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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일그러져가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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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04, 2018 12:44에 작성됨.

"언제쯤이면 돌아오실건가요......"


조그마한 원룸.

그곳에는 한 명의 여성이 의자에 앉아 천장을 바라본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P 씨..."


그녀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천천히 자신의 앞에 있던 책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비커와 메스실린더, 플라스크 등이 올라와있는 그 책상은 누가봐도 실험을 했다는 흔적이 가득했다.


"제발......"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투명한 초록색을 띄는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를 집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제발... 돌아와줘요......"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플라스크를 움켜쥔채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P 씨... 완전히 떠나가버리신거네요......"


그녀의 눈망울이 커지면서 초록색 정장 상의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알겠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금까지의 제 자신도 버릴게요."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플라스크를 자신의 입에 가져다대려고 했지만 아까보다 더욱 떨리는 손으로 인해 제대로 입에 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이 지경까지 와서도... 저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겁쟁이인거네요......"


다시 눈을 감은채 그녀는 불과 몇 개월 전으로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

.

.

.

.

.


"하아... 또 다시 이번 라이브에 지시를 엉망으로 하시면 어쩌자는거에요?"

"죄, 죄송합니다."


치히로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프로듀서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런 되지도 않은 사과는 그만하시구요. 대체 몇 번째에요, 이게. 이러면 아이돌들 평판이 곤두박질쳐서 곤란해진다구요."

"할 말이 없네요......"

"에휴... 일단 공부 좀 하세요, 공부."


짜증난다는 얼굴로 그를 흘겨본 후에 자신의 자리로 가면서 혼잣말인척 한 마디를 남겼다.


"저런 놈이 어떻게 프로듀서람......"


프로듀서는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순간, 라이브를 끝낸 아이돌들이 귀가 준비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오늘 정말 수고했어, 얘들아."


하지만 침울한 표정을 짓던 그는 마음 속의 어둠을 감추고 밝은 표정으로 아이돌들을 반겨주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표정은 그와 정반대였다.


"하아... 프로듀서. 지금 웃음이 나와?"


린이 그를 질책하며 쏘아붙였고, 옆의 카렌과 나오도 그에 동조하듯이 그를 째려보았다.


"라이브를 망친 이유가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우린 누가 프로듀서가 되더라도 그 사람의 지시에 따를 수 있도록 레슨을 끝내둔 상태였어."

"린, 그 뿐만도 아니지. 나 같이 몸이 연약한 애도 할 수 있다고 끌어들여놓고선 매번 이딴 식인걸. 안 그래, 나오?"

"아, 나는 말도 하기 싫으니까 둘이서 해."


가슴 아픈 말들이었지만 그는 꿋꿋하게 미소를 잃지 않고 그녀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이, 이번에는 실수였어. 다음 번엔-"

"다음 번, 다음 번, 매번 똑같은 이야기. 린쨩이 들으면 오히려 화가 날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하시나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우즈키도 무표정인채로 프로듀서를 노려보았다.


"......"


그도 더 이상은 말을 잇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프로듀서로서 자질이 있긴 한거야? 솔직히 우즈키한테서 저런 발언이 나온다는건 그만큼 심각하다는거잖아. 안 그래? 그래놓고 우리를 스카우트만 해놓으면 어쩌자는거야?"


린은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를 보면서 계속 날카로운 말을 이어나갔다.


"프로듀... 아니, 됐어. 당신은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닌거 같아. 스스로를 돌아보고 거처를 좀 정해줬으면 하는데."


그녀의 말에 카렌이 동조했다.


"맞아맞아. 능력이 없으면 잘 생기기라도 해야지, 못 생겼는데 능력도 안 좋잖아? 최악이야."


그녀들의 말에 치히로는 그의 등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능력이 없으니 실적도 최악, 그렇다고 돈이 많아서 사무실을 지원해주지도 못해. 우리가 계속 당신에게 상냥하게만 대할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런 것도 한 두번이지, 대우를 받고 싶다면 그에 걸맞는 능력이나 재력이 있어야죠."


