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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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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4, 2013 00:08에 작성됨.

 제 1부: 셋이서

<3화>


슬슬 짧은 태양빛도 내일을 위해 쉬려는 모양이다. 좀 더 일하라고, 추워 죽겠으니깐.

쿠로이에게 오겠다는 확답을 받아낸 후, 적당히 저녁시간까지 시간을 때우러 캠퍼스를 쏘다니다가 하필 지도교수님과 맞닥뜨린후에 끌려가서 이 시각까지 설교당했다.

'4학년씩이나되었으니정신차리고좀생산적인일을찾아보게부모님생각도해야지같은학년인쿠로이군을좀본받지그러나' 

같은 아마도 무슨 마법주문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지만, 내용까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저나 슬슬 시간이니 가보긴 해야겠는데, 그 전에 집에 전화하는걸 잊고있었음을 깨달은 나는 공중전화를 찾아 밖으로 나왔다.

지금까진 딱히 늦게 들어간다고 집에 전화한 적은 없었지만, 교수님의 설교를 통해 나도 무언가 한 걸음 성장한게 아닐까 싶다. 결코 어머니의 등짝때리기가 무서워서 굳이 전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추우니 짧게 하고 들어가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공중전화로 향하던 나에게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



뒤를 돌아보니 보인건, 꽤 평범하게 생긴듯한 여자애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인상은 평범하지만, 꽤 예쁘다.

어깨를 살짝 넘는 길이의 단발이 겨울 바람을 따라 살랑거린다. 약간 불안해보이는듯한 입꼬리.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오른쪽 눈가의 점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내가 '예쁘다'고 생각한 부분은, 그녀의 부드러운 듯한 연 갈색 눈동자와 그 눈이 머금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었다. 저 빛의 정체가 신경 쓰이지만, 그것보다.



"저기… 중앙강의실이 어디인가요?"



내가 모르는 얼굴에다가 우리 과 건물 앞에서 중앙강의실을 찾는걸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우리 과의 신입생인 모양이다. 

문득 장난기가 들었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혹시 1학년? 나도 1학년인데…"

"어? 응, 시노자키 아이치라고 해. 반가워!"



…바로 말을 놓다니. 첫 인상과는 달리 적극적인 부분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저 빛의 정체는 숨겨진 '적극성' 이었는가. 

하지만, 이로써 내 계획은 한결 편해졌다.



"타카기 준이치로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해"

"타카기군 이구나. 나도 시노자키라고 불러줘!"



아~ 살았다. 사실 아직 대학교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어~ 따위의 태평한 소리를 하던 시노자키가 갑자기 표정을 다시 울상으로 바꾸었다.



"아, 그런데 타카기군도 중앙강의실이 어딘지 모르는구나. 우리 어쩌지…"

"……"



시노자키의 머릿속에는 이미 나까지 '이대로 갔다간, 모임에 늦어서 선배님들에게 혼날'멤버에 포함된 듯 하다. 

중앙강의실이라고 이름 붙었으면 보통 건물 1층이나, 건물의 중심에 있을거라는 발상을 하지 않나? 아니면 단순한 길치일지도 모르겠는데.



"걱정마, 둘이서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을거야"

"…그렇네!"
 


이번엔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을 앞둔 모험가의 표정이다. 참, 표정이 데굴데굴 바뀌고 참 재밌는 애야.

적당히 중앙 강의실과는 떨어진 부분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마주친 류스케에게 - 시노자키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 윙크를 하며 중앙 강의실이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고 졸랐다.



"선배님~, 죄송한데 중앙 강의실이 어딘가요~?"

"………"



어째 류스케는 아침마냥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지만, 그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했다. 


-----


"중앙강의실에 도착~!"

"예이~!"



짝, 하고 손바닥을 부딫히고 싱긋 웃는 시노자키. 어, 지금 살짝 귀여웠다.

강의실을 살짝 들여다보니, 안에는 환영회가 이제 막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이제 데리고 들어가서 깜짝카메라를 공개할 일만 남았……아!

