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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이 많아 슬픈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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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08, 2017 13:48에 작성됨.

11:59

하루가 지나간다.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별 특별한 일은 없었다. 동료들과 늘 나누던 평범한 인사, 프로듀서와 스케줄에 맞춰 이동하고, 작별 인사와 함께 늦은 저녁 퇴근. 혹시나 하던 서프라이즈 파티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사무소의 누구도 내 생일을 모르니까. 사장을 제외하곤.

냉장고에서 술병을 꺼내어 든다. 진한 초록색 술병. 초록이 이토록 쓸쓸한 색이었나. 잔에 술을 조금 따라본다. 맑은 액체가 잔을 가득 채운다. 나와는 다른, 투명한 색이다. 조그만 잔을 한입에 털어 넣는다. 싸구려 알코올 향과 함께 올라오는 쓴 맛이 불쾌하게 입안에 감돈다. 어쩌다 이런 생활을 하게 된 걸까.

 

처음 사무소에 들어갔을 때였다. 오디션 이라고는 사장 앞에서 노래 몇 곡 부른 게 다였던 영세한 사무소. 그래도 연 이은 낙방 끝에 붙은 사무소였기에 기쁜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사장은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다며 출근 첫날 나를 불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이런 질문을 했다.

“시죠 양, 아이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야, 노래와 춤 아닐까요?”

나는 정석적인 대답을 했다. 너무 기습적인 질문이었기에 다른 답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요즘은 컨셉이 중요하다네. 팬들이 원하는 아이돌의 모습 말일세.”

왠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나는 일단 최대한 수긍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일세, 내가 자네를 위한 컨셉을 한 가지 생각해보았는데 말이야…”

그는 나에게 신비주의 컨셉이 어떻냐고 물었다. 아름다운 은발의, 고풍스러운 말투를 쓰는 비밀 투성이 아가씨. 분명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말투 정도야 어떻게든 노력하면 바꿀 수 있을 테고… 나머지는 별로 문제가 안되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네. 방송에 출연할 때가 아니더라도 컨셉에 맞춰 생활해주게나.”

그는 나에게 방송에서는 물론이고, 사무소에서 동료들과 있을 때나 사무소 밖에서 팬들을 만날 때나 컨셉에 맞춰 행동해 달라고 했다. 본인은 완벽을 추구한다나 뭐라나. 나는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기에 뭐라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알겠다고 했다.

“아 참. 요즘은 여고생 아이돌이 대세니까, 프로필 나이는 고등학생 즈음으로 하도록 하지.”

그렇게 스물을 넘긴 나는 고풍스러운, 은발의, 비밀 투성이 여고생으로서 아이돌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 쥐며 몸을 일으켰다. 울적하다고 밤 늦게 까지 마신 게 화근이었다.

“몇 시지…?”

아직 12시가 안 지났기를 바라며 머리맡에 둔 휴대폰을 켜 본다.

1:21

“하… 좆 됐네. 그냥 가지말까…”

출근하기 싫다. 사무소에 가봤자 무슨 좋은게 있다고. ‘히메찡’ 거리며 졸졸 따라다니는 쌍둥이, 무슨 상황에서든 ‘난쿠루나이사’라며 웃어넘기는 바보,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있겠지. 그런데 그들이 아는 나는 사장이 만든 컨셉 속의 나일 뿐이다. 내 진짜 말투, 진짜 성격, 진짜 모습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여전히 나를 좋아해줄까?

“……”

모르겠다. 출근 준비나 하자. 오늘만 지나면 주말이니까.

 

사무소 문 앞에 서서, 혹시나 몸에서 술 냄새는 안 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본다. 다행히도 술 냄새는 다 지워진 것 같다.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간다.

“히메찡!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마미 엄청 기다렸다구?”

사무소에 들어가자 마자 쌍둥이 중 한 명이 나를 반긴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퇴근하는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가 떠오른다. 어릴 때 분명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지. 웰시코기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미안하군요. 마미. 오늘은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습니다.”

“에? 히메찡이 늦잠을?”

그녀는 놀라서 동그라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게요. 저도 정말 놀랐답니다. 그나저나 아미는 어디 가고 혼자 있는거지요?”

“아미는 좀 전에 프로듀서랑 나갔어. 요즘 아미도 그렇고 다들 너무 바빠서 마미는 외롭다구? 거기다가 피요쨩은 오늘도 지각이야.”

