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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잡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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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8, 2017 15:40에 작성됨.

남자의 직업은 아이돌 프로듀서이다. 아이돌을 길러내는 게 일이다. 아이돌이란 건 황무지에서도 대충 잘 자라는 잡초 같은 존재가 아니라, 엄격한 관리와 품질 검사를 거치고 나서야 손님에게 내어줄 수 있는 고급스런 상품이다. 남자의 경우, 길러내는 것 뿐만이 아니라 판매처의 확보와 유통업체와의 협상, 고객과의 상담까지가 일이다. 물론 남자 혼자서 하는 일은 아니고, 그의 활동을 보조하기 위한 여러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다.

 

아이돌 하나를 길러내기 위해서. 남자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집 창가 한구석을 차지한 스티로품 상자를 떠올렸다. 아이돌을 기르는 데 들이는 노력에 비하자면, 이 정도 노력은 별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 접속했다. 액상 비료 하나가 구입이력에 남아있었다. 어제 남자의 집에 도착한 물건이었다. 아직 뚜껑을 뜯진 않았다.

 

무슨 풀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이걸 적당히 부어주면 더 잘 자라겠지.

 

'오늘도 열심히 일할까' 남자는 전철의 안내방송을 듣고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전차가 멈추자, 남자는 인파에 휩쓸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아침의 만원전철에서 빠져나왔다. 계절에 관계없이 쪄 죽을 것만 같은 양철 찜통 안에서 바깥으로 빠져나오니, 신선한 공기와 시원한 바람, 따사운 햇살이 그를 맞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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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이 기획서 다시 써 오게. 무슨 소리냐고? 자네가 읽어봐

 

이딴 말도 안 되는 기획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전에 간 데 있잖아? 거기에서 클레임 들어왔어. 확인해봐.

 

신입사원도 아니고, 뭐 이런 데서 실수를 해?

 

아무튼 이따가 나갈 준비 해. 사과하러 가야지. 선물세트는 센카와 양이 준비해뒀으니 그쪽에서 수령해 가.

 

그리고 기획서 다시 써 오고. 그런 걸로 걔가 팔리겠냐?

 

안 그래도 아이돌 수명은 짧단 말이야. 좀 더 단기적인 플랜을 가져오라고. 

 

지금 잘 나가고 있다고 해서 나중에도 잘 나갈 것 같아? 어차피 한철이야 한철. 너도 좀 냉정하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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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간, 사무실에는 밤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빗소식이 창문을 세차게 때렸다.

 

--

 

그 이름 모를 풀을 기르기 시작한 이후, 남자는 스티로품 상자에 매일같이 물을 한 컵씩 부었다. 처음엔 매일같이 물을 줄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하루 이상을 고민했으나, 결국 식물에 따라 다르다는 결론을 얻어낸 후로 자기가 내키는 정도로만 주고 있었다. 그 물 한 컵은 남자가 귀찮아하지 않을 정도의 분량이었다. 물론 인터넷으로 주문한 액상비료는 아직 뚜껑을 열지도 않았다.

딱 한 컵, 그 한컵이 남자가 이름 모를 식물을 기르는 데 쓸 수 있는 움직임의 최대치이자 한계치였다. 돈 받는 일이 아니라면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현대인이란 건 대체로 그런 것이다.

 

"내일은 바로 현장출근이니까 조금 늦게 자도 되려나....."

 

귀가도 시간도 수면도 조금 늦은 밤, 남자는 자신이 기르는 풀을 보았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옷가지를 제외하면 칙칙한 단일색에 가까웠던 방에, 아주 작은 색이 생겨났을 뿐이었다. 며칠 동안 출근과 귀가를 반복하는 사이, 그것은 어느 새 칙칙함의 일부가 되었다. 처음에야 신기했을지 몰라도, 익숙해져 버리면 결국 같아지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방 한 구석을 점거하고 있는 얼룩처럼,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때가 취미생활의 끝과 의무생활의 시작이라는 걸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팬심의 변질 같은 것이라고.

 

"아이돌도 한철 장사니까 말이지....."

 

그는 이름 모를 풀을 떠올리며,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아이돌을 같이 떠올렸다. 아이돌이 되기에는 조금 많이 어린 소녀.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똑부러지고, 영민하다고 해주기엔 너무 고집이 센 그녀를 떠올리며 남자는 쓰게 웃었다. 인기는 착실히 올라가고 있고, 앨범 판매량 등의 수익도 호조를 보이고 있다. 남자의 윗선에서는 대학 입학 전 까진 상당히 팔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 뒤가 불투명할 뿐이었다.


마치 잡초 같은 인생이다. 남자는 한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곧바로 고개를 흔들어 부정적인 생각을 머리 속에서 떨쳐냈다. 모든 것이 호조다. 시간 너머 먼 미래의 일이라면 모를까, 당장 눈 앞의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계속 아이돌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만....."

 

물론, 고개를 흔든다고 해서 어떻게 될 일은 아니다.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할 여유 같은 게 지금 있을 리 없다. 눈 앞에 닥친 현실을 살아가는 것만 해도, 남자와 아이돌 같은 젊은이들에겐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초록색 새싹 같은 것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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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요. 밥 사줘요. 뻔뻔하다고요? 어차피 식비는 회사 경비로 나가잖아요.

