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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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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03, 2018 02:39에 작성됨.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1)】 에서 이어집니다.




도심 한 가운데 위치한 R호텔의 최상층에는 특별한 방이 있다. 거대한 호텔 건물의 한쪽 모서리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보통 크기의 방을 너댓 개는 합친 것처럼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그 방은 호텔 경영진, 혹은 그 이상의 위치에 서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방이었다.


정적이 흐르는 방 안에 별안간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방음이 충실하게 되어 있는 문이었기에 방 안에서 들리는 노크소리는 ‘똑똑’이라기 보다는 ‘툭툭’에 더 가깝게 들렸다.


“들어와.”


도시의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를 앞에 두고, 테이블에 다리를 꼬고 앉아 서류다발을 읽고 있던 검은색 정장 차림의 여성은 서류다발에서 눈길조차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찰칵, 하고 문고리가 돌아갔다. 경첩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공기를 가르면서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감색 정장 위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금발의 남자였다.


“뭐 보고 계십니까?”

“조만간 찾아오실 손님 자료.”


문을 닫으며 들어오는 남자의 말에 대답하면서 여성은 서류다발의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할아버님도 참,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씀이라도 해 주시지.”


그렇게 말하며 여성은 서류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에 들어 있는 것은 뿔테 안경을 쓰고 단정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프로듀서의 모습을 하고 있는 P의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를 정말로 회유하실 생각이십니까?”

“회유를 해? 뭘로? 돈도, 명예도 다 갖고 있는 사람인데?”

“그, 그건 그렇네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멀뚱히 서서 뒷머리를 긁적이는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수 시절부터 그랬어. 그렇게 화려한 삶을 살면서도 스캔들의 ‘S’근처에도 안 가본 사람이야. 뭔가 꼬투리를 잡을 게 있었다면 진작에 잡았겠지.”

“그러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할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는 산불 같은 남자라고 했어. 격렬하게 불타오르다가도 불이 꺼진다 싶을 때는 근처에 있는 다른 나무로 옮겨 붙는다고.”

“산불이라……그럴싸한 비유네요.”

”그런 산불을 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지. 뭔지 알아?”

“글쎄요. 저는 아가씨처럼 똑똑하지 못해서요.”


탁, 하고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여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이었다. 남자가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히자, 그녀는 재빨리 손을 뻗어 검지와 엄지로 남자의 귀를 낚아챘다.


“아얏!”

“잘 들어. 한 번만 말할 테니까.”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 귀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던 남자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세상에, 그걸 진짜로 하시려고요? 잔인해라.”

“별 수 없잖아? 이렇게 배우고 자란 걸. 아무튼 나가 봐. 곧 손님 오실 시각이니까.”

“쳇, 알았어요.”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문지르는 남자에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하자, 그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잠자코 방을 나갔다. 다시 방 안에 혼자 남은 그녀는 조용히 닫히는 문 위에 달린 자그마한 시계를 바라보았다.

약속 시간까지는 약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2)】




서류에 적혀 있던 약속 날짜인 수요일. R호텔의 거대한 정문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택시 뒷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평소와는 달리 짙은 회색이 도는 정장을 갖춰 입은 프로듀서였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수고하십쇼!”


요금을 건네고 택시 기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그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호텔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문서에 적혀 있던 약속 장소는 그저 ‘최상층’이라고만 되어 있었을 뿐, 방의 호수는 적혀 있지 않았다.


“분명 파격적인 제안이야.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했지. 대가로 뭘 요구할지는 모르겠지만……일단 들어나 보자.”


등 뒤로 택시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호텔의 정문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던 그는 각오를 다지듯 가볍게 털어낸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정문만큼이나 거대한 회전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텔로 들어간 프로듀서는 프론트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눈을 마주친 프론트의 직원에게 빙그레 웃으며 목례를 한 그는 프런트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의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텔 내부의 풍경은 몇 달 전, 애니버서리 파티를 위해 방문했을 때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 때, 땡 하는 종소리가 그의 의식을 잡아 끌었다. 중간 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가 금세 1층으로 내려온 것이다.


