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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 「고맙다는 말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어」 -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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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5, 2018 00:08에 작성됨.

치하야 「고맙다는 말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어」 - 중 - 과 이어집니다 (이걸로 완결)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혼자였다. 나는 힘이 팍 죽어버린 신체를 억지로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주변의 디테일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나는 곧 이 곳이 원래 가기로 했던 작고 낡은 레슨실 근방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렇게 해도 그렇고, 저렇게 해도 그렇고. 결국, 똑같은 걸까. 소란스러움이 가신 마음에는 이제 냉소만이 남아, 하나의 결론을 읊조린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 너무 늦어버렸어. 이젠 끝이야.


라고.


응, 그렇네. 나는 가볍게 수긍하고는, 오늘 아직 아무도 발을 딛지 않은 레슨실의 문손잡이를 붙잡고 몇 번 돌렸다. 열쇠가 없으면 열리지 않는 문. 당연하게도, 아무리 돌려봤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 곳 열쇠는 우리 사무소에서 보관하고 있을 텐데.....이제서야 그 사실을 떠올린 나는 조금 물러나 벽에 기대고는 차갑게 녹슬어버린 머리로 생각해본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하고.


다시 사무소에 돌아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그렇겠지. 분노. 우려. 껄끄러움. 거슬림. 불편함. 더 이상 좋은 사람들일 수만은 없게 되었을, 그들의 시선에 담겨있을 것들을 떠올리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확실히, 그런 시선 속에서 계속 있고 싶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두려운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다만, 그 중에 딱 한 사람만큼은. 그 사람이 내게 보낼 시선만큼은. 도저히 어떻게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서.


"하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덩달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나는 아예 자리에 털퍽 주저앉아, 두 다리를 모으고 웅크렸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곧 다른 사람들이 여기로 올 거야. 그, 누구였지....그래, 하기와라 씨, 였던가. 하여튼. 마주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미리 이 곳을 벗어나는 편이 좋겠는데.....어디로 가면 좋을까. 집? 그게 좋겠네. 다른 누구의 방해를 받을 일 없이, 편하게 있을 수 있으니까.


.....아니야. 나는 불쑥 튀어나오고 마는 약한 마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레슨이 있잖아. 약소 사무소. 얼마 주어지지 않는 일. 그래도 그나마 충실하다고 하는 게 있다면, 이런 것 정도인 걸. 조금이라도 실력을 키워야지. 분하지만, 나 혼자만으로는 역시 한계라는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빼먹거나 하면, 안 돼.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일어서려고 했다. 그렇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곤란해졌다. 어쩌지. 이러면 안되는데. 나는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불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복도. 나밖에 없는 장소. 조용하고 쓸쓸한 곳. 약간의 바람 소리만 존재할 뿐.


허전하네.


무심결에 주머니를 뒤적여, 사무소에서 들으려다 만 MP3 플레이어를 꺼내든다. 이런 걸 할 때가 아닐 텐데. 나는 좀 더 우선 순위가 높은 것들을 생각하면서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원을 키고 선을 연결한다. 그리고는 둥근 헤드를 양 귓구멍에 밀어넣고, 그 때 누르지 못했던 재생 버튼을 눌렀다.


♪~ ♪~ ♪~


소리. 공기의 진동. 그런 소리들의 일정한 조합은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내고, 선율들이 모여 음악이 된다. 그리고 그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이어폰의 두 헤드에서 흘러나와 고막을 때리며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렇게 해서, 안에 너무나도 많이 자리잡고 있는 비어버린 곳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채우다 못해, 안에서 바깥으로 흘러넘쳐, 내 주위를 부드럽게 감싼다.


마치, 벽 같아. 소리의 벽.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에, 불안에 떨렸던 마음이 조금은 안정을 되찾는다. 긴장으로 바짝 굳었던 몸이 조금은 풀어진다. 그래, 전장과도 같았던 그 곳. 폭력적인 소리가 총탄과도 같이 빗발치던 그 곳에서, 이 나를 몇 번이고 구해주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어. 나는 조금 미소를 머금으며, 그대로 눈을 감는다.


벽은 이윽고 음악의 성이 되어, 모든 것을 나와 격리시킨다. 휑하고 불어오는 무서운 바람소리도, 언제부터인가 울리기 시작했던 정감없는 휴대폰 벨소리도. 전부. 그렇게 해서, 이렇게나 비틀려있는 나를 가두어버린다. 더 이상 다른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도록.


좋은 일이야. 이걸로 되었어.


