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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7)사기사와 서점의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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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7, 2017 23:30에 작성됨.

낯선 천장이다.

같은 소리로 한숨 쉬고 납득해 버리는 건 어느 98년의 보라색 로봇 타는 인생 막장 소년이면 충분하고. 난 21세기의 톱 아이돌 그 자체 사기사와 후미카의 프로듀서다. 술 마시고 부린 민폐부터 장기밀매에 상품 자격으로 참가하는 영광까지 이 상황의 스펙트럼은 너무나도 넓다.

주변 환경을 파악해 본다. 우선 내가 누운 곳은 당연하게도 침대. 예의 그 천장은 목조거나 나무를 덧댄, 어쨌든 나무다. 조금 고개를 낮추니 책이 가득한 책꽂이들과 책상, 그리고 노트북이 보인다. 노트북은 잘 안 썼는지 먼지가 조금 묻어있는 것 같다.

모르는 곳이다. 아무래도 주변을 보는 걸로는 상황 파악이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여기 오기 전의 내 행적을 따라가 보는 거다.

생각해보자, 마지막 기억은...그래, 후미카 생일 전날이다. 생일 당일은 오프라 후미카가 회사로 안 온다고 해서 다들 하루 앞당겨 파티를 해줬다. 그리고 연상조, 그러니까 카에데 씨와 미유 씨, 신 씨, 미즈키 씨랑 사나에 씨, 그리고 미나미 씨와 함께 스무 살 기념이라며 술을 마셨지. 그리고, 남들보단 일찍 술에 취해선, 으음, 기억이 잘 안 난다. 떠올려라,떠올려라.

떠올리지 않는 게 나았을까.

잡소리를 한 기억. 후미카의 부축을 받은 기억. 후미카와 함께 어딘가로 들어간 기억...

그 다음 기억은 있어도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불안감 속에 이불을 들춰보았다.

셔츠다. 손이다. 세미 롱의 흑발이다.
그렇다. 침대 속에 볼록 튀어나온 서점의 아이돌.
사기사와 후미카다.

"후미카가 왜 거기서 나와...?"

그것도 와이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다. 흉부가 꽉 끼는 걸로 봐서 내 거다. 새삼 음지의 팬덤에서 미시로의 서큐버스에 이름을 올린 그 파괴력이 실감이 간다. 아니 지금 내 아이돌의 특정 부위 지방량에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

"푹 주무셨나요, 프로듀서...?"

아니, 그러니까 그런 소리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고.

"...좋아,기다려. 내가 지금 어제의 기억이 거의 없거든. 술 마시고, 후미카가 부축해줬지. 그 다음 상황을 부디 서술해주면 좋겠는데."

후미카도 침대에 앉은 자세가 되었다. 마주보고 있기가 힘들다.

"어제는, 제 생일을 맞아 과음하셨죠. 그리고, 신체를 가누실 수 없는 것 같아, 저도 무리하지 않으려 프로듀서 씨를 부축하여 나왔습니다."

"거기까진 나도 알아."

"그리고, 제 방으로 들였습니다. 그 다음, 모종의 이유가 생각나 결국 프로듀서 씨와 섹..."

"스톱스톱스톱스톱스톱스톱스톱. 난 후미카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는 걸 아무리 생각해도 견딜 수 없어. 그러니 부디 돌려말해줘. 대체 어휘란 거. 응?"

"알겠습니다. 그럼... 그 뒤에, 프로듀서 씨와 성관..."

"아니야아니야아니야. 역시 들을 준비가 안 됐어. 다른 단어...가 아니라 비유,혹은 암시. 뭐든 좋아. 직설적으로만 하지 말아줘."

"그런가요. 그럼... 예, 생각났습니다. 전 프로듀서 씨를 눕히고, 준비를 하고...

쥐어짰습니다."

"역시 준비 안 됐어!"

