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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키 「 어쨌거나 계속해서 시간은 흘러간다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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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6, 2017 20:12에 작성됨.

 

 

1.

꽤나 예전의 일이다. 새파란 젊은이였을 무렵에 있었던 그런 이야기.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회상하자면 오싹하여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제법 섬뜩한 기억이다만,

어쨌거나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 날에 히비키는 교통 사고에 휘말렸다.

 

경찰 관계자의 말에 의하자면, 뺑소니였다고 한다. 면허도 취소되어버린 막장 음주 운전자가 벌인 사고였다.

히비키는 횡단보도를 건너던 어린 아이를 구하려다가 대신 자신이 그대로 치여버렸고,

누군가의 말로는, 차에 치인 히비키는 그대로 십여 미터인가를 날아가버렸다고도 했다. 

또다른 누군가는 날아가서 전봇대와 그대로 충돌해버렸다고도 말했다.

제각기 다른 말들이 난무하였다만, 무슨 말이 나왔건 간에 사고를 목격한 모두는 공통적으로 그녀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한다.

 

소식을 들은 나는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을 향해 질주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일개 인간에 불과한 스스로의 무력함을 통감하며

그저 두 손모아 기도할 뿐이였다. 

당시만 해도 믿을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무소에서 함께 웃고 장난치던 그녀였다

지난일에는 생일로 모두와 함께 케이크를 먹고 축하해주기까지 했었다.

그런 그녀가 곧 우리들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 아니 떠날 것이라고 예감했었다.

 

그와 같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흘러가는 운명의 손길 아래,

일개 인간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 존재인가를 실로 체감하는 것 말고는

마찬가지로 일개 인간에 불과한 나로써는 그 이상으로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다음날.

그녀는 중환자실에서 멀쩡히 걸어나왔다. 

 

히비키 「프, 프로두서?」

 

프로듀서 「히, 히비키!」(왈칵)

 

히비키 「우갹! 괘, 괜찮다죠!! 이, 이런데서 껴안고 그러면 부끄럽다죠 이제 그ㅡ」

 

프로듀서 「정말..보고 싶었다.」

 

히비키 「..자신도..다시 보고 싶었다죠..(울먹)」

 

히비키 「...프로듀서, 좋아한다죠ㅡ」

 

프로듀서 「응? 방금 뭐라고..」

 

히비키 「우갹! 아, 아무말도 아니다죠!」

 

그 자리에서 나는 한참 동안이나, 다시는 그녀의 온기를 잊지 않겠다는마냥 온 힘을 다해 그녀를 껴안았다.

돌이켜 지금 와서 회상해봐도, 정오의 따사로운 태양빛만치 따뜻했던 그녀의 체온이 여전히 손에 머무르는 것 같이만 느껴진다.

 

 

2.

히비키가 심각한 교통 사고를 당하고도 멀쩡하다는, 그런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는 한동안 언론의 좋은 가십거리였음에도,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지나자 또다른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발 속에 잊혀졌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희망 사항이였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우려와는 다르게 히비키는 아이돌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와 아이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들이 변해갔고,

만남이 으레 암시하듯 이별 또한 우리 곁을 찾아왔다.

 

가장 먼저 은퇴한 것은 아즈사씨였다.

그녀는 제법 서글서글한 외모의 방송국 PD와 약혼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며,

가장 먼저 은퇴한 765프로의 아이돌이 되었다.

 

결혼식장에서 부케를 받고서 남긴 코토리씨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코토리 「우아앙..왠지 기쁘지만 슬픈 그런 느낌이네요.」(훌쩍)

 

프로듀서 「하하하. 너무 걱정 마세요 코토리씨. 곧 좋은 사람 만나겠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다음 해에,

코토리씨도 코미케에서의 인연으로 취미가 잘 맞는 제법 멋진 남자와 만나 결혼했다.

 

그 이후로도 시간이 더 흐르며 더 많은 것들이 변해갔다.

이오리는 부친의 가업을 물려받는 대신,

아이돌을 그만두고 765 프로의 신입 프로듀서로써의 길을 택했다.

하루카는 아이돌 대신 연기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어나가기로 결정했고,

치하야도 이제는 아이돌이라기보다는 가수로써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미, 아미, 야요이..그 작고 경망스럽던 아이들은

어느덧 머리가 나만큼이나 자라 대학에 입학하며 자연스럽게 사무소에서 떠나갔다.

의사, 변호사, 사회복지사..

어느덧 푸르른 청춘의 빛으로 물든 외모만큼이나,

언제나 어릴 줄만 알았던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제법 대견한 꿈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유키호와 마코토는 함께 연극의 길을 걸어나가기로 결정하며 다른 기획사로 이적했고,

리츠코는 쿠로이 사장이 새로 확장한 연예 기획사의 장이 되기로 협의했다고 말해주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리츠코..대단한 아이였다.

 

미키는 더 큰 꿈을 향해 헐리우드로 날아갔다.

 

공항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마지막 말들이 아직도 가끔씩 아름다운 고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미키 「미키, 이제 더 빛나고 싶은거야.

