처럼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잘 해낼 수 없어. 애시당초 다른 사람으로는 할 수 없어. 난 프로듀서가 없으면 안돼."


 린은 혼자서 그런 소리를 중얼대면서 내게 안겼다. 분명히 위험한 상황인데도 나는 린을 떨쳐낼 수 없었다. 린이 약한 소리를 하는 건 그 때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나와 함께해줘. 나만을 봐줘. 나에게만 칭찬해줘. 나도 이제, 완전히 프로니까. 잘했다고 해줘."


 정정. 린은 약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였다. 분명하게 말해서 지금 린의 상태는 이상했다. 아까 대기실에서 우즈키에게 했던 말을 왜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내게는 그 이유를 물을 깡은 없었다.


 "..노력해볼게."


 결국 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린을 돌려보낸 후 사무소에 도착하니 치히로 씨가 수고했다며 드링크를 한 병 건네주었다. 예전에는 자주 이 음료를 주면서 금액을 청구하고는 했는데 며칠 전부터는 금액은 일절 받지 않고 오로지 걱정스럽다는 표정만 보내고 있다.


 그렇게 상태가 안좋아보이는 건가.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휴가를 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


 "..치히로 씨. "


 "네?"


 "한 사흘 정도만 휴가를 낼 수 있을까요?"


 "네..? 아, 네. 물론이죠! 한 일주일 정도는 족히 낼 수 있을 걸요?"


 그 정도로? 요즘들어 휴가 같은 것 없이 계속 일하고 있기는 했다만.. 뭐, 어쨌건 기간이 길 수록 좋은 거겠지.


 "그럼 일주일 정도 쉴 수 있을까요?"


 "네. 다행이네요. 프로듀서 씨, 이대로 가다가는 쓰러질 것 같았어요. 그래도 자기 몸상태니까 알고 계셨나보네요."


 "아.. 네."


 멋쩍은 웃음을 흘리면서 몇 가지 절차를 거쳐 휴가를 냈다. 어쩌면 이렇게 물리적인 거리를 둬서 린의 지금 이상한 상태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잘 되면 좋으련만.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면, 다시 린의 담당으로 붙는 것 밖에 방법이 없겠지.





 갑작스레 시간이 많아지니 어디에 써야할지 감도 안잡힌다. 이왕 휴가를 냈으니 어딘가로 놀러갈까 싶었지만 나는 여행하고는 인연이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럼 먼저 퇴근할게요."


 "네. 일단 프로듀서 씨가 하시던 업무는 다른 분께 맡길게요."


 치히로 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가방을 챙겨 사무소에서 나왔다. 남들보다 먼저 퇴근을 하는 건 처음이 아닐까? 다른 아이돌들도 내가 먼저 나서는 건 처음 봤는지 왁자지껄 떠들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일일히 그 말들에 대답을 해준 후 사무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왔을 때보다 조금 더 뻑뻑해진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아넣고 문을 열었다.


 일단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자고 싶은대로 자야할 것 같다.


 ..집에 와서도 생각을 깊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곧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



 잠을 오래자서 그런 걸까. 묘하게 상쾌한 기분이다. 오랜만에 푹 잔 것 같다. 이 정도면 바로 업무에 복귀할 수도 있겠어.


 그렇지만 기왕 휴가를 오래 낸 거 확실하게 즐기고 확실하게 컨디션이 좋은 상태로 돌아가도록 하자.


 ..하지만 좋은 컨디션과는 다르게 기분은 약간 이상했다.


 우리 집이 원래 이렇게 깨끗했던가? 나는 어제 밥을 안쳐놓고 잠을 잤나? 아니, 반찬까지 해놨었나?


 요즘들어 건망증이 심해져서 확실하지가 않았다. 일단은 기왕 된 밥에 반찬이니 이걸로 때우도록 하자.


 아마 내가 만들었겠지- 싶은 생각에 만들어진 반찬을 한 번 데워 먹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게 아닌 꽤나 맛있는 식사에 약간 감동했다. 미각까지 죽은 줄 알았건만 그래도 맛은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 먹은 식기를 싱크대에 던지듯 넣은 후 씻지도 않은 채로 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무심코 밖을 한 번 내다본 후 호흡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어째서?"