이불에서 튀어나온 게 차라리 내 장기를 떼갈 중국인이었으면 좋겠다. 준비가 안 됐지. 너무 준비가 안 돼서 어느 만년동정 프로 배신자도 굳이 언급 안 해줄 정도야.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냐고. 저절로 머리를 감싸쥐게 되고 한숨이 나온다.

"프로듀서 씨?"

"..."

"괜찮으신가요?"

그래, 몸은 아마도 괜찮을 거야. 최근 바빴으니 후련하기까지 하겠지. 하지만 인간의 제일 큰 특징은 지성의 비중이 다른 동물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이다. 그래, 그 후련함이 담당 아이돌에게 술김에 저항 없이 쥐어짜였다는 상황에 묻혀버릴 정도로 높지.

침착하자. 지긋이 있어봐야 도움 될 일 없어. 갑자기 울트라 조무사가 되어버린 기분이지만 뭐든 해야 한다.

지금 제일 먼저 확인할 건...그래, 탄피다.

서둘러 휴지통을 찾아본다. 다행히도 세 개의 탄피가 그 임무를 다하고...뭐?

"세 개?!"

"그게, 여러 연유로 길어진 바람에..."

"...안 힘들었냐? 이런 상황이지만 걱정해야겠다."

"저도 술에 취해 있어서, 몸의 피로를 고려하지 않은 탓에...으..."

후미카가 허리로 손을 가져간다. 역시나.

"일단 엎드려 있어....내가 안쓰러우니까."

"예..."

후미카가 침대에 납작 엎드렸다. 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내야 한다. 프로듀스 경험과 사례들에 의거한 내 머리 속의 프로듀서 매뉴얼을 열어본다.

찾아볼 항목은?
아이돌과 실수로 ○스를 해버렸을 때의 대처법.

"있을 리가 있냐!"

후미카의 "힉?!"소리가 들린다. 젠장, 이 와중에 귀엽다.

"그래, 이건...묻는다. 후미카, 그대로 들어줘. 사고 은폐 행동지침이다."

"예? 예...!"

내 얼굴이 그렇게 진지했나. 후미카까지 몰입한 표정이다. 또 귀여운 표정이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서점, 오늘 여나?"

"네, 오전까지만..."

"됐어, 그러면 너 먼저 내려가서 서점을 열고, 한 시간이 지나서 내가 나간다. 그러면 난 서점 손님이 되는 거야. 오케이?"

"네..."

"좋아, 상황 정리 끝. 나머지는 저 느려터진 시계바늘이 가는 걸 기다리면 될 뿐."

그리고 나는 침대에(히노 에이지의 영원한 친구, 즉 팬티 하나 차림으로) 걸터앉고, 후미카는 엎드려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5초.

"...뭐 하지?"

"그러게요...."

역시 정적은 어색하다. 아니, 술김에 저지르고 나서 술 깨고 있으니 뭐든 안 어색할까.

"...이렇게 있으니, 나이트풀에서 촬영한 일이 생각나네요."

"거기서 연상이 되는 거냐. 2주년이었지?"

"네. 일루저니스타."

"재즈 파티인데 뜬금없이 나이트풀 촬영이라고 해서, 아, 걸렸구나 싶었지. 수영복은 다시는 시키기 싫었는데."

"그러셨...나요? 전 오히려 하반신에 타월을 감아주셔서 다행이라고..."

"아아, 데뷔하고 얼마 안 지나서 수영복 했을 때 기억나?"

"으,그건..."

엎드려 있어서 나에겐 얼굴이 안 보이지만, 베게에 폭 하고 묻어버린다. 귀가 빨개져 있다.

"곤란했어."

"네?"

"의상 입고 나서, 숨은 거칠지. 몸은 떨고 있지. 눈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데 앞만 못 보고 있지. 누구나 부끄러운 게 보이는데 말을 안 했잖아."

