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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나스타샤와 흰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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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0, 2018 03:09에 작성됨.

분명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그야 그 계절에는 눈이 하염없이 내리니까.
하지만 사랑하게 된 것은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그야 그 계절에는 눈이 하염없이 내리니까.


하얀 눈의 계절의, 눈이 푹푹 나리던 어느 일상적인 나날. 지하철을 타려던 나는 문득 이질적인 소녀를 보고 멈칫거렸다. 눈을 잔뜩 맞았는지 찰랑거리는 은발. 눈으로 빚어졌는지 반짝거리는 하얀 피부.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청록색 에메랄드.


「아...」


정말로 찰나의 멈칫거림. 그 찰나 동안에 나는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린다. 아, 전철을 타야하는데. 나는 뇌리 속에서 겨우 떠올린 그 한 마디에 전철을 타려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멈칫거리는 동안에 사람들을 모두 태워 버린 전철은 잠깐의 시간도 주지 않고 떠나버리고, 역 안에는 나와 그녀 두 사람뿐. 이걸 어떻게 한다. 나는 일단은 기다리기로 한다. 회사에 늦는다면 눈 때문이라고 해 두면 되겠지.


계속해서 눈은 내리고, 전철은 오지 않는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나는 마음 한 구석에 생긴 조바심을 살살 달래며 전철의 시간표만 쳐다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시선은 그녀에게로 향한다. 햇빛이라고는 전혀 받지 않은 듯한 눈같은 살결. 어쩌면 그녀는 눈의 요정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곳에서 멍하니 눈을 맞으며 기다릴리가 없어. 나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시간동안 그녀를 쳐다본다. 그 시간은 너무나 길어, 눈조차도 느리게 내리는 듯했다.


얼마나 그녀를 쳐다보았을까. 너무 눈길을 줘도 실례라고 생각한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쳐다보았다. 눈은 푹푹 나리고, 붉은 신호는 바뀌지 않는다. 너무나 지겹게 봐 흥미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며 뜸을 들인다. 좋아, 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나는 괜찮을리 없는데도 나 자신에게 무리하게 속삭이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가 있던 쪽을 쳐다본다. 그 소녀는 그 곳에 계속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저어, 어디로 가시기에 전철을 기다리고 계시나요?」
「...?」


내가 엉망진창으로 구겨서 내던진 호의를 받은 소녀는, 짙고 검은 눈썹을 움직여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야말로 하얀 눈같은 표정. 백지같은 표정,이라고 말해야 하려나. 나는 무슨 말을 더 해야할지 고민한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야기를 뜬금없이 할 수는 없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가장 무난한 선택지를 택한다.


「눈이 많이 오네요.」
「да- зима, 아... 겨울이니까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나의 말을 받는 그녀. 그 바람에 다시 대화는 단절되어버린다. 여기서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하지? 나는 길 잃은 양처럼 그녀를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하얀 눈이 계속 푹푹 나린다. 하얀 털의 양은 눈 속에서는 보이지 않을것이다. 이렇게 묻혀버리는 수밖에 없나. 나는 아직도 멀뚱히 떠 있는 붉은 신호를 쳐다본다. 역시 눈 때문에 아무래도 평소보다 늦어지는 모양이다. 그녀에게 실없는 이야기라도 다시 한 번 해볼까. 나는 그녀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나의 시선을 겨우 거두고는 생각해본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 그녀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건다.


「눈 내리는 하늘이란건 꽤 아름답네요. 마치 별이 쏟아지는 듯해요.」
「...звезда! 그렇네요, 정말 멋진 표현이예요!」


눈을 반짝이며 나의 말에 크게 동조하는 그녀. 아, 혹시 별을 좋아하는건가. 다른 사람이라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만큼은 왠지 모르게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별 대단치 않다. 그녀의 에메랄드 같은 눈이, 별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 하늘의 그 어떤 별보다도 더 밝게 반짝였으니까..


「별을 많이 좋아하시나봐요?」
「да-! звезда, 아- 별, 아주 좋아합니다!」


청록색으로 반짝이는 눈에 한아름 눈을 담아, 그녀는 환한 미소로 대답해주었다. 그 미소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하늘에 떠 있는 별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래, 하얗고 순수해 너무나 눈이 부시는 눈같은 미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아름다웠지만.


「별을 좋아하시는군요. 어떤 별이 가장 좋으신가요?」
「음- 데네브겠네요-」


하얀 그녀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백조자리의 알파 별을 말한다. 백조자리라,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하늘의 별자리다. 하얀 그녀 앞에서, 나는 마치 나 자신이 흰 당나귀인 것처럼 느껴진다. 아름다이 호수를 유영하는 백조를 동경할 운명의 당나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묶여 서글프게 울어제낄 흰 당나귀.


「당신은 어떤 별이 좋으신가요-?」
「아, 저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민한다. 역시 여기서는 알타이르나 베가가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리겔? 그것도 아니라면 스피카? 무슨 별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이야기해야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고민한다. 로댕의 그 유명한 조각품처럼 생각한다. 흰 눈이 멈추듯이 내린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붉은 신호가 푸른색 신호로 바뀐다. 열차가 들어서는 신호가 들려온다.


「아, поезд- 아, 전철이 오는 모양이예요-」
「아...」


미처 대답하지도 못했는데 전철이 삐비비빗-하는 소리를 내며 들어온다. 나는 강철덩어리일 뿐인 전철에 대고 속으로 욕을 한다. 네가 조금만 늦게 왔다면 대답할 수 있었을텐데,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할 수 있었을텐데.


설국에 기차가 멈춰선다. 눈은 아직까지는 내리고 있지만 곧 그칠 것이다. 아, 너무 늦기 전에 그녀의 이름이라도 물어봐야한다. 하얀 이름, 그 이름이라도 들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시간은 무의미한 눈처럼 흘러지나간 것이 되어 버리니까. 전철이 붉은색 신호를 받아 완전히 멈추기 직전에, 나는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녀의 이름을 묻는다. 별에서 다시 전철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나의 질문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이름 하나를 말한다.


아나스타샤.


그리고 그 말소리와 함께, 어느새 붐비는 사람들 틈에 숨어 사라져버리는 그녀. 그 속에 휩쓸려, 나는 그녀와 다른 칸으로 옮겨져버린다. 사람들 틈에서 흰 당나귀는 응앙응앙 울고 있다. 더러워버리는 세상 속에서, 흰 당나귀는 응앙응앙 울어버리는 것이다. 문이 닫힌다. 눈은 아직도 푹푹 나리고 있다. 아름다운 아나스타샤를 다시 볼 수 있다면. 흰 당나귀는 백조의 꿈을 꾼다. 신호소에 다시 파란 불이 켜진다. 신호소에 서 있던 열차가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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