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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4 - 표류漂流 : 이치노세 시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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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15, 2018 16:43에 작성됨.

 어느 순간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애들 장난 마냥 ‘너 죽어!’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잔인하게 살해하고 싶은 충동을 말한다. 이에 대해 치히로는 사회생활을 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전부 한 두 번 쯤은 가볍게 겪어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 또한 그랬으니까. 그리고 현재의 나도 그러했다.

 간신히 스태프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디렉터에게 넘긴 CD가 땅에 떨어졌을 때 들은 생각이다. 그 안에는 우리 애들이 커버한 기존 아이돌들의 곡이 들어가 있었다. ‘바람색 멜로디’와 ‘Never say never.’ 둘 다 잘 녹음 되었고, 특히 후자는 기존 곡보다 훨씬 높은 퀄리티가 나왔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디렉터가 내 손을 쳐냈을 때, CD가 떨어지고 표면에 금이 갔을 때 열이 솟구쳤다.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사고였지만, 그래서 우발적인 충동이 일어난 것이다. 만일 내가 이런 충동에 항시 시달리는 부류, 그래서 충동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커다란 사고가 났을지도 모를 수준이었다.

 나는 평상시처럼 마음을 다잡고 CD를 주웠다. 끓어오른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홀로 방송국 복도에 서있었다.

 맞지 않는 일을 하는 부작용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분노를 꾹꾹 눌러 참을 필요 없었는데. 오히려 내 성격을 드러냄으로서 인정과 경멸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성격을 드러냈다간 경멸만을 받는다. 참는다고 해서 인정을 받지도 않는다. 단지 그것이 기본이다. 나란 인간이 영업에 맞지 않는 이유였다. 어렸을 때부터 참는 것이 특기였지만,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특기라는 이유로 더 많은 것을 참아왔고, 지금도 참고 있기에 남들보다 배로 힘들었다.

 “뭘 그렇게 사색에 잠겨 있냐?”

 선배가 등을 툭, 건드렸다.

 나는 미리 사놓은 커피를 건넸다. 영업, 힘들어서요.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있겠냐.”

 “다른 것보다, 특히 더 힘듭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려워서.”

 “원래 사람 대하는 게 가장 힘들어. 세상 모든 문제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거든. 근데 문제의 마무리도 사람이 한다. 바로 이렇게.”

 선배가 텅 빈 가방을 자랑했다. 수십 분 전까지 CD가 가득했던 가방이었다. 선배는 자랑할 만한 것을 자랑하며 특유의 성격을 드러냈다. 듣다 보면 참 재수 없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능력이었다.

 “우리 애들 거 영업하는 김에 너희 애들 것도 돌렸다. 끼워 팔기였지만 일단 노래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감사합니다. 정말로.”

 “네 요즘 꼴이 불쌍해서 그런 거야. 언제까지나 도와줄 수는 없어.”

 “알고 있습니다.”

 영업을 할 때는 거의 이런 식으로 선배의 도움을 받았다. 편승이라고 할까, 덤이라고 할까. 내가 주체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내 아이돌들의 매력을 스스로 전달하지 못 한다니.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하는 일이 없는 건 또 아니었지만.

 어떤 일의 컨셉을 짜거나 기획 하는 것은 자신 있었고, 선배에게도 인정받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도움은커녕 동정조차 받지 못 했을 것이다. 저래 보여도 선배는 프로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 가망 없는 녀석은 끌고 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냥 착한기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가벼워 보이는 행동 안에 능구렁이 같은 속내가 숨겨져 있는 타입. 아마 지금까지 내가 도움 받은 모든 일을 기록해뒀다가 중요한 순간에 써먹을 것이 분명했다. 즉, 나는 선배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슬슬 자리 잡고 잘 나가기 시작할 때 차용증을 들이밀겠지. ‘갚을 능력이 없으면 도움을 받지 말았어야지’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나는 드라마 속 무능한 가장처럼 망연자실하고 옆에는 토끼 같은 아이돌들이 울며불며 난리를…….