아이돌을 서큐버스 이미지로 만들고 싶지 않은 프로듀서들의 최대의 적은 사진사다. 그 모든 부끄러워하는 행동들이 하나하나 매혹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아이돌은 신경도 안 쓰고 마구 사진을 찍어댄다. 베개영업을 보내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

"그 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촬영 직전에 후드티를 조달해왔다. 그것 나름대로 그 자식들이 즐긴 것 같아 기분은 여전히 더럽지만.

"오히려 미안하지. 그 뒤에 엄청 혼냈으니까."

"으, 무서웠어요..."

"참 나. 덕분에 트라우마 생겨서 발큐리아 때 제복이 의상이란 말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이 나와버렸으니까."

"아, 그게...!"

"맞아. 그 때 일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얘기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지."

"죄송합니다, 전, 그것도 모르고..."

"커뮤니케이션 문제는 프로듀서 잘못이야. 이제 와서 자책하지 마. 그것도 오래 전 일이니까."

"예..."

"그 다음에 피어라Jewel이었지. 정말로 열심히 했었어."

"그 때, 연습실 촬영에서 아리스 양이..."

"푸흡...그거 아직도 쓰는 사람 있는 거 알아?"

"풉...아리스 양이 알면 화내겠네요."

"뭐, 그 쪽 프로듀서는 멋져보일 정도로 힘낸 증거라면서, 어른의 계단으로 생각하자고 했지만."

"좋은 프로듀서죠. 누구는 뒤풀이로 유원지에 가자고 했더니 일이 밀렸다나..."

뜨끔,하고 돌아봤다. 부우-하는 효과음이 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나를 노려보는 후미카가 보였다.

"그거...미안하다."

"됐어요, 옛날 일이고."

그것도 옛날인가. 세월이 무섭다.

"...그래도 덕분에 곧 솔로CD를 낼 수 있었죠."

"정말 고생했지. 너도, 나도."

"그 때, 너무 긴장해 버려서... 사실 데뷔 라이브부터 실수투성이라서, 프로듀서 씨를 볼 낯이 없었어요."

"그 때, 바로 닛타 씨랑 아리스한테 갔던 게..."

한숨이 나온다. 나와 후미카는 도대체 얼마나 어긋난 채로 지내왔던 걸까.

"너무 어긋났네, 진짜."

"사실, 오늘의...사고, 도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

"...저는, 아이돌을 하면서 정말로 행복했어요. 수많은 세계를 알지 못하던, 비어있는 책장이 채워지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프로듀서 씨라는 책은 도저히 넣을 수가 없었어요."

"...나?"

죄책감에 의문이 끼어든다. 왜 나를?

"그저 스카우트를 위해서 서점을 몇 주씩이나 드나드는 사람이, 저는 궁금했어요. 업무관계라고 하면서도, 언제나 저를 우선이라고 하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내 편으로 달려와주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프로듀서 씨를 알고 싶어서, 손을 뻗었지만..."

헛웃음이 나온다. 이렇게나 내가 고평가받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이 시간 동안, 이런 보석을 신데렐라 걸 한 번 시켜주지 못한 내가.

"...프로듀서 씨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프로듀서 씨는 언제까지고 저와 한 뼘 멀리 있었어요. 하지만, 어제..."

"술 마시고 이상한 소리라도 했으려나."

"후훗...네, 확실히 술주정이었죠."

"욕 나오네. 언제나 내 신조는 '남자는 진리를 깨닫고 모든 걸 믿어도 술과 자기 아랫도리는 믿으면 안 된다'였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후미카가 웃어서 그럴까.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나도 고마운 말이었어요."

"불안한데. 차라리 내용을 들려주면 안 될까?"

"비밀이에요, 후후."

소악마다.

"전 그 말을 듣고, 결심했어요. 이제라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하나하나 맞춰나가자고. 사기사와 후미카의 다음 도전은, 이렇게나 어긋난 사람과 맞아떨어지는 거라고."

참 고마운 말이다. 그런데,

"그걸 위해서 그...쥐어짜야 했어?"

"흐...술이잖아요, 술!"

역시 귀엽다.