여기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니까.」

 

프로듀서 「그래, 미키. 미키라면 어디든지 빛날꺼야.'」

 

미키「...바보. 미키는 허니가 손목을 딱 붙잡으면서 가지마 사랑했어, 라고 해주길 기대했는데..」

 

프로듀서 「...미키..」

 

미키 「...」

 

미키 「..풉. 바보. 농담이였어.

그러니까 허니는 끝까지 바보인거야.

..그래서 이제는 벌로 프로듀서라 부를꺼야. 그러니까..」

 

미키 「잘있어, 프로듀서」

 

 

하늘 위 순백으로 빛나는 별만큼이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아이..

가끔씩은 그때 정말로 잡았어야, 하고 후회처럼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녀는 부족하기 그지없는 나 따위가 품기에는 너무나도 빛나고 소중한 모두의 별이였다.

 

타카네는 처음 만났던 그 날만큼이나 신비로운 이유로 사무소를 떠났다.

 

프로듀서 「지금 가는구나..」

 

타카네「..실로 감사했습니다.프로듀서. 정말로 즐거운 추억이였어요.」

 

프로듀서「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까?」

 

타카네「(미소)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

그리고 히비키에게 전해주세요. 언젠가 다시 돌아오면 예전 그 때처럼 꼭 함께 살자고요.

다른 친우분들에게도, 부디 안부를.」

 

프로듀서「응. 알았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언젠가 돌고 도는 인연의 끝에 다시 만날 것임을 알았기에,

보내는 그 순간이 서글프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뭐, 히비키는 떠날 때 인사도 못 했다는 사실에 한동안 우울해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모든게 변해갔고,

인연이 나가고 새 인연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무소 또한 리모델링에 리모델링을 거듭하여 이전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타가키 사장님의 뒤를 이을 즈음엔,

나 또한 어느새 제법 늘어난 군살에,

이마에는 주름과 세월의 흔적이 켜켜히 쌓여나가는 그런 평범한 늙으수레한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나는, 뭐랄까 덧없는 공명심 같은 것에 눌려있었던 것 같다.

무언가 더 큰 꿈을 이루지도 못했건만, 덧없이 지나가는 세월에 서러움을 느끼다가도, 

 

이따금씩 히비키와 이오리가ㅡ

 

히비키 「헤헷! 프로듀서, 자신이 흰머리 뽑아줄 테니까 고마운줄 알라죠!」

 

이오리 「참, 프로듀서라는 사람이 칠칠치 못하게..다이어트 좀 하라구!

그, 그리고 오해하지 마!

이건 단순히 니 머리가 흰머리로 덕지덕지 보이는게 꼴보기 싫어서 그러는 거니까!」

 

프로듀서 「ㅡ후훗. 반성해야겠는걸?」

 

라면서 늙어가는 못난 남자에게 달라붙어주는 것 또한 우울했던 당시의 나를 미소짓게 만들어준 나름의 재미였다 할만한 것이였다.

 

3.

히비키는 변하지 않았다.

세월 속 한 장면에 남아 영원히 이어지는 듯,

그녀의 외모를 포함한 모든 것들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이따금씩은, 사무소에 새롭게 들어온 신입들보다도 더 어려보일 정도였다.

 

뭐, 가끔씩은 의야할 정도였지만,

그것으로 의문을 가지기에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나와 이오리, 하루카와 치하야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가끔 올라오는 히비키의 상태에 관련된 가십 수준의 주제라도,

우리들은 항상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신입 프로듀서로 가끔 허둥대는 이오리를 도와,

그래도 히비키는 제법 능숙한 선배 아이돌 답게 후배들을 잘 인도해나갔다.

그녀는 하루카만큼이나 부드럽고,

때로는 치하야만큼이나 명확하게 후배들을 이끌어주었다.

 

히비키 「우갹! 이오리, 방금 전에 실수로 스케쥴을 착각해서 로케를 잘못 보냈다죠!」

 

이오리 「우아앗! 이 바보야! 걔들 이미 도착했다구 그랬다구!...프로듀서!」

 

하루카 「헤헷. 히비키랑 이오리는 여전히 사이가 좋네. 그치 치하야짱?」

 

치하야 「그러게나 말야, 하루카.」(미소)

 

...뭐 대체적으로는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녀는 언제라도 이 사무소에 남아 있을 것만 같았지만,

그녀 또한 결국엔 우리 곁을 떠나갔다.

 

아직도 그 날을 기억한다.

그 날은, 찬란한 가을 햇살이 내리던 어느 선명하고 화창한 가을날이였다.

푸르른 가늘 하늘이 드리워진 765프로 빌딩의 옥상 위에서, 별안간 히비키가 나와 이오리, 하루카, 치하야를 불렀었다.

 

하루카 「히비키짱, 여기서 뭐해?」

 

이오리 「뭐야 히비키, 765 프로 합동 콘서트 준비 때문에 바쁘다구!