 재미도 감동도 없는 망상을 지웠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 갚으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선배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물어봤거든? 대체 뭔 생각을 한 거야. 너 진짜 요즘 특히 피곤한 거 같아. 그 신인 때문이지?”

 “아뇨. 그냥, 좀, 날씨가 더워서.”

 “고생이다, 고생. 그래도 난 걱정 안 해. 네가 잘 책임지겠지.”

 “…….”

 괜히 모자를 눌러썼다.

 발뺌하긴 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상 모든 문제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니까. 나는 지독한 여름 태양만큼이나 지독한 인간에게 걸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참느라 병이 날 것 같은데 골칫거리가 또 하나 늘다니. 자칫 잘못하면 최악의 문제로 발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내가 선택한 일이니 참아야지. 모자 그늘 아래에서 화를 다스렸다. 그리고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이 문제가 최악은 아니더라도 차악에는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프로듀서!”

 “겨울P!”

 아나스타샤와 미오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그 순간 직감이고 뭐고 필요 없이 어떤 종류의 일이 벌어졌을지 깨달았다. 그것을 내 자리에서 확인하고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범인을 찾으려고 한 건 아니다.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깔끔했던 책상에 수상하고 끈적거리는 붉은 액체를 뿌려놓을 인간은 한 놈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놈이 현재 내가 자주 잠을 자는 사무실 구석 소파에 누워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이치노세 시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고양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냐하. 영업 갔다 온 거야? 수고했어, 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 전에 미안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할 곳이 네 자리 밖에 없었거든.”

 “치우십시오. 얼른.”

 “걱정 마. 지우는 액체도 당연히 있으니까. 근데 만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 때까지만 참아줘.”

 속내를 알기 힘든 웃음이 퍼졌다.

 아나스타샤와 미오가 내 눈치를 살폈고, 사무실 안의 모든 시선이 이쪽에 쏠렸다. 상황을 정리한 것은 치히로였다. 이대로 두면 분명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상을 했겠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충동이 올라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비품실에서 청소도구를 가져왔다. 맨 먼저 장식용 마트료시카를, 이어서 책상을 닦았지만 액체가 자꾸 엉겨 붙어 고된 작업이었다. 청소를 끝냈을 때 와인처럼 진한 붉은 색이 손에 가득했다.

 그것이 내 눈에만 보이는 환상인지, 망할 놈의 발명품인지, 혹은 시키의 머리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희미하게 비릿한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

 

 저기저기. 이건 지금 뭐하는 거야?

 드라마, 촬영 중입니다.

 그렇구나. 재미있어 보이네. 그럼 너는 뭐하는 사람? 배우? 야쿠자 역이야? 감독이 사인 보내면 저기 여고생들을 덮치러 가는 건가?

 배우, 아닙니다. 아이돌 프로듀서입니다.

 아이돌? 으음…… 그렇구나. ‘안녕~ 팬 여러분의 시키라고 해~ 오늘은 시키의 멋진 노래로 여기 있는 사람들을 심.쿵. 하게 해줄게~’ 이런 식으로 하는 아이돌?

 모두 그런 식은, 아닙니다만.

 하긴. 좀 전에 같이 있던 애는 그런 스타일은 아닌 것 같더라. 하지만 남자의 시각 반응을 자극하기 좋은 스타일이었지. 그런데 나는 아이돌보다는 너에게 관심이 가거든. 특히 내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 네 땀에는 남들에게 없는 독특한 냄새가 섞여 있어!

 …….

 좋은 냄새가 난다는 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거겠지? 지금 하는 일 어때?

 그냥, 힘듭니다.

 너무 무뚝뚝한데? 말은 왜 그렇게 띄엄띄엄해?

 알 필요 없습니다.

 흐응. 뭐, 됐어. 근데 나도 이 일에 흥미가 생겼어. 분명 즐거운 일일 거야. 그러니 나한테도 아이돌이 어떤 건지 알려줘! 알려줘!

 더우니까, 떨어지시죠. 촬영 중이니 조용히…… 어딜 가는 겁니까.

