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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별이 흐릿한 겨울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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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01, 2017 21:46에 작성됨.

실패는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를 비웃을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찰리 채플린

 

아나스타샤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 아나스타샤양! 그대로!”

아나스타샤는 스스로의 새끼손가락이라도 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눈 앞에선 카메라 소리가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아나스타샤를 찍고 있다. 찍는것은 겨울 테마 화보. 익숙한 일이다. 겨울만 되면 아나스타샤에게는 화보집 오퍼가 질리도록 들어오곤 했으니까.
당연한 소리지만, 추워서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가끔씩 이 날씨에 야외 촬영을 고집하는 열정적인-미쿠의 표현을 빌자면 ‘정신나간’- 사진사도 있긴 하지만 화보집 의상을 입은채 몇시간동안이나 촬영을 시키는 것은 좋게 봐줘도 아이돌을 학대하는 행위다. 덕분에 아무리 열정적인 사진사도 아이돌들에게 야외촬영을 시키겠다는 생각은 차마 현실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아나스타샤의 기분이 이런걸까.

“오오, 그 포즈 좋아! 가녀려보여! 그대로! 우수에 찬 표정으로!”

정신을 차려보니 아나스타샤는 어느샌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의 둘째 마디를 깨물고 있었다. 스스로도 몰랐던 사실에 그녀가 흠칫한다. 사진사의 셔터는 그 사이에도 계속 불을 뿜는다. 조명, 셔터소리, 지켜보는 사람들, 쓸모도 없는 사진사의 잡담.
머리가 расст… 어지러워요.

“кон…”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말이 나오려다 멈춘다. 반사적으로 아나스타샤가 입을 막는 시늉을 한다.

“응? 무슨 말 하려고 했나?”

“…아니, 에요.”

사진사를 바라보지도 않고 있던 그녀는 애써 표정을 지우고 웃어 보였다.

“계속, 하도록해요?”

아나스타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화보도, 답답함을 감추는 억지 웃음도.


겨울이 되고, 새하얀 옷을 입은 아나스타샤의 모습이 전광판들에 걸린다. 마치 눈의 요정이라는듯이 가련하고 덧 없는 아나스타샤의 모습은 팬들에게도 호평이었다. 물론 저걸 찍을 때 아나스타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черная комедия… 웃을수 없는 코미디네요. 이래서 싫어하는거지만요.
이번 겨울도 아나스타샤는 ‘눈의 요정’일 뿐이었다. 아무도 ‘아나스타샤’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매번 느꼈던 감정이 아나스타샤 안에서 격하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조금… 참기 힘들지도.

“다녀왔습니다냐!”

미쿠의 목소리가 사무소를 가른다. 미쿠가 열고 들어온 문으로 노아가 살짝 안을 엿보듯 갸웃 하더니 따라 들어온다. 그리고 연이어 들어오는 후미카, 미오, 코즈에.

“화보 발매, 축하해.”

“고마워요, 노아.”

노아는 아나스타샤의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창가의 선인장에 가 말 없이 가지치기를 하기 시작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 소파쪽을 보면 미오가 신나서 지팡이를 휘두르며 과장되게 누군가의 흉내를 내는 중이었다.

“어때, 후미후미! 조금 찰리 채플린같아? 헤헤.”

“…아. 찰리 채플린 흉내셨나요…?”

“으으윽… 그 말만으로도 실패했다는걸 알 거 같아.”

다들 즐거워 보인다. 창가에 대고 있는 손에 올라오는 냉기가 아나스타샤에게는 유달리 차게 느껴졌다. 손끝에서 성에가 피어나는듯한 차가움이 아냐의 마음 속 깊숙히 파고든다. 지금 이 기분을 눈 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누구라도 좋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라면.
하지만, 무슨 말을?
거의 행동으로 옮겨갈 뻔했던 아나스타샤의 생각은 머릿속을 지나가는 이 한마디 말 때문에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이 감정을, 넘칠듯한 기분을 그녀가 일본어로 전할수 있을까?

“그런데, 어째서 찰리 채플린을?”

“아하하. 그게 말이지. 연기 연습하면서 찾아보다 보니 찰리 채플린의 연기가 이 미오쨩의 하트에 큥- 하고 왔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정말 기쁜 일일 거에요. 찰리 채플린은 희극 배우로서 유명하지만 그 인생은 많이 고탈팠다고 해요. 그의 연기 철학은…”

결국 아나스타샤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이방인이다. 아나스타샤가 찰리 채플린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눈 앞의 후미카와 미오의 대화에 끼어들어 활발하게 대화할 어휘는 없는 것이다. 부족한 어휘로 두 사람을 불편하게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닫는 것이 낫다.

