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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5, 2018 01:49에 작성됨.

 늦은 밤이었다. 고된 하루를 끝냈을 때, 시곗바늘은 어느덧 자정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려 했다. 회사를 나와 밖으로 나서니 환한 가로등 불빛만이 나를 반겼다. 천근 같은 발걸음을 전철역까지 옮겼다. 가까스로 탄 막차 안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가 졸고 있는 그 안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했다. 목적지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맨션 문이 열리고 우편함을 살폈다. 전단지와 고지서 사이로 무언가 보였다. 하얀 편지 봉투였다. 왜 이런 게 있나 싶었다. 그렇지만 쏟아지는 피로를 견디기 힘들어 다른 것들과 대충 모아 집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 그것들을 올려놓고 나는 소파에 쓰러졌다. 정신이 몽롱해졌고, 그대로 잠에 빠졌다. 그날 밤은 왠지 모르게 그 녀석의 꿈을 꿨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나는 가끔씩 그 녀석의 꿈을 꾼다. 또렷하게 생각나는 얼굴, 목소리, 그리고 체온. 그 꿈을 꿀 때마다 나는 아직 마음 한 구석에 그 녀석을 담아두고 있단 걸 느꼈다. 그 녀석이 나를 보고 입을 열려고 할 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새벽 5시 24분. 아직 이른 시간이다. 평소였다면 신경질을 냈을 것이다. 귀중한 잠을 깨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며칠 간 휴가를 얻었기에 마음이 조금 느긋했다. 뻐근한 몸을 일으켜 침실로 갔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꿈속으로 들어섰다.

 조금 더 숙면을 취하고 일어났다. 탁상 시계는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다. 의외로 일찍 일어났다. 손해를 본 것 같았지만 모처럼 휴일이니 일찍 일어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내 시간을 더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헝클어진 머리를 긁으며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어 계란과 베이컨을 꺼내 프라이팬에 구웠다. 식빵도 구울까 했지만 아침은 간단하게 때우기로 했다. 오렌지 주스도 조금 남아 해치우기로 했다. TV를 켜고 먹기 시작했다. 아침 TV 프로그램이라고 해봐야 와이드 쇼뿐이었지만, 귀가 심심한 것보다는 나았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대충 설거지를 했다. 그러다 어제 식탁 위에 올려놓은 것들에 눈이 갔다. 전부 가지고 소파에 앉아 살펴보았다. 청구서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가장 눈에 띄는 게 보였다. 나는 그것을 뜯었다. 청첩장이었다.

 사이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의 사진이 있었다. 신랑은 누군지 알 수 없다. 내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신부는 알았다.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다. ‘키사라기 치하야’, 그 녀석이었다.

 ‘저희 결혼식에 참석해주세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결혼. 그 녀석과 있었을 때 한번도 생각한 적 없었던 단어가 이 종이에 쓰여있다. 그 녀석도 이제 행복해질 때가 됐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난 일어서서 청첩장을 고지서 위에 던져놓고 다시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가슴이 조금 욱신거렸다. 머리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한데,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왜일까? 아직 그 녀석 생각이 남았기 때문일까? 이젠 다 잊었다 생각했건만 왜 내 마음은 잊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내 미련일 수도 있다. 그 때 확실하게 잊지 못했던 내 잘못이 더 큰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집안일이나 하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 세탁기부터 돌렸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지만, 잡생각을 잊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핑계거리를 만들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베란다 문을 열고 환기도 시키며 청소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밀어 먼지를 없앴다. 쌓인 설거짓거리도 단숨에 해치웠다. 세탁물도 베란다 건조대에 걸어두었다. 오랜만에 바쁜 가사였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점심 때가 되었다. 아침에 먹은 것들이 소화가 돼서 배고픈 참이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이름을 보고 나는 조금 망설였다.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통화를 눌렀다.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치하야의 목소리다. 예전보다 조금 더 밝아진 목소리였다.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무슨 일로 전화했어?”

 “아, 별 건 아니고요. 혹시 청첩장 보냈는데 받으셨나 해서요.”

 치하야는 쑥스러운 듯 말이 들어갔다. 난 마음이 울컥했지만 아무 일 없는 듯 말을 이었다.

 “응. 받았어. 보고 놀랐다. 네가 결혼을 하다니 말이야.”

 “후후. 저도 놀랐어요. 그 사람이 먼저 고백해올 줄은.”

 “어때? 마음이 싱숭생숭하지?”