이런, 집에 전화하는걸 깜빡했다…



"그럼 여기까지, 좀 있다가 봐!"

"…에?"



어쩐지 멍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바람과 같이 달려나갔다. 

…막상 전화하니까, 어머니는 뭣하러 전화했냐고 하셨다. 교수님. 교수님이 틀렸어요.


-----


그리고 저녁, 과 건물 중앙강의실.

평소엔 쓸데없이 넓었던 강의실이, 지금은 그 많은 책상을 모조리 치우고 테이블을 몇개 두었는데도 북적거린다. 벌써 각자의 소개가 끝나고 술도 몇 순배 돌았는지, 싸구려 술 냄새가 고약하다. 

이미 술로 빨개진 요시자와는 만화 잡지를 돌려주면서 '이번 달 신문의 작품소개란, 결정이네'란 한마디를 남기고 1학년 후배들을 취재하러 갔다. 입학에 대한 새로운 감상같은걸 묻고 싶은거겠지.

아, 쿠로이다.

공중전화로 집에 연락하고 온다던 쿠로이가 들어왔다. 쿠로이여도 집에 전화는 하는구나.

강의실 문이 열리자 누가 왔나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린 학생들 거의 대부분이 그 대로 얼어붙었다. 쿠로이를 중심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으나 곧 이어, 후배들이 쿠로이에게 줄지어 인사를 청한다. 

1학년들이 당황하잖아. 누가 보면 교수님이라도 온 줄 알겠어. 

아무튼 주변을 둘러보던 쿠로이가 내 쪽에 있는 4학년 테이블로 와서 앉자, 분위기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술의 힘은 대단해.

 

"네 녀석은 4학년인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건지"

"자자 그러지 말고 한잔 받으시게"



오, 생각보다 잘 마신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동기녀석에게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나저나 4학년이라……



"쿠로이. 너는 졸업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가업을 이을 생각이다"



엥?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에 놀랐다. 쿠로이의 집안은 무슨 일을 하는걸까? 대학생활을 이렇게나 착실하게 해놓고 가업이라니.

물어봤지만, 쿠로이는 '비밀이다.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말도록' 이라는 한마디로 일축해서,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옆에 있는 동기가 넌지시 연예계 프로덕션을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헤에. 쿠로이와 연예계인가.

집이 부유하다고 하는걸로 봤을 때, 꽤나 잘 나가는 프로덕션임이 틀림없다. 혹시 이녀석도 이미 그 쪽 분야의 교육을 집에서 받고 자랐다거나 그런건가?


「잘나가는 프로덕션의 자제 쿠로이 타카오와, 집에서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는 아들 타카기 준이치로」


…한번도 붙어본적 없는 쿠로이에 대해, 이유를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든다. 

아니야. 잘 생각해 보는거다, 준이치로.

방금 전에 봤던 쿠로이의 표정은… 내 감이 맞다면, 이 녀석은 가업을 잇는걸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긴 대인 기피증이 연예계 영업이라니, 무슨 우스갯소리 겠냐만. 하하하.



"선.배. 여기있었구나~ 자, 인사드려 4학년 선배님들이야"



그러던 와중에, 뒤에서 류스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조용히 해, 난 지금 자기합리화작업에 바쁘다고.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시노자키 아이치라고 해요"



……아.



머릿속에서 빠르게 패배를 선언하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싱긋'웃는 시노자키가 있었다.

게다가 벌써 술도 어디선가 한잔 걸친 모양인지 혀까지 살짝 꼬부라졌다. 이 상황은 위험해.



"처음뵙겠습니다. 타.카.기.선.배.니임."

"……"



류스케 녀석이 뒤에서 히죽대고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지적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나는 지금 수세에 몰려있다.

아… 지금, 시노자키의 눈동자가 엄청 빛났다. 이런, 저 빛의 정체는 사실 장난기였던거냐!



"아~~~! 선배니임 혹시, 어디선가 만난 적 없으신가요오?"

"사, 사람 잘못보신게…"

"……아! 준쨩! 준쨩이구나? 나야, 나. 아이치!"