당장 내일인데 누구는 겁먹어서 별과자만 처먹고 있고,

누구는 리더 못하겠다고 그러고..으으

히비키도 그만 놀구 빨리 내려와서 나랑 프로듀서 좀 도와줘.」

 

그래, 그 때에 기억을 돌이켜 그때 그 모습을 회상해보자면,

옥상 난간에 등을 기대어 서 있던 히비키의 모습은 마치 예전 우리들이 처음 만났던 그 순간과도 같았던 것 같다. 

내가 신입 프로듀서로써, 타가키 사장님의 부탁으로 아이돌 소개 촬영을 하던 그 날의 히비키랑.

 

히비키 「헤헷. 똑같네, 예전에 우리들이랑.

우리도 다들 그랬었잖아. 실수 투성이에, 다들 막 싸우고..

헤헷. 그래두 뭐 우리 때처럼 폭풍은 없잖아.

그러니까, 난쿠루나이사다죠!」

 

치하야 「훗. 그렇네 가나하씨.

정말 그 때랑 같은 분위기야..」

 

그때 나는 무언가, 직감 같은 것을 느꼈건 것 같다.

그녀의 환한 미소 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굳은 심지의 결심 같은 것을.

 

프로듀서 「...떠나려는 거니?」

 

히비키 「..헤헷. 역시 프로두서, 이젠 제법 날카롭다죠?」

 

하루카 「응? 그게 무슨..」

 

치하야 「잠깐만 가나하씨, 너무..갑작스럽잖아?」

 

이오리 「응? 그, 그게 무슨..

잠깐! 호, 혹시 일이 힘들어서 그래?

그런 거면 걱정 마! 이제부터 내가 다 하구 히비키는 쉬어도 되니까 그러니까ㅡ」(당황)

 

히비키 「그래서 그런게 아니야, 이오리.」

 

청명한 가을 바람 사이로 그녀의 윤기나는 흑발은, 바람 아래 물결같이 나부끼는 부드러운 실크 천마냥 흩날리고 있었다.

 

히비키 「그냥..더 남아 있으면 프로듀서랑 이오리랑 하루카랑 치하야랑 모두의 발목을 잡게 될 것 같아서.」

 

이오리 「그게 무슨..」

 

히비키 「자신, 언제나 이 모습 그대로잖아.

..사고 당했는데도 그대로 멀쩡하고..가끔 수근거리는 것도 들어. 

그리고, 자신은 언제나 이 모습 그대로니까..언젠가는 사람들도 이상하게 여길거구,

결국엔 쓸데 없이 사람들의 눈길만 끌게 될 거다죠?

자신 때문에 이 소중한 사무소가 나중에라도 논란에 휘말리는건 사절이니까..」

 

이오리 「말도 안돼! 히비키, 절대로 그런 일 없을 테니까ㅡ」

 

하루카 「맞아 히비키짱, 다들 지금까지 잘 막아왔다고!」

 

치하야 「..설령 무슨 말이 쏟아지던 가나하씨는 꼭 지켜줄 테니까ㅡ」

 

히비키 「헤헷. 그것도 그거지만, 고향에 내려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 것두 있다죠!

방문한지 제법 오래 됬으니까..

그 투명한 바다랑, 쌉싸름한 바닷바람..

철썩이는 파도 소리..

어망두, 오빠두...모두 그리워.」

 

이오리 「..히비키..(울먹) 그냥 휴가를 자주 길게 줄 테니까ㅡ」

 

히비키 「..미안. 그래도 자주 내려올께. 내려와서, 다들 행복하게 사는 모습 꼭 볼 테니까!」(울먹)

 

프로듀서 「..알았다. 대신, 거기서도 꼭 잘 살아야 한다..'(울먹)」

 

히비키 「왜 다들 울고 그러냐죠..(울먹) 바보 같게..」

 

그날, 우리들은 한참을 껴안고 하늘이 떠나가라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나 운 기억이 또 언제 있을까?

..그만큼 히비키는, 이제는 그 없는 모습이 상상조차 안 될 정도로 소중한 가족이 되어 있었으니까.

 

과연 약속대로, 후배들의 첫 합동 공연이 끝나고 

다른 옛 동료들을 일일히 찾아가 마지막까지 해맑게 그녀다운 인사를 건넨 후에,

결국 히비키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녀와의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아직도 어젯날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프로듀서 「..이제 가는데..마지막으로 아이들은 안 봐도 되겠어?」

 

히비키 「괜찮아. 아예 이별하는 것도 아니구..

언젠가 또 볼 테니까.

그리고 이제 겨우 마음 다잡기 시작할텐데

또 보면 더 힘들기만 할 테니까.」

 

프로듀서 「..그리울거야.」

 

히비키 「응. 자신두..헤헷.」

 

히비키 「그리고 프로듀서 이 둔탱아!

눈치 없는 바보야!」

 

프로듀서 「응?」

 

히비키 「하루카랑 치하야랑 스케줄 더 같이 잘 붙여주구,

이제는 이오리에게 맡길 테니까, 이오리랑 좀 잘 지내보라구!

