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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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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05, 2012 12:03에 작성됨.

“자. 긴장 풀고. 연습 때 같이만 하면 돼. 다치지만 마. 다치지만 말고 이겨. 그럼 돼. 쉽지?”

드디어 대망의 아이돌 야구대회 첫 경기. 리츠코와 함께, 아니. 사실상 혼자 감독을 맡게 된 나는, 사장님께서 친히 사비를 털어 맞춰주신 그럴싸한 유니폼(그날 밤 사장실에서 혼자 틀어박혀 눈물을 뿌리고 계시던 사장님을 본 것 같지만 잊자.)을 입고 있는 우리 765프로의 아이돌들에게 말했다.

“마코토. 너무 무리해서 던지지 말고.”

“네… 푸훕!”

“…웃지 마.”

“네. 노, 노력해볼게요.”

“젠장. 그리고 포수. 히비키. 블로킹 제대로 하고.”

“푸흐흐…”

“망할. 웃지 말라니까. 그리고 내야진들은 불규칙바운드 조심해. 이런 말 하면 속물 같겠지만, 너희들은 어디까지나 얼굴이 생명임을 기억해둬. 뭐. 여자들은 다들 그렇다지만.”

내가 지목한 내야의 네 사람. 야요이, 미키, 치하야는 내 말에 가까스로 대답하며 킥킥거리기 바빴다. 심지어 타카네까지.

“제발 집중 좀 해라. 그리고 외야. 콜 플레이 잘해. 서로 들이박지 말고.”

“아, 알았엉… 크훗…”

“그만 좀 웃으라고. 너희들 지금 내 말 듣고는 있는 거냐?”

내가 약간 언성을 높이자, 이오리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애초에 너는 왜 그 복면을 쓰고 있는 건데?”

그랬다. 나는 지금 마치 피처럼 붉은 복면을 눈 밑까지 올려 쓰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머릿속에 뮤즈의 ‘Plug in baby’가 들려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아직 전국으로 송출되는 방송에 내 얼굴을 드러낼 수는 없단 말이다. 니들도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왜 하필 그런 붉은 복면인 거야?”

“사실. 이번 대회에 프로듀서가 감독 역할이라 필연적으로 얼굴이 나올 것 같다. 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단 말이다. 그래서 여기 오기 전에 오토나시 씨에게 얼굴 가릴 거 아무거나 달라고 했더니 준 게 이거였어.”

“어째서?”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아냐. 어쨌든, 내 맨얼굴을 전국에 까느니 그냥 이상한 놈 취급을 받겠어. 뭔가 컨셉이라는 느낌이라 인기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 하긴…”

“어쨌든! 이기고 와라! 지면 밥 없어.”

““에에--””

“에에--고 뭐고. 빨리 나가. 시합 시작한다.”

시합시작을 알리는 멘트가 흘러나오자, 모두 허둥지둥 동그랗게 모여 손을 한곳에 모았다.

“765프로! 파이팅! 오--!”

지금껏 그래왔듯 하루카의 선창으로 모두 힘차게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이걸 하는 것도 오랜만이군. 지금까지 단체로 맡은 일이 없다시피 했으니까 당연한가.
우리가 말 공격이었으므로, 곧 후보인 하루카와 아즈사 씨와 마미를 제외한 아홉 명이 우르르 달려가 자신의 수비 포지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바로 경기 시작. 투수인 마코토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예상은 했다만.”

3회초 2아웃까지 진행된 시점. 우리 팀은 4-0이라는 점수 차로 앞서 나가고 있었다. 히비키-치하야-타카네-마코토로 이어지는 라인이 불을 뿜은 건 물론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예상을 했어야 했음에도 미처 생각 못했던 사실이 있었는데,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아. 또 잡았다.
심판의 과장되게 큰 삼진 아웃 사인과 함께, 상대팀의 9번 타자인, 거의 야요이만큼 작은 여자아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덕아웃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그와 반대로 마운드에 서 있던 마코토는 별 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우리 측 덕아웃으로 뛰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애초에 저걸 염두에 뒀어야 했는데, 아니.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만, 그래도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저 녀석. 저번에 마지막으로 가르쳐줬을 때보다 더 공이 좋아졌어.

