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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편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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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07, 2018 08:48에 작성됨.


어느 날 밤의 일이었습니다. 깊게 잠들어있었다면 결코 듣지 못했을 작은 소리가 들려, 저는 살며시 눈을 떴습니다. 아직 완전히 잠든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깨어있다고는 할 수 없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저는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어떤 형체를 목격했습니다.

불 꺼진 방. 그 안을 잠식하고 있는 어둠. 그렇지만 그 안에 스며들어있는 아주 약간의 빛. 그 빛에 부딪쳐, 대략적인 윤곽을 드러내는 그 형체. 하얀색. 흐드러진 은빛 머릿결.....

시죠 씨.....?

가물가물했던 의식이 좀 더 뚜렷해졌습니다. 저는 눈만으로 어둠에 녹아들어 사라져가는 시죠 씨의 뒷모습을 쫒으며, 이부자리 주변을 더듬거려 휴대전화를 주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혹시 작은 빛이라도 새어나갈까 조심조심 시간을 확인해봤습니다. 어라, 새벽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른 때 같은데요.

시죠 씨,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일어나신 걸까. 음.....잠깐 화장실이라도 갔다오시는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저는 눈을 감고 도로 잠들려고 했지만, 한 번 깨어버린 이상 다시 잠든다는 건 좀 어려운 일. 얼마 안 가 저는 다시 눈을 뜨고는, 이따금 잠꼬대가 들려오는 것 외에는 조용한 방을 둘러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푹 잠들어 있는 익숙한 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뭐라 뭐라 웅얼거리는 미키 쨩과는 달리, 정자세로 누워 규칙적인 숨소리 정도만 내고 있는 치하야 쨩. 이불 같은 건 벌써 걷어차버린지 오래인 아미 쨩, 마미 쨩.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가장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비어있는 자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시죠 씨.....조금 늦는 것 같은데.

화장실이 아닌 걸까? 그럼 어딜 가시는 거지? 이렇게 늦은 시간에.....아무리 시죠 씨라고는 해도, 위험하지 않을까.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던 저는 몇 번을 뒤척이며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습니다.

역시 따라가야겠어, 라고.....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마저 깨어날세라, 저는 스리슬쩍 이부자리에서 몸을 빼내고 휴대전화를 쥔 채 일어났습니다. 그러고는 최대한 소리없이 옷매무새를 점검한 뒤, 조심스럽게 바닥에 발을 딛었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미닫이 문을 열어 불 하나 없이 깜깜한 복도를 향해 걸어나갔습니다.

....

한밤 중의 합숙소는 무서울 만큼 고요했습니다. 제 자신이 내는 아주 약간의 발소리마저 겁이 날 정도로요. 그렇지만 저는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쭉 걸어갑니다. 방 안에 사라지고 없는 시죠 씨를 찾아나섭니다. 걱정만이 아닌 호기심도 같이 섞여들어간, 다소 불순하다 할 수 있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지만, 아무래도 좋아. 지금은 그저 시죠 씨를 찾고 싶을 뿐입니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시죠 씨의 모습을.

저벅, 저벅. 저벅.....저벅.....툭.

오늘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복도를, 잔뜩 움츠린 채 걸어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의외라면 의외라 싶을 정도로, 저는 금방 시죠 씨의 행방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걸음을 멈춰선 곳보다 조금 앞. 복도를 따라 쭉 줄지어진 유리 미닫이문들 중에서 단 하나 열려진 문. 그 문틀이 되는 쪽에 시죠 씨가 걸터앉아있었습니다. 아주 약간 드러워진 달빛을 받고 있는 옆모습은 마치 조각상과도 같이, 어딘가 생기없이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좋을까.

저는 그 이상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바로 옆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흐릿한 유리창 너머로 야윈 달이 보입니다.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처럼 보이는 달은 짙게 깔린 구름들 사이로 혼자 외롭게 떠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시죠 씨를 보았습니다. 시죠 씨는 제가 근처에 있다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는 듯, 그저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필시, 달을 보고 계시는 거겠지요.

시죠 씨는 왜 저러시는 걸까요?

방에서 몰래 빠져나가는 게 이번 한 번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럼 대체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요.

그리고 가장 무엇보다도.

어째서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요.

저렇게, 기운없는- 아니, 기운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마치 살아있는 것이라고 느껴지 않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그런 모습을.