둘이서 같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아야 해!」

 

히비키 「그리고..자신, 정말로 사랑했어.」

 

프로듀서 「응? 방금 뭐라고ㅡ」

 

히비키 「우갹! 차 도착했다죠.

먼저 가볼께! 후배 얘들한테 인사 대신 전해주고,

다들 꼭 톱 아이돌 되라고 말해달라죠!」

 

히비키 「잘있어!!」

 

프로듀서 「안녕, 히비키」

 

그녀가 떠나고, 한동안은 우울과 슬픔이 가시질 않았다. 그건 다른 모든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별이란 거의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고 가슴 아픈 일이였으니까. 특히 소중한 이의 이별 앞에서는.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다.

 

시간이 흐른 끝에야 나는 그 때 그녀의 마지막 말들에 담긴 의미를 찬찬히 깨달을 수 있었다.

하루카와 치하야는 일본 내 첫 동성 결혼에 골인한 연예인이 되었다.

아즈사씨가 첫 아이를 무사히 순산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생각난다. 고급 레스토랑 예약이 '우연찮게' 공짜로 잡혔다면서 왠지 모르게 들뜬 모습으로 시큰둥한 나를 고급 레스토랑까지 끌고 왔던 이오리의 모습이.

정작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다음 연간 계획표 작성을 생각하며 딴 생각에 잠겨 있는 와중에,

이오리가 뜬금없이 눈물을 터트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오리 「바보야! 이 바보 바보 바보!」(울먹)

 

프로듀서 「으,응? 도대체 왜..」

 

이오리 「눈치가 아무리 없어도 그렇지

이때쯤이면 눈치채야 하는거 아니야?」

 

프로듀서 「그게 무슨..」

 

이오리 「..사랑한다고! 이 바보 왕바보야!」

 

이오리 「대답해!..아니라고 하면 그냥 포크로 찍어버릴꺼야..(울먹)」

 

프로듀서 「어..가, 감사합니다..?」

 

이오리 「바보! 왕바보! 로맨스도 없고 눈치도 없잖아..우아앙!!」

 

프로듀서 「미, 미안! 미안해 이오리..」

 

이오리 「...훌쩍. 대신 엄청 사랑해줘야 한다?」

 

프로듀서 「응! 평생, 죽을 때까지 사랑할께 이오리!」

 

..이렇게 마흔을 넘어가려는 나이에 이오리와의 결혼에 골인했다.

 

그리고 또 시간은 흘러갔다..

 

헐리우드로 건너간 미키는 거기서 영화배우로 대박을 쳤고,

최근에는 자신의 매니져와 결혼 예정이라고 소식을 알려줬다.

 

유키호와 마코토도 각각 멋진 운명의 상대를 만나,

서로 사이좋게 동반 결혼식을 올렸다.

 

나와 이오리에겐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물이 생겼다.

이오리를 닮은 토끼 같은 우리 소중한 딸..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우리들의 보물은 어느덧 새끼새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제법 괄괄하고 말괄량이스러운 아가씨로 자라났다.

마치 내기 처음 이오리를 보았던 그 때 그 모습처럼.

 

이오리 2세 「어때 아빠? 나 정도면 톱 아이돌은 기본이겠지?」

 

프로듀서 「글쎄..」

 

이오리 2세 「그, 글쎄라니! 아빠는 바보야! 바보 왕바보!」

 

이오리 「후훗. 그 정도면 충분할거야.

역시 날 닮아서 완벽하다니까?」

 

그리고 그 때처럼,

우리의 보물도 아이돌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딸아, 힘든 일도 고난도 많겠지만

그 속에서 옛날 네 엄마처럼 소중하고 항상 그리울 인연과 추억 많이 만들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단다..

 

히비키에 대한 소식은,

다른 아이들에게 이따금씩 비슷한 사람이 멀리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는 정도 외에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보고 싶다, 히비키, 타카네..다른 친구들아.

그립고 소중한 찬란한 보물 같은 나의 인연들이여..

 

그런데 어느 날엔가,

내 딸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였다.

 

이오리 2세 「있지 아빠. 오늘 이상한 일이 있었다구!」

 

프로듀서 「응? 무슨 일이니?」

 

이오리 2세 「글쎄, 얼굴이 좀 타고 포니테일을 한 아이가 사무소 앞에서 알짱거리길래 수상해서 가봤더니,

급자기 나보고 이오리짱! 반가웠어 이러면서 우리 엄마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 있지?」

 

이오리 2세 「그러면서 우리 엄마 이름 함부러 부르디 말라고 하니까,

헤헷. 그러면 이쁜 딸이네 하면서 제멋대로 머리나 쓰다듬고 말이야..

건방져서 한마디 톡 쏘아봐줄려고 했는데,

..왠지 그 멍청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풀어져버렸어..왜 말 안했는지 나도 모르겠네, 참」

 

이오리 「그..그래서 그 아이는 또 뭐라고 말했니?(울먹)」

 

이오리 2세 「아, 이 말 전해달라고 그러더라.