“프로듀서! 어때요? 이번 회도 낙승인데.”

“…지금 당장 우리 팀 들어와도 1선발 낙점이다. 쌀집 아저씨는 눈물을 뿌리며 은퇴를 선언하시겠군.”

“정말요? 앗싸-!”

말대로, 마코토는 3회 아웃카운트 9개 전부를 삼진으로 잡는 압도적인 투구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내 헛스윙마저 유도해냈던 몸 쪽 패스트볼은 경기 초반에 상대 선수를 울려버려 경기가 중단되었을 정도다. 물론 그 이후 나는 마코토에게 몸 쪽 공의 봉인을 엄명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우리.”

“무슨 말씀이세요. 프로듀서. 우승을 원했던 건 프로듀서인데!”

“이렇게 압도적일 줄은 몰랐으니까. 특히 너. 마코토.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하지만.”

“나도 처음에는 너랑 같은 생각이었어. 하지만 지나보니 아니더라. 내가 너희들을 과소평가한 것도 있지만, 너희 실력이 워낙 좋아서 상대팀의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했어. 저 녀석들. 아이돌인데 말이지. 지금 상황은 고교 코시엔 토너먼트에 다르빗슈가 나와 던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다, 다르빗슈라니… 저도 같은 아이돌이라구요…”

“너는 규격 외잖아.”

“윽. 프로듀서. 그건 너무 심하신 발언 아닌가요.”

나는 아무 말 없이 마코토의 뒤편, 오만상을 찌푸린 히비키가 글러브를 끼고 있던 오른손을 얼음물이 담긴 양동이에 담그고 있는 모습을 가리켰다. 그 광경을 본 마코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히비키를 향해 달려갔다.

“히…히비키! 괜찮아?”

“으, 응? 아아! 걱정하지 마! 아무 문제없으니까.”

애써 활짝 웃어 보인 히비키는 왼손으로 마코토의 팔을 툭 건드리며,

“그래도 쪼-금은 살살해줬으면 좋겠다구.”

“으응… 미안.”

“아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히비키와의 대화가 끝나고, 마코토는 약간 풀죽은 표정으로 다시 내게 다가왔다.

“느낀 바는?”

“…살살 던질게요.”

“그래. 잘 생각한 거야. 네가 꼭 전력으로 투구해야만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방금 새삼스럽게 느꼈는데 이거 대회이기도 하지만 예능이기도 하니까.”

“그, 그렇죠.”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나에겐 그게 가장 큰 화두라고. 그러니까 무리하지 마.”

“아…”

마코토는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아들었어?”

“네, 네! 물론이죠. 아하하…”

“좋아. 그럼 준비해. 곧 네 타석이니까.”

결국 그날 우리는 4회 경기에 4회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6-0이라는 큰 점수차로 승리할 수 있었다. 마코토는 4회초 확실히 공의 위력을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세 타자 모두 삼구삼진. 4이닝 공 36개 12탈삼진 퍼펙트라는, 일본 야구사에 전무후무할 것 같은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방송 PD에게 끌려가다시피 불려가 중간에 우려했던 대로 쓴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이건 예능이지 코시엔 대회가 아니라나 뭐라나. 시청자들이 원하는 건 아이돌들의 귀여운 모습, 실수를 하는 모습들이지 눈에 쌍심지 켜고 강속구를 던지는 모습이 아니라고도 하길래, 내 딴에는 마코토를 커버 쳐준답시고 이것저것 이야기하려다 두 배로 야단맞았다. 젠장.

할 수 없지. 다음 경기부터는 설렁설렁 하라고 미리 언질을 해두어야겠다.

