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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 「언어의 정원」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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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16, 2018 01:41에 작성됨.

창작댓글 『언어의 정원』

 

말이란건 참 신기하지.

내가 전하려고 한 것들이, 단 몇 가지의 단어들로 너에게 전해진다는 건.

말이란건 참 신기하지.

내가 전하려고 했던 것들이 있을 때마다, 너는 언제나 먼저 알아채고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니까.

 

그래서 사랑이란건, 너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지도 몰라.

 

 

주룩주룩, 주룩주룩.
느릿한 세계에 내리는 비는, 그 소리마저도 느릿느릿하다. 
마치 모든 세상이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것처럼 내리는 비. 
오늘부터 장마였던가, 나는 미처 우산을 염두에 두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처럼 역 안에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본다. 
아마도 이 비는 우산을 사기 전에는 멈추지 않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지갑에는 돈이 없기에 비를 피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지, 역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자. 

그리고, 그런 나의 앞을 운명같이 지나가는 하얀 소녀. 
그 소녀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승무원과 실랑이를 벌인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래, 사실은 내가 관여할 일은 전혀 아님에도.

 

발걸음을 옮겨, 그 예쁜 소녀와 승무원이 실랑이를 벌이는 쪽으로 다가간다. 
내가 다가가자 승무원이 소녀는 일단 제쳐두고 나의 상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도와줄 것이 있는지를 물어본다. 
나는 그 승무원의 얼굴을 보고, 두 사람이 아까부터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물어본다. 
나의 질문에 승무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는데, 옆에 있던 예쁜 소녀가 잘 하지 못하는 일본어로 사정설명을 한다. 

한 프로덕션의 아이돌 지망생인 그녀는 홋카이도 출신. 
한 프로듀서의 추천과 선망하던 꿈을 찾아 도쿄로 찾아왔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언어의 장벽과 향수병 뿐. 
참다 못한 그녀는, 레슨 시간을 무단으로 빼먹고 프로덕션을 빠져나와 이 역에 당도한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나온 통에 돈이나 이런 것이 있을리가 없다. 
하다 못해 이 도쿄라는 지옥을 빠져나가기 위해 아무 열차나 타려고 했지만, 승무원의 제지로 그마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저 그녀를 꼬옥 껴안아준다.

 

나의 갑작스런 껴안음에 그녀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포근한 미소를 짓는더.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비오는 날의 끈적임이 남아 있더라도, 역시 그녀는 사람의 포근함이 그리웠던 거니까. 
잠시 동안 그러고 있다가 그녀에게서 포옹을 풀자, 그녀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아나스타샤예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라, 예쁜 이름이네. 
한 단어 한 단어가 비를 타고 느릿느릿하게 흘러들어오는 것만 같다. 

그래, 이 비 오는 우리들의 정원을 촉촉히 적셔주려는 것처럼.


아나스타샤의 집을 물어보니 그녀의 집은 프로덕션 안의 기숙사. 
역시, 바로 들어가기에는 조금 그렇겠지.

어쨌든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 나는, 아나스타샤를 내 집으로 초대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념한다. 
청소라곤 되어있지 않은 더러운 집인데다가, 이 비를 맞으며 돌아간다면 그녀가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호의가 아니게 되겠지. 
집에 가서 대접할 것도 없고. 

아나스타샤에게 설명을 하고 자리에 앉기를 권하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순순히 앉는다.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은 한 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만, 정신을 차리고 가까이서 보니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이런 미소녀를 내가 껴안았단 말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드는 죄책감에 이마를 문지른다. 

「어디가, 아픈건가요-?」 

나의 표정에 아나스타샤가 서툰 발음으로 나를 걱정한다. 
아니, 아픈 것은 아니야. 
...다만 비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우리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래. 
 

그래, 일단은 가장 무난하게 고향에 대해서 물어보자. 
홋카이도에 대해서 물어보자, 아나스타샤가 눈을 반짝이며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도쿄와는 다르게 눈도 많이 내리고, 하늘도 맑아 별도 잘 보인다고. 
말은 조금 더듬거렸지만, 그래도 그녀의 표정을 보며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조금은 실감이 나는 것 같다. 
홋카이도에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나는 그런 그녀의 표정이 오로라같다고 느낀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영웅마저도 눈이 멀어버린 그 아름다움. 