“평일 오후는 이런 느낌이었나…….”


텅 빈 엘리베이터의 안으로 들어서며 그는 왼팔에 차고 있던 시계를 슬쩍 바라보았다. 약속 시간까지는 약 5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럭저럭 시간은 맞출 수 있겠군.’


최상층의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상승함에 따라 온 몸을 짓누르는 가벼운 압박감을 느끼면서 그는 엘리베이터 내부에 설치된 거울을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내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는 단 한번도 멈추지 않고 곧장 최상층에 도착했다.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그 앞에는 감색 정장 차림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프로듀서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은 그는 약간 어두운 빛이 도는 금발 머리카락을 짧은 스포츠컷으로 정리한, 어쩐지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곧게 서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프로듀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프로듀서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만, 혹시 CG프로덕션에서 오신 분입니까?”

“그렇습니다만.”

“’메리엇 스튜어트’입니다. 저희 대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시지요.”


인사조차 없이 남자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기 소개라도 할까 싶어 명함을 넣어 둔 품 속으로 손을 집어넣던 프로듀서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머쓱한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손을 다시 주머니로 되돌렸다.

R호텔의 최상층은 4개의 스위트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호텔이 4각형 구조이니 모서리 당 방이 하나씩 있는 셈이었다. 모퉁이를 한 번 돌고 나타난 문 앞에서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문을 등지고 서서 프로듀서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던 그는 프로듀서가 문 앞에 서자 그제서야 손을 뻗어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남자는 문고리에 손을 뻗어 그대로 문을 열었다.


“자,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프로듀서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남자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찰칵, 하고 문고리가 걸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방 안을 둘러보던 프로듀서는 테라스 앞에 설치된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을 발견했다.


“아, 오셨군요.”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방으로 들어온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몸매를 드러내는 검은색 정장을 빈틈없이 갖춰 입고 윤기가 흐르는 붉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여성이었다. 그녀는 테가 없는 둥그런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안경 너머로 보이는 긴 속눈썹과 약간 치켜올라간 눈꼬리가 무척이나 이지적이면서도 예리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안내 수고하셨어요. 잠깐 들어가 계세요.”

“네, 아가씨.”


그녀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남자는 곧바로 옆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로듀서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키는 카에데와 비슷한 정도로, 프로듀서와는 머리 두 개 정도가 차이가 났다.


“반가워요. 우리 구면이죠?”

“……그렇게 되는군요.”

“안경도 멋지네요. 스마트해 보여요. 이제 선글라스는 안 끼나요?”

“감사합니다. 야외 활동을 할 때는 끼죠.”


‘설마하니 이 여자가 직접 올 줄이야…….’

자신을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는 그녀의 말에 프로듀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이미 예전에도 몇 번인가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때 자신의 오너였던 ‘메리엇 가문’의 일원이었으니까.


“이렇게 가까이서 뵙는 건 거의 7년쯤 된 것 같은데……어떤가요? 당신이 보는 저는.”

“많이 성장하셨군요. 그 때의 말괄량이가 이렇게 멋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프로듀서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갓 대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의 그녀는, 지금의 이지적인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늘 찢어진 청바지에 커다란 셔츠를 걸치고 다니는, 요컨대 말괄량이였다.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그녀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훗, 고마워요. 그 점은 저도 노력을 많이 했답니다……아차, 이럴 때가 아니죠.”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오늘은 업무 파트너로 만났으니 다시 한번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레이첼 메리엇이라고 합니다. 레이첼이라고 불러줘요.”

“……신데렐라 걸즈의 총괄 프로듀서인 P입니다.”

“어머, ‘윌리 존슨’이 아니라?”

“신데렐라 걸즈의 총괄 프로듀서인 P입니다.”


재차 강조하듯 반복하는 프로듀서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첼은 또다시 작게 웃었다.


“후훗, 좋아요, 좋아. 그렇게 하죠. 그러면 그냥 P씨라고 부르면 되나요?”

“……부디.”