그녀는 이제 풀죽은 강아지처럼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 성격 상 혼자 있는 것은 참기 어려울 테지. 그녀도 분명 나처럼 외로울 것이다.

“그럼 저와 잠시 시간을 보내도록 할까요?”

“정말? 그래도 돼? 하지만 레슨은 어떻게 하고?”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각한 것. 오늘 하루 정도는 레슨을 생략하도록 하죠.”

그녀는 환호성을 지르며 나에게 안겼다. 연신 ‘히메찡 최고’라고 외치는 그녀는 마치 동생 같았다. 동생...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못 본지 오래돼서 그런가 보다.

그녀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가지고 온 게임기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열심히 게임기를 찾는 동안 나는 곰곰이 동생을 떠올리려 했다. 같이 놀았던 기억은 있는데 왜 얼굴이 떠오르지 않지?

얼마전에 TV에서 의사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과한 음주는 알코올성 치매를 일으킬 수 있다고. 설마 이게 그건가?

“자, 히메찡은 이걸로 하면 돼.”

내가 생각에 잠긴 동안 어느새 게임기를 찾은 그녀가 내게 게임기를 건네며 말했다. 병아리처럼 발랄한 노란색 케이스가 참 앙증맞았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조작하면 되는 건지요?”

그녀는 게임기를 이리저리 만지며 조작방법에 대해 열을 올려 설명했다.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 후 우리 둘은 지각한 코토리가 올 때까지 빈 사무소에서 게임을 했다. 혼자서 술 마실 때 보다는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하늘은 미처 다 저물지 못한 태양에 주홍빛 노을로 드리워 있었다. 각자의 갈 곳을 향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사무소에서 한 일이라고는 마미와 게임한 것, 그리고 프로듀서로부터 다음부터 레슨에 무단으로 빠지지 말라는 설교를 들은 것뿐인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영 가볍지 못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고독 때문일까.

마미와 같이 앉아 게임할 때의 기분을 떠올렸다. 철저한 고립보다는 군중 속의 고독이 낫다. 가면을 쓴 채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홀로 술병을 쥔 채 TV를 보는 것보다 몇 배는 즐거운 일이다. 갑자기 내 바보 친구가 떠올랐다.

“히비키한테 전화해볼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든다. 일이 끝난 후 동료들을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다. 일이 끝난 시간만큼은 원래의 나로 있고 싶었다. 그래봤자 술 마시며 사람들은 내 본 모습을 모르니 어쩌니 혼자 푸념을 늘어 놓는 것 뿐이지만.

그럴 바에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는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내 출신지를 모르든, 나이를 모르든, 아니면 생일을 모르든 그게 인간관계에 있어 무엇이 중요한가. 말투나 성격 정도야 내가 컨셉에 맞추어 바뀌면 된다. 차라리 그게 속 편할 것 같다.

그래. 어쩌면 지금까지 어리광을 피운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럴 나이는 아니다. 남들이 내가 힘든 것을 알아주길 기다릴게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 한다. 나는 히비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이사이! 히비키다조!”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평소의 경쾌한 음성이 들려온다.

“히비키. 접니다. 혹시 통화 가능하신지요?”

“아, 타카네! 당연하지. 무슨 일이야?”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실련지요?”

수화기 너머로 거북한 정적이 흘렀다. 좋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미안! 타나네. 지금은 조금 일이 있어서. 다음에 꼭 시간 비워둘테니까… 그때 놀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다음에 보도록 하죠 히비키.”

나는 전화를 끊었다.

“……”

그리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가끔 들리던 술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조금 많이 마실 것 같다.

 

타카네로부터 전화가 왔다. 같이 술 한 잔 하자며, 혀가 꼬일 대로 꼬인 채로 내게 술집 위치를 말해줬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아직 미성년자인데 술집이라니, 말도 안 된다. 나는 최대한 서둘러 그녀가 말해준 곳으로 차를 몰았다.

얼마 안 지나 그녀가 말한 술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길가에 차를 세운 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조명 아래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각자의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타카네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많은 사람 중에서도 그녀의 빛나는 은발은 유독 눈에 띄었다. 나는 그녀가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오? 프로듀서… 빨리도 오셨네여. 헤헤. 자, 여기 앉으세여.”

배배 꼬인 발음, 붉게 상기된 얼굴,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진 빈 병.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일단 그녀 맞은 편에 앉았다.