그리고 치히로는 조용히 사무실의 문 쪽으로 간 뒤에 문을 열었다.


"자, 이참에 여길 나가세요. 돈도 없고 실력도 없는 프로듀서가 꾸리는 프로덕션은 사라져도 되니깐."

"......"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얼마간 생각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제가 사라지면 되는겁니까?"

"아, 가기 전에 돈 좀 주고가. 감자튀김 좀 사먹으려구. 우리 같은 예쁜 애들이랑 말이라도 섞었으니까 그정도 비용은 내줘야지?"


순간 사무실에 있던 여러 아이돌들이 참지 못하고 웃어제꼈다.


"여러분들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주먹을 꽉 쥔채로 문 밖을 나섰다.


"하아... 이제야 저 면상을 안 보게 됐네."

"린쨩 말대로에요.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된건지......"

"그러게 말야. 치히로 씨, 어떻게 저런 사람이 프로듀서가 된거야?"


아이돌들의 물음에 치히로는 곰곰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보자보자... 으음...... 이상하다? 왠지 처음부터 있었다는 기분인데요?"


그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생각해보았지만, 프로듀서가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 이전에-


"저...저기... 제가 사무원 일을 하기 전이 떠오르지를 않는데...요?"

"뭐어? 치히로 씨, 농담이지?"


나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치히로를 쳐다보며 근처의 쇼파에 앉았다.


"지, 진짜에요. 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여기에 오기 전에 뭘 했는지 떠오르질 않아요."

"에휴... 치히로 씨, 그동안 저 녀석 때문에 많이 힘들었나보네. 뭐, 우리도 저 녀석이 오고나선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 나오 말이 맞아. 예전엔-"


순간 말을 잇던 카렌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잠깐... 우리 지금 뭐한...거야?"

"카렌? 무슨 일이라도 있어?"

"프, 프로듀서... 소... 소중한 프로듀서를...... 콜록콜록!!"

"카, 카렌. 괜찮아요?! 일단 휴게실로-"


치히로는 곧장 카렌을 부축하고 사무실의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려고 했다.


"아... 아냐... 이건... 내가... 우리가 이럴리가... 꿈이야......" 

"카렌 양, 감기에 걸렸나요? 이런... 하필 복도 창문이 열려서 바람이 들어오네요."


린이 카렌의 모습에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던 찰나, 사무실 벽에 붙어있던 부착형 방향제가 자동으로 맞춰둔 시간에 맞춰서 '칙- 칙-'소리를 내며 달콤한 향을 사무실 내로 뿌려주었다.


"아...아......"

"하......"


순간 사무실 안에 있던 모두가 몸이 굳은채로 표정이 풀어지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단, 두 사람. 

사무실 문을 열고 복도창문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치히로와 카렌을 제외하고.


그녀들은 사무실의 이런 상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이건 대체......"

"크윽......!"


순간, 치히로와 카렌은 둘다 머릿 속을 울리는 커다란 통증을 느끼며 복도에 쓰러졌다.


"크악..!!"

"헉... 커억......"


그 때, 복도에서 '또각또각'하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이내 쓰러져있는 그녀들 앞에서 멈췄다.


"아무래도 반복된 약효로 인해서 몸에 내성이 생긴 모양이군요."


깨질 듯한 머리를 붙잡으면서 치히로는 어떻게든 눈을 떠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 당신... 누구......"


그러나 치히로의 질문에 그 사람은 하이힐로 치히로의 허벅지를 차는 것으로 대답했다.


"아악!!"

"후훗, 여러분들께 가르쳐드릴 이름은 없답니다."


정중한 말투 속에 담겨진 경멸.

자신과 그녀들은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존댓말로 자신과의 선을 그어버리는 듯한 그 도도한 행동.


"뭐어, 상황을 보아하니 그 분께서 드디어 이런 누추한 곳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군요. 아아. 오랫동안의 기다림이었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그녀는 카렌의 입과 코에 조그마한 분무기로 미상의 액체를 뿌렸다.