 “네. 예식장 준비해야지, 제 일도 해야지, 쉴 틈이 없네요.

 “바빠도 할 건 해야 하니까.”

 “그렇지요.”

 그 말을 끝으로 우린 잠시 입을 닫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끊을게.”

 “아, 저기.”

 “응?”

 “혹시 점심 안 드셨으면 같이 드실래요?”

 “음? 네 신랑은 어쩌고?”

 “며칠간 출장이라서 집에 없어요. 오늘 저도 오프고요.”

 “아, 그래?”

 “그래서 괜찮으신가요?”

 “응. 나도 먹으려고 한 참이었거든.”

 “잘 됐네요. 그럼…….”

 치하야는 만날 장소를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몇 년만의 식사 약속인지 모르겠다. 사무소를 나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었으니까. 전화가 온 것도 그렇다. 그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갈 채비를 했다. 정장을 쫙 빼입는 건 너무 나간 느낌이라 어느 정도 캐주얼하게 입기로 했다. 향수를 뿌릴지 말지, 왁스로 멋을 부릴지 말지도 고민거리였다. 그러다 이건 아니다 싶어 멋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가기로 했다. 손목시계는 슬슬 점심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번화가의 어느 음식점 앞이었다. 두리번거리니 저 멀리서 치하야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들어 화답했다. 한 눈에 봐도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처음 만났을 땐 차가운 인상에 웃음 같은 건 없는 아이인 줄 알았다. 몸은 상당히 말랐고, 갑자기 쓰러지지나 않을까 싶었다. 세월이 지나니 많은 게 바뀌었다. 차가웠던 얼굴엔 봄이 찾아왔고, 어느 정도 살집이 붙어 삐쩍 마른 게 아닌, 보통 여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생겼다.

 “여기 저번에도 왔는데 꽤 괜찮더라고요.”

 치하야가 웃으며 말했다. 약간 값이 나가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내 급료로는 한 달에 한 번이나 갈까 싶은 곳이었다.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치하야는 걱정 말라는 듯이 나를 끌고 들어갔다. 유럽 느낌이 물씬 나는 인테리어의 가게였다. 우리는 구석진 곳에 앉았다. 종업원이 초기 세팅을 해주고 메뉴를 가져왔다. 펼치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보다 가격이 나갔기에 함부로 시키다간 내 지갑이 위험했다. 치하야는 능숙하게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내게도 같은 걸로 시키겠냐고 물었다. 내가 조금 머뭇거리자 자연스럽게 자신이 시켰던 스테이크로 정했다.

 “저기…….”

 내가 말끝을 흐리자 치하야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걱정 마세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그러면 더 미안한데.”

 “어차피 제가 먼저 점심 먹자고 했잖아요. 권유한 사람이 사는 게 맞지요.”

 “그럼 감사하게 먹을게.”

 입 안이 살짝 마른 듯한 느낌이 들어 물을 마셨다. 긴장한 탓이었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내 안에서 무언가 바뀐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신랑은 어떤 사람이야?”

 “음.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에요.”

 “직장인?”

 “네. 연예계하고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라.”

 “그렇구나.”

 치하야에게 고백한 그 남자는 용감한 사람이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전해서 치하야의 마음을 따냈으니 말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랬기에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이다. 만약 내가 고백을 했다면 치하야가 받아줬을까? 그랬다면 이 녀석 옆에 있는 게 그 남자가 아니라 내가 되었을까? 그건 누구도 모른다. 나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나는 떠났고, 그 남자는 다가왔다. 그것뿐이다. 내가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걸 치하야가 알아채고는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요?”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수상한데.”

 “정말 아무것도 아냐.”

 “그럼 됐어요.”

 그 사이 음식이 나왔다. 두꺼운 스테이크 두 접시가 각자 앞에 놓여지고, 신선한 샐러드가 중앙에 놓였다. 치하야는 포크와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능숙하게 잘라냈다. 나는 그 손동작을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왼손가락에 낀 반지였다. 수수하게 보이는 반지였다. 녀석의 취향일까? 화려하지 않은 게 치하야답긴 했다.

 “아, 이거요?”

 “신랑이 사준 거야?”

 “네. 딱 제 마음에 드는 반지예요.”

 “치하야는 화려한 것보단 단아하고 수수한 게 취향이었지.”

 “기억하고 계시네요.”

 “너랑 몇 년을 있었으니까.”

