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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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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09, 2018 03:14에 작성됨.

퍼스널리티P의 이전 이야기들.

1. 타카가키 카에데 <밤 바다의 이정표>

2.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3. P <인내의 삶> 

4. <신데렐라 걸스> 

5. 센카와 치히로 <함께 걷는 길> 

6.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7-1. <방랑자라고 다 길 잃은 것은 아니다> 

7-2. 호죠 카렌 <히로인과 소녀, 꿈의 무게> 

8. 네가 모르는 이야기, 너만이 아는 이야기

9.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10. 촛불과 별빛이 가장 밝게 빛날 때

11. 결말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 
12. 시마무라 우즈키 - Like a Fastball

 

<외전격 이야기들>

메모리얼 <사쿠마 마유의 회상>

사기사와 후미카<걷지 않은 길>

사기사와 후미카 <파트너>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프로듀서, 자기 자신한테 꽤 인색하지』

 




3월의 첫 번째 일요일, 도쿄 도내에 위치한 대형 체육관에서는 히나마츠리를 기념하는 드림 라이브 페스티벌이 한창 개최되고 있었다. 이번에 개최되는 드림 라이브 페스티벌은 도쿄 소재의 10여개 안팎의 프로덕션이 참가하는 대형 합동 공연으로, 이 공연의 세트리스트에는 신데렐라 걸즈 역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화려한 조명이 번쩍이고 요란한 음악소리가 흘러 나오는 무대의 뒤편에서는 스탭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스탭들 가운데 한 사람, 손에 세트리스트를 든 사람이 프로듀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신데렐라 걸즈, 3분 뒤에 나갑니다. 준비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다른 아이돌의 무대가 한창 펼쳐지고 있는 스테이지를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스탭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몸을 돌려 자신의 등 뒤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긴장되지?”

“да…….”

“시, 심신을 구속하는 심상의 사슬이……(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요……).”

“뭐, 무리는 아니지. 첫 무대가 이런 무대니까.”


수용규모만 5만명이 넘어가는 대형 돔에, 티켓 회수율은 95%를 넘겼다. 합동 페스티벌이라는 전제를 제외한다면, 이런 규모의 무대는 선배들 가운데에서도 카에데 정도만이 경험이 있을 정도였다.

프로듀서는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대답하는 아냐와 란코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힘 빼고 마음 편하게 가져. 지금 너희들은 잃을 게 하나도 없는 입장이니까, 뭘 하든 플러스만 남게 될 거야.”

“그치만……기왕 하는 거, 잘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하는데.”

“동감이야. 신인이라도 자존심은 있으니까.”

“마음가짐은 기특하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옆에 서 있던 슈코와 카나데의 말에 그는 작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렇게 떨고 있으면서 어떻게?”

“…….”

“할 말이 없다…….”

“욕심 부리지 마. 그래서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턱을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돌아보던 프로듀서는 손을 들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프로듀서를 향했다.


“얘들아,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해 줄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마주보았다.


“다들 떨릴 거다. 불안하고, 또 긴장도 될 거야. 처음 겪어보는 일이고 처음 맞이하는 환경이니까. 그렇지만 무리해서 잘 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지 마. 오늘 이 자리에서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실수하지 않는 거니까. 그런데 그게 마음 먹은 것처럼 쉽지는 않을 거야. 무대에 올라서면 눈 앞이 캄캄해질 테니까.”


프로듀서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떨려서 눈앞이 캄캄해질 때는, 억지로 방법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내려놔. 자신을 믿고.”

“자신을 믿고……?”

”그래. 너희는 지금까지 많은 노력을 했다. 스스로는 잘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쌓아 온 노력과 시간은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너희들에게 남아 있을 거다. 그러니 모두 내려놓고, 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너희들이 지금껏 쌓아 올린 것들이 너희를 알아서 이끌어 줄 거야. 알겠지?”

“”네!!””

“그래, 좋아. 이제야 표정이 좀 좋아졌구나.”


힘차게 대답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던 프로듀서는 아이들 가운데 세 사람을 따로 불러냈다.


“시마무라, 죠가사키, 마에카와.”


세 사람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그는 세 사람을 향해 자세를 낮추며 작게 속삭였다.


”다들 열심히 준비했으니 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만……만약의 사태에는 잘 부탁한다.”

“네! 열심히 할게요!”

“맡겨만 달라구★”

“걱정 마라냥!”