 냐하! 잡혀버렸다. 순발력 있네.

 촬영, 방해 마십시오.

 하지만 정말 재밌어 보이는 걸? 나는 흥미로운 걸 발견하면 못 참는 성격이거든. 그리고 어차피 나도 아이돌할 거니까 바로바로 체험해 보는 게 좋지 않아?

 …… 아이돌 하고 싶으시면, 이걸 가지고, 프로덕션으로 오십시오.

 어디어디. 모르는 곳이네. 백야? 이게 네 이름이구나. 백야…… 백야……. 독특한 이름인걸. 아, 내 이름은 이치노세 시키야. 시키라고 불러줘!

 

 *

 

 담당 아이돌이 늘어난다는 것은 예상보다 큰 변화였다. 아이돌로서의 캐릭터를 잡고, 이미지에 맞는 곡과 활동 방향성을 잡는 등 이미 했던 일을 다시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미 데뷔한 아나스타샤의 활동을 멈춰서는 안 된다. 아직 아나스타샤도 신인으로서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니까. 사람 하나 늘었더니 해야 할 일이 세 배, 네 배가 된 것이다.

 반대로 한가한 시간은 줄어들었다. 원래 자진해서 일을 많이 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상관없었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만 상관없었나보다. 아나스타샤는 늘어난 내 업무량에 시무룩해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 만큼 나와 동행하는 스케줄을 소중히 여겼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의 드라마 촬영도 그랬다.

 아나스타샤가 맡은 역할은 단역으로 주인공의 반 친구였다. 쿨하고 말수 적은데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 미디어에 비치는 아나스타샤의 이미지를 그려 넣은 느낌이었다. 일부러 준비했다고 해도 믿겠군. 하지만 우리 애의 매력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아나스타샤가 먼저 의욕을 보였다.

 열의를 꺾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지. 그것이 잘못된 목적이 아닌 이상. 나는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고 일주일 후에 선택을 후회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건. 분명 설정상 주인공의 반 친구인데 어째서 야외촬영이 더 많은 거지? 교실 배경으로 세트 세우고 앉아서 수업 받고 수다 떨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망할 놈의 청춘물. 바람 많이 부는 강가에서 석양이나 바라볼 것이지.

 저주 섞인 원망과는 반대로 촬영은 매우 순조로웠다. 이를 축복하듯 날씨는 맑았고 나는 죽어갔다. 죽어가다가도 감독이 컷을 외치면 멀쩡한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맞이해야 했다. 스위치를 껐다 킬 수 있는 인형 같은 꼴이었다.

 “촬영은, 어때?”

 “Это весело. 즐거워요. 연기는 처음해보는 거라, 긴장했지만. 감독님께 칭찬받으면 정말로 좋아요. 프로듀서는 제 연기, 어떻게 보셨나요?”

 “괜찮았어. 좀 더, 갈고닦아야겠지만.”

 덧붙인 말에 아나스타샤의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정말, 열심히 했어.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일을 시작할 때부터 아나스타샤는 평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임했다. 짐작 가는 이유가 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으면 말해주겠거니, 그런 생각이었고 그 생각은 정답이었다.

 “이 드라마, 아빠랑 엄마가 꼭 보겠다고 했어요. 멋진 모습 보여주고 싶어요.”

 역시 그건가.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히 홋카이도에 있는 아나스타샤의 집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선배를 따라갔던 출장에서 돌아오기 전날. 나는 홋카이도의 가정집 앞에서 인생에 다시없을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범죄자처럼 생긴 전직 범죄자가 따님을 아이돌로 만들어 드리겠다고 말한다면, 부모 입장에서 쉽게 허락할 수 있을까. 심지어 열 살 차이나는 소녀에게 불순한 감점을 품고 있는 놈인데. 산탄총을 꺼내들지 않으면 다행이려나.