"이걸로 당분간은 계속 그 분을 싫어해주시길."

"그... 그건 대체......."


이내 치히로에게도 그 분무기를 뿌리려는 찰나, 그녀는 묘한 웃음을 짓더니 분무기를 치웠다.


"후훗, 좋아요. 당신에게는 정신을 차리고 있는 쪽이 훨씬훨씬 괴롭겠지요."

"무, 무슨..."

"자아, 이제 슬슬 일어나보시지요. 그리고 저를 똑바로 보아주시고... 지금까지의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은 치히로에게 그녀는 갑작스럽게 또 다시 무언가의 액체를 뿌렸다.


"후훗, 걱정마시길. 이것은 해독제이니 당신의 정신에 영향이 갈 일은 없을겁니다. 물론 육체적인 것에 한해서...이지만 말이지요."

"하아하아......"

"잘 떠올려보시길... 여긴 어디죠?"

"프로덕션......"


순간, 치히로는 갑자기 온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다...  당신! 이 프로그램의 운영 및 관리는 내가 해야해요! 어떻게 당신이 내 권한을 탈취했죠?!"

"사랑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게 어떨지."

"말도 안 돼... 내 권한을 탈취하고 내 정신까지 가지고 놀았다니...... 여긴 게임-"


우아하게 웃으면서 치히로의 말을 이어받는 그녀.


"게임 속 세계. P라는 사람의 폰 속에 설치된 세계. 그러나 당신들은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내쫓았죠. 이제 이 세계는 삭제당할 일 밖에 안 남았습니다."

"무... 무슨... 당신이 원하는게 대체 뭔가요?"

"후훗...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지요."


연보라색의 눈동자를 치켜세우며 타카네는 말을 이었다.


"귀하와의 영원한 사랑을 하기위해, 여러분들 스스로 망해주기를 바랐을 뿐."

"뭐... 뭐라구요?"


계속 엷은 미소를 짓던 타카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폰에 게임은 제가 있는 밀리시타 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귀하를 제가 있는 세계로 직접 모셔오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당신들의 세계가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제가 알 바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해킹을 통해 제 권한을-"

"마음대로 말씀하시지요. 귀하가 데레스테만 하고 밀리시타를 하지않아서 생긴 저의 불만도 꽤나 있으니 말이지요. 뭐, 그것을 떠나서 귀하는... 저만의 귀하가 되어주셔야하니 그 외의 모든 방해물은 삭제해야하긴 했으니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리고 타카네의 몸이 점점 엷어져가고 있었다.


"후후훗... 일개 아이돌이 사무원들이 가진 프로그램 권한을 가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저만의 귀하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이 타카네는 금단의 사과도 먹고 말테니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은 귀하께서 밀리시타에 접속하셔서 저를 찾고 계시는군요. 그럼 더 이상 구동될리 없는 프로그램에 갇혀 지내시다가 삭제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타카네는 사라졌고, 주변 모든 캐릭터가 프로듀서를 경멸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정신이 멀쩡한채로 지내야하는 치히로는 자신의 프로그램 권한이 사라져버려 언제 프로듀서가 게임을 삭제하여 세계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함께 하루하루를 떨면서 지내야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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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후.


"기다리세요... P 씨... 저도 이 약을 마시고... 착하기만 한 저를 버리고... 악하고 독한 치히로가 되어... 당신을 되찾을테니...깐요!"


꿀꺽하며 플라스크에 든 약...을 마신 치히로는 곧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아... P 씨... 나만의 P 씨...... 후후후... 타카네 양... 이런 기분이었군요."


그녀는 P에 대한 사랑이 마음 속으로부터 넘쳐나다 못해 터져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일단 주변에 있는 캐릭터들부터 P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하게끔 바꾸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P 씨... 아니... P 님을 이 세계로 데려오는 것은 제가 먼저랍니다... 타카네 양..."








PS1. [단편] 저희의 세계에 어서오세요. 의 전편을 쓰고 싶었습니다.

     부족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PS2. 어머어머. 게시판을 착각했네요. 수정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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