그리고 그 다음에 물어본 것은 아이돌 일에 대해. 
이 이야기를 꺼내자 반짝거렸던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그야 연예계 일이라는게 어렵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의 각오도 하고 도쿄로 왔을 터다만, 역시 생각보다 더 어려웠던 모양이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말보다는 이런 따스함이 그녀의 상처난 가슴을 더 치유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교우 관계에 대해서 묻자, 아나스타샤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연다. 

 

「미나미나, 란코, 그리고 미쿠라면...」 

미나미라면 그 닛타 미나미인가. 
확실히 그 아이라면, 친할 것 같긴 하네. 
연하의 아이를 잘 챙겨줄 것 같고. 

그리고 미쿠와 란코라... 
내가 알고 있는 한에는, 마에카와 미쿠와 칸자키 란코일텐데... 
왜 친한거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아나스타샤를 쳐다보자, 그녀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일단 칸자키 란코의 경우, 먼저 란코 쪽이 다가갔다고 한다. 
머리색이 비슷해서라나 뭐라나. 
뭐, 흰색과 회색은 비슷하기도 하고 비슷하지 않기도 하지... 

그리고 그 다음은 마에카와 미쿠. 
별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이지만, 미나미와 란코가 친하게 지내자 자연스럽게 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 친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는거지. 

「그런데, 당신은 왜 그런걸 묻는 건가요-?」 

아나스타샤의 악의없는 질문이, 나를 관통한다. 
확실히 그렇다. 
아나스타샤가 모두 대답해주긴 했지만, 원래라면 나같은 초면의 사람에게는 말해주지 않는 것들. 
아나스타샤의 말에, 나는 대답 대신 빙긋 미소를 지어보인다. 

피차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통하지 않고, 힘든 레슨에 지쳐서, 친구가 있어도 외로운 아나스타샤. 
친구 하나 없이 고독한 쳇바퀴만을 도는 나. 
피차 집에서 하는 일은 똑같을 테니까. 
집에서 밥 먹고, 일을 나가고, 잠을 자고, 일을 나가고, 밥 막고, 일 나가고. 

아나스타샤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어느 순간에 외로움의 패라미터가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버린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쉬는 날에, 그것도 비 오는 날에 이렇게 혼자서 멍하니 역 앞에 앉아서 사람 구경이나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지갑에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이 곳에서 빠져나가기 싫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테니까. 

나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나의 어깨를, 그 가녀리고 따스한 손으로 쓸어준다. 
그 손길에 나는 조금은 평온함을 느끼면서도, 못내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의 따스함을 나눠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 끈적거리는 걸 싫어할 것 같아서...」 

나의 표정을 본 아나스타샤가, 왠지 미안하다는 듯이 변명을 한다. 
그녀의 마음씨에 나는 괜찮다는 듯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 
...지으려고 노력한다. 

밖을 쳐다보니 비가 거의 멎어간다. 

웬만하면 그녀와 같이 가고 싶지만, 프로덕션까지 그녀와 단 둘이 가는 건 그녀에게도 좋지 않은 일일 것이다. 
느릿느릿하게 약해지는 빗발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늘을 멍하니 쳐다본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그치고 햇볕이 나오기 시작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돌아가기는 싫지만, 비가 그쳐 버렸으니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나를 보던 아나스타샤가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언제 또 볼수 있을지를 묻는다. 

물론 아나스타샤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달려갈 것이라고, 약간의 미소를 띈 채로 답한다. 
물론 내일은 일을 가야 한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잠을 잘 공간은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당신은, 상냥한 거네요-」 

아나스타샤의 밝은 목소리가, 나의 귓전을 간질인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말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눈송이같은 단발을 흩날리며 달려나가고 있다. 
슬슬 가지 않으면 위험한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 깨달은 거지만, 
그녀는 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다시 그녀를 만날 날을 위해 오늘은 내 몸 한 덩이 뉘일 집으로 돌아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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