"너도 어지간히 취했었구나. 말투가 달라지질 않길래 술 센가 했다."

"으..."

"얼마나 취했으면 날 여기로 끌어들이냐."

"그건 상관없잖아요! 프로듀서 씨 정도라면 술 때문이 아니어도 멋지기도 하.....고.."

"에?"

얼빠진 소리가 나와버렸다. 뭐지? 후미후미 몰카인가?

"아,아,아아아...!"

다시 이불에 얼굴을 파묻는 후미카가 보인다.

"...못 들은 걸로 할게."

"네, 부디, 부탁이니까...!"

"그래..."

마음에 무언가 걸린다. 마음의 소리다. 물론 개그만화가 아니다.

이대로 넘겨버릴 거야?

또 다시 어긋난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쭉 어긋난 채로 와버렸다. 난 이대로 프로듀서를 계속할 생각인가?

후미카는 그게 싫어서 이런 무모한 일까지 저질러버렸는데, 난 그걸 무시해버릴 셈인가?

후미카의 생일인데?

물론 대답은 정해져 있다.

"...아니, 그냥 넘기긴 힘드네."

"...네?"

"1년이다!"

"잠깐,무슨 소리를..."

"1년 내로, 난 너를 톱 아이돌로 만든다! 목표는 신데렐라 걸 타입별 1위! 그리고, 그 때까지 너도 나도 마음을 정리한다. 정리하고서, 그 때 꺼낸다! 다시는 어긋나지 않는다!"

"프로듀서 씨..."

"네 생일이지만, 내년 생일 선물 예약이다!"

어느새 난 비장하게 일어서서, 후미카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고 있었다. 후미카가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이렇게나 변해왔다. 후미카는.

"푸흡..."

"아, 갑자기 왜 웃어?"

"죄송,합니다...정말,푸흡,감사합니다만,발언이,의상이랑 도저히..."

아, 나 팬티 차림이었지. 여보세요? 중국인? 나 수치로 죽을 지경이니 장기 가져가줘요. 좋은 데 써줘.

"음...후미카는 어휘력이 풍부하니까, 이 순간을 간직한다는 말은 부디 다른 말로 바꿔줘..."

"네,후후후..."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다. 결국 후미카의 웃음에 나도 전염되어 버렸다. 그렇게 둘이 한참을 웃고 있었다.

"프로듀서 씨, 올해 생일 선물도 부탁해도 될까요?"

"아... 물론이지. 뭔가 원하는 거라도 있어?"

후미카를 바라본다. 후미카도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면, 이젠 서로 말 못한 채로 어긋날 것 같지가 않다.

"...오늘 하루, 서점에서 프로듀서 씨를 대여해도 될까요?"

치사한 기습이다. 저런 표정으로 저런 대사라니. 솔로CD 라디오에서 고백 대사를 구상했을 때, 이런 재능을 예상했어야 할까.

후미카도 어느새 나와 같이 앉아 있다. 내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후미카에게 얼굴을 들이댄다.

"프로듀서, 씨...?"

"너, 그 대사 무슨 의미가 되는지 알고 있는 거지?"

후미카의 눈이 가늘어지고, 그녀의 팔이 내 목을 휘감는다. 알고 있다. 소악마 취소. 대악마다.

"물론이죠. 이거, 하나 남아있다고요?"

놀라운 물건이다. 1리터의 물을 간편히 보관 가능하다니.

"...후회하지 마라?"

"제가 고른 생일 선물이니까요. 후회할 수가 없네요?"

"...생일 축하해."

후미카를 안아서 침대에 눕힌다. 이제 천장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남자는 다 믿어도 자기 아랫도리만큼은 믿으면 안 된다.

술은 어디 갔냐고? 글쎄...어긋난 사람과 진솔하게 얘기하고 싶을 때라면,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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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로 프로덕션과 사기사와 후미카는 과음을 지양하는 건전한 시민 육성에 협력합니다.

문향탄신일입니다. 즐거운 날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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