 또 해괴한 망상을 하던 중 초인종도 누르지 않은 문이 열렸다. 벌써 들킨 건가? 본능적으로 이를 물었다. 빌어야 하나, 싸워야 하나, 도망쳐야 하나. 답을 내리기도 전에 아나스타샤가 나를 집안으로 이끌었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예상대로 미인이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굉장히 심상치 않았다. 아내와 딸의 미모를 잊게 할 만큼 강렬한 외모였고 그래서인지 나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듯 했다. 반대로 나는 그 훌륭한 근육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제발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기를. 화목한 가정집과 취조실 사이 어딘가의 분위기에서 나는 묻는 말에 순순히 답한 뒤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자연히 떠오르는 기억을 곱씹고 있으려니 의문이 들었다. 아나스타샤의 부모님은 아나스타샤를 아껴주었다. 아나스타샤도 그 만큼 부모님을 사랑하고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

 나의 부모님은 어떠셨을까. 풀리지 않을, 이제 와선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그런 사소한 의문이었다.

 “분명, 아버지도, 어머니도 보실 거야. 아름다운 모습, 보여드리자.”

 “Да(네).”

 다녀올게요, 프로듀서. 다시 촬영이 시작됐다. 한기를 떠나보내자 바로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습도와 온도가 매우 높아 찌는 듯한 더위를 무더위라고 한다. 최근에 비가 내렸기 때문에 세상은 무더위가 잠식하고 있었다. 불쾌지수는 차오르고 지나가다 사람끼리 스치는 것만으로 충동이 솟구친다. 촬영을 구경하러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따금씩 날선 언어가 오고 갔다.

 제발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쿨팩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쿡, 찔렀다.

 고개를 돌리자 여고생이 있었다. 주름 자국 있는 교복을 헐렁하게 입고 슬쩍 배꼽을 드러낸 고양이상의 소녀. 눈에 확 띄면서도 잊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곱슬거리는 와인색 머리칼도, 나를 스캔하는 눈빛도, 여름이라 특히 더 역겨운 화학약품 냄새도. 무엇보다 직감이 느낀 매우 거슬리는 분위기가 그랬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한 마디 한 마디 신경을 건드릴 뿐만 아니라 건방지고 예의 없는 말투에 짜증이 났다. 그다지 상종하고 싶지 않은 부류. 자리를 피할 구실이 없어 건조한 음성을 뱉어주다 보니 알고 싶지 않은 정보들을 알 수 있었다.

 언행이 가볍다는 것. 얼굴값을 못한다는 것. 냄새 나니까 좀 씻고 다니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부류라는 것. 자신의 페티시를 직설적으로 밝힌다는 것. 내가 그 페티시에 부합한다는 것. 그래서 내 기분이 적잖이 나쁘다는 것. 점점 더 상종하기 싫다는 것. 핑계를 대서라도 자리를 떠야겠다는 것.

 행동하려는 순간 직감이 경보를 울렸다. 녀석이 촬영장으로 걸음을 옮긴 것이다.

 재빨리 붙잡아 끌어내려 했지만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이대로 두면 어떤 식으로든 촬영에 방해가 될 터였다.

 어쩔 수 없군. 나는 명함을 건네주었다.

 소녀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명함에 새긴 내 이름이 반복해서 읽히는 동안 터져버린 쿨팩에서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

 

 아침에 일어나면 빌어먹을 집의 빌어먹을 천장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팔굽혀펴기와 조깅 후 샤워, 식사랍시고 반공기도 안 되는 밥에 풀떼기를 씹어 먹은 뒤 정장을 입는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쓰면 출근 준비 완료.