자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이제는 세계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고.

둘도 행복해보여서 기분 좋다고..

앞으로도 쭉 행복할 거라구..」

 

프로듀서 「히비키..울먹」

 

이오리 2세 「뭐야, 아는 아이였어? 다들 반응이 왜 그래??」

 

이오리 「응..아는 아이란다.

정말루 착하고, 태양같던 아이였어..」

 

이후에 히비키에 대해서 추가로 듣거나 보게 된 일은 없었다.

때때로, 그녀를 떠올리면 행여나 어디서 곤란을 겪지는 않을까,

동물 친구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을까 하고,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의 심정으로 괜한 걱정에 휩싸이기도 하지마는,

그 걱정도 항상 찬란한 태양을 보면 그녀의 해맑은 미소가 떠올라 늘 깨끗하게 걷힐 뿐이였다.

 

그녀는 태양같은 아이니까,

언재 어디서건 그때처럼 밝고 환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나와 내 아내는 지금까지도 믿고 있다.

 

 

 

4.

히비키는 언제나 오키나와에 있었다.

 

오키나와, 아름다운 그녀의 고향. 푸르른 바다와 정 많은 이웃들이 함께하는 히비키의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

때로는 넒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푸르른 바다에 작은 낚싯배를 띄워놓고 평화를 만끽한다던가,

아니면 마당에 작고 앙증맞은 꽃들을 가꾸며 그녀는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씩 옛 인연이 그립다고 하면, 오키나와에서 벗어나,

몰래 저 너머에서 각자의 길을 걷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친구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바라보고 돌아오는 정도면 충분했다.

더 이상 시끄러운 일은 그녀의 마음에 맞질 않았으니까.

 

계속해서 시간은 흘러갔다.

마당에 키웠던 꽃들은 어느새 번창하여,

여전히 작은 키의 히비키가 채 모두 관리하기에는 벅찰 정도였다.

 

히비키의 존재를 알았던 사람들의 자손들까지 황혼의 나이에 접어들 무렵,

오키나와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겨울 눈이 찾아왔다.

어느덧 소복히 쌓이기 시작한 눈의 풍경을 만끽하며,

히비키는 집 문간에 앉아 옛 도쿄에서의 추억을 오래간만에 회상했더란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오키나와에도 거대한 빌딩들과 공장들이 들어섰고,

추억의 해변가가 있던 자리에는 대신 딱딱한 콘크리트 부두들이 즐비했다.

히비키는 집을 옮겨야만 했다. 더 조용하고ㅡ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더 깊은 곳으로.

 

그 이후로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인류 문명의 기술과 과학은 히비키의 이해 범주를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진보하여, 히비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는 마법에 가까워질 정도에 도달해 있었다.

한때에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비행차들이 부의 상징이였다면,

이제는 오히려 지상을 달리는 차들이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하늘은 새보다도 차들이 더 가득했다.

지상에는 인간들 대신, 옛 시절에 영화라 불리던 옛 문화 생활에서나 보였던 강철 인간들이 인간들의 모든 노동을 대체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지상을 넘어 상층부까지 치솟는 거대 빌딩들에서 첨단 문명의 이기를 누렸다.

오키나와의 지상은 일개 마을 규모의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들에 의해 사시사철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고,

그 지상에 남은 인간이라곤 이제 히비키만이 유일했다.

 

인간들이 지상을 떠난 사이, 언제까지고 푸를 줄 알았던 바다 위에는 검은 기름이 뒤덮히기 시작했다.

생명으로 풍요로웠던 바다는 이제 본 적 없는 괴상한 벌래들만이 가득했다.

악취 때문에 더 이상 바다에서 놀 수 없게 되자,

히비키는 제법 깊은 슬픔을 느꼈다.

 

몇 번, 몇 십번의 겨울인가가 더 흘러갔다.

수많은 빌딩들이 일어섰고, 이제는 하늘에 닿을 만치 거대한 도시 크기의 빌딩들이 예전 세상을 대신하고 있었다.

빠르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기술의 진보는 더욱 더 가속화되고, 이전 기술은 다른 새로운 기술의 이기들 아래 지면으로 버려지고 잊혀져갔다.

예전에는 태양 햇살 아래 있었던 히비키의 작은 오두막집은,

이제는 그녀가 줏어온 이런저런 물건들로 개조되어 하나의 자급자족형 거주 플랫폼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그녀의 집은 먼 고대의 유적처럼 이전 세대의 버려진 문물들 사이에 파묻혀, 지하의 등대마냥 작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래도 히비키는 그 삶이 나름대로 조용하고 평온하였으므로, 삶에 있어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이따금씩 심심할때면, 땅굴을 파고 올라와 지상의 기계 인간들과 교류하고 다시 들어가면 그만이였다.

 

그 이후에, 다음에 다다음 해인가, 기계와 인간 간에 거대한 전쟁이 일어났다.

인류 역사상 펼쳐졌던 그 모든 전쟁들을 합친 것보다도 더 거대한 전쟁.

