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기억을 걷는 시간』

댓글: 2 / 조회: 932 / 추천: 2


관련링크


본문 - 12-30, 2017 03:17에 작성됨.

나스카의 평야. 이름 모를 난해한 그림들이 가득 그려진 곳. 나의 손에 쥐어진 건 나스카의 평야의 지도.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마야 문명의 글자들처럼, 나는 풀지 못할 에니그마를 잔뜩 쥔 채로 멍하니 굳어간다. 그녀는 왜 이걸 나에게 준 것일까. 내가 해석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도. 나는 왠지 모르게 차오르는 슬픔에 울어버린다. 오늘의 슬픔은 내일의 절망, 내일의 절망은 모레의 그리움. 울다가 문득, 시간이 더 지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라고 생각한다. 눈물 한 방울마저 다 쥐어짜내져버린 나는 결국 비 한 줄기 내리지 못하는 사막이 되어버리는 걸까. 

 

시키가 떠나갔다.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해 주지도 못했다. 프로덕션에서는 일방적인 해고 통보 뿐. 능력없는 프로듀서일 뿐인 나는 순순히 순응하고는 내 물건을 찾아 프로덕션을 헤집는 수밖에 없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시키의 물건도 찾아보았지만, 이미 그런 것은 남겨져 있지 않다. 시키는 그야말로 실종되어버린 것이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생텍쥐페리처럼,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버린 그처럼.

 

혹시나 해서 시키의 연구실이 있던 방을 열어 확인해본다. 그녀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너무나도 깨끗하다. 그렇게나 많던 플라스크 하나도, 그렇게나 많던 스포이드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둘 중에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그녀를 연성해낼 수도 있을까. 하지만 나는 시키가 아니니까 그럴 수 없겠지. 새삼 나의 멍청함에 눈물이 난다. 내가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그녀를 만나볼 수도 있을텐데.

 

깨끗한 방을 나와 사무실에서 쓸쓸히 내 물건을 정리하다가 문득, 그녀가 자주 앉았던 소파를 쳐다본다. 작지만 두 사람이 앉기에는 안성맞춤인, 푹신푹신하고 향기로운 마지막 조각. 나는 그곳이라면 혹시 그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소파에 앉는다. 조금은 그녀의 향기가 나는 것도 같다. 화려함 속에 가려진 외로운 향기. 잠시 앉아서 그녀와의 향기로운 추억을 되새기던 나는,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몇개 되지도 않는 내 물건을 들고 도망쳐 버린다. 재빠르게 지나친 사람들. 새로운 아이돌과 새로운 프로듀서겠지. 이 방 안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사람들. 나는 공항에서 시키를 만났을 때가 어떻게 해도 떠올라 버린다. 나는 시키와 함께 이 방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시간들이 어떻게 해도 생각나 버린다. 나는 그들을 쳐다볼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시키를 찾아 떠나가버릴 것 같으니까. 어디있는지도 모를 그녀의 향기를 찾아 사막을 헤집을 것만 같으니까.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시키가 마지막으로 주고 간 편지를 읽는다. 나스카의 평야. 그 누구도 몰랐던 그림들이 그리움이라는 도화지에 오버랩된다. 나는 시키 트리스메기스토스를 떠올린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이치노세 시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이치노세 시키 박사. 정말로 그녀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녀가 마법처럼 내 앞에 나타나줬으면 좋겠다. 그 고양이상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 그 장난기 섞인 미소를 다시 한 번만 보고 싶다. 한참동안이나 나스카의 평야 그림을 보던 나는 문득, 그녀를 만날 수 없다면 무미건조한 나스카에서라도 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그 곳에 있기에 이런 편지를 남긴 것은 아닐 터다. 그래도 한 번은 가 봐야 할 것 같다. 결국 그 어떤 것도 없을지라도,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더라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간다. 그리고 슬슬 한계점. 회사에서 준 퇴직금은 거의 다 소비되었다. 애초에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었다. 시키만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내기에는 내 삶이 너무나 길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컵라면 몇 개를 사온다. 허기를 지우기 위해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넣고는 잠시 멍하니 나의 낡은 방을 쳐다본다. 나는 오늘로서 내 삶의 마지막을 맞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면제를 살 만한 돈은 없고, 저녁에 눈을 뜨면 꼭 새벽에 눈이 떠지는 일상. 의지박약인 나는 결국 시키나 나 자신을, 혹은 둘 다를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나 자신을 포기하면 시키도 포기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시키를 포기하기로 했다. 한 쪽 구석에 시키를 남겨놓은 채로, 그저 고양이상의 그녀로 가슴 속에 우겨 집어넣어 구겨친 채로 그녀를 남겨놓기로 하고.

 

양복을 잘 차려입고 추천서에 쓰여진 회사로 찾아간다. 사실은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평생이라도, 평생이 안 된다면 그 다음 생에도 시키를 그리워하면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스카에 시키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스카에서 홀로 서서, 영원한 추억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영원한 추억만으로도 인간은 살 수 있는걸까, 나는 나스카가 아닌 곳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 비유하자면 추운 시베리아의 벌판에 홀로 서 있는 탐험가. 나침반은 작동하지 않고, 동서남북조차 알 수 없는 황야에 홀로 서 있는 불쌍한 탐험가. 아, 그에 비하면 나스카에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 곳에는 최소한 그림이라도 있으니까.

 

들어간 회사는 분주하다. 마치 누군가가 이렇게 하라고 시킨 것처럼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과 몇 번이고 어깨를 부딪치고는 추천서를 받아줄만한 상사의 사무실로 안내받는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한참 재미없어보이는 상사가 날카롭게 눈빛을 빛내며 나는 누구냐고 물어본다. 조심스럽게 추천서를 내밀자 그는 알겠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싱긋 미소를 짓는다. 아무래도 재밌는 녀석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얼음을 밟기 싫어 경비행기를 타고 있는 관광객이 된 듯한 그를 쳐다본다. 시베리아의 평야에는 나 밖에 없다. 메마를대로 메말라, 더 이상 메마를 곳도 없는 슬픔이 나를 감싼다. 메마른 감정, 나는 초속 1밀리미터의 움직임으로 고개를 움직인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상사가 얼음조각같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한다. 나는 그에게 최대한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사무실을 나온다.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들이 왜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지의 이유는 모르는 채로. 이곳은 마치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아온 듯한 시베리아의 평야. 나는 그 곳에 홀로 서 있었다. 

 

 

 

 

이야기 흐름:

이 글 -> 그녀가 없는 거리 -> 빗속의 거리

 

2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