“응? 아냥?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아니, 에요. 미오. 고마워요.”

결국 버릇대로, 감정을 숨길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런게 버릇이라니. 농담으로도 실격이에요.
그녀는 다시금 새끼 손가락 마디를 무심코 입에 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하셨어요.”

오늘의 일이 끝났다.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뽀얀 입김이 나온다. 은근히 꽃히는 그녀를 신기하게 보는 시선은 암만 이미 익숙하다지만 새삼스럽게 부담스럽다. 고개를 돌리자 그런 시선들이 서둘러 다른 곳을 본다. 한숨이 나오려 했다.
별수없죠. 이미 익숙한걸요. 그녀는 스스로에게 암시하듯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이런 것에 연연해선 모습 자체가 눈에 띄는 아나스타샤로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것이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요. 사람들이 나를 내버려두면 삶은 아름다우리라고.
아나스타샤는 스스로가 사나워져 있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 모든게 별거 아니고 휴식이 필요한걸지도 모른다. 얼른 집에 가자.

“실…?”

사무소의 문을 열자 의외의 암흑이 그녀를 반겼다. 이 시간에 아무도 없다니 별일이다. 아나스타샤는 반사적으로 불을 켜려다, 암흑 속에 인영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아…”

익숙한 목소리. 어둠에 익숙해진 아나스타샤의 눈에는 어둠속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모습이 보였다. 며칠전에 아나스타샤가 서 있던 그 위치다.

“별… 안 떠있네…”

그녀는 아나스타샤가 온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안 그러면 이런 혼잣말을 할리가 없으니까. 창에 비치는, 평소의 쾌활함이라고는 없는 쓸쓸한 표정. 어째서 짓고 있는 표정인지는 모른다. 춥다.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어쩐지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미오, 오늘은 구름이 많대요.”

아나스타샤가 말을 걸자 방금 전까지 착 가라앉아 있던 미오는 화들짝 놀라며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이 표정을 보면 확실히 평소대로의 미오다.

“으, 으앗?! 아냥?! 언제 여기에?”

“방금 전 에요.”

아나스타샤는 살며시 웃어 보였다.

“별 보러, 가실래요?”


프로덕션의 옥상은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기에 사시사철 계절을 뽐낸다. 물론 이 계절의 메마른 경치는 그리 환영 받진 못하는 편이지만, 그런게 필요할때도 있는 법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의 미오라거나.

“자, 아냥. 여기 따끈한 핫초코.”

미오는 스스럼없이 웃으며 아나스타샤에게 캔 초코우유를 건네준다. 하지만 아까 그 표정을 본 아나스타샤는 미오의 웃음 뒤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할까. 스스로가 하고 싶은 말도 재대로 하지 못하는데.

“그치만 옥상까지 올라와도 구름때문에 별은 거의 안 보이네… 아, 저기 하나 있다.”

“저건 полярная звезда… 북극성, 이에요. 길잡이 별이랍니다.”

“길잡이 별?”

“밤하늘에서 길을 알려주는 별을 말해요.”

“글쿠나… 구름에 가려져 있어도 길잡이 별이 있으면 대략적인 위치는 알 수 있을거야…”

아나스타샤의 머릿속에서는 여러가지 말이 떠돌았지만 전부 여기에 적합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런 표현을 하려던 것이 아닌데.

“별은 길잡이가 있구나…”

그런 말을 하는 미오는 멍하니 북극성을 바라 보고 있었다. 아까 봤던 그 표정이다.

“아냥, 이번에 내가 영화 출연했던거 알아?”

“네. 그랬었죠.”

“거기서… 배우들이 서로 싸웠어.”

“그랬나요…”

“둘 다 잘못했다는건 알지만, 그래도 난 사이 좋게 지내는게 좋아서… 그래서 두 사람 화해 시키려고 그랬었는데, 그런데,”

미오가 답답하다는듯이 숨을 조용히 들이 쉬는 것을 아나스타샤는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어휘과 풍부했어도 여기서 해 줄 말 같은건 없었으리라.