그렇지만 어째서일까. 나는 어딘가 멍해진 머리로,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해버린다. 뭘까. 부족한 건. 딱히 지금 들리는 음악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닐 텐데. 확실히 직접 연주하는 걸 듣는 것보다는 다소 조악한 음질이지만, 불평을 말할 때가 아닌 걸. 나는 그걸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반대로 그 생각은 점점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나갔다.


허전해. 쓸쓸해. 외로워. 비어있어.


아파.....


아무리 음악을 들어도, 텅 비어있는 곳이 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 둔한 아픔이 가슴 안 쪽에서부터 서서히 퍼져나갔다. 마치 피가 배여나오는 것만 같은 착각에, 나는 황급히 가슴가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뭔가 묻어나오지는 않았지만, 욱신거림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욱....."


나는 튀어나오려는 뭔가를 억지로 꼴깍 삼켰다. 조금 뜨거워지는 것 같은 눈을, 억지로 비볐다. 어쩐지 물기가 묻어나왔다. 왜, 그런 거야.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는데, 왜 이러는 거야.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야하는데. 등줄기를 타고 기어오르는, 두려울 정도의 당황스러움. 나는 어쩔 줄 모르고 헤메는 어린아이처럼,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았다. 없어. 혼자야. 나밖에 없어. 그러니까, 안심해.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터벅.


그렇게, 필사적으로 나 자신을 타이르고 있을 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뭘까. 그 곳을 향해 머리를 돌리려고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다른 소음들처럼 금방 사라져버릴 것으로 느껴졌다.


터벅, 터벅, 터벅.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았다. 전보다 조금 더 커진 소리가, 두터운 성벽을 비집고 들어와버린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는 음악에 모든 것을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치하야, 쨩."


그러려고 했는데. 그 다음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와중에 플레이어가 바닥에 떨어지고, 이어폰도 덩달아 빠져 주위를 굴러가고 말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정면을 응시했다. 조금 흐려진 시야에는 이 쪽을 바라보는 이가 들어왔다. 정돈하는 것을 잊어버린 건지, 여전히 조금 뻗쳐있는 갈색 단발머리. 놀라운 기색이 역력한, 둥근 초록빛 두 눈.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마주하고 싶었던. 그 애의.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애가 아니면 빈 자리를 채울 수 없을 거라고.


"앗, 그, 저, 저기....."

"가면 안 돼!"


무심코 뒷걸음질치려는 그 애에게, 나는 급히 손을 뻗으며 외쳤다. 내가 그 애를 붙잡아내기에는 조금 먼 거리. 그 애가 내게서 도망치고자 한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거리. 그래도 그 애는, 하루카는 용케 내 부탁대로 그 자리에 멈춰서주었다. 아아, 다행이야. 정말로. 하지만, 언제 내 곁을 떠나버릴지 몰라. 안 돼. 그러기 전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하, 하루카.....미안해."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사죄의 말을 내뱉었다. 하루카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급박해지니까 미안하는 말이 쉽게 나오는 구나. 이런 건, 그저 말뿐만인 미안함이겠지. 정말로 미안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잃기 싫어서 나오는 것일 뿐.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말.


그러게.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쉽게 나와버렸어. 훨씬 전부터 말할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이미 늦어버렸어. 돌이킬 수 없어.


"어.....?"

"미안해. 생일 축하해준 거, 전혀 기뻐하지 못해서."


그걸 알면서도, 나는 사죄를 반복했다.


"나, 나.....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어. 그런 건, 너무 오랜만이어서. 어색했거든."


어제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입에 담았다.


"네가 만들어준 케이크, 정말 맛있었어. 그만 나 혼자 다 먹어버렸을 정도로. 그렇지만, 너랑 같이 먹었다면 분명, 더 맛있었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미안.....미안해....."


하루카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지리멸렬한 말들을 그저 바깥으로 내보내기 급급했다. 네 할 말만 하기 바쁘구나. 이기적이야. 비겁해.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 곧바로 뒤따라붙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대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하루카를 보내는 것이 싫었다.


"아까, 심한 말을 해버린 것도, 정말, 미안."


일방적이기만 한 회화를 잠시 중단했다. 아까부터 쭈욱 내 말에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던 하루카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네. 역시, 늦었어. 이런 이야기들을 해봤자. 내가 하루카에게 남긴 상처는 지워지지 않아. 부르르 떨리는 신체를 애써 억눌렀다. 상처를 입혔으면 똑같이 상처를 받아야했다. 나는 터질 것 같은 숨을 참아내며 하루카가 쏟아낼 비난을 기다렸다.


".....다행이야.....!"


어.....?