다음날.
나는 PD에게 들은 대로,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녀석들에게, 특히 마코토에게 살살 던져줄 것을 주문했다. 마코토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어제 내가 말한 일도 있고 해서 납득해준 모양이다.

참고로 그 붉은 복면은 오늘도 착용했다. 어제 반응을 보니 나라는 걸 알아챈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포커스는 어디까지나 아이돌들이지, 잠깐잠깐 비추는 프로듀서에게 관심을 가질 녀석이 있을 리가 없지. 오토나시 씨의 말에 따르면 아주 가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냥 ‘별난 프로듀서’ 정도로만 인식된 모양이다. 내가 나온 장면 자체가 한 장면. 그것도 덕아웃에 앉아있는 아즈사 씨를 클로즈업하려다 얻어걸린 것뿐이니까.

어쨌든, 그렇게 2번째 경기. 4강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마코토는 내가 지시했던 대로 어제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같은 공을 한복판으로 던지기 시작했고, 이번 상대 프로덕션도 8강에서 만난 프로덕션보다 아이돌들의 운동신경이 더 좋았다. 아니. 운동신경이 아니라 야구센스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미키는 의욕이 하나도 없었다.
자기 정면으로 오는 공에는 그럭저럭 반응하지만, 3유간으로 빠지는 타구에는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아, 유격수인 타카네 혼자 죽어라 땅볼을 잡으러 달려야 하니, 제 아무리 타카네라 하더라도 체력이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하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결국은 그쪽부터 에러가 터지기 시작하고, 키 스톤 중에서도 중요한 유격수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결국은 내야 전체가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웃어넘길 일이지만, 내 속은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안 되겠다. 하루카. 준비해.”

“에, 에엣?”

“타카네랑 교체다. 치하야가 유격수로, 네가 2루로 들어갈 거야.”

하루카의 침 삼키는 소리가 내가 서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엄청나게 불안했지만, 그래도 지친 타카네를 계속 뛰게 하는 것보단 나았다.

“으…”

“걱정 마. 하루카. 지금까지 연습해왔던걸 믿어.”

“으, 네, 네!”

그리고
시합은 본격적으로 예능화 되기 시작했다.

하루카의 기적적인 에러연발로, 우리 팀이 공격에서 막강한 화력을 발휘하면 다음 수비 때 그대로 실점을 하는 것이 반복. 수비가 길어지면 수비수들의 집중력 역시 떨어진다는 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지금껏 기적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던 외야까지 대폭발하기 시작했다. 아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 좋을까. 궁여지책으로 가장 많은 실책을 범한 아미를 마미와 교체했지만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봐 똑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시합 중 가장 길었던 3회말이 끝난 후의 스코어는 11대10. 그동안 내 주름살이 21개 정도는 생겨버린 것 같았다만, 어쨌든 리드는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포수인 히비키가 내야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에러가 날 때마다 커버해주고, 외야에서 이오리가(물론 엄청나게 투덜거렸지만,) 남들의 두 배는 더 뛰어준 덕분에 10실점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고 할까. 저 둘에겐 끝나고 뭐라도 해줘야겠다.

우리의 4회초 공격은 치하야-하루카-마코토가 별다른 소득 없이 공격을 끝냈고, 남은 건 4회말 마지막 수비.
높이 뜬 공을 이오리가 잘 잡아내 줘서 아웃 하나. 타구가 미키의 정면으로 향한 덕분에 미키가 잘 처리해서 아웃 하나. 이제 마지막 아웃 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된다.

그러나 우익수 뜬공을 유키호가 극적으로 놓치는 바람에 주자는 2루까지. 투아웃 2루가 되고 말았다.

