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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이시 츠무기] 나와 닮은 그 아이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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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02, 2017 15:40에 작성됨.

새로운 만남과 아쉬운 이별.

7년 동안 이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계속해서 마주했던 것들.

 

도시에 막 상경해 신입으로 들어왔던 것이 엊그제 같건만, 작고 허름한 영세 기획사가 어느덧 대형 극장까지 갖춘 중견 기획사로 자라게 된 것처럼 나 역시 신입 티를 벗어 던지고 조심스레 베테랑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뭐, 실력까지 베테랑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쨌든 아무 것도 모르던 신인 프로듀서였던 내가 걸어온 7년 간의 기억들을 되짚어보면, 정말로 많은 만남, 그리고 이별과 마주해왔던 것 같다.

숱한 만남과 이별을 통해 머리와 가슴 속에 남은 좋은 기억, 그렇지 않은 기억을 조심스럽게 곱씹다 보면 아, 나도 나이를 들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와 만났던 그 아이들도 잘 지내고 있을까 하는 애틋한 그리움이 슬며시 내 가슴 한 켠을 적시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 아이들은 나와 함께 지냈던 나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과연 그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는가.

다시 한 번 그 아이들과 만나게 된다면, 나는 떳떳하게 웃으며 먼저 다가갈 수 있을까 하고.

 

그렇게 여태까지 만났던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조용히 떠올리며 나 자신에 대한 나름대로 엄격한 채점을 끝내고 나면 그제야 가슴 속에 차 있던 무겁고 축축한 감정들을 한숨과 함께 뱉어낸다.

그리고 다짐한다.

다음에는 더욱 더 잘하자고.

 

어느 샌가 나는 그렇게 매일매일 새로운 만남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더욱 준비를 단단히 해야만 했다.

카나자와에서 온, 한 소녀와 만나는 날이었으니.

아이돌이 되기 위해 카나자와에서 올라온 소녀는 앞으로 1시간 뒤, 이 곳에 도착한다고 했다.

사장님과 나를 알고 있는 지인의 추천으로 이 곳에 오게 된 그녀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기에, 나는 사진으로만 봤던 그녀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목소리는 어떨지, 말투는 어떨지 상상했다.

이름이… 시라이시 츠무기라고 했던가.

그녀의 이름을 되뇌며 1시간 앞으로 다가온 만남을 앞두고, 나는 천천히 기지개를 폈다.

 

그 뒤로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약속시간이 되었다.

마치 이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소녀는 아오바 씨와 함께 조심스레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오바 씨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에게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이쪽이 프로듀서 님이세요."

"안녕하세요. 시라이시 츠무기라고 합니다."

 

아오바 씨의 소개를 듣고, 찰랑거리는 은발이 인상적이었던 소녀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인사했다.

침착하면서도 어딘가 강단이 느껴지던,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단아함이 묻어 나오던 그녀의 목소리.

전화를 통해 들었던 지인의 말대로, 츠무기라는 이름의 소녀는 범상치 않은 기품과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

 

그녀의 첫인상에 살짝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니, 놀랐다기 보다 압도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설명일지도 모르겠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분위기를 내뿜던 그녀에게 압도된 나는 신입 시절 처음으로 아이들과 만났을 때의 느낌이 떠올라 잠시 움찔했다.

그러자, 아오바 씨는 대답이 없던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저기… 프로듀서 씨?"

"아…! 바… 반가워. 시라이시 양…이라고 했나? 앞으로 잘 부탁해."

"……."

 

아오바 씨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츠무기에게 인사했다.

그녀와 만나면 어떻게 첫 인사를 할 지 계속해서 생각을 했었건만, 정작 만나고 나니 머릿속이 순간 새하얗게 되어버릴 줄이야.

살짝 긴장한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편하게 츠무기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프로듀서."

 

나와는 달리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어 보였던 츠무기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그녀 쪽에서 먼저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달라면서 말이다.

초면에 긴장도 할 법인데, 전혀 그런 기색 없이 특유의 기품을 유지하던 그녀.

가녀린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던 진지한 분위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마음가짐을 알아채곤 그녀의 진지함에 보답하고자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 츠무기."

"……."

 

츠무기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인사를 했다.

미소도, 웃음소리도 없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반응.

프로듀서와 담당 아이돌의 첫 만남 치고는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자, 아오바 씨는 약간 어색했는지 괜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츠무기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던 진지함과 엄숙함으로 말미암아, 그녀가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으니.

매사에 진지할 것 같아 보이는 그녀였기에, 그녀의 다소 무겁고 진지해 보이는 분위기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밝은 미소를 보여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녀도 어쨌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있는 카나자와를 떠나 먼 이 곳까지 왔으니 긴장이 될 수 밖에 없었을 터.

츠무기의 인사를 보고 내가 이 곳에 처음 입사했을 때가 생각나 더욱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되던 나는 그녀의 아름다울 미소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일단 우리 사무소랑 시어터 동료들을 소개시켜줄게. 같이 가볼까?"

"…감사합니다."

"프로듀서 씨, 제가 해도 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어차피 시어터에 있는 아이들에게 츠무기를 소개시켜줘야 하니까요. 아오바 씨는 쉬고 계셔도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

 

아오바 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나의 얼굴을 츠무기는 조용히 쓱 쳐다보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지만, 나는 못 본 척 하며 조심스럽게 사무실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츠무기는 나의 뒤를 차분히, 그러나 도도하게 따라왔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사무소와 시어터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대화를 주고 받은 나는, 머릿속으로 그녀가 나에게 알려준 것들을 갈무리했다.