“바쁘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러니 곧바로 일 이야기를 시작하죠. 이렇게 잘 지내는 걸 알았으니, 추억팔이라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배려 감사합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레이첼은 프로듀서를 바라보며 두어 번의 헛기침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흠, 흠. 그래서, 저희 제안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세상은 ‘Give&Take’다. 내가 신인이었던 시절, 당신들에게 배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의 내용은 그 상궤를 크게 벗어나 있었어요.”


사장에게서 서류를 받은 그 날, 프로듀서는 몇 번이고 문서의 내용을 다시 살폈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뭔가 놓치고 지나간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딘가 숨겨진 수작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서류에 든 것은 그저 메리엇 스튜어트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들뿐, 그들이 원하는 조건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 한 가지, 프로듀서 본인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르쳐주시죠. 언제부터 메리엇 스튜어트가 자선사업을 시작했습니까?”


레이첼은 계약서의 내용을 ‘자선사업’이라는 말로 일축한 프로듀서의 말을 듣더니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훗, 자선사업이라……그래요.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습니다. 말씀대로 그 문서의 내용은 정말 터무니없는 내용들뿐이죠. 이 쪽은 이것저것 준비해 주는데, 그 쪽에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참,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질 나쁜 농담인가 싶었지요.”


프로듀서가 어깨를 으쓱하며 가벼운 어조로 대꾸하자 레이첼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궁금하시죠? 우리가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냈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간단해요. 이건 미끼거든요. 당신을 끌어내기 위한.”

“……저한테 뭘 원하시길래?”

“뭐, 대수로운 건 아니에요. 단순히 당신을 원하기 때문이죠.”


터무니없는 대답이었다. 프로듀서는 기가 차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은퇴하고 나서 우리가 얼마나 당신을 찾아 다녔는지 모릅니다. 메트로의 오너로써, 구단과 우리들의 명예를 드높여준 당신께 진 빚이 너무도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좀처럼 우리들에게 다가오지 않았죠.”
“아니, 나라는 사람이 뭐라고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다닙니까? 이젠 그라운드에 복귀도 못 하는 퇴물인데 이제 그만 놓아주시죠.”

“퇴물이라니, 자기비하도 정도껏 하셔야죠? 아직도 인기투표를 했다 하면 상위 3인에서 내려오질 않으시는 분이.”
“단순히 인기 때문에 그런 거라면 저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을텐데요?”
“네, 그러려면 그렇게도 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그 사람들은 ‘윌리 존슨’이 아닌걸요. 말씀 드렸죠? 당신이 필요하다고. 당신이 아니면 안 되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상상조차 못 한 러브콜이 날아왔기 때문일까, 말문이 막힌 듯 자신의 말을 듣고있는 프로듀서를 바라보던 레이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머, 말도 안 되는 소리라뇨, 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시네요. 뭐, 마음같아서는 저도 이만 놓아 드리고 싶었는데, 우리 가주님께서 그걸 허락하질 않으시더군요. 아니, 오히려 그 분께서 명령하셨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찾으라고.”

“가주요? 그게 누굽니까?”


프로듀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수 시절 나름대로 가깝게 지내기는 했지만, 가문으로써의 ‘메리엇’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단주였던 조 메리엇과 선수단과 접촉이 잦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얼굴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

하지만 레이첼은 담담한 태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떠올려 봐요. 당신이 만났던 우리들 가운데 가주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달리 있을까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프로듀서의 머릿속에는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적인 자리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늘 하얀 양복을 입고 다니는 노년의 신사. 메트로의 구단주이자 시티 필드의 주인인 ‘조 메리엇’이었다.


”그래요.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사람이 맞을 거에요.”

“’조’가 가주라는 말입니까?”

“그렇죠. 조지프 P. 메리엇. ‘메리엇 스튜어트’의 창시자이자 메리엇 가문의 현 가주이십니다. 제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분이시죠.”

“그렇군요. 그런데 그 분께서 어째서 저를 그렇게 찾으신답니까?”

“그야 그 분께서 후계자로 당신을 지목했기 때문이지요. 후대의 ‘메리엇’으로요.”