의문점들이 차례차례 떠올라, 다시 제 안에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너무 많이 쌓인 탓에 그만 목 끝에서 넘실거리는 그것들을, 저는 겨우겨우 꿀꺽 집어삼켰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게 좋을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 시죠 씨가 날 알아채게 하는 것도 괜찮을지도. 발소리를 일부러 조금 크게 낸다던가 해서.

어떻게 해야한다는 생각은 솟아났습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의지는 부족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가만 서 있기만 할 뿐입니다. 언제나와는 조금 다른 시죠 씨를 눈 앞에 두고.

.....그냥 모르는 척 잠자리로 돌아갈까?

불현듯이 튀어나오는 또 다른 방안은, 그다지 내키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정말, 어떻게 해야하지.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시죠 씨가 먼저 절 알아채주거나 했으면.....유키호, 라고 제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속상함을 담아 시죠 씨를 바라봤지만, 시죠 씨는 끝까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저벅.

언제까지 지속될 지 알 수 없는 대치 상황 속에서, 답답함을 이기지 못했던 저는 겨우 앞으로 한 발자국 떼었습니다. 능숙하게 기척을 숨기는 건 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나고마는 아주 작은 발소리. 시죠 씨라면 그조차 알아챘을 터였건만, 어째서인지 아무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그저 달만을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몇 걸음 더 전진하기로 했습니다. 어둠과 달빛이 아슬하게 맞닿아 있는 곳을 경계로 해서, 그보다 살짝 뒤에 도달한 저는 다시 한 번 시죠 씨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아까부터 쭈욱 시선은 저멀리 하늘에 걸려있습니다. 일부러 무시하는 거라기보다는, 아예 저를 눈치채지도 못한 것 같은 모습. 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꾹 다물었던 입을 조금씩 벌려, 소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시, 시죠 씨."

그러자 시죠 씨는 일순 몸을 작게 떨더니, 느릿한 움직임으로 겨우 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살짝 올렸던 고개를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역시 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줏빛 두 눈을 제게로 향했습니다.

"네. 무슨 용무인가요."

그와 때를 거의 같이 해서 흘러나오는 말소리는 너무나도 평탄했습니다. 억양과 높낮이만 최저한으로 남아있고, 그 외의 것들이라고는 전부 잘려나간 것만 같았습니다. 말소리만 이상한 게 아니었습니다. 저를 보는 두 눈도, 제게 보이는 얼굴도 마치 텅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감정 같은 건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듯. 마치 인형과도 같이, 기계와도 같이.

시죠 씨는 침착하고 정숙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감정하지는 않으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 시간에 나와계신가요? 무슨 일 있으세요? 어째서 그러시는 건가요?

다음으로 꺼냈어야 할 다음 말들은, 입 안에서만 맴돌다 사그라들고 말았습니다.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선 저는 두려움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눈빛을 말 대신으로 보냈습니다. 시죠 씨는 그 이상 말을 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뭔가 말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그것은 저를 배려해서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말을 꺼내는 일 없이, 어디까지나 응답만 해주겠다는 식인 듯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뭘 더 말해야 할까요.

어떤 말을 꺼내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습니다. 내용은 다르긴 하겠지만, 감정이 없다는 건 똑같은 말들이. 저는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입술을 꾹 깨물었습니다. 그런지 조금 지나자, 시죠 씨의 시선은 다시 하늘로 향했습니다. 용무가 없다면 그만 떠나라는 듯이. 달빛이 머물러 조금 밝은 앞과 그렇지 않은 뒤. 저와 시죠 씨 사이를 경계로,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읏.....!"

왈칵하고 흘러나오려는 울음을 겨우 참아내며, 등을 돌렸습니다. 어둡고 긴 복도로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어둠 속으로 완전히 제 자신을 감춰버릴 때까지도, 시죠 씨가 저를 불러세우는 일은 없었습니다.

.....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식어버린 제 자리에 도로 들어가 이불을 둘러쓴 것까지는 머리 속에 남아있었지만, 나머지는 기억이 다소 희미합니다. 확실한 건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아침은 평등하게 찾아왔다는 것. 그리고 시죠 씨가 언제나의 시죠 씨로 돌아와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조용하고, 기품있고, 차분하고. 그러면서도 웃을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어쩌면, 돌아온 게 아닌 걸지도 모릅니다. 그 하얀 도자기 같은 얼굴에, 희노애락이라고 하는 감정들의 물감을 능숙하게 칠하고 있는 걸지도요. 이런 의심이나 하는 제가 불경스럽게 느껴졌지만, 한 번 의식해버린 이상 그 날 밤의 기억은 도저히 머릿 속에서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시죠 씨 본인에게 진실을 듣는 게 어떨까.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혹여 시죠 씨에게 있어 그, 다소 민감하다 싶은 소재일수도 있으니까요. 함부로 그런 걸 건드리기라도 한다면.....아니,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또 한 번 그 때의 시죠 씨와 마주하게 될까봐. 그래서 저는 그 날의 풍경을 언제까지고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겨놓기로 했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의심과는 별개로. 그랬는데.