 안 그래도 더운 여름에 미쳤다고 아침 운동을 하는 이유는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덥다고 움직이지 않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몸을 망치니까. 딱히 근육에 미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몇 안 되는 장점인 만큼 유지하는 것이 좋겠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던 전 직장을 다니며 생긴 버릇이기도 하고. 어떤 직업이든 몸이 재산인 건 마찬가지니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밟는 것조차 싫은 집 앞의 더러운 거리를 빠져나와 지름길인 골목으로 접어들면, 담벼락 위에서 얼룩무늬 고양이를 발견할 수 있다. 녀석은 매일 같은 담벼락 위 같은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왜 저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 거리 안에 맛있는 먹이라도 있나, 그런데 이 녀석도 나처럼 저 거리가 끔찍이 싫어서 갈등하고 있는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절대 나를 기다리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예전부터 동물들은 나를 싫어했고, 이 녀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다가가면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당장이라도 할퀼 것처럼 대들었으니까. 이 녀석들은 나처럼 감이 좋으니, 나의 위험성을 느끼고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슬프지만 그 현명함에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녀석의 행동이 아니라 고양이라는 동물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너 때문이 아니니 괜히 화풀이는 하지 않을게. 역시나 고개를 절로 끄덕이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역시 고양이가 싫어지는 건 어쩔 수 없어. 스스로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합리화하며 회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내 사고방식은 한층 더 편협해졌다.

 오전 업무를 하던 중 트레이너에게서 연락이 왔다.

 “프로듀서 씨. 또 입니다.”

 “또, 입니까.”

 “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번 이래요. 죄송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아니요. 제가 할 일인걸요.”

 장식용 마트료시카에 씌워둔 모자를 쓰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늘 아래에서 눈빛과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익숙한 일들이었다. 전 직장에서 사람을 찾을 때 쓰던 익숙한 방법, 입사 후 몇 달이 지나 익숙해진 거리를 걸으며, 며칠 사이 익숙해진 실종 아이돌 찾기에 돌입하는 것이다.

 어디 있냐. 넌 이 거리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어. 감이 와,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눈이든 귀든 간에 내 감각에 걸리는 순간…….

 후각이 냄새를 잡아냈다. 화학약품 냄새. 굳이 민감한 내 코가 아니더라도 집중하면 충분히 맡을 수 있었다. 나는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녀석도 청각보다는 후각으로 나를 느끼고 있겠지.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치려 할 때 헐렁한 백의 사이로 드러난 어깨를 붙잡았다.

 “아, 또 잡혀버렸다. 실종된 시키를 찾아라! 새로운 스테이지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박수!”

 “이번이 몇 번째인 줄, 아십니까.”

 “음. 다섯 번째였나?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거든.”

 “궁금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죠. 돌아가서, 레슨 받으십시오.”

 “그거, 그거 말이야. 오늘은 빠져도 된다고 트레이너에게 약속 받았어.”

 나는 멈춰 섰다. 뭐라고요?

 “못 믿겠으면 물어봐. 어제 분명 연습 중인 안무를 다 외우면 내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들었거든. 그리고 완벽하게 성공! 멍해진 트레이너를 두고 나는 도주! 그렇게 된 거야.”

 이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성적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감각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당장 폰을 꺼내 트레이너에게 전화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에도 녀석에게서 주의를 풀지는 않았다. 도망칠 의지는 없어보였지만,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금방 연결된 전화에서 트레이너는 아차, 하고 자신의 실책을 알아챘다.

 “한 번 해본 말이었는데 설마 그랬을 줄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제 하루뿐이었어요.”

 “네. 하지만, 이 녀석이 들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단, 제가 알아서 할 테니, 트레이너 씨는, 다른 아이돌들의 레슨을, 챙겨주십시오.”

 전화를 끊고 목덜미를 만졌다. 골치 아픈 상황이군. 이미 약속을 했다면 이 녀석은 타협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놓아줬다간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레슨을 빼먹을 게 분명하고.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두통이 일어났다.

 더위 아래에서 약품 냄새를 맡은 탓이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유독성물질이 몸에 거부반응을 일으켜 가려움을 유발했다. 몸에 가득한 흉터에 벌레들이 달라붙은 기분. 살갗을 꼬집고 뜯어내어 몸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떼어내고 싶지만, 이놈들의 실체는 환각과 망상이었다.

 참자, 참아.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증세일 뿐이야. 모자를 눌러 쓰고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피폐한 정신을 일으켜 세웠다. 좋은 생각을 하자고, 겨울의 풍경을.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또한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떠서 확인하니 녀석이 예의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내 행동에 흥미를 보였다.

 “뭡니까.”

 “혹시 어디 아픈 건가 해서.”