세 사람의 대답을 들은 프로듀서는 만족한 듯 웃으며 그녀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서 야광밴드를 팔에 두른 스태프가 팔을 흔들며 그들을 불렀다.


“신데렐라 걸즈, 준비해주세요!”


스탭을 향해 알겠다는 신호를 보낸 프로듀서는 다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아까 전보다는 훨씬 밝아져 있었다.


“자, 가자! 지난 반년간 너희들이 해 온 것들을 보여줄 시간이다! 회장의 사람들에게, 너희가 어떤 사람들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도록 해!”

““네! 다녀오겠습니다!””


프로듀서는 스테이지와 연결된 계단 옆에 서서 스테이지로 올라가는 아이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내가 하는 거, 잘 보고 있어야 돼? 알겠지★”

“오냐, 알았다.”


대열의 가장 뒤에 서 있던 미카가 자신을 돌아보며 찡긋, 윙크를 보내 왔다. 그녀의 윙크를 쓴웃음으로 받아 넘기며, 그는 다시 계단에서 물러나 음향장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한편 그 시각, 태평양의 구름 위를 비행기 한 대가 지나고 있었다.

비행기의 기수가 향하는 방향으로는 오늘의 역할을 마친 해가 불타오르는 석양을 남겨둔 채 서서히 수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동체의 옆면에 고풍스러운 필체로 이니셜 M과 S가 새겨진 커다란 여객기는 석양빛을 받아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는 커다란 방이 있었다. 방의 한 켠에는 사무를 처리할 수 있는 근사한 책상과 책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책상을 마주 보는 벽면에는 커다란 액정TV가, 그리고 방 중앙에는 마치 응접실처럼 소파와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구성을 보건대, ‘객실’이라기보다는 확실히 ‘방’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방의 가운데 설치되어 있는 소파에는 한 명의 여성이 모로 누워 있었다. 검은 바탕에 흰색 줄무늬가 들어간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그녀는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적당히 하나로 묶어 오른쪽 어깨 앞으로 늘어뜨리고, 그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똑똑 하는 작은 노크소리와 함께 나무로 만들어진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아가씨, 이제 곧 도착합……어라, 일어나 계셨네요.”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얀 드레스셔츠 위로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마치 운동 선수처럼 머리카락을 짧게 정리한 금발의 남성이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려던 그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소파에 누워 있던 여성은 몸을 일으켜 문가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 잘 왔다. 온 김에 물 한 잔만 가져다 줄래? 여기 있던 거 다 마셨거든.”

“네, 잠시만요.”


방을 나가고 잠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남자의 손에는 500ml짜리 생수병이 들려 있었다.


“자, 여기요.”

“고마워.”

“그런데 웬일로 일어나 계십니까? 뭐만 탔다 하면 귀신같이 곯아떨어지시던 분이.”


목이 말랐던 것일까, 꼴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척 맛있게 물을 마시던 그녀는 절반쯤 비운 물병을 다시 남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좀처럼 잠이 안 오더라. 생각이 많아져서.”

“생각할 거요?”

“있지, 혼자만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지금도 혼자 살고 계시잖아요?”

“아니, 독신 말고,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 살아 있으면 말이야. 가족들은 아무도 없고.”


여자의 질문에 팔짱을 끼고 골똘히 생각하던 남자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팔짱을 풀었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래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나도 사실은 그래.”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십니까?”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우리야 뭐 뿔뿔이 흩어져 있더라도 보려면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지만, 그게 안 되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싶더라고.”

“별일이네요, 만사태평이 좌우명인 아가씨께서 그런 생각도 하……?”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하던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가 눈썹을 움찔하더니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묵직한 크리스탈 재떨이를 집어 들었기 때문이다.


”농담! 농담입니다! 그 재떨이 내려놓으세요!”
“요즘 좀 안 맞았다. 그치?”
아니 무슨 농담 한 번 했다고 사람 뚝배기를 깨려 듭니까…….


손에 든 재떨이를 던지는 시늉을 하던 그녀는 에휴,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제서야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쪽에서 순순히 오겠다고 할까요?”

“올 거야. 그러라고 아주 좋은 미끼를 던져 뒀으니까.”


남자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한 그녀는 소파로 다시 몸을 뉘었다.


“……사람 일이 참 모를 일이네. 지금까지는 맨날 선수랑 오너로써 만났는데 말이야.”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1)】





“어이, 거기 조금만 더 들어 봐!”

