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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6, 2013 20:04에 작성됨.

주의 : 이 글은 현실 보정이 높은 글이니, 유의해주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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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대학교의 한 강의실. 에어콘 소리만이 시끄럽다. 교수가 모든 학생에게 제시한 발표 주제는 「꿈과 가상현실」이었고, 나는 전날 하루에 걸쳐 하얀 PPT에 가상현실에 관련된 내 꿈을 채워 넣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 꼬라지다. 질답 시간에도 아무런 질문이 없는 걸로 볼 때, 이 주제는 교수에게도 흥미를 끌지 못한 듯 하다. 이 과목도 좋은 학점을 받기는 글렀군.
드문 드문한 박수 소리를 받고 단상을 내려오면서, 나는 영화 '매트릭스' 를 떠올렸다.

내 머릿속에 있는 키아누리브스는 언제나 네오였다. 선글라스에 검정코트를 입고 당시 기술로는 획기적이었던 수많은 액션을 선보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매트릭스를 혁명이라고 칭송했었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 있어서 매트릭스는 현실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알약 두 개를 두고 고민 한다던지, 공중전화기를 잡고 순간 이동을 시도 한다던지, 돈벌레를 보면 배꼽에 들어 갈까봐 무서워 한다던지 하는 것들이 전부 일상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현실은 꿈으로 변해갔다. '그' 매트릭스는 이제 내 머릿속에만 존재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많은 사상들과 결합하여 '매트릭스' 는 새롭게 변모해갔다.

"인간의 데이터화?"

그날 밤 술자리에서 친구인 L에게 내 꿈에 대해서 짧막하게 이야기했다. 같은 매트릭스 세대였던 L은 이 꿈을 더듬어가면 그 단초가 매트릭스에서 나온다는 것을 눈치채지는 못한듯하다.
'인간의 데이터 화' 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인간의 뇌 정보, 유전 정보, 신체 정보 등 모든 정보를 흔히 우리가 말하는 '프로그램 데이터'로 환산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일단 데이터로 변한 '인간'은 가공도, 복제도, 저장도 자유롭다. 
그리고 이 꿈은, 아마도 모든 생체기술의 종착지일 것이다. 오늘의 발표를 다시금 되새긴다.

"데이터를 백업할 수도, 복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영생을 의미합니다. 사고가 나든, 노화가 되든 새로운 육체를 얼마든지 재 생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보만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공간 이동을 의미합니다. A지점에서 인간을 분해한 후, B지점에 같은 인간을 만든다면 그것이 곧 공간 이동입니다."

매트릭스 영화를 보면서 어릴 때부터 생각했던 것들이다. '분해' 부분은 조금 그로테스크 할 수도 있겠지만, 정 뭐하다면 동일한 신체를 여러개 준비해서 곳곳에 배치한 후 정신적인 정보만 이전 시키는 식으로 실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하루로는 준비하기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발표는 깨끗이 망했다. 이건 인정할 수 밖에 없겠는데.   

"허망하구만"  

L은 일축했다. 실로 그렇다. 착상은 인정받을 수 없다. 이는 기술적 사상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착상이 모두 현실이 된다면,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닐 것이다.
뭐어 아무튼, 하고 L은 화제를 돌렸다. 내 꿈의 불완전연소는 계속될 모양이다.

"아이돌 마스터라고 알아?"

새로운 미연시 이름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그 것'스러운'네이밍을 말하는 L은 미연시 오덕이다. 나쁘게 말하면 오타쿠, 멋드러지게 말하면 '2차원 시각 연구 및 여성 성 고찰 위원' 정도겠지.
일단 L이 나에게 그러한 네이밍을 스스럼없이 발했다는 사실은, 내가 L과 마찬가지로 미연시 오덕이거나, 오덕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거나 둘 중 하나라는걸 의미했다. 나는 안타깝게도 두 부류에 모두 속했다.
하지만 여긴 대학가고, 굳이 주변에 큰 목소리로 일코 해제의 위험 부담을 지고싶지 않았던 나는, '몰라 관심없어' 한마디로 일단 주제를 끊으려 했다.  

"아니아니, 이번에 XBOX로 발매되는 콘솔게임 이름인데…" 
 
아무래도 나의 의도는 L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 같다. 이제는 편하게 포기하고 맥주를 들이키면서 L의 말을 경청했다. 
L의 말을 종합해보면, '아이돌 마스터'는 기본적으로 육성 시뮬레이션 이라고 한다. 육성 시뮬레이션 하면 떠 오르는건 프린세스 메이커 밖에 없는데.
일단 아이돌 마스터니까, 프린세스가 되는게 아니라, 아이돌을 정점으로 만드는 게임이겠지. 뭐 일단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을 미친듯이 좋아했던 나에게는 솔깃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L은 그 근처까지 파악하고 나에게 이 화제를 던졌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유감일세 L군, 나는 콘솔게임을 안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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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지나고, 또 계절도 늦더위가 가셔 제법 쌀쌀해졌을 무렵. 군 복무도 마친 나와 L은 오랫만에 만나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시덥잖은 - 주로 누구의 상관이 더 쓰레기였나 -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신앙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군대에 있는 동안에 성당을 다녔었다. 딱히 신을 믿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의외로 복잡한 군대 생활 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단순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은 거기 정도 뿐이었다.
반면, L은 굳이 구분하자면 유신론자이다. 보통 유신론자를 상대로 하는 신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스럽기 마련이지만, 나와 L의 사이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신 이라는건 부처도 있고, 예수도 있고, 알라도 있고, 뭐 가지가지 있잖아"

"그렇지"

기독교를 믿는 사람 치고는 시원한 대답이라 마음에 들어. 따위를 생각하면서 나는 말을 계속한다.