“프로듀서는… 맥주? 아니면… 소주?”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그녀의 모습에 나는 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실 없이 웃으며 술을 권하는 그녀를 언제 볼 수 있겠는가?

“저기, 타카네. 내가 지금 상당히 당황스러워서 말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줄래? 우선 미성년자가 어떻게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지부터 말이야.”

술에 취한 그녀가 못 알아들을 까봐 나는 최대한 또박또박 그녀에게 물었다.

“헤헤. 프로듀서는 제가 그렇게 어려보여여? 사실은 저, 성인이에요! 여기 신분증도 있다구요?”

그녀는 지갑에서 주섬주섬 신분증을 꺼내더니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래도 저, 나름 어른스러운 매력을 풍긴다고 생각했는데, 안 그런가보네요…”

방금까지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제는 의기소침해져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한다.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아니 타카네는 충분히 어른스럽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점에서요?”

어떤 점에서라니. 무슨 대답을 원하는거지? 이거, 잘못 대답하면 성희롱이 아닌가?

“그, 그러니까. 섹시하다던가? 뭐 그런거 있잖아.”

“그러면 저 못 알아들어요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무슨 말인지, 알겠죠?”

한 손에는 술잔을 쥔 채로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평생 못 잊을 것이다. 그녀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어떻게든 대화의 주제를 돌려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잠시만 타카네! 그 전에 몇가지 더 물어 볼게 있어. 도대체 나이는 왜 속인거야? 그리고 지금 네 모습 평소랑 엄청 다른거 알아?”

말 돌리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그녀가 맥 빠진 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프로듀서, 컨셉이에요! 컨셉!”

그녀가 하루카의 흉내를 내며 말했다. 그녀는 어디까지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는 걸까.

“뭐, 제가 생각한건 아니고, 사장님이 생각해낸거지만. 덕분에 직장용 타카네 따로, 자택용 타카네 따로.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그녀는 이제 나에게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컨셉이면 방송에서만 지키면 되는거 아니야? 왜 사무소에서까지…”

그녀는 손에 쥔 잔을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 놓았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컵이 안 깨진게 천만다행이었다.

“몰라… 사장이 그러라잖아. 완벽을 추구한다나 뭐라나. 내가 미쳤지 그걸 왜 수락해가지고. 너는 참 편하겠다. 있는 그대로 회사 다닐 수 있어서.”

이젠 반말까지. 눈 앞에 앉아있는 여성이 과연 타카네는 맞는 걸까. 분명 취해서 그런거겠지? 그래 내가 이해하자.

“흠흠. 저기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 내가 집까지 태워줄 테니까.”

“벌써? 나 아직 2병 밖에 안 마셨는데… 그리고 이렇게 맘 편하게 누구랑 이야기하는거 오랜만이란 말야. 나랑 좀 더 있자. 응?”

그녀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앙탈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좀 전의 찐득한 분위기 보다는 대하기 편했다.

“좋아. 그러면 딱 30분만. 대신 술은 더 안마시는 걸로. 어때?”

“좋아! 대신 남은 술은 마저 마실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10분 뒤에 그 자리에서 뻗어버렸다. 집이 어딘지도 말 안해준 덕분에 그녀를 들쳐 메고는 사무소까지 갈 수 밖에 없었다. 사무소 소파에 그녀를 적당히 눕혀 두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알아선 안 될 큰 비밀을 알아버린 이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불쾌한 감각들을 느끼며 눈을 떴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어제 도대체 얼마나 마신거지…”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침마다 보던 풍경과는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사무소잖아, 왜 여기서 잠든거지…?”

필름이 끊긴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별로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휴대폰을 확인해야겠다. 그러면 뭐라도 알 수 있겠지. 그 전에 세수라도 해서 정신부터 차려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갑자기 눈 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몸이 휘청거리는게 느껴진다. 나는 소파에 다시 풀썩 앉았다. 세상이 빙빙 도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껏 술 마시고 이런 적이 없었는데.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나. 어느 정도 어지러움이 가라앉고 나서야 세수를 하러 갈 수 있었다.

 

“하아…”

세수를 마친 뒤 확인한 휴대폰의 통화내역 최상단에는 프로듀서의 번호가 있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프로듀서한테 전화해야 하나? 아마 그래야겠지.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제발 별일 없어라…

“으음… 여보세요?”

피곤에 찌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때문이겠지. 술에 취한 나를 사무소까지 옮겨 왔을 테니.