“끄아아…”

나는 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끼며 벤치에 간신히 주저앉았다. 정말 끝까지 마음을 못 놓게 만드는구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이 녀석들은 아이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집어넣고 있지만, 내 전 직업이 자꾸 그걸 방해해서 미칠 것 같았다.
흘끗 마운드를 바라보니, 멍하니 서 있는 마코토의 얼굴이 빨갛다. 하긴. 덕아웃에서 보고 있는 내가 이 정도인데 투수인 마코토는 얼마나 화가 날까. 아까부터 빨갛더니, 그래도 마코토가 마인드 컨트롤을 잘 하고 있는…

아까부터?

“에? 프로듀서?”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덕아웃을 나서자, 리츠코가 화들짝 놀라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심판에게 타임을 요청하고 곧바로 마운드로 올라갔다.

“마코토!”

“프…로듀서? 설마 교체인가요? 저는… 괜찮으니까… 끝까지…”

목소리가 평소의 마코토의 그것이 전혀 아니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지쳤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마코토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역시나 이마가 불처럼 뜨거웠다.

“이 멍청이가!!”



“으응…”

아. 일어났나.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긴 병원이다. 나는 끝까지 던지겠다며 생떼를 쓰는 마코토를 강제로 내린 다음, 리츠코에게 부탁해 곧바로 병원에 보내게 했다. 그런 다음 불안한 기색의 나머지 녀석들을 간신히 진정시켜야만 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나를 포함한 모두는 마코토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부리나케 달려왔고, 우리가 본 광경은 의식을 잃은 건지, 자고 있는 건지 어쨌든 누워있는 마코토였다. 자고 있는 녀석을 깨울 수도 없는 터라, 내가 혼자 병실에 남고 리츠코는 녀석들을 데리고 돌아가 쉬기로 했다.

나 혼자 남아 잠들어있는 마코토를 바라보며 걱정을 태산같이 했던 것이 어느덧 20분. 마코토는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아직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프로…듀서? 여기가 어딘가요… 경기는…?”

“안심하세요. 여긴 병원입니다.”

“병원…요? 제가?”

“잘 들으세요. 고열이 안 좋은 타이밍에 발생했습니다. 몸살이 영 좋지 않은 타이밍에 났다고요.”

“그게… 무슨 소린가요. 프로듀서.”

“다시 말해, 당신은 내일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됐다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럴… 수가. 내가 내일 경기에 못 나간다니… 내가… 내가 내일 경기에 나갈 수가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요!”

뭐. 각설하고, 마코토가 병원으로 후송된 이후 마코토 대신 아즈사 씨를 투입시켜 히비키에게 투수를, 아즈사 씨에게 포수를 맡겼다. 히비키는 간단하게 마지막 타자를 투수땅볼로 처리, 우여곡절 끝에 결승에 진출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이 모양이니, 내일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군.”

“저는 정말 괜찮다니까요… 내일 바로 던질 수도 있고.”

“그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해봤자 아미랑 마미가 ‘이제부터 장난은 그만 두겠다’라고 말한 것만큼의 설득력도 없어.”

“우우…”

몸살에 걸렸으니 적어도 이틀정도는 안식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역시 어제 전력투구한 게 원인이 된 건가. 그것도 36구나 던졌으니.
한국의 옛 투수 중 기인이라고 불렸다던 장호연이라는 투수가 한 말이 있다. ‘공 세 개를 던져 삼진을 잡는 것보다 공 하나로 맞춰 잡는 것이 낫다.’ 마코토에게는 그것이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이 바보는 몸이 안 좋으면 말을 해야지. 하긴 경기 시작 전부터 묘하게 기운이 없어보였던 것 같은데, 그걸 파악하고도 제대로 묻지 않은 내 잘못이다.

“어쨌든, 방금 네 부모님께 연락드렸으니 곧 오실 거야. 그러니까 푹 쉬고 있어. 내일 꼭 승전보를 전해줄 테니까.”