"하지만 신 이라는건 여러 명이 있으면 모순 아냐?"

"그런가?"

단락적인 사고지만, 신은 만능이라는 일대일 대응을 생각해보면(오히려 신이 만능이 아니라면, 신이 아니겠지) 신이 여럿이라면 그 만능 또한 여럿이라는 소리가 된다.
A 라는 신이 사용하는 권능과 B 라는 신이 사용하는 권능이 항상 일치하고 방향성도 같다면 문제가 안되겠지. 
하지만 이 세상 종교에 배타적인 교리들이 서로 상충한다는 사실이 존재하는 한 그건 있을 수 없고, 결국 모순인 것이다.
쉽게 말해 가령 A신이 나를 믿으라, 하고 B신도 나를 믿으라 한다고 생각해보자. 한 사람이 A 를 믿는 순간, 배타적인 두 교리 속에서 B는 자연스럽게 부정 되고, 이는 B신의 전능함 또한 부정 된다는 의미이다.
토착 신들처럼 '어느 지역' 에 만 해당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던지, '어느 분야' 에 만 해당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던지 하는 식으로 다신교를 믿는 경우에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나와 L은 지금 유일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즉 유일신은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엔 유일신이 참 많기도 하지.

"있을 수 있네"

친구는 또 시원스레 긍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시덥잖은 논의로 친구가 신앙을 바꾸진 않을 것이다. 
신앙이란 건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러면 말이야, 이런 건 어때"

여기서 나는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유일신은 하나만 존재하는데, 유일신이 여럿이라는 모순. 
그렇다면 실제로 사람들 각자가 믿고 있는 신은, 각자가 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결론짓는다면 이 모순은 해결된다.
신의 자비로운 모습을 보는 사람들, 신의 정의로운 모습을 보는 사람들, 신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 그 모두가 '자신이 믿는 신 만을 믿는다'는 건…그건 이미 '죽어버린 신'이 아닌가.
신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습니다 - 라는 유명한 문구는 이 사실을 합리화 하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단수가 아니오…?"

느닷없이 사각에서 찔러 들어온 말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터졌다. 드래곤라자 역시 나와 L의 추억을 묶어주는 단단한 끈이다.  
그래. 유일신은 단수가 아니었던 모양이네.



알코올과 함께 이야기는 자꾸만 튀고, 시점은 자꾸만 과거로 거슬러갔다. 그러다가 또 예의 '꿈' 이야기가 나왔다.

"가상현실?"

"그래"

몇 년 전의 발표 주제였던 '꿈과 가상현실' 중에서, 이번엔 가상현실 부분에 대해서 L에게 이야기했다.
'인간을 데이터 화' 할 수 있다면, 어떤 '데이터로 이루어진 가상의 공간' 안에서 그 '데이터가 된 인간'이 실제 세계처럼 인지하고 살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그 어느 날 인류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모든 인류를 담을 수 있는 컴퓨터와, 그 컴퓨터를 돌릴 수 있는 반 영구적인 동력 원,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인간' 들이 있다면, 영원한 삶을 넘어 영원한 낙원 역시 가능할 것이다.

몸이 죽어도 살아있는 인간. 육체가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인간. 그것이 내 머릿속에 있는 매트릭스의 완성 형이었다.

L은 옛날과 같이 '허망하구만' 같은 소리를 하진 않았다. 대신에 술잔을 굴리면서 그는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아이돌 마스터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 거 기억나?"

"…응? 아, 어"

군대에 있을 때, 읽었던 게임 잡지에서 아이돌 마스터가 어떤 게임인지 자세히 소개해주는 코너가 몇 달 씩이나 연재 되었었다.
흥미에 항상 목 마른 군인이었기에, 결국 몇 번이고 읽어버려서 대략적으로 어떤 캐릭터들이 있는지 - 메인 히로인의 이름이 아마미 하루카…던가? -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L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도 비교적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L은 말을 이었다.

"인간이 데이터로 바뀐다면, 애초에 데이터였던 그녀들은 대체 무엇일까?"

경우가 다르다, 고 생각했다. 인간이 데이터로 바뀐다면,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는 온전히 잴 수 없을 방대한 양의 정보 일것이다. 패턴화 라는게 가능하다면 간단해 지겠지만 인간에게도 그것이 적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하지만 그 '아이돌' 들은 결국 인간들이 만들어낸 정보에 불과하다. 거기에 팬심이라는 살을 붙여도 마찬가지이다. 잘 만든 피규어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팬픽, 팬아트들이 그녀를 그리고 또 그려도, 그것은 그들 각자 속에 있는 '아이돌'이지, 그녀 본인은 아니다. 결국 아까 말했던 '신'의 경우와 마찬가지.
아무리 그녀들을 숭배해도, 사랑해도, 아껴도 그녀들은 우리와 같은 차원에서 만날 수 없는 존재들인것이다.

