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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그녀는 오늘도 잠에서 깨어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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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5, 2017 17:46에 작성됨.

 

그녀는 오늘도 잠에서 깨어난 뒤 그 자리에 가만히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별의 그 날 이후, 매일 아침이면 그녀는 몇 분이고 그 날을 떠올리고는 했다. 시험이 끝난 뒤 틀린 문제를 복습하는 학생처럼.

 

 

하루카는 나와 같은 사무소에 소속되어 활동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노래를 즐겼다. 우리 사무소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했으며,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밝은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었을 때쯤, 그녀는 일을 그만두었다. 일을 계속하기에는 그녀는 너무 평범했다. 사무소의 모두가 그녀의 손을 붙들고 이끌어준 덕분에 산 중턱까지는 갈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 였다. 그녀는 산 중턱에 가만히 서서 위로는 동료들이, 아래로는 신인들이 치고 올라가는 모습을 가만히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심정을 알고 있었기에 사무소의 누구도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녀를 위한 송별식이 열렸고, 다들 재회를 약속하며 그녀를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그녀와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건물을 나서려 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는 차가웠다. 그녀가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였다.

“잠시만요. 키사라기씨!”

자신을 부르는 청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녹음실에서 함께 작업했던 남자다. 그녀는 미간을 살며시 찌푸리며 그의 이름을 생각해내려고 애썼지만 이내 포기했다.

“무슨 일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운 2월의 공기보다 더 묵직하게 바닥으로 깔리는 듯했다. 그녀의 냉랭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잠시 후에 회식이 있을 건데 오시지 않을래요? 더 일찍 말씀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는 그녀가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적어도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어떻게 설득할지 생각할 심산이었다.

“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서 힘들 것 같네요.”

그러나 그녀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생각보다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회식 즐겁게 하세요.”

그녀는 그에게 더 이상 눈길도 주지 않고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 잘 들어가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너무 쌀쌀맞게 대한 것은 아닌지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그는 나에게 지어 보였던 웃음을 싹 거두고는 회식자리에서 자신을 흉볼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말에 동조할 것이다. 나의 태도에 질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나는 예전부터 누구에게나 그래왔다. 매번 뒤돌아 서서 후회하지만 나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바뀔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앞으로 내 성격이 바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병신이니까. 이제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스스로를 대한다.

 

그녀는 눈이 오지 않는 겨울의 거리를 걸어갔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거리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이제 녹음실의 그 남자는 아무래도 좋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귀찮게 남들과 엮이느니 혼자인 편이 여러모로 수월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녀는 행인들 사이를 지나가며 문득 고독감을 느꼈다. 길 한가운데에서 주저 앉아 울고 싶은 충동을 느낀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길거리에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려는 미친 여자로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울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리에 심겨진 나무에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듯이.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섰다. 그녀는 이 거리를 몇 번이고 지나다녔지만 가로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도 몰랐다. 길을 따라 나란히 심겨진 가로수들을 보았다. 한 때는 푸르른 이파리를 한가득 품고 있었을 그 나무는 지금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로 건조한 겨울 거리의 일부분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나무에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만두었다. 잠시나마 동질감에 빛나던 눈은 시린 슬픔 속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나무는 봄이 돌아오면 다시 예전의 싱그러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돌아올 봄도, 아름다운 모습도 없었다. 차라리 눈이라도 와서 모든 것을 덮었으면 그녀는 바랬다.

 

하루카는 과자를 잘 굽곤 했다. 사무소에서 함께 일할 때도 종종 과자를 구워 와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했다. 썩 잘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정성을 생각해서 다들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녀도 그런 우리의 심정을 이해라도 하듯 과자 맛이 어떤지 물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과자를 굽는 일은 그녀에게 취미였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사무소를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과제빵 쪽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 소식을 듣고 사무소의 모두들 그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다시 찾았음에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직접 찾아가 축하해준 것은 나 뿐이었다. 그녀는 나의 방문을 반가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해 하는 기색을 보였다. 자기가 괜히 바쁜 사람을 방해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착하니까. 점점 나의 방문을 정중히 사양하는 회수가 늘어갔다. 이대로는 그녀를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몇 달만에 그녀를 다시 보았던 그 날 나는 그녀에게 나의 마음을 고백했다. 그녀가 나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 주었을 때부터 품고 있었던. 그녀는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7월의 무더위 속에 나에게 새로운 봄이 찾아왔다.