이제는 수백미터 아래 지하에 위치한 히비키의 집에서조차,

이따금씩 지상에서 펼쳐지는 전쟁이 만들어내는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푸른 하늘만은 유일하게 변하지 않을 줄 알았건만, 

어느 날엔가 거대한 기계들이 인간의 멸종을 위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검은 먹구름을 쏟아부은 이후로는,

영영 밤하늘보다도 더 칠흑같은 어둠만이 자리잡았다.

지상에 남은 빛은 이제 끊어져가는 가로등 빛과, 저 멀리서 불타오르는 도시 하이브 빌딩들의 불길 뿐이였다.

 

간간히 히비키가 지상이 그리워 바깥으로 나올 때마다,

암흑에 잠긴 하늘 위로 형형색색의 선명한 광선들이 흑빛으로 물든 어두운 캔퍼스 하늘을 현란하게 비추었다.

만에 만을 더하는 온갖 찬란한 색과 빛의 광선들과 거대한 폭발이 암흑에 물든 하늘 위를 수놓으며,

이제는 흐릿해져가는 먼 옛날에 사무도 동료들과 함께 여름 캠프에서 보았던 그 불꽃놀이들 떠올리게 해주었지만,

광선들과 폭발이 지상과 공중을 휩쓸어간 자리에는 웃음 대신 기계 인간들과 육신의 인간들의 비명소리와 절규만이 들려왔다.

 

전쟁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때로는 마치 어둠을 가르는 빛의 가위마냥,

지평선 끝과 끝 사이를 거대한 화염이 뒤덮어 수 일간을 빛내기도 했고,

옛 하늘 위에서 빛나던 태양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환한 빛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던 달에 커다란 구멍을 내버리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히비키는 오키나와를 벗어나 옛 친구들의 먼 먼 후손들을 찾으러 여행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일본 본토 어디를 거닐던, 대지는 끝없이 내리는 재로 뒤덮혀 있었다.

히비키는 기계 인간들이 흘린 붉은 오일이 모여 만들어진 차가운 기름의 강을 건너,

인간들의 해골과 기계 두개골이 나란히 뒤덮힌 폐허를 지나,

태산만치 거대한 하늘 파괴자 기계들이 쌓여 만들어진 녹슬어가는 강철의 산을 올라

봄이 찾아왔음에도 꽃이 피지 않아 여전히 겨울 같은 봄의 계절이 찾아올 무렵 즈음에, 마침내 도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전 시대에는 거대한 빌딩들이 지평선 너머 태양까지 가렸었고, 수많은 빛들이 별들보다도 더 많이 반짝였건만,

이제는 단 하나도 남은 것 없이 끝없이 펼쳐진 잿빛의 폐허와 황야만이 도쿄의 전부였다.

봄에도 풀과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대지 위에서,

사람들은 옛 문명의 이기들, 예컨데 영구 보존 통조림이나 땅 속에 파묻힌 고대 기계들을 캐는 것을 농업이라 부르며,

죽어가는 시대에 마지막으로 생명의 불을 피워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히비키는 기적적으로 옛 동료들의 먼 먼 후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잿더미로 변해버린 세계 속에서, 옛 친구들의 멀디 먼 후손들은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죽어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리라. 지상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인간들은 이전 문명과 문화는 참혹한 대전쟁 속에 모두 잊어버리거나 점점 잊어가고 있었고,

이제 유일한 생존 수단은 지하에 파묻힌 이전 문명의 이기들을 다시 파내는 것 뿐이였으므로

중세, 고대를 거쳐 문화 수준이 그 이하로 점차 퇴보해갔다.

 

그럼에도 히비키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도쿄를 방문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그녀가 직접 개량한 고야 종자들과 그 재배법을 전수하고,

기나긴 삶 속에서 만들어온 압축 통조림 처리된 사다안타기들을 나눠주었다.

더불어 틈틈히 전 일본 본토를 여행하며, 다시 지구를 되살릴 방법을 찾아다녔다. 소득은 없었지만.

 

낮에는 방사능 낙진이 끝없이 떨어지고,

밤에는 흉측한 돌연변이들과 기계-야만인들이 돌아다니는 이 험난한 세상을 마음대로 거니는 히비키를 성녀로 여기는 사람들도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지하를 파면 부족할지언정 무한하게 나올 것만 같던 지난 시대의 부스러기들도 이제 그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제 인간들은 옛 먼 고대적의 선조들마냥 부족 생활 수준으로까지 퇴보하였다.

미나세 혈족의 가장 마지막 아이는 이제 멸망을 앞둔 한 부족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가장 마지막에 히비키가 찾아갈 즈음엔, 부족의 미래를 건 전쟁을 곧 앞두고 있었다.

 

5.

끝없이 펼쳐진 잿빛과 잔불의 폐허 위로,

유일하게 문명의 잔상이 그나마 남은 것이라곤 얄궃게도 옛 765 프로 빌딩이였다.