내 말에 마코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그 자리에 없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 그건 그렇다만…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마코토를 어떻게든 안심시켜야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우울함 반, 분함 반이 섞인 표정으로 벽을 바라보고 있던 마코토의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내일 결승전. 오후 5시였지. 그때까지 나아. 무조건 나아라. 그런 다음에 와. 그럼 언제라도 넣어줄게. 경기 진행 중이더라도, 설령 경기 끝난 직후에 와도 우승 세리머니는 같이 하게 해줄게.”

“…정말인가요?”

“그래. 거짓말은 안 해. 대신 너도 거짓말은 하지 마. 무조건 완쾌된 다음에 와야 돼. 또 땀 뻘뻘 흘리면서 오면 다시 병원으로 되돌려 보낼 줄 알아.”

“알겠어요.”

“이제 된 거지?”

“네.”

“그럼 지금부터 쉬도록 해. 약도 먹었으니 다시 한숨 푹 자둬라. 내일을 위해.”

“프로듀서도 이제 그만 가보세요. 프로듀서도 쉬셔야 할 텐데.”

“환자한테 걱정 들을 정도로 피곤하진 않거든. 걱정 말고 자. 내가 설마 니 자는 틈에 뭐라도 할까봐 그러냐?”

“엑…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제가 자는 틈에, 왕자님이 공주님에게 하는 것처럼 볼에 키스라던가! 그러면 저 한 방에 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서 왜 좋아하는 거야! 너는 여자취급만 받을 수 있다면 뭐든 좋은 거냐!”

“헤헹. 프로듀서. 적당한 타이밍에 딴죽이 들어오는 걸 보니 그다지 화나셨던 게 아니었군요.”

“내가 화낼 이유가 어딨겠냐.”

마코토가 힘없이 웃으며 꺼낸 말에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 녀석. 설마 아직까지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건가. 마코토를 내린 다음에 덕아웃에서 고래고래 소리쳤던걸.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그 장면을 카메라가 잡지 않았던 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내가 아픈 걸 숨기고 던진 거 때문에 화가 나지는 않으셨을까, 해서요.”

“멍청이. 그런 걱정 할 시간 있으면 빨리 자기나 해. 그때 소리 지른 건 미안하게 생각하니까.”

“아니에요, 프로듀서. 저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그래요! 투혼이라고 할까!”

“물론 프로야구 선수가 부상이나 몸의 이상을 숨기고 뛰는 건 투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아이돌이 그런다면 그건 바보짓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넌 아이돌이다. 이 바보야.”

“윽…”

마코토는 과장되게 상처받은 표정을 짓더니, 곧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대로 몇 분 정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더니, 곧 쌕쌕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 몸이 꽤 안 좋긴 한가보다. 그래도 얼굴은 내놓고 자야겠지. 저렇게 푹 뒤집어쓰고 자는 걸 마코토의 부모님께서 보셨다간 심장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여긴 병원이라고.
이불을 목 아래까지 내려준 다음, 어째 자면서도 묘하게 불편한 표정인 것 같아서 미리 놔뒀던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줬더니 표정이 대번에 밝게 변했다. 이 녀석. 진짜 자고 있는 거 맞는 건가. 헤죽거리는 게 귀엽긴 하다만.

“……서…”

뭐야. 이젠 잠꼬대까지 하잖아. 어째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귀를 가까이 대보았더니,

“……프로듀서……복면……푸후훗…”

망할 녀석. 다 나으면 보자.



결승전 당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 여러모로 보나 불행인 것 같지만, 결국 마코토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무리해서 오지 않는 걸 보니 나와의 약속을 지킨 듯 했다.

이렇게 된 이상 투수는 히비키를, 포수는 아즈사 씨를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로 인해 타선에도 수정이 필요한데, 문제는 히비키를 4번에 놓으면 마땅한 톱타자가 없다는 거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녀석은 아직도 의욕이라고는 에베레스트 산에서 모래사장을 찾는 것만큼 없어보였다. 스타팅 9명 중에 유일하게 2경기 타율 0.000에 빛나고 있으니까 말이지.

“미키. 오늘은 니가 1번이다.”