 “그랬지요.”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우린 서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내가 치하야와 만났던 건 몇 년 전이었다. 치하야는 갓 데뷔한 참이었고, 나는 사무소의 신입 프로듀서로 들어왔다. 프로듀서라기 보다는 매니저라고 해야 옳겠지만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꽤나 차가운 인상이었다. 쉽게 웃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였으며 독불장군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일은 처음이었던 나로선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레슨이며 영업이며 라이브며 쉬운 일이 없었다. 특히 치하야의 의견에 부합한 일을 따오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았다. 그래도 나는 그 일이 좋았다. 몸은 힘들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느꼈고, 치하야가 하루하루 성장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녀석이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묵묵히 해내는 것을 보고서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갈 테니. 내 노력이 전혀 쓸모 없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치하야는 조금씩 표정이 밝아졌고, 업무나 라이브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걸 줄이고, 내가 가져온 일거리를 차근차근 검토하고 처리했다. 힘들 때는 서로 상담하기도 하고, 기쁜 일이 있었을 땐 내 일인 것처럼 축하했다. 그렇게 하루, 한 달, 1년이 지나고 치하야는 신인상부터 하프 밀리언, 골든 디스크 상도 받을 만큼 커졌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대견스러운 마음과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난 재계약을 하지 않고 그대로 사무소를 나왔다. 치하야에겐 좋게 둘러댔지만 이해를 해줬을지는 지금도 모른다. 헤어질 때 보여준 그 쓸쓸한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날 밤은 왠지 모를 죄책감에 잠을 못 이뤘다. 내 잘못이 아님에도 내 잘못인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난 연예계를 떠나 일반 회사원이 되었다. 바쁜 나날이었지만 과거를 잊기엔 좋았다. 계속 일에 치이다 보면 어느새 잊히겠지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잊히지 않았다.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는 녀석을 보노라면 난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잊어야 했다. 가끔씩 내 전화로 걸려오는 녀석의 전화를 난 뿌리쳤다. 그게 한두 번 이어지자 전화는 더 이상 걸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이렇게 다시 만났다.

 대화 없는 식사가 끝났다. 치하야는 후식으로 커피를, 나는 콜라를 주문했다. 탄산의 자극이 기분 좋았다.

 “저기.”

 치하야가 먼저 말을 꺼냈다.

 “결혼식, 오실 거죠?”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가야 한다, 가지 말아야 한다, 둘 다 내 마음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 가봐야 또 미련이 생겨 녀석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말을 꺼내려 한 순간이었다. 치하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 잠시만요.”

 전화를 받은 치하야는 얼굴이 환해졌다.

 “아, 자기! 잘 지냈어요? 밥은 잘 챙겨먹고?”

 아마 예비 신랑과 통화를 하는 듯 했다. 그 남자를 하나하나 신경 써주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게 바뀌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통화하는 내내 치하야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이제 나도 미련을 가지지 않아도 되겠다. 미련 없이 녀석을 보내줘도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내일 온다고요? 알았어요. 당신이 좋아하는 거 준비해놓고 기다릴게요. 그럼 내일 봐요.”

 치하야가 통화를 끝냈다.

 “한 달 뒤였지?”

 “아, 네.”

 “축의금 기대하고 있어.”

 “얼마나 내실 건데요?”

 “그건 비밀. 먼저 말하면 재미없잖아?”

 “하긴 그렇지요.”

 “꼭 갈 테니까 기대해.”

 “네. 기다릴게요.”

 치하야가 계산을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럼 결혼식 때 봬요.”

 “응. 예비 신랑한테 잘 해주고.”

 “잘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그래. 그럼 잘 가라.”

 “네, 프로듀……, 아니지.”

 치하야는 잘못 말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프로듀서란 직책이 아닌 내 이름을 말했다. 이것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내게 전하고 싶었던 녀석의 대답일 것이다. 이미 치하야는 빛 바랜 상자에 나와의 추억을 고이 담아두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나 같은 바보처럼 미련을 가질 녀석이 아니니까.

 치하야는 꾸벅 인사하고 걸어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나는 소리쳤다.

 “치하야!”

 내 소리에 치하야는 뒤를 돌아봤다.

 “꼭 행복해라!”

 치하야는 꾸벅 인사하고 다시 길을 걸어갔다. 나는 한동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왠지 모르게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잃어버렸다기 보다는 나올 것이 나왔다는 후련한 느낌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치하야에게 미련을 갖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사랑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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