 “더워서 그럽니다.”

 “더운데 왜 옷을 안 벗어? 나처럼 시원하게 벗어!”

 남의 속도 모르고 녀석이 백의를 집어던졌다. 그 모습이 정말로 시원해 보여서 부럽다가도 무방비하게 속살을 드러내는 몸짓에 화가 치밀었다.

 다행이라면 녀석은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단 것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로 상황을 풀어가야겠지. 이치노세 씨.

 “응? 왜 그래?”

 “시원한 곳에서, 이야기 좀 하죠.”

 

 녀석이 처음으로 회사에 찾아온 것은 명함을 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불길한 기운을 느껴 창밖을 봤다가 택시에서 내리는 녀석을 발견한 것이다. 맙소사, 진짜 왔어. 난 아이스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로비로 내려갔다. 내려갔더니 녀석은 이미 자신의 페티시를 자랑하듯 사람들에게 코를 들이대고 있었다.

 당장 잡아다 사무실로 데려갔다. 소파에 앉혔는데 조금도 집중 못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려 해서 세 번이나 주의를 주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이름은 이치노세 시키. 나이는 18살. 작년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가족관계는 아버지와 어머니. 미국에서는 이미 어린 나이에 대학으로 월반까지 할 만큼 우수했으며,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지만 특히 잘 하는 것은 화학. 취미 삼아 수상한 실험을 자행하고 특제 향수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일본에 돌아온 이유는 미국에서의 공부가 시시하고 질려서.

 여러모로 내가 아는 상식을 깨부수는 프로필이었다. 본인도 인정하듯이 선천적으로 우수한 재능을 타고난 인생의 승리자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사기캐로 평가했던 미오도 이 녀석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허세가 아닐까, 의심도 했지만 실제로 레슨에 들어가 보니 달랐다. 춤이든 노래든 연기든 간에 녀석은 뭐든 척척 해냈다. 특히 뭔가를 외우고 기술적인 요령을 파악하는 재주가 남달랐다. 단점이라면 실험실에서 오래 지냈기 때문에 체력이 조금 약하다는 것. 보충할 필요가 있었는데,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실험 외에 이 녀석의 취미는 실종이었다. 문자 그대로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불시에 사라지는 것. 산만한 주의력에 더해 녀석을 종잡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였다.

 녀석은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사라져 트레이너의 골치를 썩게 만들었다. 그 때마다 잡아오는 것이 내 일과가 되었고, 나는 안 그래도 힘든 업무시간의 일부를 한 여름 밖에서 녀석과 술래잡기를 하며 보내야했다. 더군다나 녀석의 실종은 패턴이 어긋나 있었다. 그 때 그 때 충동을 따라 움직이는지라 자주 가는 장소도 없고, 다음 목적지도 알아내기 어려웠다. 예전 직장에서 이런 일에 도가 튼 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놀이였다.

 한 번은 녀석을 찾기 위해 집으로 찾아간 적도 있었다. 옆에 차고가 딸린 꽤 넓은 집으로 사는 사람의 성격을 대변하듯 정리정돈이 전혀 안 되어있었다. 깔끔한 주택가에서 저 혼자 고약한 개성을 드러냈다고 할까. 특히 집 앞에 놓인 여러 개의 대용량 쓰레기봉투가 동네 미관을 심히 해치고 있었다.

 음료수병, 도시락 용기, 갖가지 인스턴트식품, 휴지 롤, 여자 사이즈 신발 상자 여러 개, 신발도 여러 개, 더러워진 책 등 온갖 쓰레기가 한 군데 뭉친 재앙의 결정체가 거기에 있었다. 심지어 음식은 거의 먹다 남겼다. 봉투를 제대로 묶지 않아서 입구가 훤히 벌려져 있고, 구둣발로 누르니 익숙하고 역겨운 냄새가 새어나왔다.