“하핫! 그렇군요. 그러면 저는 내일부터 그쪽으로 출근하면 됩니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말을 받아 넘기는 프로듀서와 달리, 그에게 말하는 레이첼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농담 아닌데요.”

“그러면 농담이 아닌 것까지 농담이겠죠.”

“아뇨, 그것도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말씀 드리는 거니까요. ‘조지프 P. 메리엇’의 대리인 신분으로 이 곳에 온 ‘레이첼 메리엇’으로써.”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럼, 그런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단순히 진지하게 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더러 믿으라는 말입니까?”

“물론이죠.”

“허.”


프로듀서는 기가 차다는 듯 시선을 잠시 옆으로 돌렸다.


“그쪽에는 인재가 없습니까? 후계자같이 중요한 걸 정하는데, 단순히 야구 좀 잘 한다는 이유로 하등 관계없는 저 같은 사람을 고른다고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십시오. 차라리 영화 스토리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프로듀서의 반론에도 레이첼은 말없이 미소를 띄운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언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었다.


“아뇨, 당신께선 저희들과 관계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을 선택한 이유도, 야구선수로써의 당신과는 털끝만큼도 관계가 없지요.”

“……뭐, 따지고보면 생판 남남은 아니긴 하네요.”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요.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레이첼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두어 번 심호흡을 한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미스터 존……아니, P씨. 만약 당신의 진짜 성이 ‘존슨’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겠나요?”

“……허어?”






“만약 당신의 진짜 성이 ‘존슨’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겠나요?”

“……허어?”


터무니없는 질문이었다.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질문에 나는 말투를 신경 쓴다는 것도 잊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랍니다. 당신의 성이 ‘존슨’이 아니라는 뜻이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야,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신의 왼팔을 가리켰다.


“당신께서 차고 계신 그 시계 말이에요.”

“……이거 말입니까?”

“네. 그 시계, 당신의 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물건이죠? 조지프 M. 존슨 씨.”

“……어떻게 그걸 알고 있습니까?”


내 대답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들었지요. 그 시계를 ‘만든 사람’에게서.”

“……그렇습니까.”


그 웃음은 마치 ‘내가 위에 서 있으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고 말하는 듯 했다. 빈정이 상한 나는 오른손으로 왼팔의 시계를 덮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이 시계가 어쨌다는 겁니까?”

“가주님. 그러니까 할아버님께서는 그 시계에 답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일견 건방져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내 태도를 보고서도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기는커녕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빌려도 될까요?”


나는 눈 앞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을, 입을,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그녀의 손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 하는 것은 아닌가. 뒤늦게 내 눈길을 눈치챈 그녀는 나를 향해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내보였다.


“괜찮아요. 부수거나 해코지를 가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당신께서 시계의 수리를 맡기셨던 그 공방에 대해서는 저희도 ‘아주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 혹여 문제가 생기더라도 금방 고칠 수 있어요.”

“……그렇군요.”


그렇군. 미행이 붙었던 건가.

돌이켜보면 나는 미국에 갔던 첫날부터 클럽하우스에 들렀다. 아무리 조의 부탁이었다곤 하지만 그건 ‘내가 여기 돌아왔다’는 것을 사방팔방 떠들고 다닌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시계방’이 아니라 ‘공방’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 노인이 보통 시계장이가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는 것일 터. 여기까지 알려졌다면 더 이상 뺄 여지가 없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왼팔의 시계를 풀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조심해서 다뤄주십시오. 소중한 물건이니까요.”

“물론이죠. 고마워요.”


작게 웃으며 시계를 받아 든 그녀는 시계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물건……보기보다 묵직하네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께 전해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계에는 한 가지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답니다.”

“……아버지에게서는 아니지만 들은 적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듣지 못했지만요.”