 아침의 좋은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린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이 된 것처럼 벽에 딱 붙어서 조금 가빠진 숨을 몰아쉬었다.


 이어서 나는 침대로 들어가 쥐 죽은 듯 이불을 덮어썼다. 어째서 주소를 말하지도 않았는데 린이 여기까지 온 걸까- 라는 의문과 동시에 다시 한 번 린과 내가 했던 그 약속이 머리를 스쳤다.


 ..일단은 오늘은 집안에서 보내자.


 외출을 할 의지를 모두 잃은 나는 티비를 켤 생각도 하지 않고 이불 안에서 숨을 죽였다.


 방음이 그닥 좋지 못한 곳이라 밖에 누가 오고가는지 소리가 다 들린다. 또각또각하는 구두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린다.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다가오는 게 린의 이미지와 어울리기는 했다.


 그래도 문은 잠겼으니..


 라는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간단하게, 문이 열렸다.


 "..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히 지금 린은 내 앞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솜을 품은 이불 사이로 시선이 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급하게 몸을 웅크리고 눈을 꽉 감았다.


 몇초 후, 내 몸을 덮는 아주 약간의 중량감이 사라지더니 아침을 알리는 화창한 햇살이 내 감긴 눈꺼풀을 뚫고 망막을 자극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을 하기도 전에 등이 부드러운 것에 감싸여졌다.


 그게 린이라는 걸 깨닫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로듀서."


 내가 깨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린이 말을 이었다.


 "..약속, 곧 지키게 될 거야."


 될 거야. 라고, 린의 말이 강제성을 띄는 건 내 착각일까. 괜히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나의 귀와 볼을 순차적으로 쓰다듬던 린의 손이 입술에 닿았다. 얇은 손가락이 내 윗입술을 스윽 훑고 지나갔다.


 "..린."


 "왜?"


 내가 깨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 행위로 나를 깨우려고 한 걸까? 어쨌건 나는 이 이상은 안된다고 판단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린을 바라봤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약간 말려 올라간 스커트. 평소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옷이 확실하게 아이돌 같은 복장이었다. 일단 프로의식은 확실하게 있으니 들키지 않고 온 건 확실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불법침입은 엄연한 범죄야."


 "불법침입이 아니야."


 "..그럼 뭐야..?"


 "이제 곧 가족이 될 거니까. 불법침입이 아니지."


 "..그럴 일은 없어."


 딱 잘라서 말하니 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나를 쳐다봤다. 그 동공에 내가 비춰지지 않는 것 같아서 무심코 침대 끝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그럴 일이 없을리가 없어."


 단정을 지어봐야 무가 유로 되지는 않는다. 나는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며 린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린. 지금 너는 탑 아이돌 자리에 있잖아. 천천히 생각해봤으면.."


 말을 멈췄다.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내 말을 잠자코 듣던 것 같은 린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뒤적이더니 침대에 떨어뜨렸다.


 소리하나 내지 않고 이불에 안착한 물체는 철로 만들어진 꼬챙이 비슷한 물체였다. 끝이 구부러진 걸로 봐서는 아마..


 "린."


 "왜?"


 "네가 딴 거야?"


 뻑뻑해진 열쇠구멍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헤집어서 말의 앞뒤를 잘라버렸다. 그럼에도 린은 이해한 것 마냥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


 "있지. 칭찬해줘."


 "무슨.."


 "프로듀서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어. 익숙하지 않은 일까지 하면서."


 이어서 린이 떨어뜨린 것은 부러진 얇은 꼬챙이들. 이렇게 망가진 건 린이 급하게 했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해서 그런 걸까?


 지끈대는 머리를 눌렀다.


 "칭찬해줘. 있지."


 린이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칭찬해줘."


 그 눈에 빛은 들어있지 않았다.





 요령이 없는 나로써는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그 약속'은 린의 사기를 올리기 적절한 행위였다. 당시에는 린도 웃음으로 무마했었으니 우리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그 이후였을 것이 분명했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니 린이 만족한 표정을 하면서 웃었다.


 "그럼, 프로듀서가 걱정하니까 이제 갈게."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린이 방에서 나갔다. 깨진 쇠꼬챙이는 린이 전부 가져간 뒤였다.