 

치하야는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녀는 밤새 주방의 대리석 아일랜드 식탁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움츠려 있던 몸을 갑자기 움직이자니 전신의 근육들이 경련하는듯 했다. 거실로 나와 밖을 보았다. 유리창을 타고 빗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하늘이 온통 구름에 가려 시간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주말이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그녀는 주말에도 빽빽하게 스케쥴을 잡고는 했다. 그러나 하루카와 연인이 된 이후로는 주말에 스케쥴을 비워 두었다. 그녀를 위해.

 

나는 가끔 공원에서, 때로는 그녀가 공부하는 대학 주변에서 만남을 가지고는 했다. 어느 날 그녀는 꼭 자신이 구운 과자와 빵을 가져왔다. 그녀가 가져온 작품들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자니 예전 사무소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행복했다. 그렇게 그녀가 구워 온 과자와 빵을 사이 좋게 다 먹고 나자 그녀는 나에게 맛이 어땠는지 물어봤다.

“맛이 어때? 빵이 조금 퍼석하지 않아?”

한번도 맛에 대한 평을 물어보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이번의 기습적인 질문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전혀, 정말 맛있는 걸. 다음에도 또 만들어줄 수 있을까?”

그녀는 뭔가 미덥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어왔다.

“정말이야? 치하야가 솔직히 대답해줘야 내 실력도 는다고?”

그녀의 의심을 떨쳐 내기 위해서 최대한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살짝 퍼석거리긴 했지만 충분히 맛있었어. 진짜야 하루카”

나의 진중한 표정에 그녀도 납득을 한 모양인지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 치하야. 다음에 더 맛있게 만들어 올게.”

그 후로 그녀는 만남이 있을 때 마다 과자나 빵을 구워 왔다. 그리고 구워 온 것들을 다 먹고 나면 늘 나의 시식평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맛있다고 해줬고, 그녀는 고맙다고 했다. 언제부터 인가 그녀는 나에게 맛이 어떤 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드디어 자신의 실력에 만족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지하철 플랫폼을 걸어 나왔다. 인파에 섞여 역 밖으로 나온 그녀는 한 손에우산을 꼭 쥔 채로, 예전 기억을 더듬으며 야마테의 어딘가에 있었던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가게 이름이 분명 ‘로슈’였다고 그녀는 떠올렸다. 하루카가 요코하마에 맛있는 식당이 있다고 데려간 곳이 그 레스토랑이었다.

 

“치하야! 오믈렛이야, 오믈렛!”

그녀는 기쁨으로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서빙된 오믈렛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내 접시에 오믈렛을 덜어준 뒤 자기 몫을 가져갔다. 확실히 맛은 있었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오믈렛 위에 뿌려진 진한 데미글라스 소스가 오믈렛의 부드러운 식감과 어우러져 최고의 맛을 냈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오믈렛도, 그 위에 뿌려진 데미글라스 소스도 아닌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오믈렛을 한입 씩 떠먹으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얘기했다. 가까이에 있는 공원도 들리고 해가 지면 관람차에서 야경도 보자며 한껏 들뜬 모습을 보였다.

 

“여기 주문하신 오믈렛 나왔습니다.”

점원의 말에 치하야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 앞에 놓여진 오믈렛은 추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차이라면 화창했던 그 날과 달리 지금은 비가 내린다는 점과 식당에 혼자 왔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녀는 오믈렛을 한 입 떠서 입에 넣어보았다. 예전의 그 맛이 나지 않거나 차라리 맛이 없기를 바랬지만 여전히 이곳의 오믈렛은 맛있었다.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소소하게 행복감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 그녀는 한심했지만 그녀는 이별 노래의 주인공처럼 매 분 매 초를 비탄에 빠져 살아갈 필요는 굳이 없다고 생각하며 숟가락을 마저 들었다.