아주 예전에, 인류 문명이 절정에 달했을 때엔

765 프로는 태양계를 아우르는 거대 엔터프라이즈 기업이였지만

수많은 전쟁이 지나자 도쿄에 남은 것은 딱 예전 765 프로 빌딩 수준의 다 무너져내려가는 건물의 폐허 뿐이였다.

 

그 폐허를 기준으로, 지상에는 돌연변이 괴수들의 가죽과 시멘트 파편들을 섞어 만든 조잡한 토굴집들이 근방을 개미굴들마냥 뒤덮고 있었다.

토굴 구멍들의 수로 보아 한 500가구 정도나 될까?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모를 터였다.

히비키는 자신이 매번 올 때마다 그 수가 더욱 더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 세대에 수 세대가 더 지났지만, 방사능 낙진은 인간이 적응하기에는 여전히 유독했다.

 

그 토굴들을 지나, 히비키는 옛 765 프로 건물의 잔해ㅡ 이제는 미나세 부족의 족장 성채로 쓰이는 건물 앞에 섰다.

그녀의 품에는 그 아이가 좋아할 사다안타기 통조림이 잿빛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작고 이쁜 분홍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

 

그 작은 아이. 이오리 18세는, 이전 겨울에 왔을 적엔 사다안타기를 제법 맛있게 먹었었지..

 

히비키 「나 왔다죠!」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조잡한 시멘트 석칼이나, 녹슨 철근 창을 내밀며 막으려던 사람들이 히비키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길을 비켜주었다.

그들을 지나, 돌연변이들의 가죽이 카펫처럼 깔린 돌계단을 올라간 끝에 

히비키는 오래간만에 그 아이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래간만이네 당신,」 이오리의 먼 후손이 말했다.

 

히비키는 오래간만에 만난 그녀의 먼 후손을 잠시 살펴보았다.

바깥의 괴물들에게 다친 것일까? 못 본 사이에 왼쪽 이마를 따라 아래로 긴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팔에는 공업용 흰색 페인트로 칠해진 제법 무시무시한 해골 타투가 그려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히비키 보기에 이 아이 또한 먼 옛날 그녀의 선조와 거의 똑같아 보였다.

 

히비키 「이오리도 안녕? 그 동안 잘 있었냐죠?」

 

마코토의 먼 후손 「그 존함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썰어버리기 전ㅡ」

 

이오리 18세 「그만해, 마코토 '자전거' 21세. 이 분은 내 은인이야.

이 분이 없었으면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을껄?

내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와 그 어머니도 이 분께 도움을 받았어.

그러니까 함부로 하지 마. 씨알도 안먹힐 레이져 권총도 집어넣고.」

 

이오리 18세 「..그리고 당신도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난 이제 용맹한 샤를 도나텔로 18세 여왕이라고.

먼 예전부터 선조들에게 전해져 내려온 위대한 이름을 물려받은거야.」

 

히비키 「..우우..그 이름의 유래가 뭔지 알면 좀 황당할껄?」

 

이오리 18세 「이미 알고 있어. 우리의 가장 먼 선조님께서 직접 잡아서 길들였다는 하얀 털로 뒤덮힌 긴 귀의 흉악한 포식자의 이름에서 따왔다지?」

 

히비키 「아..음. 뭐..」

 

히비키 「..그나저나 다들 살벌해졌네.」

 

이오리 18세 「응. 그렇게 보이는게 당연할꺼야.」

 

이오리 18세 「타카츠키 부족과 전쟁을 앞두고 있거든. 알고 있잖아. 당신도.」

 

히비키는 사무소 한 켠에 전시된 그들의 무기들로 시선을 돌렸다.

이 잔불의 시대에, 마지막 인간들은 기술을 개발하거나 혹은 발전시킬 능력 따위는 조금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자원도 없었지만.

지구는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왔고, 그 결과로 이제 남은 것은 재와 낙진 뿐이였다.

 

대신 그들은 옛 문명 기술의 남은 부스러기들, 즉 땅 속에서 캐낸 전기 토치, 혹은 플라즈마 분출기와 볼트탄 발사기 등의 도구들을

화석화된 나무 혹은 페로콘크리트 따위를 조잡하게 갈아 만든 창과 검에 조잡한 돌연변이 가죽실 따위로 묶어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멸망이 임박했어도, 싸움과 전쟁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히비키 「응. 그래서 말인데..」

 

히비키가 말을 흐렸다.

 

히비키 「전쟁, 안 하면 안될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될 꺼구, 어쩌면 이오리..이오리랑 마코토도 다치게 될지 몰라.」

 

이오리 18세 「..하지만, 그러면 마지막 남은 지하 숙주나물 광산은 포기해야 되는데도?」

 

히비키 「..사이좋게 나눠 가질 수는 없을까?

야요이가 숙주 나물을 좋아하는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먼 먼 옛날 선조 때부터 좋아했으니까.

그러니까 서로 사이좋게 나눠서 다시 예전처럼 사이 좋게ㅡ」

 

이오리 18세 「그만! (버럭)」

 

이오리 18세 「사이좋게 나눠가지라고? 그런건 다 환상일 뿐이야.