 나는 뭔가에 씌인 것처럼 업자를 불러 자물쇠를 떼고 도어락을 달아놓았다. 그걸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조금 큰 돈을 들여 지문 인식 장치도 설정했다.


 비밀번호도 무작위로 떠오른 단어를 마구잡이로 누른 비밀번호로 설정했다. 일단 비밀번호는 핸드폰에 저장해놨으니.. 괜찮겠지.


 휴가의 첫 날은 무섭게 끝이 났다. 허나 다음 날과 다다음 날, 그 다음 날까지. 휴가 마지막까지 린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휴가를 낸지 세 번째 날부터 조금 풀어진 마음으로 휴가를 즐겼고 그제서야 티비를 켰다. 매일 아침 거울로 체크한 결과 눈가의 다크서클은 점차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어딘가에 쫓기는 것 같던 마음도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가끔가다 외출을 할 때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거나 집의 잠금을 누군가가 풀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들기는 했다만 이내 떨쳐냈다. 굳이 이유를 설명하자면 치히로 씨의 소행인지 외출을 할 때마다 아이들을 만났었다. 아마 오프겠지.


 나는 마지막 날까지 머리를 싸매면서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아이들의 놀이 계획에 몸을 맡긴 후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복귀를 했다.


 "괜찮으셨나요?"


 역시 치히로 씨의 소행이었나. 대금을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서비스라면 돈을 내도 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매일 다른 아이돌하고 돌아다니다니.. 아마 이건 복 받은 거겠지.


 지금까지 한 고생이 사라지는 기분과 함께 의욕이 찼다. 치히로 씨가 이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거, 린이 계획한 거예요."


 지금까지 듣지 않은. 겨우겨우 머릿속 한 구석으로 밀어낸 그 이름이 내 심장을 쿡 쑤셨다.


 하지만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나 혼자만의 문제를 굳이 크게 키울 필요는 없었다. 현재 린은 나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나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린의 이미지가 실추될 일은 설령 같은 사무소의 사람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역시 린이네요."


 결론적으로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며 치히로 씨에게 말했다. 부들대며 떨리다가 이내 주먹을 꽉 쥔 손은 잽싸게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그렇죠? 프로듀서 씨가 피곤한 거 같다고 아이돌들을 모아서 말하는데 완전 감격했다니까요.."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던 치히로 씨가 이내 얼굴을 들며 내게 말했다.


 "그럼 이제 바로 일하죠! 드링크가 있는데 하나 사실래요?"


 그래. 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는 없다. 평소와 같이 일을 하고 아이들을 데려다주면 되는 거다. 평소와 같이 행동하면 무서울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스스로 자기최면을 걸며 자리에 앉았다.


 "고생하셨으니까 하나는 무료로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호의에 고개를 끄덕이며 드링크 병을 열었다. 약간 새콤한 향이 비강을 자극해 정신을 맑게 만드는 것 같았다.



 -----



 "읏차.."


 "벌써 다 끝나셨어요?"


 "네. 오늘은 왠지 컨디션이 좋네요."


 "제 드링크 덕분이겠죠? ..라고 말하고는 싶지만 아무래도 아이돌들 덕분이겠죠?"


 "그렇죠. 왠지 돌아오니까 다들 빠릿빠릿해져서 일이 수월하게 끝났어요."


 "기왕 빨리 끝난 거 한 잔 마시러 갈까요?"


 치히로 씨가 술잔을 드는 시늉을 하면서 살짝 웃었다.


 "그럴까요?"


 그것도 가끔은 좋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최근들어 집에서 혼자 마시는 일이 많았으니 다른 사람하고 마시는 게 조금 그리운 것도 있기는 했으니까.


 "그럼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치히로 씨가 아까보다 빨라진 움직임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 집중하는 모습을 방해하는 것도 뭐해서 나는 자리에 다시 앉아 내일 일을 적당히 조정하기 시작했다.


 "갈까요!"


 "아. 네."


 성인조는 오늘은 오프라 집에서 쉬고 있겠지. 이렇게 보자니 치히로 씨랑 둘이서 마시러 간 적은 얼마 없는 것 같다.


 땋은 머리가 기분 좋게 흔들리는 것을 본 나는 정리한 자료들을 저장한 후 컴퓨터를 껐다.