 

......좀 줄여야 한다고요? 혹시 회사가 도산 직전이라던.... 아, 치히로 씨가. 납득했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저기 마츠야에서 사 주세요. 이야기 제대로 들었냐고요?

 

물론 이야기는 제대로 들었어요. 좀 싼 걸 먹으라는 말이잖아요. 프로듀서도 알다시피 전 성장기라서 배고픈 시기입니다.

 

청소년법 만세각 인정? 응 인정.... 아, 이런 말투는 팬들 앞에선 안 쓰니까 걱정 마세요.

 

....음, 맛있네요. 아, 그러고보니까 말이에요, 지난번에 그 농사니 뭐니 하던 거 어떻게 됐어요?

 

아직 기르는 중이에요? 뭐 기르는데요?

 

......비밀? 모르는 게 아니라요? 예? 다음 일?

 

저기, 너무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리지 말았으면 하는데요. 무시당하는 것 같아요.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말 안하신다면 뭐.... 어쩔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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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물을 주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아침 늦게 일어나 급히 출근준비를 하는 도중에, 남자는 어제 스티로품 상자에 물을 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는 걸치다 만 양복 바지를 질질 끌며 싱크대로 다가가 컵에 물을 담아, 스티로품 상자에 뿌려주었다. 흙이 물을 흡수했다. 그리고, 평소 쓰던 컵보다 더 큰 크기에 한숨을 지었다. 너무 많이 주면 아래 뚫린 물구멍을 통해 다 새어나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창가와 바닥이 흙탕물 장판으로 덮여있을 걸 생각한 남자는, 우선 크게 한숨부터 쉬었다.

 

그리고 저녁에 한번 더 물을 준 후, 다음 날 물을 주지 않았다. 벽을 따라 내려와 바닥을 적신 흙탕물만 가볍게 닦아내었다. 어느 새 때가 타기 시작한 스티로품 상자는 방의 얼룩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도 스티로품 상자에 물 주는 것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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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다음 일 캔슬이에요? 왜요?

 

....아, 그거 때문에... 

 

아니에요, 제가 실수한 탓이죠. 죄송해요.

 

괜찮아요. 힘 내요.

 

그러니까, 제가 실수했다니까요. 거기서 그런 말을 해 버려서.....

 

.....됐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아무튼지간에, 기르고 있다는 그 식물 어떻게 됐어요?

 

잠깐, 또 그런 식으로 못들은 척 하고. 무시하지 말라고 했죠?

 

그러니까!! 사람 좀 제대로 보고 말하라고요!!

 

아, 몰라. 이제 됐어요!! 갈께요!

 

그리고 몇 번이나 말하는데, 절 부를 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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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이 올 때까지, 휴일 저녁이 되어도, 남자는 스티로품 상자에 물을 주지 않았다.

담당 아이돌과도 업무를 위한 연락 빼고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기획서 쓰느라 바빴다는 훌륭한 변명거리가 있었다. 서로 눈을 피하는데 바빴다.

 

--

 

휴일 밤, 지금 내리는 비가 내일 아침에도 끊기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남자는 알고 있었다.

풍경이 되어버린 것은, 계속 눈에 밟히긴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서 딱히 무엇인가를 할 생각은 들지 않는, 그러한 것이 되어버린다. 남자는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고, 그래서 큰 기대 없이 식물을 향해 눈을 돌렸다. 아주 조금 남아 있는 신선함을 마지막으로나마 즐겨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변하기 직전의 팬심이 마지막 기대를 가지고 아이돌 굿즈를 사는 마음과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 만큼 부질없고 허망한, 어찌 보면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아....."

 

자그마한 둥근 잎 두 개가, 흙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말라서 떨어져버린 것이다.

 

 

 

 

 

 

 

 

 

 

 

 

 

 

 

 

 

 

 

 

 

새로 돋아난 푸른 잎들이 넓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잎이라고 생각하던 부분은 누렇게 뜬 채로 흙 위에서 말라가고 있었고, 대신 그 자리에 지금까지와든 다른 모습을 한 잎들이 있었다. 흙 위에 한 쌍으로 고고히 존재하던 둥근 잎은, 앞으로 뻗어나갈 수 많은 자손을 남기고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연한 녹색 줄기 몇 개가 뻗어나와 있었다. 그 끝엔 두툼한 단풍, 혹은 뭉툭한 톱니처럼 생긴 작은 잎들이 달려 있었다. 남자는 새싹일 때 보다 더 커진 그 풀을 보며, 무심코 감탄성을 질렀다. 우연히 자라난 새싹은, 드디어 첫 고비를 넘어선 것이다.

 

줄기 옆에서 뻗어나온 작은 줄기가, 흙 위를 더듬기 시작했다. 신선한 광경이었다. 
남자는 이제 그 이름모를 식물에 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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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적인 제목, 건전한 내용. 전 건전한 사람입니다.

이제 왕복 4시간 출근길에서 해방된다고 생각하니 참 좋군요. 일단 잠시 휴식시간이 나와서 이렇게 글도 쓸 수 있고 게임도 실컷 할 수 있고.

자 그럼 슬슬 헬스장에 등록하러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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