정말, 운명의 장난이기라도 한 걸까요. 저는 다시 한 번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합숙이 끝나, 모두 사무소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때. 그래요, 바로 눈 앞에.

"....."

표정없는 시죠 씨. 잘 만들어진 밀랍인형과도 같은 시죠 씨. 그 너머로 보이는 반쯤 열려있던 창문 사이로 말랐지만, 조금 차오르려고 하는 달이 엿보입니다. 이따금 부는 차가운 밤바람. 작고 낡은 사무소 안 쪽을 맴돌다, 주변의 공기에 녹아들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새까만 하늘. 한참 늦은 밤. 충분히 익숙한 사무소가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숨겨진 공간으로 느껴질 정도로, 주변에 흐르는 기이한 분위기. 저는 빛이 비껴나간 곳에서 멍하니 서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시선을 흘렸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거람. 나, 나는 그냥.....깜빡하고 놓고 갔던 노트를 도로 챙겨오려고 했던 것 뿐인데.

그런데,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대랑.....아니, 아니야. 시죠 씨야말로, 지금은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래, 내가 미울거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불청객처럼 나타나버렸으니까.....아니야. 지금의 시죠 씨는, 미움조차 제게 할애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

아니, 지금뿐만 아니라, 어쩌면.....저는 떨리는 시선을 다시 한데 모아, 어둠 속에서 홀로 달빛을 작게 머금고 있는 시죠 씨에게로 향했습니다. 얼마없는 빛에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은, 여전히 흔들림없는 무표정. 일상 속에서 봐왔던 시죠 씨의 따스한 미소, 감정이 담겨 있던 목소리, 풍부하다고는 하지 못해도 생기가 느껴졌던 몸짓. 그 전부가 거짓말과도 같이 느껴질 정도로.

언제나의 시죠 씨. 그 날 밤과, 지금 이렇게 다시 마주하는 시죠 씨. 과연 어느 쪽이 진짜일까. 만약, 저 가면과도 같은 얼굴이야말로 진정한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럼 시죠 씨는 모두를, 저를 어떻게.....저는 그런 시죠 씨에게 있어서, 과연 어떤 존재가 되는 걸까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갖지 못하는. 하다못해 길가의 돌멩이조차 될 수 없는, 그런.....?

생각이 점점 진행될 수록 불안함과 의심이 부풀어올라, 눈이 저절로 뜨끈해졌습니다. 저는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눈물, 시죠 씨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평소의 저는 참된 저, 라고는 할 수 없겠군요. 이걸로 모든 궁금증이 풀리셨습니까?"
".....네....?"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거기에는 등 돌린 시죠 씨가 보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표정.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은빛 머리칼이 그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흔들렸습니다.

의심이 진실이 되는 순간. 푹 박혀있었던 날붙이가 그만 쑥 뽑혀나가는 것만 같은 해방감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그 비어있는 틈새로 쓰라림이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리고.....마지막으로는. 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섰습니다. 그러자, 은의 장막과도 같은 시죠 씨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시죠 씨."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단번에, 시죠 씨를 불렀습니다.

"네. 무슨 용무인가요."

그러자 시죠 씨는 돌아보는 일 없이, 그 때와 별 다를 바 없는 평탄한 대답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어째서일까요. 저는 그 말투에서 약간의 서글픔을 느끼고 맙니다. 차를 마시고 난 뒤, 혀 끝에 조금 맴돌다 사라지고마는 쓴 맛과도 같은.

그래서.

그래서 저는.

앞으로 나아가보기로 했습니다.

느릿하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한 번 들어올린 발은 의외로 쉽게 앞으로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약간 궤를 달리하는 것만 같은 달빛의 영역. 거기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 저. 가지런히 정돈된 방을 흙투성이 발로 침범해버리는 것 같아 죄악감을 느끼면서도, 계속 두 번째, 세 번째 걸음을 이어, 시죠 씨와 맞닿을 거리쯤 되어서 겨우 멈췄습니다.

"있죠, 저.....그만 노트를 두고 왔어요."
"그렇습니까."