 -----



 엄밀히 말하자면 치히로 씨는 술에 꽤 강하다. 나도 나름대로 마신다- 라고 스스로 말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앉은 자리에서 테이블 한 켠을 꽉 채울 정도로 부어라 마시는 사람 수준까지는 못된다.


 흐릿하니 좌우로 기우는 시야로 치히로 씨를 바라봤다. 아주 살짝 상기된 볼만이 취기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 가는 몸의 절반이 간으로 돼있는 건가?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술병의 잔을 채웠다.


 "괜찮으세요?"


 심장소리가 치히로 씨의 말을 애매하게 끊는다. 일단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이자 치히로 씨가 방긋 웃으면서 술잔을 들었다.


 짠- 하는 소리가 들리고 술자리는 마무리. 비틀거리는 걸음과 그에 대비되는 또렷한 정신으로 어떻게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다.


 핸드폰의 비밀번호를 어찌어찌 보고 입력, 지문 인식 칸에 손가락을 살짝 얹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막상 이렇게 보안을 철저하게 하니까 조금 귀찮다.


 "..응..?"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집이 이 정도로 깨끗했나? 내가 불을 켜두고 나갔었나? 베갯잇은 원래 없었나? 이불이 파란색이었나?


 "..뭐야.."


 머리를 몽롱하게 만들던 취기가 싹 사라지고 기분 나쁜 두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구역감이 들지도 않았는데도 절로 손이 입을 가렸다.


 눈동자를 천천히 돌렸다. 마치 파노라마 사진처럼 집안 풍경이 길게 시야에 들어온다. 순간 머릿속에서 오늘 외출하기 전 방 모습이 생각났다.


 이불. 원래는 흰색.


 식기. 설거지를 하지 않고 나갔었지.


 신발. 몇 개의 구두를 빼놨었어.


 책상. 자료가 난잡하게 흩어져 있었어.


 그 외 여러가지.


 전부가 바뀌어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형광등이었다. 왜 형광등이 켜져있지? 안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윽.."


 아무도 없는 방에 왠지 인기척이 느껴져서 뒷걸음질을 쳤다. 심령현상은 믿지 않는 주의지만 이건 귀신이나 유령의 소행이 아니였다.


 범인의 모습이 너무도 뚜렷하게 보였다.


 "린.."


 겨우겨우 내뱉은 말에 용기를 얻은 걸까.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외쳤다.


 "린! 있는거지!? 빨리 나와!"


 덜컹하고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심장이 크게 뛰는데도 얼굴은 식어가는 게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분명 아무도 없어. 내가 취해서 잘못 떠올린 걸거야. 애시당초 이 잠금을 뚫고 들어올 수 있을리가 없잖아? 지문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혼자서 중얼대면서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에도 화장실에도 다른 방에도, 혹시나해서 열어본 장롱의 안에도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안도감이 들었다. 이어서 풀린 긴장과 함께 피로감이 몰려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빨리 이곳에서 나가 어디 숙박업소에서 자고 싶었지만 한 번 풀린 긴장의 끈이 다시 잡히지는 않았다.


 저절로 시야가 닫히고, 정신이 멀어진다.


 완전히 잠에 빠지기 직전 거의 감긴 시야 사이로 인영이 보인 것 같았지만 착각이겠지. 분명히.


 ..완벽하게 잠금장치를 달아놨으니까.




 -----




 "프로듀서."


 "..윽..!"


 기분 나쁠 정도로 청명한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 허리가 살짝 삐걱였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쓸 때가 아니였다.


 "아침이야."


 "린.."


 "괜찮아? 안색이 나빠.."


 린이 내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 가느다란 손을 쳐낸 후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들어온 거야?"


 지끈대는 머리가 어제 일을 기억하는 걸 거부하는 것 같았다. 술의 탓도 있겠지만.


 "그건 알면 안돼."


 그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는 행동은 분명히 말해서 톱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의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달랐다. 매번 말하는 거지만 린은 아이돌이다. 사사로운 감정에 삼켜져서 절정기인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돌에게도, 린 자신에게도, 그리고 나 스스로도.


 "이건 명백한 주거침입죄야. 덧붙여 말하면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그냥 동경심일 거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멋진 사람도 아니고 린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니까."