“그래? 미키. 조금이라도 빨리 나왔다가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거네.”

“제발 오늘만이라도 움직여 봐라. 마코토는 몸이 아픈 상황에서도 끝까지 던지려 했는데, 보고 느끼는 게 없냐?”

“하지만, 아이돌이 야구 따위 잘해봤자 쓸모없다는 느낌인걸.”

“그건 맞긴 하다만, 이건 예능의 연장선이잖아. 아이돌이라면 예능도 어느 정도 해줘야지.”

“예능이라면, 미키. 하고 있는 거야.”

젠장. 이 녀석에겐 다른 쪽에서의 접근이 필요하겠군.
경기 시간이 다 되었기에, 일단은 이쯤에서 해두고 생각했던 대로 미키를 톱타자에, 히비키를 4번에, 아즈사 씨를 원래 미키의 자리인 6번에 놓은 라인업을 제출했다.

결승이니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 경기는 특히 지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하지만 어떨라나. 저쪽의 실력은. 저쪽도 꽤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쨌든, 경기는 시작되었다. 우리가 초 공격이기 때문에, 미키가 배트를 질질 끌며 하품을 하고서는 타석에 들어가, 정말 예능다운 헛스윙으로 삼진. 내 속을 시작부터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하야와 타카네 또한 연속 삼진. 이건 예상 못했는데. 하지만 납득은 되었다. 저 녀석. 꽤 빠른공을 뿌리고 있잖아. 물론 마코토보다는 한 수 아래라지만, 앞선 두 경기에서 느린공만을 받아쳐온 우리에게 저런 속구는 대처해내기 꽤 어려울지도 모른다.
나는 골치가 아파짐을 느꼈지만 애써 픽 웃으며 내 옆에 서있는 리츠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니 사촌동생. 대단하잖아.”

내 말에 리츠코는 대답 없이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1회말 수비. 한번도 투수라는 포지션을 해본 적이 없는 히비키는 시작부터 거하게 볼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거기에 3루 미키의 고의성 다분한 실책으로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스코어 0-1에 주자는 2,3루. 나는 직접 마운드에 올라가 울상을 짓고 있는 히비키에게 말했다.

“맞아도 좋아. 일단 스트라이크를 꽂는데 신경 써. 알겠지?”

“하, 하지만 다음 타자가 저 녀석이라구.”

“상관없어. 내줄 점수는 그냥 줘.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봤자 홈런 맞고 0-4. 그럼 다음에 만회하면 되니까. 하지만 너 여기서 또 볼넷주면 넌 그다음부터 절대 스트라이크 못 던진다. 그럼 그 시점에서 우리 팀은 끝이야.”

“…해볼게.”

“부담 잔뜩 줘놓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부담 갖지 말고 던져. 알겠지? 어차피 예능이니까.”

“응!”

그나마 기운을 차린 것 같아, 어깨를 두드려주고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노아웃 만루에서 드디어 이 대회 최고의 거포라 불리는 4번 타자가 등장했다.
히비키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다음, 셋포지션으로 들어가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공이 히비키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냥 이 녀석은 거르고 만루를 채우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바로 그 순간,

“키라링-- 파--워---!!”

맞는 순간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확하게 타구를 어퍼스윙으로 퍼 올려냈다. 멍하니 뒤돌아서서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공을 보고 있는 이오리와 유키호의 뒷모습이 왠지 처량해보였다.

“뇨와앗-! 키라링의 큐트 파워 발사 성공-!”

이건 내 미스다. 그냥 고의사구로 내보냈어야 하는 것을. 그랬다면 1루를 채우고 후속타자의 병살을 기대할 수라도 있었는데.
폴짝폴짝 뛰며 베이스를 도는 876프로의 4번 타자 모로보시 키라리와, 금방이라도 유키호가 구멍을 판 자리에 대신 뛰어 들어갈 것 같은 표정의 히비키를 보며 본격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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