"시죠 씨, 혹시 노트를 본 적 있으신가요? 갈색 표지에....."
"기억에는 없군요."
"네에....."

몇 번 말을 걸어보았지만, 시죠 씨는 필요최저한의 응답만을 할 뿐. 어떻게할까. 망설이던 저는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시죠 씨는 무슨 일로 여기에 오신 건가요?"
"조금, 생각해볼 것이 있었기에."
"그런가요."

시죠 씨는 딱히 숨기는 것 없이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표면만을 슬쩍 떠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조금 더, 앞으로 가보기로. 그렇게 해서 시죠 씨 곁에까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 저는, 시죠 씨의 옆얼굴로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저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달님을 보고 있을 뿐인 자줏빛 눈동자. 멀리서 봤을 때는, 무감정하게만 느껴졌던 눈. 하지만 이렇게나 가까이서 바라보면.....

"당신은 두렵지 않습니까?"
".....두려웠어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말씀이군요."
"네."

왜냐면 알았으니까요. 시죠 씨가, 사실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물 하나 보이지 않는 눈이지만. 마치 철가면을 뒤집어 쓴 것만 같은 얼굴이지만. 구부러짐 하나 없이 꼿꼿이 허리를 펴고, 단정한 몸가짐을 하고 계시지만.

"저어.....그 때는 죄송했어요. 갑자기 뛰쳐나가버려서."
"사죄를 드려야할 쪽은, 저라고 생각합니다."
"네?"
"당신에게 너무 매정하게 대하고 말았기에. 실은, 지금도 그런 듯 합니다만....."
".....뭐, 뭔가.....고민, 하고 계신 거죠?"

어렵사리 꺼낸 말에, 정적이 소리없이 찾아왔습니다. 어쩌지. 처음부터 너무 갑자기, 건드려서는 안될 곳을 찌르고 말았을까. 잘못을 들켜버린 어린 아이마냥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할 때, 시죠 씨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하기와라 유키호."
"네, 네엣!"

거기서 흘러나온 제 풀 네임에는 버겁다 싶을 무게가 실려있어, 그만 바짝 차렷 자세를 취하고 말았습니다. 시죠 씨는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아아니. 그런 곳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는 듯 자기 할 말만을 제게 부딪쳐왔습니다.

"당신은 시죠 타카네라고 하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에, 시죠 씨를, 제가.....?"
"예."

가능한 한, 솔직하게 답변해주셨으면 합니다. 시죠 씨는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어쩌지. 어떻게 말해야 좋은 거지. 이렇게까지 말해도 좋은 걸까? 시죠 씨가 싫어할지도 몰라. 그런데 시죠 씨는 솔직하게 답해달라고 했는 걸. 우우, 그렇다곤 해도.....갑자기 닥쳐온 무척 진지한 질문에 저는 어쩔 줄 모르고 시죠 씨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도자기와도 같이 새하얀 그 얼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아주 미세한 금이 가있는 듯 보였습니다.

"저, 저는 시죠 씨가.....시죠 씨를....."

그걸 보니, 제 마음은 더욱 급박해져, 일단 뭐라도 말을 꺼내야겠다는 식으로 우물거렸습니다. 시죠 씨는 재촉하는 말 하나 없이, 그런 저를 바라만 볼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 눈빛이야말로 어떤 말 한 마디보다도 가장 큰 재촉으로 느껴져, 저는 뭐라도 좋으니 이것저것 꺼내고 엮어냈습니다.

"조, 좋아해요. 아, 그 좋아한다고 해도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그, 그러니까....존경해요. 멋지다고 생각해요. 제, 제게 시죠 씨는 고고하고, 아름다우시고, 뭐든지 척척 해낼 수 있다는 이미지가 있다고 해야할까.....조용하신 것도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저, 저처럼 소심한 거하고는 확연히 다르다고 해야할까.....그, 시죠 씨는 해야할 말이라면 하실 수 있으시니까.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렇습니까."
"앗, 그, 그게.....저, 저어....."
"하기와라 유키호."
"네, 네에."