이 애는, 지금, 무슨 말을? 다행이라니, 뭐가? 어떤 걸.....사고가 그 말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 차갑게 굳어있던 손에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어라, 뭘까. 그 쪽으로 주의를 돌리니 내 손을 꼬옥 하고 붙잡고 있는 두 손이 눈에 들어왔다. 아, 하루카가 내 앞에 서 있구나. 내 손을 꼭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지만 웃고 있어. 마음이 놓였다는 듯. 뭐야, 정말 이상한 얼굴.....


"나, 있지.....치하야 쨩이 별로라고 생각해서, 그래서.....기분이 상했을까 했는데.....후아아, 다행이야. 정말."

"하루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어본 질문에 하루카는 넘치는 눈물을 조금 훔쳐내고는 그에 답하기 시작했다.


"속상했어. 치하야 쨩, 갑자기 휙 뛰쳐나가버려서. 내가 잘못한 게 아닐까 했지. 으음, 잘못한 게 맞을지도. 좀 더 알아보고 했어야하는데 그러지 않고 다짜고짜 파티를 열겠다고 한 거잖아. 치하야 쨩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렇지 않아. 하루카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이상했을 뿐....."

"미안해."

"아니, 미안해야할 쪽은 나야. 네가 사과할 게 아닌데."

"다음에는 물어보고 할테니까. 화, 풀어주지 않을래?"

"하루카, 그러니까.....푸핫."

"에, 저기.....치하야 쨩?"

"푸흣, 우훗,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라.....하아. 됐어. "


정말, 이게 뭐람. 이렇게나 간단히 해결되는 걸 가지고 나는 뭘 그리 끙끙 앓은 건지. 긴장이 탁 풀려버린 나는 어쩐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고 마는 웃음을 몇 번 토해내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하, 하여튼 그래서.....정말 미안했어. 특히, 좀 전에 심한 말 해버린 거."

"에이, 뭘. 괜찮아. 그런 건 치하야 쨩의 본심이 아니었을테니까."

"응?"

"목소리, 떨려있었어. 정말로 날 미워해서 그러는 것일 거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랬, 었니? 나는 작게 반문하면서 지난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이건만, 색이 바랜 사진처럼 느껴져 하루카의 발언에 대한 진위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랬구나......"

"응. 그러니까 괜찮아."


어쩔 수 없이 하루카의 말에 끄덕끄덕 수긍하는 사이, 하루카는 남아있던 눈물을 전부 훔쳐내더니 곧 나를 가리켰다. 어라, 왜일까. 갑자기 나는 또 왜? 당황해있자니, 하루카는 킥킥 웃으면서 끝이 새빨개진 자기 눈매를 가리켰다. 아. 그제아 의미를 알아챈 나는 눈에 고여있던 것들을 슥 훑었다.


"치하야 쨩이 우는 거, 처음 봤어."

"나라고 해서 전혀 울지 않는 건 아니야."

"그렇구나.....그래도 좀 미안해지는 걸."


하루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깐 허리를 숙이더니, 바닥에서 뭔가를 주워 내게 건네었다. 좀 전에 떨어트렸던 이어폰과 음악 플레이어. 나는 그걸 조심히 거두어들어, 주머니에 쑤셔박았다.


"있지."

"응."

"내년에 또 치하야 쨩 생일이 돌아온다면, 그 때는 정말 축하 파티, 해도 되냐고 물어볼게. 그리고 물어봐서 괜찮다고 한다면.....그 때는 어제보다 더욱 성대하게 축하해줄게. 치하야 쨩이 기뻐할 수 있도록."

".....괜찮아. 그러지 않아도. 물어보지 않아도 돼. 그냥, 어제처럼만 축하해줘. 그러면 정말.....기쁠 거야. 마,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기쁠 수 있도록 노력해볼테니까."

"뭐야, 그거. 그렇게 억지로 어울려줄 필요까지는 없는 걸."

"그래도 그, 축하해주는 성의라는 게 있잖아. 적어도....."


.....아, 맞아. 그러고보니. 나는 꼭 했어야 했던, 지금까지 해주지 못했던 말을 이제서야 떠올리고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적어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하루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다지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들썩여가며 다시 말소리를 자아냈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주지 않으면. 그러니까.....고마워, 하루카. 생일 축하해줘서."


그러자 하루카의 표정이 재밌을 정도로 데굴데굴 바뀌었다. 놀랐다가, 말도 안된다는 듯 슬쩍 내게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이다가. 조금 불안하다는 듯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이제껏 봤던 것보다도 가장 환한 미소를 내게 보였다.


다행이야. 고맙다는 말을 하기에는,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아예 늦어버리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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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쨩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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