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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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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3, 2013 19:58에 작성됨.

 제 1장: 셋이서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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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카오가, 아이치와 만난 것은 아이치의 신입생 환영회 때였다.



당시 일본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시기였고, 누구나 대학정도만 나와도 평생 직장을 얻을 수 있기도 했다.

그런 만큼 느슨하고, 평화로우며, 활기 넘치는 분위기가 캠퍼스 전체에 만연해 있었다.

마치, 몇년전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으로 얼룩진 역사는 전부 거짓인 양.

적보다는 동료, 동료보다는 친구. 경쟁보다는 협동, 협동보다는 단결. 그것은, 경제호황을 이끈 정신이기도 했다.

우리는 하나라는 정신…… 단카이세대의 깊은 증오는 그 속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 타카기 준이치로는 어떤가.



나 또한 4학년이 되어서까지도 친구, 선배, 후배들과 어울리며 노는것 자체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었다.

어제도 연예계 쪽에 취업한 선배중에 한 명이, 한 명이 귀하디 귀한 콘서트 티켓을 몇장씩이나 구해다줘서 후배들과 함께 보러갔다.



모모에 쨩은 18세가 되어도 귀엽구나.



결국 어제는 열광적인 응원에 이어서, 같이 간 후배 녀석들과의 술자리.

그리고 술자리에서의 시덥지 않은 논쟁 - 모모에는 어떤 남성과 결혼할 것인가, 아니다 나의 모모에가 결혼할리가 없어 같은 - 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류스케. 내가 보기엔 생각보다 빨리 결혼할 것 같단 말이지. 그 전에, 나의 모모에라니… 콘서트 회장 근처 술집에서 그런 소리를 하니까 주변 손님들이 노려보잖아. 

류스케 녀석은 술을 정말로 좋아하지만, 술을 많이 마시면 가끔씩 뜻 모를 말을 쏟아내곤 한다. 재밌는 녀석이지만, 가끔 넌 시대를 잘못 타고난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 논쟁은 결국 가게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꽃의 고3트리오 최고!'라는 종잡을 수 없는 결론으로 종식되었다. 

……하지만 그 점이 또 마음에 들었다.



"선배에, 선배는 이제 4학년인데 이러고 있어도 됨미까아?"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 전에 네 혀부터 좀 어떻게든 해봐"



결국 뒤치닥거리는 선배인 내가하게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 어째 손해만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자고 일어난 오늘 아침.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된다. 머리가 좀 지끈거리지만, 오늘은 오전수업이 있으니 나가야한다.

4학년인 우리들은 슬슬 리쿠르팅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업은 오전중에 있다. 즉 오후에는 취업을 준비하라는 소리.

역시 나이를 먹으면 손해만 본다니깐… 이라고 식사중에 중얼거렸다가 어머니에게 맞았다.

식사를 마치고, 어제 낮에 사두었던 잡지를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선다.



등교해서 과 건물로 향하는 도중에 어제의 전사자들과 마주쳤다. 아이고 얼굴들 좀 봐라.

특히 류스케, 너 가부키 배우해도 되겠다.

아무튼 새로운 학기가 이제 막 시작된 캠퍼스는 작년과 똑 닮은 느긋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캠퍼스에서도 이질적인 녀석들은 꼭 있기 마련이다.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쿠로이… 쿠로이 타카오 역시 그런 녀석이었다.

저 녀석도 작년과 똑 닮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작년의 작년도, 그 작년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하면 정확하게, 인간관계는 깔끔하게, 학업은 완벽하게.

교수들과 선배들은 그러한 그를 좋아했고, 후배들은 그를 어려워하면서도 경외시했다.



하지만 동기들은 조금 달랐다.



"타카기. 뭐 읽냐?… 또, 만화 잡지? 하나토유메? 처음보는 잡지인데"

"이거좀 봐봐. 얼마 전부터 연재된 작품인데 전개가 마음에 들더라고"

"어디어디…유리가면? 딱 봐도 순정만화잖아 이거. 드디어 네가…"

"흠. 요시자와, 이번 학기 첫 신문에는 이 만화의 소개를 싣는게 어때" 

"…호오, 그정도인가" 

"그래. 팅 하고 왔다. 이 만화는 앞으로 몇 십년안에 국민만화가 될거야"

"엑, 몇십년……"



그렇게까지 연재가 길면 누가 읽겠냐 - 하면서 요시자와가 질린다는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올해로써 대학교 신문부장이 된 요시자와는, 예전부터 이렇게 가끔씩 나에게 기삿거리를 얻어가곤 한다.

그렇게 쓰여진 기사들은, 자유분방한 나의 사고방식과 요시자와 특유의 강렬한 문체가 어울려 제법 인기가 많았다. 

요시자와가 잡지를 가져다가 읽고있는동안, 강의실에 있던 동기녀석이 나를 보고 말을걸었다.