 긴 대사를 전부 말하고나니 조금 차분해졌다. 하지만 차분함과 공포는 충분히 양립할 수 있는 감정이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파란색 이불을 살짝 잡은 후 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프로듀서의 말은 틀렸어."


 돌아온 대답은 덧 없을 정도로 허무한 말이었다. 린의 표정이 살짝. 아주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대답은 없었다.


 나는 말 없이 내게서 멀어지는 린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약속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말고도 다른 뭔가가 있는 건가?


 상념이 섞이고 또 섞여서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인채로 거실로 나갔다.


 책상 위에는 지폐가 두 장 놓여있었다. 린이 나에게 준 건가? 라고 생각했지만 구겨져있는 모양을 보아하니 아마도 이건 내가 이전에 린에게 줬던 택시비일 것이다.


 왜 이걸 다시 돌려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덩그러니 놓여진 그 지폐를 가지고 싶지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흘렀다.


 새로 들어온 아이돌들은 모두 초보 딱지를 벗어던졌고 경험있는 아이돌들은 프로의 반열에 올랐다.


 몸의 피로는 더해졌지만 그래도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어깨를 누르는 것 같은 피로와 뻑뻑하니 잘 감기지 않는 눈도, 억지로 비틀은 입꼬리도, 몸을 조아매는 것 같은 근육통도, 그 외 다른 모든 것도 이제는 익숙하다.


 집의 잠금장치와 지문인식 장치도 익숙해졌다.


 문을 열면 언제나와 같이 깨끗하게 정리된 집도 모두 익숙해졌다.


 나를 부르는 청명한 목소리도,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마치 아내 같은 그녀의 모습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녀가 매일 내게 주는 좋은 향기의 차도. 그 안에 있는 아주 약간의 이물감도 익숙해졌다.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것에 끝내 적응을 해버리니 사람을 적응의 동물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프로듀서. 아침이야."


 이미 린은 내 생활 깊숙히 침투했다. 린이 어떤 행동을 하던, 몇 시에 나오던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린은 탑 아이돌이니까.


 린이 언제 은퇴를 하더라도 누구도 규탄하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린은 탑 아이돌이니까.


 만약 은퇴를 한 린이 평범한, 단지 하나의 접점만을 가지고 있는 남자에게 마음을 준다고 해도 누구도 규탄하지 않을 것이다. 린은 탑 아이돌이니까.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 상황에 순응을 하더라도 그 누구도 규탄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린은 그 약속을 했으니까.


 "잘 먹을게."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입에 옮겼다. 맛은 글쎄. 잘 모르겠다.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겠지? 감촉은 약간 촉촉해서 버석버석하니 마른 입을 적시는 것 같았다. 이런 건 싫어하지 않는다.


 "다녀와."


 린은 어느 순간부터 나보다 늦게 집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이제 이런 것도 익숙해졌다.


 그도 그럴게 린은 탑 아이돌이니까. 나와 린은 그 약속을 했으니까.


 "..?"


 약간의 모순점이 생각났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나와 그녀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괜히 들춰내봐야 그건 분명 의미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행동에 불과할 것이다.


 조금 반항을 해보자면 이건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는다. 이상하게도.


 사실 나 스스로도 이런 상황이 무너지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무너진 순간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그 누구도 공들인 탑이 무너지는 걸 좋아하지는 않겠지.


 그래서 나는 순응하는 것을 택했다. 그도 그럴게,


 "린은 탑 아이돌이니까."


 "응? 내가 왜?"


 "..아무 것도 아니야."


 나의 말에 린이 쿡하고 웃었다. 관계적으로 옳지 않다만, 솔직한 심경을 말한다면 그 미소는 지금까지 봤던 어떤 미소보다 맑았다.


 그래. 모든 건 익숙해졌다.









 ..라는 건 거짓말.


 나는 무너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정신을 꽉 누르고 있었다. 억지로 옭아맨 사슬이 언제 풀어질지 모르는 상태로 계속해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한 달 하고도 사흘이 지났을 무렵. 정말 뜬금없이 옭아맨 사슬이 끊어졌다.


 집에 가는 길에 핸드폰을 만지다가 우연히 본 누군가의 게시물. 린은 어디로 갔냐는. 왜 요즘 린은 활동을 하지 않냐는 식의.