카나자와에서 기모노 가게를 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한 계기.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어엿한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당찬 포부까지.

이제 17살인 츠무기가 무뚝뚝하게 꺼낸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무게가 느껴졌다.

 

'대견하네…….'

 

속으로 그런 츠무기가 대견하다고 생각한 나는 혹여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살랑거리는 은발, 도도한 눈매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품이 마치 은은한 화장처럼 그녀의 얼굴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에 홀린 나는 멍하니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프로듀서? 아까부터 제 얼굴을 쳐다보시던데… 용무가 있으신지요?"

"……아!"

 

나의 시선을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었는지, 츠무기는 약간 날이 선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그녀가 불쾌해하는 것 같아 곧바로 사과했다.

 

"미… 미안! 딱히 용무가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오해를 할 수도 있으니 너무 말없이 쳐다보는 건 자제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용무가 있으시다면 바로 이야기를 해주시고요."

"…그래. 다음부턴 주의할게."

 

낭패였다.

경력 7년, 나름 베테랑 프로듀서라고 자신하던 내가 처음 만난 아이돌에게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여줄 줄이야.

아이돌이라는 꿈을 위해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온 츠무기와의 첫 만남.

담당 프로듀서로서 그녀에게 신뢰감을 줘야 했건만, 도리어 안 좋은 인상만 보여준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신입 프로듀서 시절 이후에 이런 실수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어째서 그녀와의 만남에선 이렇게나 실수를 많이 하게 된 건지 아리송했다.

 

덕분에 그녀에게 하려던 이야기, 알려주었던 일정, 담당 프로듀서로서의 각오 등등 기껏 준비해왔던 것들을 말하지도 못 하고 오히려 까먹을 지경까지 왔다.

거기에 더해 나와 그녀 사이에 감도는 기류가 매섭게 는 화제를 돌리려고 무작정 츠무기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숙소는 혹시 정해졌어?"

"숙소 말씀이십니까?"

 

츠무기는 잠시 창문 너머의 풍경을 쭉 훑어보고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시어터 기숙사에서 생활하기로 했습니다. 동료 분들과 같이."

"아, 기숙사에서 생활하기로 했구나. 하긴 여기에 막 올라와서 주변 지리도 잘 모를 테고 혼자서 자취하긴 위험하기도 하고……."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

 

그 때.

츠무기의 퉁명스러운 대답을 들은 그 순간.

아련한 옛 기억의 편린이 날카롭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무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작은 기억의 파편.

그 파편 위에 투영되고 있던 아련한 기억의 한 장면 속에서, 한 남자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방금 츠무기가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며.

 

갑작스럽게 머릿속에서 떠오른 과거의 기억 때문에 순간 아찔해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내 눈앞에 아른거리던 기억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무덤덤하게 나를 쳐다보는 츠무기의 얼굴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프로듀서?"

"……어?!"

 

그녀의 부름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나의 과거를 들추는 매서운 격풍이 되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하지만 츠무기는 자신이 한 이야기에 있었던 커다란 파급효과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이야기했다.

 

"죄송하지만 짐 정리를 좀 하고 싶은데 잠시 기숙사에 다녀와도 될까요?"

"아, 물론이지. 급히 오느라 시간이 없었을 텐데 천천히 정리하고 와도 돼."

"…감사합니다."

 

나의 대답을 들은 츠무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숙사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특유의 기품이 느껴지는 걸음걸이로, 차분히 제 갈 길을 걸어갔다.

 

"……."

 

나는 조용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찰랑거리던 은발.

가녀린 몸에서 느껴지던 우아한 기품.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절제미까지.

홀로 복도를 걸어가던 그녀의 뒷모습은, 여전히 그녀다웠다.

 

하지만, 나는 그 때 깨달았다.

그녀가 보여주던 모습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던 어색함을 말이다.

방금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한 장면, 그리고 그에 대한 단상은 츠무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고쳐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 눈에 비치던 그녀의 모습 모든 것은 그렇게 단 한 순간에 어색함으로 점철된 소녀의 필사적인 위장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느꼈다.

그녀는 지금, 특유의 기품이 있는 듯한 모습으로 말미암아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다는 것을.

 

"저기, 츠무기."

"…무슨 일이시죠?"

 

그녀의 모습에서 느껴지던 위화감.

그리고 그 위화감을 일으키게 된 원인.

도도하고 냉철한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던 것.

그것을 끄집어내기 위한 질문을, 나는 조심스럽게 던졌다.

 

"혹시,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지?"

"……?"

"아무래도 도시는 처음일 테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도 돼. 무리하지 말고."

"……."

 

나의 질문에 담긴 속뜻을 알았는지, 츠무기는 말없이 창문 너머를 쳐다보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

그 건물들을 조용히 쳐다 본 그녀는 다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이따 뵙겠습니다. 프로듀서."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도도하게 가던 길을 걸어갔다.

조용해진 복도 안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에게 대답을 듣지 못한 나는 물끄러미 뒤도 안 돌아보는 츠무기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몸을 감싸던 기품은 온데간데 없이, 가녀리고 쓸쓸해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 눈에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은,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짧은 순간, 내 머릿속을 훑어 지나가던 기억 속의 남자.

바로 7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내 모습과 츠무기가 닮았다는 것을.

 

7년 전, 홀로 시골에서 올라와 아는 사람도 없어 우울해 하던, 그러나 그걸 필사적으로 숨기려던 나의 모습과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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