"야, 타카기. 오늘, 올해 신입생들 들어온다는데 얼굴 함 비춰줘야 하지 않겠냐" 

"야 무슨 4학년이나 되어가지고 1학년 애들이랑……아저씨, 정신차려요"

"오호, 요시자와는 어쩔래?…… 참고로 이번에 예쁜 애들이 많다고 하더…" 

"이야기는 들었다. 불초 타카기, 신입생들을 위해 마술쇼를 준비하겠습니다"



동기녀석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윙크했다. 하지마라, 그런거.

웃고있던 녀석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강의실 끝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쿠로이. 너도 이번 모임에는 꼭 와라"

"…과제때문에 몹시 바쁘다. 먼저 실례하지"

"…그러냐, 수고해라"



갑자기 화기애애하던 강의실의 온도가 5도쯤 내려간 기분이 들었다. 난로는…음 여전히 작동중이다. 기름이 떨어지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군.

쿠로이가 강의실을 나가고 나서,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 동기녀석은 입을 열었다.

 
 
"…역시 별로 마음에 안드는 녀석이야"

"……"



동기생 사이에서 쿠로이는 '그 녀석'으로 통했다. 모임은 최소한도로 참석. 대화도 딱 필요한 만큼만.

게다가 어쩐지 잘난듯한 말투는 실제로도 잘난 그 녀석의 학업성취도와 맞물려 '재수없는 쿠로이'라는 이명까지 얻게 했다.

명색이 대학생이라고 과연 이지메 까지는 하지 않지만, 다들 쿠로이를 대할 때 어느정도 거리를 두는건 명백했다. 

아니 이 경우엔 쿠로이 쪽에서 거리를 둔다고 하는게 맞으려나? 

비유하자면 모두가 벚꽃을 피우고 있는 동안, 혼자 옆에서 장미꽃을 피우고 있을법한 그런 이미지였다.

한 마디로 안어울려.



"나쁜 녀석은 아닌데 말이지"

"나도 동감이야"

"…뭐 부정은 하지 않겠어"



잡지를 보던 요시자와가 쿠로이를 은근슬쩍 두둔하자, 동기 녀석은 마지못한듯이 부분 긍정을 했다. 

나는 자리를 일어서서 강의실을 나섰다. 



"야, 타카기. 어디가?"

"조금 볼일이 있어서"



조금전의 복수로 씨익 웃어주면서 윙크를 날리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변한 동기 녀석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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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깄구만 역시"

"…타카기인가"



과 건물 옥상. 이 추운날씨에 이런 곳에 오는 녀석은 쿠로이밖에 없을 것이다.

쿠로이는 이렇게, 시간만 나면 건물 높은곳에서 건물 아래를 내려다본다. 취미…라는 녀석일까. 고상한 녀석다운 고상한 취미다.



항상 생각하지만, 대체 무엇을 보는걸까.



"정말로, 높은 곳 좋아하는구만"

"너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네네~"



과연 쿠로이. 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다른 동기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녀석이 몹시 마음에 든다.

입으로만 무심한척, 고상한척 하는 녀석들은 이 좁은 캠퍼스에서도 세고 셌지만

실제로 3년이 넘도록 이렇게 변함없이 언행이 일치하는 녀석은 이 녀석 뿐이겠지. 이 녀석은 어릴때도 이랬으려나?



"쿠로쨩~"

"뭣!?"



닭살이 올라오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눈으로 본다는건 굉장한거구나. 22살이나 먹고서야 알게되었다.

대각선 방향 뒤로 바짝 붙어서서 한마디 하자, 방금전까지 겨울 매처럼 고고해보이던 쿠로이의 목덜미에 순식간에 닭살이 엄청 돋아나는걸 눈으로 보고야 말았다. 뭔가 기분나쁜데.



"윽, 기분나빠"

"…내가 할 말이다"



바퀴벌레도 놀랄만큼 엄청난 속도로 나로부터 약 3미터 정도 떨어진 후에, 녀석은 나를 노려보는 듯 하다가 다시 고개를 난간 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두번다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도록 - 이라고 덧붙이는 것을 쿠로이는 잊지 않았다. 과연 재수없는 쿠로이는 허명이 아니구만.

아무튼 충분히 놀렸고, 본제에 들어가볼까.



"쿠로이, 왜 신입생 환영회에 안가?"

"말했을텐데, 과제로 바쁘다고…"

"너 나랑 거의 수업 겹치잖아. 과제, 없는데?"

"……"



아, 입 다물었다. 입 다물었어.

애초에, 학기초에 그렇게 과제가 많을리가 없잖아. 나 타카기를 속이려면 30년은 이르다고. 하핫.

그런데, 대체 왜 신입생 환영회… 아니, 왜 이 녀석은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않는거지?



다시금, 이 녀석의 학교내의 평가를 상기해보자.