 확실히. 현재 린은 활동을 줄였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의문스러워했지만 누구도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의문을 가슴에 품을 뿐.


 모든 걸 알고있는 나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오늘도 집에 돌아간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린의 얼굴. 깨끗한 집. 반찬과 국의 향기. 그 모든 것이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왜 내가 이런 꼴을 겪어야 하는 거지?


 "제발.."


 문득 눈치를 채보니 이미 마음에 쌓아놨던 단단한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만해줘.."


 모아둔 눈물이 제방을 넘어 흐르는 걸 알면서도 꾹꾹 눌렀던 고통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뭘 그만해?"


 "..그만.."


 다가오는 린의 어깨를 살짝 잡고 밀었다. 사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미치기 직전이라는 걸.


 "..윽.."


 목소리가 작아졌다. 내 목소리는 희미해진 저항과 공포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린이 나를 쳐다봤다. 형광등을 등진 상태의 린의 그 눈은 너무도 뚜렷하게 감정을 담고 있었다.


 나는 이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나를 쳐다보는 린을 피하듯 집을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도망치듯 집에서 나와 숙박업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하지만 잘 수는 없었다. 숙박업소는 결코 편한 곳이 아니였다. 오히려 집에 있을 때보다, 사무소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닫힌 문을 바라보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내가 향한 곳은 결국 사무소였다.


 이건 일 중독일까 아니면 그곳이 가장 마음이 편한 곳인 걸까. 아무리 그래도 린이 있는 곳으로 와버리다니..


 하지만 이왕 온 걸 다시 나갈 수는 없었다. 일단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소처럼 행동해야해. 그래도 모두가 있는 곳에서는 린도 어찌하지 못할테니까.


 다행히 연기를 하는 것은 이제 익숙해졌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 올리고 웃는 표정을 만들면서 일을 진행했다.


 아무도 그 모습에 토를 달지 않았고, 아무도 그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묵묵히 타자를 친다.


 익숙하다. 전부 다 익숙해. 아이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는 것도, 치히로 씨의 구매 권유를 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도, 사무실에 혼자 남는 것도, 전부 다 퇴근을 한 시간에 린이 내게 다가오는 것도 전부 다 익숙하다.


 그녀가 내게 차를 건넨다. 찻잔이 불투명해서 안의 내용물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뭐, 린이 항상 주는 그 차겠지.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온도에 딱 맞춰진 차를 한 입에 꿀꺽 삼켰다.


 "후후.. 맛있게 마시네."


 "..그러게. 린이 끓인 차도 이제 좋은 향이 나네."


 "그럼 지금까지는 안났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오늘은 좀 더 좋은 향이 나서."


 "그래. 좋은 찻잎을 썼거든."


 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는 이런 담백한 대화를 원했던 거다. 그러니까 나는..


 나는..


 "..나는..?"


 "왜 그래? 프로듀서?"


 "아.. 아무것도 아니야."


 또 너무 무리를 한 걸까. 최근들어 사라진 것 같았던 건망증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방금 한 생각을 잊다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프로듀서로써 고쳐야할 것 같다. 건망증에 잘 드는 약이 있으려나.


 "프로듀서. 할 일 끝났으면 이제 집에 가자."


 ..이렇게 끝나고 린과 함께 집에 가는 것도 언제나 했던 일이었겠지. 항상 이런 식으로 행동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든다.


 "그럼 돌아가자."


 "아.. 그래."


 나는 무심코 린에게 대답했다. 사실 어차피 상관은 없었다. ..원래 린과 나는 집에 함께 돌아갔었으니까.






 ..





 아니, 원래 린과 함께 집에 돌아갔었나? 언제부터? 나는 언제부터 혼자 살았지? 린은 어디서 살았었지? 린이 왜 내 집에서 살고 있는 거지? 왜 이런 기억이 내 머릿속에 있는 거지? 분명히 린의 친가는 꽃집이고 나는 한 사람이 살기 적당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 아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거짓인가? 내가 알고 있는 게 거짓이라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인 거지? 왜 이런 불쾌한 모순점이 느껴지는 거지? 왜 기억의 한 켠이 뜯어진 것 같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프로듀서?"


 영원을 헤멜 것 같던 생각은 린의 목소리에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어.. 어어.."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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