이 세상을 봐. 당신 같은 존재한테는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완전히 말라가는 중이라고!」

 

이오리 18세 「알잖아.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도, 굶주린 돌연변이 괴물들이 어른이고 아이고 가리지 않고 공격하고,

역겨운 냄새나는 곰팡이들과 핵 방사능에 찌든 콜라 따위나 지하 쇼핑몰 광산에서 캐서 먹고 살아가고 있어.

그조차도 이제는 거의 바닥나서 태반이 굶주리고 있다고!

...그 숙주 나물 광산은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야.

양보할 수 없는 유일한 희망.」

 

이오리 18세 「..야요이 여왕 입장도 마찬가지일꺼야. 난 그녀를 원망하지 않아.

심지어 예전엔.. 그나마 조금이라도 평화로웠을 적엔, 우리도 친구 사이였는걸?

하지만 잔불만이 남은 이 세상에 이제 양보할 수 있는 희망 같은건, 어디에도 없어.

남은 건 오직 전쟁뿐이야.

그마저도 결국엔..언젠간 모두 사그라들겠지.」

 

히비키 「이오리..」

 

이오리 18세 「가! 여기에 더 있어봤자 위험할 뿐이야.

우리는 이번 전쟁에 선조들이 남기신 모든 무기를 다 총동원하기로 결정했어.

상대편도 마찬가지일테고.

계속 남았다가는,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생명을 보장해줄 수 없어.

그러니까 가 줘.」

 

히비키 「..알았어. 하지만 방법을 꼭 찾아올 테니까!

분명히 다 같이 살아나갈 수 있을꺼야!

그리고 푸른 하늘을 언젠가는 꼭 보여줄께.

그러니까 그때까지는ㅡ」

 

이오리 18세 「..그런 방법 같은건 없어. 이젠 믿지 않아.

당신이 내가 어렸을 적에 말해줬던, 그 '푸른 하늘'이라는 건 말도 안되는 말이야.

푸른 하늘? 어렸을 때 당신에게 매일같이 들어왔지만...하늘을 봐봐.

저기 어디에 그런 푸른 하늘이 있는 건데?」

 

이오리 18세「...평화 같은건 없어. 야요이도 마찬가지고.

이 세상은 오직 전쟁뿐이고, 이번에도 결국 전쟁은 시작될꺼야!

...이제 그만 가줘. 그래도 먼 은인이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히비키 「....」

 

 

건물을 나와, 몇 걸음 걷다 말고 히비키는 재로 뒤덮힌 거리 위에 주저앉았다.

마치 눈과 같이 하얀 재가 소복히 쌓인 얼어붙은 땅바닥 위로,

몇 방울의 투명한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땅을 조그맣게 적셨다.

 

더 이상 이 세상에 희망은 없었다. 온 일본을 여행하며 찾아 다녔지만 결국 구원 같은건 없었다.

먼 고대에, 인류가 태양계 너머로 진출할 무렵에는 그런게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지구를 잊은게 분명했다. 아니면 버렸거나.

 

히비키 「자신..자신은 최선을 다 했는데..

미안해. 자신은 여기까지인가봐.

미안해 이오리..프로듀서..얘들아. (뚝뚝)」

 

그때, 폐허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카네 「아직입니다. 히비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히비키가 잊을래야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히비키「..이, 이 목소리는..」

 

히비키「타카네?」

 

6.

여전히 산중의 맑은 폭포수처럼 길게 흘러내리는 은발을 자랑하는 타카네의 모습은

히비키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실로 믿을 수 없는 모습에, 히비키는 행여나 꿈일까 의심하며 한쪽 뺨을 세게 꼬집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통증이 그녀가 진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히비키「우갹! 아파..정말 타카네야? 내가 꿈꾸는거 아니지?」

 

타카네「실로, 당신이 아는 타카네가 맞답니다. 히비키.」

 

히비키「정말 하나도 안 바뀌었다죠?」

 

타카네「당신도 그렇네요. 후훗」(미소)

 

타카네「세상은 많이 바뀌었지만요.」 ㅡ타카네는 슬픔과 그리움이 뒤섞인 눈으로 지상을 바라보았다.

 

히비키「정말, 정말 정말 정말이지? ...만나서 정말 반갑다죠!」(울컥) 

 

히비키의 두 뺨 위로, 수백년간 흐른 적 없었던 눈물이 오래간만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히비키「...왜 이제야 나타난거야.. 정말 보고 싶었는데.」

 

타카네「그, 그리 안으시면..(화끈)」

 

타카네 「..그나저나 실로, 저 또한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답니다.」(뭉클)

 

타카네「그나저나,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어요.」

 

타카네「어서 떠나요. 이 세상은..이미 꺼져가기 일부 직전이니까요.」

 

히비키 「응? 어디로?」

 

타카네「제 고향으로요.」 타카네가 미소지으며 다시 말했다.

 

타카네「저 멀리, 우주 건너에 있는 낙원과 같은 제 고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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