“네. 여기 리피터의 동작 버튼을 뽑아내면 시계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어 버리는 장치죠. 이걸 풀기 위해서는 뽑았던 버튼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거나, 아니면 완전히 같은 설계로 만들어진 형제 시계의 버튼을 써야 해요. 다른 나사나 핀으로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는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가 보는 앞에서 내 시계의 버튼을 뽑아냈다. 시계의 초침은 물론, 문자판 너머로 얼핏 비치는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던 톱니바퀴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자, 보세요. 완전히 멈췄죠?”

“……그렇군요.”

“말씀드렸다시피, 이 상태에서는 용두(주; 아날로그 시계에서 시간을 조절하는 장치)를 조작하더라도 절대로 시계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니, 용두 자체가 돌아가질 않아요. 한번 해 보세요.”

“……그렇군요.”


그녀에게서 시계를 받아 든 나는 용두를 손 끝으로 잡고 돌려 보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용두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시계를 내밀었다.


“자, 그럼 여기서 이걸 사용합니다.”


레이첼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가방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전체가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회중시계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덮개 부분에 메리엇 가문의 인장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그 시계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뭔지 알고 있다는 눈치로군요.”

“……어느 정도는요.”

”그래요. 이건 가주님, 할아버님의 시계랍니다. 이 타이밍에 이게 왜 나왔는지는 당신께서도 짐작하고 있으시겠죠.”


그녀는 회중시계의 용두 옆에 달린 버튼 하나를 뽑아내어 내 시계의 비어있는 구멍에 찔러 넣었다.


“……보세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죠?”


그녀의 말대로였다. 멈춰 있던 시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지는,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도시의 풍경이 마치 물결처럼 조금씩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흐릿해져가는 시야 너머로 시계를 수리하기 위해 찾았던, LA의 골목길에 위치한 공방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시계를 의뢰한 사람은 만의 하나 이 시계를 받은 아들이 자신을 찾아올 경우를 대비해 시계에 특별한 장치까지 넣어 두었네.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나와 그 남자만이 알고 있어. 내가 이 시계를 단번에 알아본 것도 그것 때문일세. 이 세상에서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건 젊은 시절의 나 말곤 없다는 걸 자신하고 있었거든.』


‘만약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


결론이 떠오르자 가슴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두 발에 힘을 주고,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눈 앞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이 정도면 이해가 가시나요?”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그 시계장이가 같은 시계를 하나 더 만들었다는 뜻인가요?”

“이상하네. 이 정도만 설명하면 충분히 알아들을 거라고 하셨는데…….”


멀쩡한 척, 태연한 척 하는 연기라면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연기가 먹혀 든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대에서 벗어난 대답이기 때문인지. 평정심 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아요. 그럼 직설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당신은 우리의, 메리엇 가문의 피가 흐르는 사람입니다. 즉, 우리들의 ‘가족’이라는 말이에요.”


‘가족’이라는 단어에 다시 한번, 두근, 하고 가슴이 크게 뛰었다.


“……고작 시계 가지고 이야기의 비약이 심하시군요. 농담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그렇죠? 믿기 힘들죠? 그러면 유전자 감식이라도 해 볼까요? ……막 이래.”


농담이라면서 작게 웃은 그녀는 다시 시계의 버튼을 원래대로 돌려 놓았다.


“믿든 안 믿든 자유이지만, 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랍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조금 전에 보셨던 일련의 행위에 담겨 있죠. 당신과 제가 같은 피가 흐르는 사이라는 것.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하기엔 저는 태어난 이래로 아버지와 어머니 말고 다른 친척들의 얼굴은 본 적도 없습니다만.”

“그야 그렇겠죠. 가주님……그러니까 할아버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존재를 다른 가족들에겐 비밀로 하셨으니까요.”

“어째서죠?”

“혼외자식이셨거든요. 사업차 방문하셨던 일본에서 태어난…….”

“혼외자식……이라고요.”


내가 지금 무엇을 들은 것인가, 일순간 머리가 생각을 정지했다.

가만히 서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첼은 조심스럽게 회중시계를 상자에 넣어 가방 속으로 되돌리고는 다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쉽게도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랍니다. 가주님께서는 대리인 자격으로 저를 보내시면서 여기까지만 가르쳐 주셨어요.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 분께 직접 여쭤보셔야 할 겁니다.”