“이봐! 크레인 들어가야 되니까 조금 비켜!”

“배선 지나갑니다~잠시만요~!”


축제가 끝나고, 관객들이 모두 돌아간 이후에도 회장은 여전히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다.

아이돌들을 각자 기숙사와 집으로 바래다준 프로듀서는 다시 공연이 열렸던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주최 측도 아니었기에 정리 작업의 마지막을 지켜봐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커다란 행사가 끝난 다음에는 그 열기와 공허한 한기가 공존하는 이 순간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무대였네.”


난간에 기대어 선 채 해체작업이 한창이던 무대를 바라보던 그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옆을 바라보았다. 언제 온 것인가, 그의 옆에는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서 있는 남자의 눌러 쓴 베이지색 빵모자 아래로 희끗희끗한 머리가 눈에 띄었다. 네모난 무테 안경 아래에서 조용하게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 있는 그 남자는 프로듀서 역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지난번 765프로덕션과의 프로덕션 매치 페스티벌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던 프리랜서 기자인 요시자와였다.

자신을 돌아보는 프로듀서에게 그는 빙그레 웃으며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가볍게 들었다 놓았다.


“오랜만이군, 젊은이.”

“요시자와 씨! 오랜만입니다!”


서로 가볍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다시 난간에 기대어 서서 스테이지를 내려다보았다. 해체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달한 것인지, 이제는 스테이지를 제외한 나머지 기재들이 지게차에 들려 나가고 있었다. 가만히 스테이지를 내려다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요시자와였다.


”무대는 잘 봤네. 아이들한테 무척 공을 들였더군.”

“그렇습니까……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무얼 감사까지야. 이렇게 훌륭한 소재가 들어왔는데 가만 있을 여유가 어디 있겠나.”

“훌륭한 소재라니,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벌써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 그게 말이지……”


난처한 듯 뺨을 긁적이던 요시자와는 입맛을 한번 다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를 소개시켜 달라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

“저를요?”

“그래. 자네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그는 몸을 돌려 활짝 열려 있는 객석의 입구를 돌아보았다.


“이봐! 언제까지 숨어 있을 작정이야? 이제 슬슬 나와!”

“네, 네!”


요시자와의 호령에 입구 뒤편의 그늘진 곳에서 한 사람이 튀어 나왔다. 얼핏 보기에 카에데보다 약간 작은, 미즈키와 비슷한 체구의 그녀는 검은색 여성용 정장을 입은 여성이었다. 가벼운 밑화장이 되어 있는 얼굴에는 장신구라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짧게 정리한 쇼트컷 헤어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하다는 인상마저 느껴질 정도로 빈틈없이 갖춰 입은 정장은 그녀의 성격이 몹시 꼼꼼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인사하게. 내 후배인 요시나가라고 하네. 요시나가, 이쪽은 신데렐라 걸즈의 P 프로듀서다.”


‘호오, 이것 봐라?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오네.’


요시자와에게서 그녀의 이름을 들은 프로듀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능의 요시나가’라고 하면 요즘 예능 쪽에서는 가장 주목받는 기자 가운데 하나로 프로듀서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만면에 띄운 미소 아래에 그것을 꽁꽁 숨겨두고, 프로듀서는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소개받은 P입니다.”

“안녕하세요, 요시나가입니다. 선배님과 마찬가지로 연예계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적(籍)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요.”

“아, 성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기사도 자주 읽었어요. 특히 이전에 영화 ‘폭풍의 언덕’ 리뷰는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네? 정말로요?!”


프로듀서의 대답이 의외였던 것인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요. 워더링 하이츠,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이거든요.”

”감사합니다. 어쩐지, 취재하러 온 주제에 취재대상한테 그런 얘길 들으니까 좀 쑥쓰럽네요.”

“하하, 그런가요. 그런데 갑자기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아! 그게, 오늘 무대 관련해서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요. 인터뷰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믈론이죠.”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금방 준비할게요…….”


품 속에서 자그마한 수첩과 녹음기를 꺼낸 그녀는 곧바로 프로듀서에게 수첩에 적힌 내용들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요시자와는 두어 걸음 떨어진 난간에 서서 질답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신데렐라 걸즈……라고. 타카기, 이번에는 쿠로이보다 더 독한 녀석을 상대하게 됐군.”