 집 앞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녀석은 차고를 개조한 실험실에서 자고 있었다. 여긴 그나마 나았는데 미국 다큐에서 봤던 청년 창업 현장을 떠올리게 한 까닭이다. 얘가 미국에서 온 게 맞긴 맞나보구나, 근데 이러고 퍼질러 자는 게 아메리칸 스타일은 아닐 텐데. 둘러보면서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었다. 실험도구와 약물, 쌓여있는 책, 연구자료, 그 안에 파묻힌 액자.

 이런 녀석이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 어젯밤 연구의 결과물을 발견했다. ‘신경안정용 아로마’라고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레슨 중에 쓰려고 만들겠다는 말은 들었는데 진짜였나. 용도는 좋지만 보는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이 녀석이 만든 망할 발명품들 때문에 엿을 먹은 게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는지라 사무실에서 내 입지는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그 때마다 녀석은 내 반응을 관찰하며 굉장히 즐기고 있었다.

 아이돌만 아니었어도 밟았을 텐데. 최대한 화를 누르고 정중하게 녀석을 깨웠다. 비몽사몽하고 어지러운 정신으로 일어난 녀석은 고양이 같은 웃음으로 나를 환영했다. 그 때와 같은 표정을 지금, 에어컨이 틀어진 사무실에서도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핑계로 날 회사로 데려오다니. 너 꽤 머리 좋네. 어깨를 꽉 잡고 있어서 도망치지도 못 했어.”

 “이렇게라도 안 하면, 얘기가 안 되니까요.”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녀석에게 주고, 나는 생수를 마셨다. 입안을 충분히 적신 다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치노세 씨.

 “응. 왜 그래?”

 “아이돌, 하고 싶으십니까?”

 “딱히 아이돌이 하고 싶은 건 아니야. 어떤 일이든 간에 내 흥미를 끄는 일을 찾고 있는 거지. 흥미가 떨어지면 아이돌도 그만두고 그냥 가버릴 거야.”

 “당신은 아직, 데뷔도 안 했습니다. 또, 현재는 아이돌에, 흥미 있잖습니까.”

 “그렇지. 그럼 아이돌이 하고 싶은 걸로.”

 “아이돌을 하시려면, 레슨을 받고,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걸 거부, 트레이너님을 곤란하게 합니다. 이래서는, 데뷔할 수 없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걸. 매일 똑같은 일만 반복하는데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어. 트레이너가 시키는 것쯤은 이미 퍼펙트하게 잘 해. 내기에서도 이겼잖아. 흥미가 떨어졌으니까 새로운 흥미 거리를 찾아 떠났을 뿐이야.”

 “기본기는, 아무리 채워도, 모자란 겁니다. 이치노세 씨는, 체력도 붙여야 하잖습니까.”

 “응. 그래서 이번에 레슨 중에 쓸 만한 좋은 아로마를 조합해 봤거든? 시키의 특제 조합을 곁들인 플레이버! 그거라면 기력이 떨어져서 기진맥진 할 때도 편안히 쉴 수 있어.”

 “그것도, 문제입니다. 실험, 하는 건 좋지만, 사람들에게 민폐잖습니까.”

 “오우. 시키는 외국에서 살다 와서 잘 모르겠어요우.”

 순간 혈압이 치솟았다. 감으로 느껴지는 이 녀석의 진심 어린 장난기 때문에. 프로듀서라는 일에 대한 강한 회의감과 분노까지. 내가 이딴 일까지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진심으로 든 것이다.

 진정하기 위해 물을 마셨다. 순식간에 한 통을 비우고 볼 안쪽을 물었다. 어떻게 하면 알아먹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한 걸까. 의구심이 드는 와중 감이 또 놈의 거슬린 행동을 포착했다.

  내 모자를 향하는 팔을 단번에 낚아챘다. 녀석은 놀랐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본능적으로 너무 강하게 힘을 주고 말았다.

 천천히 힘을 빼고 손을 놔주었다. 녀석은 팔목을 주무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모자 소중한 거야? 알려주라! 속으로 혀를 찼다. 또 귀찮은 일만 늘었어. 일어나서 빈 생수통을 버렸다. 죄송했습니다.

 충동을 억누르며 사무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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