“……물론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얘기겠지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와! 세계의 절반을 먹은 사람의 후계자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기쁨의 춤이라도 춰야 합니까?”


대답 대신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길어야 4, 5년 정도……일까요.”


식은땀이 흘렀다. 일단 부정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순간 마주친 그녀의 눈빛은 강한 확신의 빛을 품고 있었기에 순순히 단념했다.


“……그걸 어디서 알았습니까?”

“다 아는 방법이 있지요. 저희는 당신에 대해서는 당신 스스로의 생각보다 조금 더 잘 알고 있고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바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마지막 정도는 가족들의 품 속에서 보내는 것도 좋지 않나요? 저희는 언제라도 당신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종합하면 마치 ‘알아서 하라’는 협박처럼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찌릿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뒷통수 쪽에서 이마에 달린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통증과 함께, 마치 격렬한 롤러코스터라도 타고 나온 것처럼 눈앞이 샛노랗게 물들며 시야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위액을 토해낼 것만 같았지만, 그것을 이성으로 억누르며, 나는 눈 앞의 여자에게, 감히 가족을 자칭하는 가증스러운 사람에게 말했다.


“나 참, 농담도 적당히 하시죠.”

“……네?”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들이 그렇게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자라왔는지도 잘 알고 있을테죠.”

“……부정은 하지 않을게요.”

“그걸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이제 와서 내가 가족이라는 소릴 들으면 기뻐하면서 쌍수 들고 환영이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레이첼은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반 걸음 다가서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20년이 지났습니다. 가족의 온기를 잃어버린 지는 18년이 지났고, 홀로 이 세상에 내팽개쳐진 지는 15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요. 내 가슴에는 18년의 설움이 담겨 있고, 15년의 고독이 담겨 있으며, 20년의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

“내가 후견인도 없이 보호시설을 전전할 때, 옆 집에서 들려오는 가족들의 웃음소리에 눈물을 삼킬 때, 간호해 줄 사람도 없이 병에 걸려 혼자 끙끙거리며 괴로워할 때,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나에게 뭘 해 주었죠?”


이야기를 계속하면 할수록 가슴의 박동이 빨라졌다. 머리 한 가운데에서 시작된 찌릿거리는 느낌은 왼쪽 눈을 타고 내려왔다. 금방이라도 눈알이 뽑혀 나갈 것만 같은 통증에 왼쪽 눈에서는 금세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비오듯이 흘러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가슴을 채우는 열기는 점차 그 뜨거움을 더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증기 기관차의 보일러처럼, 가슴을 가득 채운 열기는 서서히 내 머리를 달구려고 하고 있었다. 평정심이라는 가면을 쓰는 것도 이제는 서서히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었다가는 금방이라도 위액을 토해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말해야만 한다. 말하지 않으면, 토해내지 않으면 이 가슴의 두근거림이 좀처럼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어요. 당신들은, 그런 내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필요하니까, 그제서야 나더러 가족이니까 당신들에게로 돌아오라고요? 세상에,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까? 당신들은 염치란 것도 없나요?”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본 것인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표정이 약간 바뀌었다.

조금만 더 버티자. 나는 서류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을 꽉,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내가 이야기를 계속 하려던 찰나, 그녀가 한 발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때의 일은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가항력이었어요. 당신이 우리들의 일원이라는 것을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그걸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어요. 당신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그걸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머리가 받아들이는 그 대답은 틀림없는 정론이었다. 하지만, 가슴이 받아들이는 그 대답은 정론을 방패로 내세운 변명처럼 느껴졌다. 평정심이 흔들린 그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시큼하고 뜨끈한 느낌이 느껴졌다. 나는 말을 멈추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읍……!”


가까스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덕분에 위액이 올라오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입을 단단히 막은 채, 소리 죽여 두어 번 헛구역질을 한 다음에야 나는 입에서 손을 떼고 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렸군요.”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눈 앞의 여성의 눈치를 살폈다. 내 추태에 웃을 만도 했지만, 뜻밖에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기와는 거리가 먼, 오히려 연민에 가까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내게 다가와 물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너무 흥분하신 것 같네요. 조금만 진정해주세요. 가뜩이나 없는 시간이 더 줄어들지도 모르잖아요?”