그의 입에는 아직은 불을 붙이지 않은 하얀 담배 하나가 물려 있었다. 담배의 필터를 질겅질겅 씹으며 그는 다시 스테이지를 내려다보았다. 마무리 작업도 슬슬 끝나 가는 것인지, 스테이지가 있던 자리에는 무언가 커다란 것이 있었다는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밤 늦은 시각.


고요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던 CG프로덕션 별관의 신데렐라 걸즈의 사무실에는 때 아닌 덜컥거리며 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보안이 풀렸음을 알리는 기계음과 함께 사무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너머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커다란 상자를 든 프로듀서였다.


“휴…….”


들고 있던 커다란 상자를 자기 자리 옆에 내려놓고 자신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와이셔츠의 소맷자락으로 닦아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와, 무슨 기자가 말이 그렇게 많냐…….”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입가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신에게 인터뷰를 걸어 온 기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기가 조금 가라앉자,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가지고 온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의 내용물은 팬클럽이나 개인 팬들에게서 도착한 팬레터와 선물이었다. 아직까지는 아이돌 부서 시절부터 있었던 선배들의 것 밖에 없지만, 이제는 새로 들어온 신데렐라들의 것들도 조금씩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일부러 드림 라이브 페스티벌이라는 큰 무대를 데뷔 무대로 삼았으니까.


“그건 그렇고, 이거 다 정리하려면 오늘 날밤 까겠군.”


또 다시 한숨을 내쉰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이 하얗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그는 몇 시간 전, 스테이지의 광경을 떠올렸다. 의상을 갖춰 입고 스테이지에 서서 지금까지 수십 수백 번을 연습해 온 것을 선보이는 아이들의 모습과, 처음 보는 아이들의 모습에 낯설어하면서도 그들에게 응원을 해 주는 관객들의 모습.

우렁찬 콜도 없고, 야광봉을 흔드는 것도 박자가 맞지 않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빛의 파도는 분명히 그 아이들에게 인상적인 추억을 남겼을 것이다.


“……다들 굉장히 안정적이었지. 조금 빡빡하게 굴리기는 했지만, 그렇게 한 보람이 있었어.”


이제껏 몇 번이나 해 온 일이었지만, 스테이지를 내려오던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가슴이 뛰었다.


“나 참……내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닌데.”


물끄러미 형광등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의 가방 속에서 비닐봉투를 꺼냈다. 대형 문구점의 로고가 그려진 비닐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알록달록한 편지봉투와 편지지였다.프로듀서가 구태여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이유는 비단 상자의 내용물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게 기지개를 펴는 그의 말에 회답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왼팔에 차고 있는 시계가 짤깍, 하는 소리를 냈다. 곧이어 들려온 아홉 번의 종소리는 지금이 밤 9시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 날, 3월의 두 번째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 밝았다.
3월도 이제 둘째 주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예년보다 약간 빨리 찾아온 꽃샘추위는 사람들의 옷 두께를 사정없이 두껍게 하고 있었다. CG프로덕션, 신데렐라 걸즈의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센카와 치히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으으, 추워~!”


마치 시간을 지난 겨울로 되돌린 듯, 두툼한 코트를 입고 그 위에 목도리까지 두른 그녀는 잰걸음으로 정문의 회전식 자동문을 지나쳤다. 실내에 들어서자 따스함을 넘어 포근함마저 느껴지는 히터의 온기를 품은 공기가 그녀를 반겼다. 입구 뒤에 서 있는 감색 제복을 입은 보안팀 사람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그녀는 잰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러 별관으로 향하는 구름다리로 향했다.


“어머?”


사무실에 도착한 치히로는 뜻밖의 광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풀려 있을 것이라 생각한 사무실의 보안장치가 잠금 상태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듀서 씨, 아직 출근 안 하셨나……?”


그녀가 아이돌 부서의 어시스턴트가 된 이후로. 아니, P라는 남자를 만난 지 어언 3년째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거듭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는 보안을 해제하고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중앙난방의 통제권 밖에 있는 사무실에서는 서늘한 공기가 훅 새어나왔다. 전등과 함께 히터를 켜고, 문 옆에 서 있는 옷걸이에 코트와 목도리를 걸어놓고,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은 그녀는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곧바로 준비실로 향했다.

준비실로 향하던 치히로는 문득 사무실의 벽에 걸린 스케줄 보드의 아랫부분에 눈길이 갔다. 정확하게는, 스케줄 보드의 여백 부분에 적힌 메시지가 보였던 것이다.