그녀들은 '아이돌'이 될 수는 있어도, '인간'이 될 수는 없다. 피그마리온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만약 인간이 데이터 화 된 세계에 존재한다면 그녀들도 같은 '데이터' 로서, '인간' 으로서 마주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믿는 신이 아닌 '신' 그 자체에 마주쳤을 때, 인간은 과연 또다시 자신만의 형틀로 신을 찍어내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그녀들에게 있어서도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이미 '죽어버린 그녀'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확신이 없다.

너는 지금 모든 2차 창작자들을 적으로 돌렸어. L은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부딫혀왔다.

----- 

다시 또 몇 년이 흘렀다.

내 인생이 위인전 이었다면 '꿈' 을 위해서 심리학이나, 뇌 공학등을 연구하는 대학원생으로 클래스 체인지를 했겠지만, 아쉽게도 여긴 책 밖이었고 나는 기술자가 되기보다 기술자를 고용하는 사람이 되는 길을 택했다.
나 혼자서 할 수 없다면,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돈을 엄청 들여서 연구소를 만들어 인재들을 고용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믿으며 고시 공부를 시작해 합격한 후, 취직한 로펌에서 또 몇 년. 나는 매달 나름 큰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아직 꿈과는 거리가 먼 자산 사정이지만, 언젠간 이루어지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니코틴 분말을 허공으로 쏘아 올리는 것만이 취미인 시시한 남자가 되어버렸다. 
요즘엔 어쩐지 '신'도, '데이터'도 아무래도 좋다고 느껴지는데…그렇게 생각하며 담배를 꺼내 입에무니 아내가 끊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덕분에 아침부터 별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와 같이 일로 바쁜 와중에 오랫만에 L에게 짧막한 문자가 왔다.

「아마미 하루카 은퇴」

잠시, 정리하던 문서를 워드에 저장하고, 나는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몇 년전일까? 애니메이션으로 나온걸 계기로 아이돌 마스터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었다. 그 후, 애니메이션, 게임, 소설, 팬픽, 팬아트, 라디오 등을 점점 섭렵해가면서, 내 마음속의 '아이돌' 은 점점 자라났다. 
그녀들의 '얼굴' 그녀들의 '목소리' 그녀들의'프로필' 그녀들의 '성격' 모든 걸 줄줄이 꿰고 있었다. 글도, 영상도 몇번은 직접 쓰고 만들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끝이다. 생각보다는 충격이 크지 않았다. 내 꿈과 함께 열정도 무뎌진 걸까.  
담배 연기는 입김과 같이 하늘로 빨려 들어갔다. 하루가 또 이렇게 가는구나.


퇴근하니, 아내는 벌써 자고 있다.
어쩐지 배가 고파서 라면을 하나 끓여 먹고 나니 문득, 낮에 받았던 문자가 떠올라 서재로 향했다.
서재의 책장에는 온갖 법률 서적이 꽃혀 있고, 책상 위에는 많은 서류들이 쌓여있다. 그리고, 그 옆 구석에 하루카의 피규어가 단 한 개 서있었다.
결혼하면서 많았던 피규어들은 전부 처분 되고, 딱 한 개 만을 겨우 남길 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저 피규어이다.
모처럼이니 피규어를 정성껏 닦아준다. 그러면서 동시에 발가락으로 서재에 있는 컴퓨터를 킨다.

피규어를 다 닦은 후, 인터넷으로 아이마스에 대해서 검색해 보았다. 오, 검색 순위가 높다.
아이마스는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점점 1세대 캐릭터들이 하나 둘 씩 은퇴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제각각이다. 성우의 노쇠화, 소재의 고갈, 범람하는 새로운 캐릭터, 그에 따라 요동치는 팬덤.
한 때는 세대 교체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치열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대체로 수긍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마미 하루카 만큼은 '아직도' 현역으로서 출연하고 있었다. 그래. 어제까지는.
     
『아마미 하루카 는 영원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아이마스 때문에 배우게 된 일본어를 통해, 오랫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가 나에게 전달된다.
하루카, 내 마음속에 있는 하루카는 이미 하루카가 아니게 된다고. 
그것도 모르다니 정말로 바보구나. 내가 알려줄게. 
너희들은 말이야…


너희들의 얼굴은 그림과 그래픽 이란다.

너희들의 목소리는 성우의 연기로 이루어졌지.

너희들의 프로필은 제작진의 설정이고,

너희들의 성격은…우리들의……

그리고…, 그리고…


아아, 그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덕질도, 영원한 꿈도… 없다.

하지만… 좀 더 꿈을 꿀 수 있어도 되잖아……



흐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화면을 보면서, 나는 단지 계속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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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교체에 대한 제 감상을 글로 써보고 싶었더니, 이런 괴작이 나와버렸습니다...
난 몰라(무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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