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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그녀는 언제부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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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02, 2017 19:26에 작성됨.

1편: https://www.idolmaster.co.kr/bbs/board.php?bo_table=create&wr_id=110665&sca=%EA%B8%80&page=2

 

그녀는 언제부턴가 나와 만날 때 과자를 구워 오지 않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바빠서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와 내가 만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 때, 나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에게 연락해서 내가 잘못한 게 있는건지,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는건지 만약 그런 거라면 정말 미안하니까 떠나지 말라고 말했다. 그녀는 괜찮다고 아무 일 아니라고 며칠 뒤에 한 번 만나자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녀와 오랜만에 만난 그 날 그녀는 나에게 이별의 말을 전했다.

미안해, 치하야.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사랑 받길 바래.”

헤어지며 그녀가 나에게 했던 그 말이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돌며 지워지지 않는다.

 

여보세요.”

긴 신호음 끝에 아주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네. 하루카.”

치하야! 나는 네가 전화를 안 받기에 번호가 바뀐 줄 알았잖아! 다행이다.”

자신이 찾던 사람이 맞아서 기쁜 건지 고양된 하루카의 목소리가 휴대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미안. 잠깐 다른 일을 하고 있었거든.”

여전히 일 때문에 바쁜가 보네.”

그녀는 하루 종일 일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 그럭저럭. 녹음을 새로 시작했거든.”

어떡하지. 사실은 다음주에 같이 밥이나 한 번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바빠서 힘드겠지?”

아니, 그 정도는 괜찮아.”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하루카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러면 내가 네가 사는 쪽으로 갈게. 그쪽에 괜찮은 식당이 있다고 들었거든. 정확한 위치랑 날짜는 나중에 메일로 보내 줄게.”

고마워. 그러면 그때 보자.”

그래. 나중에 봐!”

그녀는 집으로 가는 길에 옷가게에 들러 옷을 몇 벌 사갔다. 평소에 잘입지 않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녀는 하루카에게 평소 모습을 최대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코트를 꺼내 입었다. 메이크업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니트가 목까지 올라와서 조금 불편하지만 이는 별로 중요치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루카에게 최대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신발장에서 언제 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구두를 꺼내 신었다. 신발장에 달린 전신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그대로 문을 나서 그녀가 보내준 장소의 식당으로 향했다.

곧 봄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밖은 쌀쌀했다. 하루카는 식당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도 나처럼 코트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빨간 리본이 봄이 한창임을 알리는 장미처럼 그녀의 머리칼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치하야. 정말 오랜만이야!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녀가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해왔다.

반가워, 하루카. 너도 하나도 안 변했네. 리본까지.”

이건 내 아이덴티티니까 말이지. 헤헤.”

그녀와 나는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식당으로 들어갔다. 꽤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을 채우고 있었다. 연인들끼리 혹은 친구들끼리 온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종업원이 우리를 예약석으로 안내했다. 거리가 훤히 보이는 창가의 자리였다. 나와 그녀는 간단하게 샐러드와 파스타를 주문했다.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치하야는 그 동안 뭐하고 지냈어?”

오랜만에 만난 사람끼리 당연하게 오고 가는 질문이었다. 평범하게 일하고 놀러 다녔다고 남들처럼 답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답하기 싫었다. 매일 아침 너와 헤어지던 날을 떠올리며 일어나고, 너와 데이트했던 곳들을 돌아다니며 감상에 빠진다고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냥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놀러 다녔지.”

하지만 용기가 부족했다. 나는 결국 평범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이제 내가 그녀에게 물을 차례다.

너는 어떻게 지냈는데?”

난 말이지, 잠시 휴학하고 제과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어. 이것 저것 기술도 배우고, 손님 대하는 법이나, 가게 운영하는 방법도 익히는 중이야.”

일은 재밌어?”

그녀는 나의 질문에 가볍게 턱을 짚으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빵이나 과자 구울 때는 재밌긴한데 손님들 대할 때는 조금 힘들더라. 헤헤

진상들 처리하는게 힘들긴 하지. 그래도 너라면 충분히 잘해낼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의 칭찬에 그녀는 방긋 웃었다. 나도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고마워. 그래도 손님들 중에 좋은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아.”

예를 들자면?”

손님 중에 아침마다 빵을 사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번 빵이 너무 맛있다고 칭찬해주는거 있지. 나중에는 아침부터 수고한다고 커피나 주스 같은 걸 하나씩 주고 가더라.”