-사후강평 갑니다. 아이들 오면 곧바로 휴게실로 보낼 것. P.


“……그럼 그렇지, 그 사람이 나보다 늦을 리가……차나 끓여놓자.”


치히로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준비실로 걸음을 옮겼다.


“응? 이건……?”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과 함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치히로는 테이블 위에 반으로 접힌 채 놓여 있는 신문을 뒤늦게 발견했다. 


『신데렐라 걸즈, 화려하게 돌아오다.』

『다시 빛나기 시작하는 신성(新星). 4개월 사이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오늘 날짜로 나온 일간지로, 연예계 소식 면에는 대문짝만한 크기로 저번 주말에 있었던 드림 라이브 페스티벌에 대한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신문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치히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의 기사 본문으로 향했다. 글머리에서는 드림 라이브 페스티벌에 대해서 운을 떼고 있었지만, 조금만 내려가면 온통 신데렐라 걸즈에 대한 이야기들뿐이었다.


『……지난 11월의 프로덕션 매치 페스티벌을 마지막으로 CG프로덕션은 일시적인 휴식기에 들어갔다. 무엇을 위한 휴식이었는지는 아무도 아는 바가 없었지만, 그 뒤로 그들이 다시 무대에 서는 일은 없었다. 그런 그들이 4개월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데렐라 걸즈’라는 새로운 이름과, 더 화려하고 거대해진 모습으로.』


“와……진짜 우리 얘기밖에 안 하네…….”


그녀는 감탄사를 흘리며 기사를 좀 더 자세히 읽어나갔다.

작년 11월의 프로덕션 매치 페스티벌에서, 신데렐라 걸즈의 전신이었던 아이돌 부서는 아이돌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는 견줄 자가 없다는 천하의 765프로덕션을 상대로 총력전을 펼쳤다. 비록 마지막 개인 무대에서 승부가 갈려 석패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는 기대한 것 이상의 형태로 나타났다. 내부적으로는 타 부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평가를 받던 아이돌 부서의 평가를 한 번에 뒤엎어버렸고, 외부적으로는 더 이상 CG프로덕션이 아이돌 업계를 좌시하지 않고 당당히 뛰어들겠다는 출사표를 보인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려 놓은 그들이었기에, 이번 드림 라이브 페스티벌에서는 단순히 첫 선을 보인 것 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


『……기존의 CG프로덕션은 개개인의 역량이 강한 대신, 단체곡의 색깔이 빈약하다는 평가를 주로 받아 왔다. 유닛이라고 해 봐야 시부야 린, 호죠 카렌, 카미야 나오의 트라이어드 프리무스 뿐. 타카가키 카에데, 카와시마 미즈키, 사쿠마 마유, 사기사와 후미카라는, 개개인의 빼어난 개성을 자랑하는 인원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득이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데렐라 걸즈’는 그러한 평가를 스스로 뒤엎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단 세 곡의 단체곡으로 그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을 담당하는 총괄 프로듀서인 P는 ‘신데렐라 걸즈는 이제 출발하는 입장’이라며, ‘앞으로 계속해서 발전하고 달라질 자신들의 모습을 기대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호적수 없이 승승장구하던 765프로덕션의 밀리언 올스타즈에게 있어 새로운 적수가 나타났다.

─요시나가 기자.』


“와…….”


신문을 내려놓으며 치히로는 며칠 전, 그녀가 함께 참여했던 프로젝트의 첫 번째 제작 회의를 떠올렸다. 각 부서의 팀장급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서, 프로듀서는 이런 전략의 성공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주목이요? 뭐, 받으면 좋지요. 그런데 이건 우리 혼자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번 행사는 어디까지나 쇼케이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드림 라이브 페스티벌은……저는 시식코너라고 생각합니다. 딱 한입씩 맛만 보는 거요. 주위를 둘러보면 맛있는 게 지천에 깔렸어요. 그런 환경에서 첫 술에 배가 부른 걸 기대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첫 술에 그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프로듀서의 의도는 세간의 이목을 끄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보여주는 데만 집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그녀의 앞에 놓인 신문이었으니, 적어도 이토록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것을 보면 결과적으로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진짜 결과는 후배 아이돌들의 본격적인 ‘일’이 시작된 다음에야 알 수 있겠지만.


“정말, 매번 한 걸음 앞을 내다 보시는구나……쉬지도 않고.”