“’너따위가 뭘 아냐’더라구…”

피식. 허무한 헛웃음. 미오는 손에 들려 있는 핫초코를 한모금 마셨다.

“결국 괜한 소리를 했다고 사방에서 혼났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였을까?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것도 모르고 말하는 거면 아무 이유 없잖아. 다른 사람들을 웃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그렇게 잘못된 거였을까? ‘항상 쾌활한 미오쨩’은, 실은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고 있었던걸까?”

아아. 그래서였군요. 아나스타샤는 그녀가 스스로가 하고 싶은 말도 잘 못하면서 미오에게 손을 뻗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미오도,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전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네요.
수백마디의 이야기를 하건 한마디 말만 하건 전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아나스타샤도, 미오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혼자구나. 내 고민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인간관계라는건 각자 자기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다니는 겨울 같은거구나.

“에헤헤. 괜한 말 했나? 자, 우울한 미오쨩은 여기서 끝!”

아나스타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미오는 짐짓 쾌활하게 굴며 벌떡 일어나서 생긋 웃어 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미오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아니, 그에 앞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었다. 이쁘장한 장식품 취급 당하고 싶지 않아요. 설령 통하지 않더라도 좀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고 사람들 사이에 녹아 들고 싶어요. 일본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외지인 취급 받는 지금이 싫어요. 그리고…
…그리고?

“미오…?”

저도 모르게 아나스타샤가 미오를 부르려는 찰나, 미오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니, 춤이라고 하기에도 좀 어폐가 있다. 미오의 몸짓은 춤이라기엔 너무 우스꽝스러웠으니까. 마치 태엽장치 인형이 삐걱삐걱 걸어가는걸 흉내내는듯한 행동이었다. 뒤뚱뒤뚱. 비틀비틀.
그래. 마치 찰리 채플린 처럼.

“잠깐, 미오! 그러다간 넘…”

미오는 아냐가 저도 모르게 뻗은 손을 잡고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넘어지지 않고는 일어서서 아냐도 자신의 춤에 동참시켰다. 둘이 같이 뒤뚱뒤뚱, 삐걱삐걱. 뱅글뱅글.
되다만 춤사위가 멈춘 것은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짠!”

미오가 씨익 웃으며 팔을 벌린다. 아나스타샤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원래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비틀비틀 거리며도 용케 옥상을 가로질러 끝에 도착해 있다. 그리고 그걸 자랑스레 벌린 팔로 보여주고 있는 미오는 흡사 하나의 꽁트 같았다.

“…풋.”

“풋.”

“…하하하… 정말, 못말리겠네요, 미오는.”

“푸하하하핫!”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폭소하던 두 사람은 눈에 맺힌 눈물을 닦고 서로를 바라 보았다.

“미오, 할 말이 있어요.”

아나스타샤의 마음속에서 마구 날뛰던 말은, 춤추고 웃는 사이 어느샌가 한마디 말로 정리 되어 있었다. 남의 말을 빌려서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건 어쩐지 치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미오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이런 말 아시나요?”

아나스타샤는 잠시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이 말이 부디 위로가 되기를. 미오.


조금 늦게 스케쥴이 끝난 후미카를 반겨 주는 것은 방긋 웃으면서 폴짝폴짝 뛰며 현관을 나서는 미오였다.

“안녕하세, 요?”

“오옷, 후미후미! 이제 스케쥴 끝난거야?”

“네… 그런데 미오는 어째서 이 시간까지…?”

“헤헤! 이제 나두 집에 가야징! 빠이염~!”

미오가 활기차게 달려 와서는 후미카의 들고 있는 손에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지나쳐간다. 그 뒤를 선선히 웃고 있는 아나스타샤가 조용히 걸어 나온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후미카는 멍하니 미오의 뒷 모습을 바라 보았다.

“안녕하세요, 후미카.”

“네, 아나스타샤씨… 미오양이 기분이 좋아보이네요?”

“이야기를, 좀 했었어요.”

후미카는 아나스타샤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야기…요?”

“네.”

아나스타샤는 후미카를 돌아보면서 생긋 웃었다.

“후미카, 아냐랑 찰리 채플린 이야기 해 보지 않을래요? 분명, 위로가 되는 말이 잔뜩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지나고 나면 전부 웃어넘길 수 있는 것들.
-찰리 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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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미오 생일 기념으로 쓰기 시작했던 글인데 어느샌가 아냐가 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찌 넣은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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