“……눈물나게 고마운 배려네요.”


잔에 담긴 물을 전부 마시고 나는 빈 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저희도 공짜로 당신을 원하는 건 아니에요. 저희도 염치가 있지, 그렇게 상처를 입혀 놓고도 또다시 폐를 끼칠 생각은 없거든요. 대신, 저희는 현 시점에서 당신께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해 드리려고 합니다.”

“……뭡니까, 그게?”

“제가 아까 ‘미끼’라고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그녀의 말에 나는 손에 들린 서류를 바라보았다.


“이거 말입니까?”

“네. 그건 당신을 이 곳으로 끌어내기 위한 미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희가 제시하는 ‘교섭’의 조건이기도 하답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여기에 온 건 이것 때문이었죠. 그래서, 그 보답이란 건 뭘 해주시려고 그러십니까?”

“별 건 아니에요. 그저 우리들이 가장 잘 하는 것을 해 드리는 것이죠.”

“구체적으로는……?”

”당신께서 당신의 두 발로 스스로 그 곳을 떠나실 때까지, 우리 메리엇 스튜어트는 가능한 모든 것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바, 꿈꾸는 바를 모두 이룰 때까지, 당신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원조해드리겠어요. 돈, 기회, 필요하다면 사람까지도요.”

“제가 원하는 게 어떤 것인 줄 알고요?”

“그건 서로가 ‘소통’하며 차근차근 알아가야겠죠.”

“그 쪽에서 내거는 조건은 당연히 제 자신이고요.”

“물론입니다. 당신께서 스스로 만족하셨다고 판단했을 때, 언제라도 저희에게 와 주시면 되는 거죠.”


어쩐지 신선한 느낌이었다. 자본주의의 최정점에 군림하는 천하의 메리엇 스튜어트에게서 ‘교섭’이라는 단어를 들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아까보다 내 분위기가 누그러진 것을 눈치챈 것일까, 그녀는 아까보다는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나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대답은 한 가지 뿐이었다.
아니, 이 거래같지도 않은 거래로 그 아이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애초에 고민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뭡니까?”

아뇨, 조금 신기해서요.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하시려나 싶었는데…….

기회라는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 왔는데, 챙기지 않는 쪽이 바보가 아닐까요.

“뭐어……그렇긴 하지만요.”
“그래서, 이제 저는 뭘 하면 됩니까?”

“그냥 평소처럼 지내시면 됩니다. 저희 쪽에서 먼저 연락이 갈 거에요.”

“그렇군요.”


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평정심을 되찾은 머리가 계속해서 이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경종을 울려댔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그저 직감이 그렇게 감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아, 서류는 다시 받아갈게요. 여기엔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니까요.”


내게서 봉투를 받아간 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함께 잘 해보죠. 파트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그나저나, 단순히 혈연이라는 것 만으로 후계자를 정하다니. 메리엇 가문도 꽤 물렁하군요.”

“네? 그게 무슨 소린가요?”


돌아갈 채비를 하던 프로듀서의 말에 레이첼은 되물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 눈에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라 있었다.


“……아닙니까?”

“물론 가주님께서 당신을 직접 지목하신 건 맞습니다만, 그 이유가 단순히 당신이 혈연이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고생에 대한 보상의 의미는 더더욱 아니고요.”

“네? 그럼 뭐가 또 있습니까?”


프로듀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주님께서는 순수하게 당신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저한테요? 뭐가 있길래……?”

“’경험’이 있지요. 우리들 가운데에선 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한, 모든 이들의 위에 서 있었던 경험이.”

“네?”

“할아버님께서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정점에 올라설 자격이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정점에 올라 본 적이 있는 사람뿐이다』라고. 아쉽게도 우리들은 그 자격을 갖지 못했지요. 단 한 사람, 당신을 빼고. 그래서 가주님께선 당신을 선택한 거랍니다.”