벽에 걸린 일정표를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리던 치히로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자신의 얼굴을 양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그래! 그러면 나도 전력을 다해서 서포트해야지! 일하자, 일!”



*****



“저 왔습니다.”


프로듀서가 사무실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 정도가 지난 오전 열한 시였다.


“회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은 다 왔나요?”

“네, 연습생들이랑 카에데 씨, 미즈키 씨를 빼고는 다 왔어요. 지시하신 대로 휴게실에 보내 뒀고요.”

“그렇군요.”


두 사람은 오후에 따로 인터뷰가 잡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오후부터 출근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프로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치히로는 재빨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프로듀서 씨, 혹시 차…….”

“그럼 저는 잠시 아이들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전화 부탁드릴게요.”

“……네! 맡겨만 주세요!”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라고 말하려던 그녀는 나머지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자료를 자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대신 서류가방을 챙긴 프로듀서가 사무실을 나간 뒤, 조용하게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참, 이제는 조금 쉬었다 가셔도 될 텐데…….”



******



사무실을 나선 그는 곧바로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 가까워질수록 두런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정확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휴게실의 문 앞에 도착한 그는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한 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휴게실에는 신데렐라 걸즈의 선배들 다섯 명 이외에도 이제 막 데뷔 무대를 마친 14명의 후배들도 함께 모여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컸던 것일까, 휴게실의 아이들은 이야기를 멈추고 일제히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자신을 향해 무수하게 날아오는 시선을 느끼며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미안하다. 오래 기다렸지?”

“아뇨, 저희도 조금 전에 왔는걸요.”


프로듀서의 말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미나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에 다시 한번 빙그레 웃은 프로듀서는 손을 뒤로 뻗어 휴게실의 문을 닫은 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너희들을 지금 이 곳으로 모이라고 한 건, 특별히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다.”

“보여주고 싶은 거……요?”

“그래. 아마 너희들에게도 큰 자극이 될 거야.”

이번에는 미나미의 뒤에 서 있던 아이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녀에게 대답하며, 프로듀서는 휴게실의 문을 활짝 열고는 아이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자, 따라와.”


프로듀서가 아이들을 이끌고 향한 곳은 휴게실의 옆에 위치한 신데렐라 걸즈의 회의실이었다. 두툼한 방음문을 열고 들어간 회의실 안에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무언가가 들어 있는 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우와, 이게 다 뭐야?”

“너희들 컴백했다는 소리 듣고 팬클럽에서 보낸 거다. 대충 검수는 끝났으니까 나중에 레슨 끝나면 올라와서 읽어보도록.”


7명의 선배 아이돌들은 아이돌 부서 시절부터 이미 기존의 팬층이 적당히 확립되어 있었기에 그들의 이름이 적힌 상자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회의실에 놓여 있는 상자의 갯수는 두 개가 더 많은 9개였다. 나머지 두 개의 상자에 적힌 이름은 ‘죠가사키 미카’와 ‘시마무라 우즈키’였다.


“우와, 우즈키는 그렇다고 쳐도, 내 것도 있네★”

“죠가사키,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는 뜻이지.”

“헤에, 그렇구나. 고마운걸★ 나중에 답장 보내도 돼?”

“뭐, 보내는 건 자유이긴 한데, 그럴 시간이 있을까?”


저마다 자신의 상자에 들어 있는 것들을 확인하는 가운데, 한 사람, 우즈키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적힌 상자에는 한 눈에 보더라도 다른 아이들보다 많은 팬레터가 금방이라도 상자 밖으로 넘쳐 흐를 듯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어?”

“프로듀서 씨…….”


턱, 하고 자신의 어깨를 덮는 커다란 손의 감촉에 우즈키는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프로듀서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다들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렇네요……정말로, 저를 기다려주고 있었어요……저를 기억해주고 있었어요…….”


우즈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준 프로듀서는 회의실 한 켠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제 막 데뷔무대를 마친 후배들을 한 번 돌아본 뒤, 자신의 상자를 확인하고 있는 선배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자, 자기 것들 대강 확인했으면 선배님들은 다시 휴게실에 가 있으세요. 시마무라랑 죠가사키도 같이 가 있고.”


미카와 우즈키를 포함한 일곱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던 프로듀서는 다시 몸을 돌려 남아 있는 아이들을 한 사람씩 돌아보았다.


“어때, 부럽지?”