“저, 프로듀서, 어제는…”

“아, 타카네구나. 괜찮아. 괜찮아. 별 일 없었으니까. 네가 몸을 못 가눠서 사무소까지 옮기느라 애먹긴 했지만.”

그게 별일이 아니라면 뭐가 별일이란 말이지.

“정말 죄송합니다. 술에 취해 그만…”

“아니, 아니. 괜찮아. 오히려 색다른 경험을 했다고 해야 하나... 하하. 푹 쉬고 다음주에 다시 보자.”

색다른 경험이라니. 아마 술에 취해 이것저것 떠벌렸나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연하지. 그리고 둘만 있을 때는 이제 편하게 행동해도 돼. 어제 너한테 얘기 다 들었으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일은 잘 마무리된 것 같다. 내가 아는 프로듀서는 결코 아무데서나 비밀을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리고 여차하면 마음 터 놓고 이야기 나눌 사람도 생긴 것 같다. 잘 된 일이다.

“고마워요. 프로듀서. 다음주에 봐요.”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뒤를 돌아봤을 때였다. 사무소 한 가운데에 히비키가 놀란 표정을 지은 채로 엉거주춤 서있었다.

“히비키?”

“우갸악! 어… 음… 하...하이사이! 타카네! 하하…”

낭패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통화내용을 들은 게 분명하다. 통화에 집중하느라 그녀가 들어온 걸 눈치채지 못했다.

“히비키. 어디까지 들은거죠?”

“뭐, 뭘 말하는거야? 지분, 방금 들어와서 타카네가 하는 말 하나도 못 들었는걸?”

저 바보 같은 모습은 언제쯤 고쳐질까. 누가 봐도 통화내용을 들은게 분명하지 않은가.

“히비키. 괜찮습니다.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나는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이리저리 시선을 회피하던 그녀는 더는 안되겠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미, 미안해. 타카네! 그러니까… 어제 밤 술에 취했다는 이야기, 프로듀서한테 실수했다는 이야기, 다른 사람한테 비밀로 해달라는 이야기, 그리고 다음주에 또 보자는 이야기…까지 들었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꾹 눌렀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일단 그녀에게 해명부터 해야겠지.

“히비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아, 알겠어.”

그녀는 순순히 내 말에 따라주었다. 나는 그녀 맞은 편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남녀 사이에 그런 통화를 한다면 누군들 오해하지 않을까.

“저기, 타카네. 지분, 두 사람 얼마든지 응원할 테니까. 미키는 어떨지 모르지만 분명 다른 친구들도 축하해줄 거야.”

“하아… 히비키. 저와 프로듀서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 잘 들으십시오. 약간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녀에게 사무소에 처음 들어온 날 사장과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모두 컨셉이고, 원래 나이는 어떻고, 그래서 술을 마실 수 있었고, 밤 사이에 프로듀서랑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러니까, 고향을 숨긴 것도, 고풍스러운 말투도, 나이도 사실은 다 컨셉이라는거야?”

“예 그렇습니다.”

“가족 중에는 할아버지 이야기만 한 것도?”

“예, 그런 셈이죠.”

“그럼, 매번 하늘의 달을 그윽하게 바라본 것도 컨셉이었어?”

“제가 그런 적이 있었나요…?”

“우갸악. 지분 완전 속았잖아! 혹시나 타카네가 카구야 공주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가끔 이 친구의 바보스러움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녀도 사실은 바보 컨셉인게 아닐까?

“후훗. 그럴리가요. 그럼 이제 일어나 볼까요? 아 참. 내가 언니니까 둘만 있을 때는 말 놓을게. 괜찮지?”

“으으… 뭔가 분하다조.”

입을 앙 다문채로 부들대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래저래 일들이 잘 마무리 돼서 정말 다행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자, 집에 가볼까… 어라?”

몸을 일으키자 또다시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몸이 크게 휘청거리는게 느껴졌다. 병원에 가봐야 하나?

“타카네! 타카네! 괜찮은거야?”

히비키가 나에게 달려왔다. 그녀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 봤다. 이상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똑바로 서있었는데, 지금은 볼썽 사나운 꼴로 바닥에 고꾸라져 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도, 내 이름을 외치는 그녀의 음성도, 그녀가 내 몸을 마구 흔드는 감각도 점점 희미해진다.

왠지 오늘따라 운수가 좋다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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