"…하?"



류스케 녀석은 이제 아얘 배를 잡고 웃고있다. 망할 놈.

아무튼 이 술에취한 19살짜리 여자애를 누가 좀 어떻게든 해봐. 

시노자키는 10년간 떨어졌다가 상봉한 가족인양 내 손을 잡고 연신 우는체를 한다. 울면서 뭐라뭐라 하는데 솔직히 들어줄 정신이 없다.

윽, 쿠로이까지 입꼬리가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어. 이 녀석은 분명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음이 틀림없다. 알면 좀 살려줘라.



제가 잘못했습니다! 


-----


"쿠로이 타카오다"

"시노자키 아이치 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쿠로이 선배님"



어째 몹시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쿠로이씨.

설마, 환영회에 억지로 오게된 것에 대해 저에게 원한같은걸 품고 계신건……맞겠지요.



지금 상황을 설명하자면, 아까 전의 한바탕 소란은, 돌아온 요시자와에 의해 간신히 종료되었다. 

류스케는 은근슬쩍 테이블 반대편 나와 제일 먼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겨우 제정신을 차린 시노자키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이번엔 언제 그랬냐는듯이 얌전히 내 옆의 빈 자리에 앉아 술을 홀짝이고 있다.

솔직히 지금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는 시노자키가 두렵고 무서워서 어쩔수가 없다.

아무튼, 겨우 침착해진 분위기속에서 류스케 녀석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함인지 시노자키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야 제발 냅두라고, 괜히 건드리지 말고.



"노래…요"

"노래?"



취미같은걸 묻자, 나온 대답은 노래였다. 

흐음, 노래…… 노래란 말이지. 



"네, 저 노래를 정말 좋아해요!"



아, 또 눈이 빛났다. 이번엔 '동경'인가, 아니면 '즐거움'? 

잘 모르겠어. 내 예감은 반응하지 않는다.

모모에쨩의 광팬인 류스케가 그 말을 듣고 흥분하더니 가방에서 「모모에쨩 노래리스트」라고 적혀있는 공책을 꺼낸다. 너, 가방에 그런걸 넣고 다녔냐.

류스케는 시노자키 옆으로 오더니 리스트를 하나씩 가리키면서, 시노자키에게 부를줄 아는 노래가 있냐고 물었다.  

시노자키는 우물쭈물하다가, 이 곡이라면…… 하더니 곡 하나를 골랐다.



겨울색(冬の色)



흐음… 겨울색이라…

모모에쨩의 곡은 물론 모두 좋고, 전부 유행했지만 '그 중에서는' 조금 덜 히트한 곡이다.

다른 여자와 바람피느라 오랫동안 만나지도 못하는 남자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을 노래하는 곡.

지금까지 받은 이 애의 인상에 따르면 '어느 여름날의 경험' 같은걸 부를 줄 알았는데. 아니 솔직히 종잡을 수가 없어서, 뭐라고 못하겠지만.

귀여운 후배에게 노래를 시키려고, 동기녀석과 류스케가 온간 현란한 말빨로 밑밥을 깔기 시작하고 있고, 요시자와는 담배를 피러 나간듯하다.

쿠로이는… 별로 흥미없다는 듯이 술을 마시고있었다. 하지만 눈은 계속 이쪽을 보고있는걸 보니 아주 흥미가 없는건 아닌 모양이다.

시노자키는 난처한듯이 나를 보면서 웃고있었지만, 함락은 머지않아보였다. 난 도와주지 않겠다구.



『다음은, 신입생들의 장기자랑 경연이 있겠습니다! 신입생 여러분들은 무대쪽 문 밖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 강의실 강당쪽에 마련된 좁은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은 2학년이 신입생 장기자랑을 알리는 멘트를 외쳤다.

장기자랑인가. 나는 특별히 보여줄만한 장기가 없어서 마술을 3일 벼락치기로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벌써 3년전이구나.

아, 시노자키가 '그럼 장기자랑 하러 갈게욧!' 하면서 도망쳤다. 얼굴이 빨간건 술기운 때문만은 아닐것이다.

