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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11, 2018 03:23에 작성됨.

『기억을 걷는 시간』 - 2017/12/30

『그녀가 없는 거리』 - 2017/01/26
『빗속의 거리』 - 2017/03/11

『고요의 정원』 - 2018/01/02


내일이 밝긴 하려나. 문득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다. 시간은 새벽 두 시. 완전히 어두껌껌한 방과, 그 방을 닮아 어두운 새벽의 밤거리는 왠지 모를 공허감을 준다. 아, 이건 괜한 공허감은 아닐 것이다. 이 곳에서 느껴졌던 따스함은 사라져있으니까. 하루 동안의 코카인 향기. 나는 끊을 수 없는 향기의 부재가 지속되면 어떻게 되는지 십분 이해해 버린다. 나는 오늘조차 버텨내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내일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겠어. 오늘조차 이렇게 힘이 드는데, 내일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어.


어쩌면 나는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그 이유를 생각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쉰다. 그것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나스카, 나스카, 나스카. 나는 내일이 오면 다시 시키가 그만큼 멀어져 있을까봐 슬픈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에도 허리께까지 길어져 있던 자주색 머리카락만큼 멀어져 있었던 나와 시키다. 그것보다 더 멀어지고 싶지 않은 거겠지. 출근해야하는 직장인임에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 건 역시 그 때문이겠지. 비오는 날에 내 옆에 불쑥 나타나 하루 남짓 머물고 떠나가버린 귀여운 작은 고양이. 나는 문득, 시키와 함께 보았던 잡초더미를 생각해내고는 베란다를 쳐다본다. 잡초는 어느샌가 사라져버리고 없다. 단 하나의 증거도 나에게는 사치라는 듯이.


나는 부정하지는 않는다. 부정해봐야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고, 부정할 이유도 없으니까. 다시 만나는 분에 넘치는 사치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연락은 할 수 있다. 돈이 좀 나가지만, 그깟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예 시키와의 연락이 끊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지금 시간이 몇 시였더라.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휴대폰에 뜬 시간을 쳐다본다. 아까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가 있다. 미국의 시간대에 맞춰서 전화를 준다고 했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볼까. 시키는 항상 착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공중 전화로 전화를 거는 거겠지. 서로 마주 보지는 못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나 자신은 과거의 나보다는 행복하다고, 지금 이대로라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스카보다는 미국이 가까우니까. 비내리지 않는 메마른 평원보다는, 촉촉한 이슬비가 내리는 황량한 도시가 나으니까. 비슷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전화는 터질 테고 말이야.


시키의 전화를 기다리다 홀린 것처럼 인스타그램에 들어간다. 몇 억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일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누군 어딘 놀러가서 행복한 사진을 올려 놓았다. 카나리아 제도인가, 나는 그 중의 하나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나의 방보다 따스할 장소의 이름을 입에 댄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태양과 철썩거리는 파도를 생각한다. 솔직히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새벽 두 시까지 언제 걸려올지 모르는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전화기를 쳐다보니 어느새 두 시 반이 되었다. 벌써 삼십 분이나 흘러간 걸까. 시키는 전화를 주긴 하는걸까. 혹시나 미국에 가서 나를 잊어버린건 아닐까. 이끌리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 없는 도시의 향기를 맡아 그 곳에서 실종이라도 되어버린 걸까. 나는 온갖 상상을 하며 시키를 기다린다.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내일이 없다는 듯이.


휴대폰에서 작게 진동이 울린다. 시키의 전화는 아니다. 시키의 전화라면 더 크고 웅장하게 진동이 울려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시키의 인스타그램에서 게시물이 올라왔다는 알림음. 전화는 해 주지 않는건가. 나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기다린 보람이 있다는 듯이 그녀가 올린 게시물을 본다. 별다른 건 없지만, 행복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키의 모습이 있다. 행복해보여서 다행이야.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그 속에서 시키는 단발이었다. 싹둑 잘라버린 긴 생머리. 불편하기도 했겠지. 그래도 너무도 쉽게 잘라버린게 아닐까. 그녀의 향기와, 추억과, 그리움과 슬픔이 모두 잘라내진 것같은 기분이 든다. 무슨 일이 있었을거야. 너무 긴 머리가 불편했다거나, 아니면 잘라내고 싶은 것이 있었거나. 나는 그렇게 겨우 납득하며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이제는 자야만 한다. 그래야 내일을 버틸 힘이 조금이라도 남을 것이다. 오늘 버텨낸 것처럼 내일도 버텨내야 한다. 언제 올지 모를 시키와의 만남을 위해서 내일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모레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희망이 없을지도 모르는 내일을 위해서 지금 자 둬야 한다. 싹둑 잘라버린 단발처럼 나는 내 속의 아쉬움을 싹둑 잘라내어 고이 접어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 수가 없다. 향기가 그립다. 그래도 자야만 한다. 희망이 없는 내일을 위해, 사라져버린 오늘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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