정말 좋은 사람이네.”

그렇지? 지금은 내 남자친구야!”

무언가 단단한 것으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매일 그녀를 떠올리며 미련 속에서 힘들게 살아왔는데, 그녀는 나를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천진난만하게 자신의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를 사랑했던게 맞냐고 그녀에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후에 있을 일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느냐도 아닌 사랑했냐라니 정말 꼴사나운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녀와 연애하던 중에도 서로 사랑하느냐고 물은 적이 없었다. 그녀도 나도 그 질문을 피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했는지도 모른다.

저기, 치하야? 내 이야기 듣고는 있는 거야?”

살짝 삐쳤는지 입술을 내민 채로 그녀가 물었다.

미안. 나도 모르게 딴 생각해버렸네.”

괜찮아. 남자친구 얘기만 너무해서 지루했지? 사실은 오늘 너한테 줄게 있어서 불렀어.”

나에게 줄게 있다니. 결코 좋은 예감은 들지 않았다.

! 청첩장이야. 이것만 덜렁 보내면 미안하니까. 같이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눌 겸 부른거야.”

웨딩드레스처럼 하얀 청첩장에는 간단한 초대의 말과 그녀의 이름, 신랑의 이름, 결혼 날짜, 그리고 결혼식장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그녀처럼 깔끔하고 평범한 청첩장이었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지척에 있던 것만 같던 그녀가 이제는 손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그녀를 축하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억지로라도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루카, 축하해.”

고마워! 친구 중에는 너한테 제일 먼저 청첩장을 줬으니까 결혼식 꼭 와줘야 한다?”

당연하지.”

얼마 뒤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파스타를 한 입 떠먹어 보았지만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접시를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나는 가만히 웃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녀를 근처 역까지 배웅해주고 난 뒤 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물을 열고 들어왔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구토감이 들었다. 코트를 아무렇게 벗은 뒤 화장실로 뛰어갔다. 더 이상 게워낼 것이 없어질 때까지 변기를 붙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자 땀에 젖은 내 모습이 보였다. 화장은 엉망이 되어있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 보였다. 찬물로 입을 헹구고 간단히 세수를 한 뒤 거실로 나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차라리 펑펑 울고 나면 괜찮아질텐데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앉은 소파에 그대로 몸을 눕혔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눈 부신 햇살이 막 잠에서 깬 치하야를 맞이했다. 어제 입었던 차림 그대로인 그녀는 어제보다 한 층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코트를 주워들었다. 주머니를 뒤지자 하루카에게 받은 청첩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서리가 살짝 접혔지만 여전히 순백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선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정하기로 했다.

침실로 들어가 옷장을 열자 계절에 따른 다양한 옷들이 자리해 있었다. 옷장을 가득 메운 수수한 옷들 틈으로 비교적 화사한 옷들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하루카의 손에 이끌려 백화점에 갔던 날들을 떠올렸다. 원래 쇼핑을 즐겨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하루카가 같이 가자고 하는 날 만큼은 마지못한 척하고 가줬다. 그 옷들은 하루카가 함께 간 백화점에서 골라준 옷들이었다. 치하야는 이런 화사한 옷들은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사양했지만 하루카의 적극적인 추천에 결국 구매하고는 했다. 그래도 하루카와 만날 때 그 날 산 옷들을 입고 나오면 그녀가 매우 기뻐해줬기에 치하야는 별로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카와 헤어진 뒤에는 한 번도 입을 일이 없었다.

그녀는 감상에 젖은 채로 옛 연인이 골라준 옷들을 꺼내 침대 위에 늘어 놓았다. 이 중에서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고르면 적당할 것 같았다. 흰 블라우스와, 검은 스커트 그리고 그 위에 입을 가디건을 고른 그녀는 나머지 옷들을 개서 방 한 구석에 쌓아 놓았다. 결혼식이 끝나면 방금 고른 옷까지 포함해서 상자에 담아 버릴 심산이었다.

그녀는 이제 하루카에게 축의금을 얼마나 줄지 정하기로 했다. 그녀는 예전에 친한 친구라면 3만엔 정도가 적당하다고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 하루카는 단순히 친한 친구 선에서 끝나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는 의미 있는 숫자에 금액을 맞추고 싶었다. 그래야만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카에게 고백했던 날과 하루카와 헤어졌던 날 중에서 고민하던 그녀는 축의금으로 43만엔을 주기로 결정했다. 4 3. 하루카의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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