류스케와 동기녀석이 아 재밌었어~ 하면서 하이파이브를 나누고있고, 쿠로이는… 아,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역시 기대하고 있었잖아, 너. 

장기자랑은 신입생 전원의 이름의 50음도 순으로 진행되는데, 사회자 녀석의 변덕인지 올해는 50음도의 역순으로 출연하는듯하다.

음 아이치…면 거의 맨 마지막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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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자랑도 거의 끝이났다. 주로 노래를 부르거나, 만담을 하거나, 심지어 차력을 선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ㅡㅡㅡ집에있는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시면 우실거라고? 
 
ㅡㅡㅡ어머니 춤추느라 집에 안 들어 오시는데요

ㅡㅡㅡ와하하하하하.


사회자 녀석은 장기자랑이 끝난 신입생을 대상으로한 짧은 만담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아직 시노자키는 나오지 않았다. 우리 테이블에 있는 멤버들은 어쩐지 모르게 시노자키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다.

쿠로이는 삐삐가 울리는걸 확인하더니, 그대로 무시했다.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거야 대체.



『자, 그럼 마지막입니다! 참가번호 27번, 시노자키 아이치~!』



오오, 나온다.

옷 위에 입고있던 외투를 벗은채의 하얀 원피스 차림인 시노자키는, 쭈뼛쭈뼛한 걸음으로 무대위로 올라섰다. 어쩐지 불안한 발걸음인…


ㅡㅡㅡ쿠당탕!


아… 넘어졌다…

1인 개그 인가요? 1인 개그 입니까? 하면서 용서없이 태클을 집어넣는 사회자.

더 위축된 시노자키는 일어나서 '…노래할게요' 한마디를 겨우 말 할 수 있었다. 

아니, 저래가지고 노래는 무리아닐까.

테이블을 둘러보니, 전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 수있었다. 뭔가 떨떠름한 듯한 표정들.



심호흡을 하던 시노자키는 이 쪽을 바라본다.

보고 있다는 신호로 손을 흔들어준다.

약간 떨어져 있어서 표정까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살짝 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힘내라고, 시노자키.



불이 꺼지고


카세트 테이프가 감기기 시작한다.


빛이 내려온다.


곡이 흐른다.


시노자키는 눈을 감는다.





…시노자키는 노래한다.





그 순간, 

처음 시노자키를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신경쓰였던 빛의 정체를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것은, 적극적인 성격도, 장난스러움도, 동경도, 즐거움도 아니었다.


아득히 멀다고 생각했던 그 것.

모모에쨩… 아니, 오로지 '야마구치 모모에' 만을 위해 만들어져, 존재하고 있던 단어. 

아이돌(idol)

그 단어의 울림은, 지금 내 곁에 있었다.



♬겨울색(冬の色)


당신으로부터 허락된 립스틱의 색은

탱자나무의 꽃보다도 희미한 향기입니다


입맞춤도 주고받지 않는 깨끗한 사랑은

사람으로부터는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일까요


언제라도 당신이 슬플 때는 나도 어딘가에서 울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에 의심 따위 들어갈 수 있는 틈새는 없습니다


당신이라면 사이좋은 친구에게조차도

미소짓고 소개 할 수 있는 나입니다


당신으로부터 받은 편지 안에

아무렇지 않은 듯한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치스러운 사랑은

세상에 드문 일일까요


갑자기 당신이 죽거나 하면 나도 바로 뒤따르겠지요

사랑하는 마음에 망설임 따위 느끼는 시간은 없습니다


당신이라면 다른 아이와 놀고 있는 곳을 

찾아내도 기다릴 수 있는 나입니다

.
.
.

한잔을 채 마시기도 전에 무언가에 취한 것일까?

나는 몹시 울었다.



텅 빈 사무소에서 흘러나오는 TV속엔, 더 이상 모모에쨩은 없었다.




   1982년 4월 3일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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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를 글로 옮기기란 참으로 어렵군요.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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