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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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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01, 2018 03:40에 작성됨.

해가 수평선을 넘어 져 간다. 이제 바다를 뒤로한 채로 다시 고통스러운 재활의 시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언젠가 다시 바다를 볼 수 있을까. 나의 손이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머나먼 곳으로 가 버린 나의 아름다운 파도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어느새 어두껌껌해진 바다를 쳐다보던 나는, 아쉬워하는 나 자신을 다독인다.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을꺼야.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거야. 나는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천천히 휠체어를 접어 택시에 다시 고이 넣는다. 돌아가기 위하여, 다시 일어서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오니 걱정하는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계시던 부모님이 나를 부축해주신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시다고 말씀드리며 휠체어를 접어놓고는 나의 방으로 절뚝이며 걸어들어간다. 아직 다리가 불편하지만, 곧 있으면 다 나을 것이다. 길어봐야 세 달 정도겠지. 지루하겠지만, 인내의 시간은 인생에서 몇 번은 필요한 일이다. 그보다 다 나으면 뭘 해야 될까.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떠올렸지만,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미나미를 만나는 일이다. 그녀에게 완전히 나은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나를 만나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에게 너무나 멀어져버린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방으로 돌아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다. 불현듯 공연장에서 본 미나미의 모습이 천장 위에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잠시 보았던 무대였지만, 그 아름다움과 그 반짝임과 그 매력은 미나미가 아닌 다른 여자들은 가질 수조차 없는 것이다. 천천히 오른팔을 뻗어본다. 천장에 닿질 않는다. 가질 수 없는 별을 소망하는 어린아이처럼 팔을 더 뻗어본다. 너무 뻗은 탓이었을까, 미나미가 가득 담긴 파노라마가 마치 신기루처럼 천천히 사라져간다. 조금 더 무대를 봐 둘걸 그랬나보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런 회한 섞인 말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래, 잠에 들면 그 뒤로도 그녀의 모습을 더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문득, 어렴풋이 어딘가에서 미나미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것도 꿈일까.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는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가 이내 소리가 들린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아무래도 심야의 TV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방을 뛰쳐나가 거실로 몸을 던진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부모님께서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은 나의 마음을 읽어낸 듯한 상자 앞에 가 화면을 쳐다본다. 화면 안에는 분명한 미나미가 미소를 지으며 진행자의 물음에 대답하고 있다. 아아, 이 곳은 천국일 것이다. 미나미의 목소리, 미나미의 모습, 미나미가 밀려들어오는 밀물.


「그러고보니, 미나미쨩은 대학에서 친한 사람이 있었으려나?」
「그렇네요. 라크로스 부의 부원들이나, 같은 강의를 듣는 사람들과 친했었죠.」
「과연 미나미쨩이란 생각이 드는 인선이네-」


간단히 대답한 미나미의 말을 사회자가 적절한 대답을 해 주면서 받아쳐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상자 속의 미나미를 쳐다보며 나에 대한 것도 조금 나와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안의 미나미는 나에 대해선 전혀 이야기해주지 않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버린 사회자도 별다른 추가 질문을 하지 않은 채로 넘어가버린다. 아아, 나는 미나미의 안에서 그 정도의 사람이었던걸까. 그저 한 때 친했었던, 그 이후로는 이야기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걸까.


잠시 의미없는 사회자와 미나미의 대화가 나오는 화면을 보던 나는 털레털레 발걸음을 옮겨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간다. 나는 어쩌면 미나미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 한번만이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이라고 바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분명 나는 미나미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잊어버릴 수 없는 첫사랑을 이따금씩 그리워하는 것과는 다른, 그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한 번만 돌아오기를 바라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고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문득, 전화기에 저장되어있는 미나미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전화를 걸어볼까,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어느새 내 손에 들려있는 전화기를 쳐다본다. 전화는 아직 걸려있지 않다. 다행이야. 무의식이란 녀석은 무슨 일을 할 지 모르는 거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전화를 건다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게될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 전화를 걸어서는 안 된다. 걸더라도 나중에, 다리가 다 나으면 걸도록 하자. 나는 나 자신에게 그렇게 몇 번이가 되뇌이며 전화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때까지 저 녀석은 봉인이다. .봉인을 푸는 때는 찰거머리같이 붙어 있는 하얀 면포가 완전히 내 다리를 놓아줄 때다. 그 때까진 열심히 재활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몇 번이고 다짐하면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아 잠에 들었다.


그 다음 날부터 연속된 지옥의 재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지옥의 코스를 자청해서 하는 나를 보며 전담 트레이너 씨가 무리하지 말라고 나를 말린다. 하지만 그가 말린다고 어떻게 될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빨리 나아야만 하는 목적이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나아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러니까, 그 어떤 재활도 두렵지 않다. 오라면 와 보라지. 멋지게 이겨내서 제 발로 걸어줄테니까.


집에 돌아와서 침대에 누우면, 천장에 붙여놓은 듯한 미나미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본다. 미나미, 파도, 미나미. 그녀는 너무나도 멀리에 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그러니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워하는 일 말고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러니 재활을 빨리 끝마쳐야만 한다. 최대한 빨리 끝내서, 미나미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그리워할 수 있음을, 다시 그녀를 만나는 것만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보더니 놀랍다는 듯이 결과지를 내민다. 받아든 결과지의 내용은 완전 회복. 아직 완전히 다 나은 것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런 일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고, 의사는 혀를 내두르며 이야기한다. 그리움의 힘일꺼야.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결과지를 받아든다. 조금 더 바다 속으로 깊이 들어간 소년이 된 기분이다. 어두컴컴하지만, 결코 기분 나쁠리 없는 바다가 매만져지는 듯한 감촉. 이제는 미나미를 보러 갈 수 있어.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내 다리로 선다. 조금은 불편하긴 하지만 다쳤을 때의 감각은 아니다. 진찰실 내를 조금 걸어본다. 그다지 통증이 오지 않는다. 그럼 오늘 할 일은 단 하나가 있을 뿐. 그러니, 집에 돌아가야 한다. 그리움을 반가움으로, 그 반가움으로 또 기쁨의 밀물을 맞이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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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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