허겁지겁에 횡설수설. 난잡하게 늘어놓은 말들에 점차 한계가 찾아왔을 무렵. 시죠 씨는 그만하면 되었다는 식으로 다시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는 불안함이 그대로 투영된 눈길을 그리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시죠 씨는 이제까지와는 좀 다르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봤자 아주 조금 입꼬리가 올라갔을 뿐인, 어딘가 영영 사라져버릴 것 같은 덧없음이 느껴지는. 식어서 굳어버린 눈을 하고 있는, 어딘가 기묘하게 느껴지는 그런 얼굴. 조금 실례이다 싶을 정도로 빤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시죠 씨가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릇.....? 그 단어에 담긴 속뜻을 몰라 헤메고 있는 저에게, 시죠 씨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혼자만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당신이 제게 존경이라는 감정을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한.....그럴 격이 아닌, 텅 빈 그릇."
"시죠, 씨....."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저 같은 것과 달리 무척이나 멋진 사람인걸요! 그런 반문을 내는 대신, 저는 시죠 씨의 다음 한 마디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죠 씨의 말이 전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한다는 의무감이 묵직하게 제 안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저라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 자신의 꿈에 대한 뜨거운 열정. 어떤 일이 있어도 즐겁게 나아갈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여러분들 덕분에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결코, 온전한 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시죠 씨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결론을 마저 입에 담았습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차오른다는 것을 알게 된 저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저라는 것의 본질은 역시 빈 그릇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담담하게. 어디까지나 담담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시죠 씨.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려는 것 같은 시죠 씨. 하지만 그렇게 하실 수록, 점점, 얼굴의 금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호의에 실망을 돌려드리게 된 점, 참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 그렇지 않아요."
"늦은 밤입니다. 노트는 내일 다시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속 안에 담아두기만 했던 반론을, 이제서 겨우 꺼내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기만한 목소리여서는, 시죠 씨에게는 전혀 닿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좋지. 독버섯과도 같이 점점 퍼져가는 균열.

저러다간.....깨져버려.

깨지면 안 돼!

그런 생각이 순간 웅크리고 있었던 커다란 괴물과도 벌떡 몸을 일으켜, 조금 더 크게 말하려는 제 입을 틀어막아버렸습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가만히 있어. 그 이상 말하면 안 돼. 깨버리면 안 돼. 내버려 둬. 억지로 들쑤시지 마!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말소리들이 저를 힐난합니다. 제지합니다. 경고합니다. '존경하는' 시죠 씨를 잃을 수 없다는 두려움입니다. 혹시라도 시죠 씨를 상처입혀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입니다. 제 말이, 저 금에 닿아 완전히 부서져버리면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라는 공포입니다.

이대로 입 다물고 있어. 그래, 이만 돌아가버리는 게 어떨까. 시죠 씨도 그러라고 하잖아. 다음 날이면, 언제나의 시죠 씨로 돌아와 있을 거야. 그 때처럼. 그러니까 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면 돼. 마음 편하게 동경하면 되는 거야.

손을 뻗어도 닿을 길 없는, 달과도 같이 빛나고 있는 시죠 씨를.

마지막으로, 간사한 마음이 제게 속삭였습니다.

그치만.

그치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읏.....!?"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좀 더 크게 소리냈습니다. 그러자 일순 깜짝 놀란 듯이 보였던 시죠 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조금 떠시더니, 다시 고개를 드셨습니다. 산산히 깨지고 조각난 얼굴. 거칠고 날카로운 단면.

"하기와라 유키호! 제 철면피와도 같은 모습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보고도 그렇게 말씀하신단 말입니까!"

그리고 줄줄하고 쏟아져버리고 마는,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내용물. 아니, 내용물이 아니라.....

"단순히, 저를 위로하려고 그런 것, 이라면....."
"아니에요. 시죠 씨는 텅 빈 그릇 같은 게 아니에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제 손 끝이 단면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닿아있었습니다.

"봐요. 이렇게 넘쳐흐르는 걸요."
".....읏.....!"

턱, 하는 소리와 함께 양 어깨에 차가운 감각이 달렸습니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무게감. 꼿꼿하게 서 있었던 시죠 씨가 무너져내립니다. 그럴 수록, 무게감은 점점 강해져, 조금 휘청이면서도 어떻게든 버텨냅니다.

"으흑, 읏, 다, 당신은.....당신이라는 사람은.....!"

제 품 속에서 조금씩 새어나오는 울음소리. 가늘게 떨려오는 등에, 저는 한참 부족하다 싶은 두 손을 천천히 둘렀습니다.

"우우웃.....끅, 윽, 흐으윽....."
"의외로 울보였네요, 시죠 씨는."
"송구, 스럽습니다."
"아니에요."

시죠씨의 떨림이 잦아들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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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커뮤 리뉴얼 만세! 간만에 글을 올리네요. 유키타카도 좋습니다 유키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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