“…….”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얼굴을 살펴보는 것 만으로도 프로듀서는 충분히 그녀들의 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분하다는 표정을, 혹은 부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러울 거다. 질투도 날 거고. 왜 나한테는 저런 게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겠지. 물론 내가 계속 강조를 했으니 머리로는 이해를 할 거야. 하지만 가슴이 납득하기는 힘들 거야.”


그의 말에 아이들은 일제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뷔 무대가 가까워질수록 프로듀서는 그녀들이 들뜨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들의 현실을 일깨워주곤 했다.


『솔직하게 말해 주마. 지금 너희들은 어떤 무대에 올라가더라도 너희가 기대하는 호응을 받을 수 없을 거야. 그 무대에서 아무리 멋진 데뷔 무대를 갖더라도 팬레터 하나 받는 것도 힘들 거다. 그 사람들에게 너희는 그냥 처음 보는 이방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다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다. 이번 무대에서 너희들의 목적은, 그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누구인지를 똑똑히 새겨주는 거야. 그러니, 뒤를 돌아보지 마라. 앞만 보고 뛰어가.』


그렇게 몇 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기에 그녀들은 지금의 결과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가슴은 그렇지 않았다. 같은 무대에서 함께 뛰었건만, 어째서 이렇게 결과가 다른 것인지, 그들의 가슴은 도저히 납득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말을 멈추고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던 프로듀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너희들을 남긴 건, 이렇게 시시콜콜한 설교를 늘어놓자고 남긴 게 아냐.”


그렇게 말하며 프로듀서는 들고 온 서류가방에서 편지봉투 여러 장을 꺼냈다. 알록달록,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각양각색의 편지봉투에는 제각각 이번에 데뷔 무대를 가졌던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주고 난 뒤, 프로듀서는 다시 처음에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너희들에게 나누어 준 건, 엊그제 너희들의 무대를 처음으로 보고 감명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편지다. 지금은 그것 밖에 없다고 실망하지 마.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 쟤들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하면 되니까. 알겠지?”

“흥, 누가 그렇게 놔둘 줄 알고?”


그 때, 프로듀서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살짝 열린 회의실의 문틈 사이로 카렌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디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지. 절대로 안 따라잡힐테니까!”

“호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

“메롱~!”


프로듀서를 향해 혓바닥을 날름 내민 뒤, 카렌은 잽싸게 문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탓, 탓, 탓, 하는 가벼운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못 말리겠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쉰 프로듀서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아무튼, 비록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희가 무대에 섰을 때에는 너희를 지켜보는 사람이 언제나 한 사람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 알겠지?”

“”네!””


힘차게 대답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프로듀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아, 프로듀서 씨!”


돌아오는 길에 겸사겸사 휴게실에 모여 있던 선배들에게 오늘의 일정을 브리핑하고 아이들을 연습실로 내려보낸 뒤, 사무실로 돌아온 프로듀서는 자신을 부르는 치히로의 목소리에 자리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되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조금 전에 상무님께서 연락하셨는데, 돌아오는 즉시 바로 사장실로 올라오라고 하셨어요.”

“사장실에서요? 사장님입니까?”

“글쎄요, 저도 그것까지는……그냥 가능한 빨리 오라고만 하셨거든요.”

“음……딱히 짚이는 건 없는데……알겠습니다.


미간을 좁히며 턱을 긁적이던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가 보면 알겠죠. 그럼……”

“아, 프로듀서 씨!”


자신을 부르는 말에 그는 문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치히로를 돌아보았다.


“후배 애들한테 준 팬레터, 이번에도 프로듀서 씨가 직접 쓰신 거죠?”


‘팬레터’라는 단어에서 프로듀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좀 전에 레슨하러 가면서 아냐랑 란코가 보여줬어요. 자기한테도 팬레터가 왔다면서. 봉투에 적힌 글씨체 보니까 한번에 알겠던데요?”

“아이고…….”


히죽거리는 치히로의 앞에서 그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이들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다들 모르는 눈치니까요.”

“당연히 그래야죠. 그나저나, 그런 거 하실 거면 저한테도 말씀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이미 들켜버렸으니 다음부터는 신세 좀 져야겠네요. 아무튼,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네! 전화는 맡겨만 주세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프로듀서는 치히로의 배웅을 받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자신의 자리에 다시 앉으며 조용히 닫히는 사무실의 문을 바라보던 치히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매번 혼자서 다 짊어지려 하신다니까.”