 

그녀는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따라 천천히 관람차가 있던 곳으로 걸어 갔다. 지금 이 우산을 놓으면 어떻게 될지 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무수히 떨어지는 이 빗줄기들이 가슴 한 켠에 퀴퀴하게 묵혀 놓은 끔찍한 미련들을 깨끗하게 씻어줄지도 모른다고 떠올렸다. 하지만 갈아 입을 옷도 없는 지금 그랬다간 더 끔찍한 꼴을 당할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는 일단 관람차까지는 가보기로 했다.

그녀는 그곳에 도착하면 무언가 심정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해 하루카?”

밖을 보며 사색에 잠긴 그녀를 보며 나는 물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야경이 너무 이뻐서. 치하야도 봐! 야경 엄청나지 않아?”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바깥을 가리켰다. 분명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일전에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전국을 순회하며 시를 쓰고 다녔던 문인이 있다고 들었다. 만일 그가 이곳에서 저 광경을 보게 된다면 그가 평생 써왔던 시 보다 몇배는 긴 시를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있지, 치하야.”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치하야는 어떤 결혼식을 하고 싶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살면서 단 한번도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 해본적이 없었다. 애초에 남자와 연애조차 해본적이 없었던 나는 그녀와의 연애가 일생 처음의 연애였다.

“우리나라는 동성결혼이 안되지 않을까?”

나의 진지한 대답에 그녀는 재밌다는듯이 웃었다.

“푸하하하, 꼭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그런가. 그러면 하루카는 어떤 결혼식을 하고 싶은데?”

그녀는 손을 턱에 갖다댄 채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음.. 나는 말이지.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어.”

“바다? 특이하네.”

“그렇지?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친한 친구들이랑 가족들이 모여서 조그맣게 결혼식을 하면 정말 좋을 것 같아!

 결혼식이 끝나면 바로 거기서 사진도 찍고 뒤풀이도 하고. 역시 결혼 의상은 하얀 웨딩드레스가 좋겠지? 헤헤”

행복한 상상에 빠진 그녀를 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계속 함께할 수 있을까?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녀가 갑자기 결혼에 대해 언급한 것은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결혼을 위해 내 곁을 떠나 버릴지도 모름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졌다. 나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관람차 안이 조용해졌다. 차내를 무겁게 짓누르는 침묵 속에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음이 느껴졌다. 가슴에 손을 대지 않아도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지고 나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맹렬하게 나의 고막을 두들겼다. 그녀의 동공은 커져 있었고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갰다. 나의 손이 자연스레 그녀의 가슴 위에 올라갔다. 서로의 혀가 한 데 뒤섞였다. 서로 너무나도 서툴렀지만 그 상태는 숨이 찰 때까지 계속 되었다. 입술은 먼저 뗀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나를 살짝 밀어내고는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미안해, 치하야.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했어.”

“아니, 내가 미안해.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을거야.”

나의 대답에 그녀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녀의 반응이 괜찮았기에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관람차에서 내린 후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집 앞까지 바래다준 나에게 그녀는 즐거웠다고 했다. 나는 아직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기로 했다.

 

그녀는 결국 관람차까지 가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가까운 지하철역에 들어가 집으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5인치의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고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 그녀는 스스로를 우겨 넣었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어 들었다. 방해 받고 싶지 않아서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꾼 덕분인지 그녀가 빗속을 정처 없이 걷는 동안 생각보다 많은 연락이 와있었다. 십 여개의 연락이 와있었지만 하나 같이 스팸 혹은 업무관련 연락이었다. 휴대전화 스크롤을 쭉 내리던 그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잠시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가 켜보았다. 그녀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하루카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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