후배들의 쿠로이에 대한 경외심이나 존경심은… 뭐, 후배들 중에는 사실 쿠로이와 말 한마디라도 나눠본 사람이 손에 꼽을것이다.

동기들 사이에서 쿠로이의 별명이 '재수없는 쿠로이' 라면, 후배들 사이에서는 '고고한 쿠로이 선배' 정도 되겠지.

얼핏 들으면 '재수없는' 이라는 형용사보다도 더 비꼬는 것 같은 뉘앙스지만, 저건 단어 그대로의 의미이다.

합리적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범위내에서, 쿠로이가 해내지 못했던 것은 없으니까. 그 점이 대단해.

반대로 윗사람에게 있어서 쿠로이는 단지 '쿠로이'이다.

즉, 이 녀석이 교수와 선배 같은 윗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일처리와 관계의 맻고 끊음이 확실하다는 점이지 어떤 인간적인 매력에 대해서 인정받는다는 소리는 아니라는 것.

말 그대로 선배는 단지 선배, 교수를 단지 교수로서 대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인간관계의 확실성이 이 녀석의 장점… 하지만, 나는 불확실성을 더 좋아한단 말이지.



"팅 하고 왔다!"

"하아?"



근거는… 없는건 아니지만 희박하다. 하지만 나에겐 근거 이상의 예감이 있었다.



"쿠로이. 너, 사실은 사람이랑 사귀는거 자체가 서투른거 아냐?"

"!"



움찔했다. 역시……

대인기피증에는 여러가지 종류와 레벨이 있지만 사람 얼굴도 보기 힘든 레벨은 극히 희소하다.

오히려 지금 내 앞에 있는 쿠로이와 같은, 낯가림과도 유사한 레벨의 대인기피증이 비율로는 훨씬 더 많다.

단지 낯가림과 다른 점이라면, 낯가림은 만남 초기에 한정되는 것에 비해 대인기피증은 그 증상이 만난 기간과 관계없이 지속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 녀석의 경우에는…



"특히, 너의 경우에는 너보다 어리거나 동갑인 사람이랑 접하기 어려운 것 같군"

"!"



이 녀석, 또 움찔했군.

그렇게 계속해서 건물 아래를 보고있어도, 어깨가 반응하면 무슨 소용이냐.



그래. 이 녀석의 대인관계 패턴을 보면 의외로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3년이나 같이 있었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나는 남을 관찰하는게 취미란 말이지.

그 외에는 뭐, 요시자와 녀석이나 어렴풋이 느끼고 있겠지. 그 녀석도 이러나 저러나 사람보는 눈이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지금 포커에서 조커를 쥐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일까.



쿠로이가 '거리를 두는' 사람의 리스트에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즉, 나도 쿠로이와 그렇게 친밀한 관계는 아니라는 소리.

나는 왜 이 녀석을 신입생 환영회에 데려가려고 하는 것일까.



아…… 그런가.



사람을 보면, 어떤 예감같은것이 느껴질때가 있다.

항상 그런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경우가 드물다고 할 수 있지만. 하지만 그게 느껴질 때의, 그 예감은 거의 들어맞는다.

그리고 '예감'이 지금처럼 강하게 요동치는 때는 이제껏 없었던 것 같아.

그 예감에 몸을 맡긴채로 나는 조커카드를 사용해 패를 만들어간다.



"쿠로이. 환영회 같이 가자~"

"가지 않는다"

"……신문부 요시자와"

"!… 네 녀석"



내가 의도적으로 중얼거린 한 마디를 듣고, 머리가 좋은 쿠로이는 내 의도를 모두 파악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쿠로이가 자신의 대인기피증 속에서 찾아낸 인간관계의 최적해는 지금 상태이다.

꽤나 힘들게 구축했겠지. 하지만 그 만큼 그 관계가 흔들리게 되면 쿠로이에게는 큰 타격일터.

특히나 동기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방향으로 관계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일단 구멍이 난 제방의 붕괴를 한 사람의 주먹으로 막아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



"알았다. 알았어. 그럼 잠시 들렀다 가도록 하…"

"내가 가기전에는 가지 않습니다"

"……"



신입생 환영회는 갓 들어온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부 모이는 몇 안되는 모임이다. 4학년은 참석을 꺼리기도 하지만, 3학년 까지는 거의 참석하는것이 우리 과의 전통이다.

그리고는 보통 장기자랑과 술파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쿠로이 녀석, 술 마실줄은 알던가?



"…와인이라면 마셔봤다만"

"우와 너 부자구나"



역시 쿠로이. 싸구려 술은 마시지 않는다 이건가. 아니 그전에 부정하지 않았는데…!?

'뭐, 돈이라면 그다지 부족한 것은 아니다' 같은 소리를 하는 쿠로이 앞에서, 나는 입을 뻐끔거릴 수 밖에 없었다. 

이 녀석, 진짜로 있는 집 아들이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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