“……그렇군요. 그 선택에 대해 다른 분들의 반발은 없었습니까?”

“있을 리가 있나요? 다른 사람도 아닌 가주님의 선택인데요. 그렇지 않아도 ‘조건’을 만족하는 적임자가 없어 골머리를 썩이던 참이었답니다. ‘메리엇 스튜어트’라면 전문 경영인에게 넘기면 된다지만, 가문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돌아갈 채비를 마친 프로듀서는 현관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올 때와 달리 레이첼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현관문을 나서기 직전에, 프로듀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레이첼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 법무팀 건은 감사합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별 말씀을요. 당신이 어떤 분인데 고작 그런 일로 명성에 흠집이 가서는 곤란하겠죠. 저희로써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다시 한번 레이첼과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프로듀서는 현관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휴……잘 끝나서 다행이다. 큰일 나는 줄 알았네.”


프로듀서가 방을 나간 뒤,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로 돌아온 레이첼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휴대전화의 액정에는 통화 중을 나타내는 화면이 떠올라 있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괜찮다. 수고가 많았구나.』

“별 말씀을요. 당연히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는데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노인 남성의 목소리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기,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말해보거라.』

“오라버니께선 어째서 가족이 되는 걸 저렇게 싫어하는 거죠? 물질적인 무언가를 떠나서, 우리 가문의 일원이 된다고 하면 그 누구라도 좋아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보였던 프로듀서의 태도를 떠올렸다. 얼핏 보기에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언행에는 미처 가리지 못한 감정의 편린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분노’라는 감정의 편린이.


『십 수년이라는 세월이다. 쌓인 게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게야.』

“그런 걸까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래. 모르는 게 보통이지. 아마도 이 세상에서 저 아이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게다…쿨럭, 쿨럭!』


수화기 너머로 두어 번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어딘가 몸이라도 안 좋은 듯한 몹시 깊고 무거운 기침소리였다. 주위에 사람이 있던 것일까, 수화기 너머로 괜찮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괜찮다. 사레가 들린 것 뿐이야. 아무튼 말이다, 고독은 사람의 마음에 스며드는 맹독이란다. 마음에 병이 들었으니 그 곳을 자극받으면 날카롭게 반응하게 되는 게지.』

“그렇군요…….”

『……내가 저 아이에게 큰 잘못을 했구나. 정말 큰 잘못을……조금만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쿨럭, 쿨럭……! 아, 아니, 괜찮다. 괜찮다니까!』


레이첼은 무거운 기침소리가 연신 들려오는 휴대전화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 통증이 낯설게 다가오기에 날카롭게 대응하는 것뿐이다. 시간이 지나 조금씩 그 통증에 무감각해질 때쯤이면 그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돌아올 게야. 그렇게 살아 온 아이였고, 그렇게 살아 갈 아이니까. 명심하거라. 내가 그 아이를 어째서 산불에 비유했는지를.』

“네, 할아버님. 명심할게요.”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통화가 끝났다. 휴대전화를 가방 속으로 되돌린 레이첼은 창가에 설치된 1인용 소파에 털썩 몸을 던지며 목을 옥죄던 넥타이를 풀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 작은 방의 문을 열고 예의 금발의 남성이 슬그머니 모습을 나타냈다.


“이야기는 끝났나요?”

“응, 끝났어. 하겠다고 하시더라.”

“그렇겠죠. '메리엇'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나라도 쌍수 들고 환영하겠다. 그래서, 다음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너 같은 속물이랑은 받아들인 포인트가 다르긴 하다만, 뭐……일단은 탐색부터 해 봐야겠지.”


남자의 질문에 레이첼은 정장의 주머니 속에서 사진 하나를 꺼냈다. 공항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속에는 두 사람이 찍혀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사복 차림의 프로듀서와, 풍성한 올리브색 단발머리와 눈가의 눈물점이 인상적인, 호리호리한 체형의 한 여성이었다.


“대체 뭐가 좋아서 이런 곳에 처박혀 있는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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