*****




“신데렐라 걸즈의 프로듀서입니다.”


건물 중앙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에 도착한 프로듀서는 사장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커다란 문 대신, 그 옆에 위치한 부속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정장 차림의 한 여성이 모습을 나타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장님께서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미 들은 것이 있었던 것인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반 걸음 정도 물러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약간 급해 보이는 구두소리와 함께 그녀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프로듀서는 다시 옆에 있는 커다란 문으로 향했다. 방음 처리가 되어 있어 묵직한 질감이 느껴지는 문을 두어 번 두드린 뒤, 그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찾으셨습니까?”

“아, 이제야 왔군. 어서 와라.”

“실례하겠습니다.”


사장실로 들어서려던 그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사장실 중앙에 설치된 접대용 소파에는 사장을 제외하고도 또 한 사람, 미시로 상무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신경 쓰지 마라. 이제 막 볼일이 끝난 참이니까.”


사장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상무는 자신을 바라보는 프로듀서에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사장님,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프로듀서는 살짝 옆으로 물러서서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상무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녀가 사장실을 나가자, 사장은 멀뚱히 서 있는 프로듀서에게 손짓을 했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아. 서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프로듀서가 상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부속실에서 비서가 나와 그에게 찻잔을 건네었다. 딱 마시기 좋을 정도로 적당히 식은 홍차였다.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사장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드림 페스티벌 건은 수고 많았다. 반응이 아주 좋더군.”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요시나가는 또 어떻게 끌어들인거냐? 그 여자 신출귀몰하기가 아주 귀신 같은 양반인데.”

”예전 프로덕션 매치 페스티벌 때 요시자와 씨와 연락을 닿았던 게 유효했습니다. 요시자와 씨를 통해서 그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하더군요.”

“그 괴짜가 먼저 연락을 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하려는 건가?”

“하하, 그렇지 않아도 요시자와 씨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살다살다 이런 건 처음 본다면서.”

”그렇지. 뭐,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던 사장은 프로듀서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 저번에 K프로덕션 일 기억하냐?”

“네, 기억하고 말고요.”


사장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2주쯤 전, 시마무라 우즈키의 전 소속사였던 K프로덕션의 프로듀서와 있었던 약간의 ‘마찰’을 말하는 것일 터. 약간의 마찰이라지만 ‘육체적인 대화’역시 조금은 오고 갔기에, 최악의 경우에는 형사고발까지 당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조용해서 좀 불안하던 참이었습니다만.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끝났다. 아무 얘기도 안 나오고.”

“네?”


프로듀서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양반이 가만히 넘어갔다고요? 지가 먼저 쓸데없는 짓 해놓고도 되려 길길이 날뛰던 양반인데요?”

“그러게 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꽤 골치가 아파질 거라고 생각하고 충분히 준비를 했다만…….”


사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메리엇 스튜어트의 법무팀이 불쑥 나타나서 자기네들이 담당한답시고 가져가더군. 그 뒤로 일사천리로 끝났어.”

“......그것 참 고마운 일이군요. 짐을 덜었네요.”

“글쎄다. 짐을 덜었다고 해야 하나, 졌다고 해야 하나…….”


턱을 쓰다듬던 사장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의 옆자리에 놓여 있던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말로 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낫겠지. 자, 봐라.”


프로듀서는 사장이 내민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스테이플러로 정리된 서류였다. 발신인이 ‘메리엇 스튜어트’로 되어 있는 그 문서는 신데렐라 걸즈와 메리엇 스튜어트간의 파트너쉽 계약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괜찮네요. 이쪽이 손해 볼 건 하나도 없잖아요?”

“그렇지. 거기서 내건 조건만 빼면.”

“조건이요?”

“그래. 그 뒷면 읽어봐라.”

“어디……『반드시 신데렐라 걸즈의 프로듀서인 P가 직접 내방할 것』? 뭡니까, 이건?”

“뭐긴 뭐야 대놓고 너보고 찾아오라는 거지.”

“으음…….”


사장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서류를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 테냐?”

“어쩌긴요, 한다고 해야죠. 이게 어떤 기회인데요.”


사장의 물음에 생각할 것도 없다는 것처럼 즉답을 내놓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못박혀 있었다.


『반드시 신데렐라 걸즈의 프로듀서인 P가 내방할 것. 수요일 오후 2시에 R호텔 최상층에서.』


“……그 쪽에서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이들(1)】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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